테마로보는역사 조선후기 문화의 창, 북경 유리창 - 새로운 세계가 황홀경처럼 펼쳐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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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1회 작성일 16-0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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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유리창 시의도(琉璃廠示意圖)〉.
뇌몽수(雷夢水) 등이 손전기(孫殿起, 1894~1958)의 [유리창 소지(琉璃廠小志)]를 출간하면서 그려 넣은 유리창의 약도. 청 건륭 연간에 제작된 북경성 지도를 기반으로 그린 것이다.


옛 북경 내성의 정문인 정양문(正陽門)에서 서남쪽으로 5리쯤 걸어가면 유리창(琉璃廠) 거리(그림 1)가 나온다. 이곳은 지금은 쇠락했지만 조선후기 때만 해도 모두 합해 27만 칸이나 되는 수많은 상점이 동서로 5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는, 북경 제1의 시장이었다. 특히 수만 권의 장서를 구비한 서점들이 즐비하고 기윤(紀昀, 1724~1805)과 나빙(羅聘, 1733~1799) 등 청조(淸朝)의 문인 학사들이 이 주변에 살거나 자주 드나들어, 북경에 도착한 사신들이 몇 번이고 꼭 들렀던 곳이다. 연행사(燕行使)들은 이곳에서 청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고, 새로운 세계와 주체에 눈을 뜨게 된다.


유리창, 황홀경에 빠지다




유리창은 북경 최고의 시장으로 중국뿐 아니라 서양의 다양한 물품들까지 없는 것 없이 다 갖춰진, 말 그대로 페르시아 시장 같은 곳이었다. 비단 가게, 서점, 그림 가게, 종이 가게, 찻집, 약국, 포목점, 은전포, 인삼 가게, 문방구점, 장난감 가게 등 수많은 상점이 동서로 이어진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온갖 물건을 팔았다. 요지경과 오르골, 벼루와 벼루갑, 이쑤시개와 치아통, 면빗과 참빗, 바늘통에 골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또 중간중간 들어선 술집에서는 소흥춘(紹興春), 죽엽청(竹葉靑) 같은 향긋한 술을 팔아 거리의 흥취를 더하였다. ‘병장기는 받지 않습니다(軍器不儅)’라고 크게 써 붙인 전당포에는 물건을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삼삼오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 무리와 부딪칠 듯 비껴가는 거마들로 귀뿌리가 울릴 지경이었고, 장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지나가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가게는 단청이 몹시 화려하다. 심한 경우 전부 금빛을 써서 황금 옥을 이룬 것도 있다. 가게 주인은 비단 옷에 담비 갖옷을 입고 앉아서 장사의 저울질을 맡아 천하의 이익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한다.

- 서유소(徐有素), 〈시사(市肆)〉, [연행록(燕行綠)], 연행록전집 79

온갖 물건을 진열해 둔 유리창의 상점들은 외관도 매우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다락에다 난간을 두고 사치를 부렸으며, 붉고 푸른 빛이 도는 유리기와를 올려 멋을 더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햇살이 비칠 때 유리창은 유리세계마냥 반짝거려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았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증언에 따르면, 가게를 새로 열 때 그 바깥 설비에만 수천만 금을 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상점의 주인들도 이에 걸맞게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손가락에는 소뿔로 만든 가짜 손톱(指甲)을 붙인 채 손님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들어오면 준비된 의자에 앉히고 차를 권했다. 이렇게 권하는 차를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노가재 김창업(金昌業, 1658∼1721)처럼 열다섯 잔 이상을 마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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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유리창(琉璃廠)〉, [연행도(燕行圖)] 중 제13폭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1780년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유리창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유리창의 옛 영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그림 한 폭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燕行圖)]에 실려 있다(그림 2). 아직 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유리창 풍경을 그린 것으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단 위에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건물 뒤편에 부속 건물이 딸려 있다. 중국 전통 양식의 건물 외관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높은 패루와 붉은 당간, 전각 앞의 넓은 테라스에서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실제보다 과장된 넓은 거리에는 거마들이 분주히 오가고, 조선 사신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던 낙타 두 마리도 보인다. 건물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쉽지만, 그때의 모습이 화려하게 되살아나 있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재화와 서양에서 수입된 기물까지 다 갖추어진 유리창 시전(市廛: 시장 거리의 가게)은, 페르시아 시장처럼 조선의 사신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리창은 조선 사신들이 파악한 당대 최고의 번화가로, 청나라의 발달된 상업문화와 도시문화를 대표한 곳이다. 물론 홍대용과 박지원 등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사치 너머의 것이 사유되고 비실용과 자본의 폐해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유리창은 청과 서양의 문화를 엿보는 창으로 기능했다. 이곳 유리창에서 매매된 수많은 상품은 조선으로 유입되어 조선의 문화 변화를 추동(推動)한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서화와 골동 취미를 야기한 진원지가 바로 유리창이었고, 벼루를 비롯한 문방구는 연행사의 주요 구매 품목 중 하나였다. 기완포(器玩鋪)에서 주로 팔던 서양 기물 중 안경과 망원경, 자명종과 양금 등도 대거 조선에 유입되어 사대부의 삶과 인식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서점, 지식을 구매하다




유리창 거리는 수많은 상점이 채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을 대표할 만한 상점은 바로 서점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연행 관련 기록 중에서 1732년 연행길에 올랐던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임자 연행 잡지(壬子燕行雜識)]에 처음으로 유리창이 등장하고, 마지막 기록은 1894년 연행길에 올랐던 김동호(金東浩)의 [갑오연행록(甲午燕行錄)]이다. 이 책들에는 서점과 관련된 기록이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행사들은 이곳 유리창 서점을 탐방한 뒤 서점의 구조와 현황, 서적 판매 방식과 구비 도서 목록, 서점 주인의 면모와 서점을 통한 인적 교류, 청조(淸朝)의 인쇄와 출판 문화 현황 등을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유리창 서점의 역사는 조선의 연행기록뿐 아니라 이문조(李文藻)의 〈유리창 서사기(琉璃廠書肆記)〉, 무전손(繆荃孫)의 〈유리창 서사 후기(琉璃廠書肆後記)〉, 손전기(孫殿起)의 〈유리창 서사 삼기(琉璃廠書肆三記)〉를 통해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리창을 거점으로 명멸해간 서점의 정보가 이들 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특히 1769년에 지은 이문조의 〈유리창 서사기〉는 연암 그룹의 연행 기록과 겹쳐져 새로운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1765년에 홍대용의 연행이 있었고, 1778년에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의 연행이 있었으며, 1780년에 박지원의 연행이 있었고, 1790년에 유득공과 박제가의 연행이 있었다. 이들은 연행 당시 여러 서점을 탐방하는데 오류거(五柳居), 문수당(文粹堂), 선월루(先月樓), 명성당(鳴盛堂), 취영당(聚瀛堂), 숭수당(嵩秀堂), 성경당(聖經堂), 문성당(文盛堂), 대초당(帶草堂), 문환재(文煥齋) 등이 바로 그곳이다. 신서와 구서를 판매하는 거대 상점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유리창 서사기〉에 보이지 않는 서점들도 일부 확인된다.

책방은 정양문 밖에 있는데 한 곳에 그치지 않았다. 그 책을 쌓는 법은 이렇다. 집에 30여 칸을 만들고 각 칸의 네 벽에 선반을 설치하여, 층층마다 질서정연하게 배열하여 쌓아두고는 벌마다 ‘아무 책’이라는 찌를 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용마루에 차고 집에 넘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문 앞에 하나의 큰 탁자를 두고 탁자 위에 10여 권의 책갑을 놓았는데 곧 책 이름 목록이었다.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서 아무 책을 사려고 하면 한번 손을 들어 뽑아주고 꽂는 것이 매우 편하고 쉬웠다.

- 박사호(朴思浩), 〈책사기(冊肆記)〉, [심전고(心田稿)], 연행록전집 86

서점의 내부 풍경은 대체로 비슷했던 듯하다. 네 벽면에 높다랗게 서가를 세우고, 칸칸마다 상아 찌에 비단 책갑을 입힌 서책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해두었으며, 소장한 도서 목록을 따로 정리하여 손쉽게 책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각 서점마다 쌓아놓은 수만 권의 서적에 조선의 연행사들은 압도되어 눈 둘 곳을 찾지 못했고, 일일이 찌를 붙여 책 이름을 적고 서목을 따로 갖춰 필요한 책을 신속하게 찾아주는 체계적인 시스템에 감탄했다. 이곳 서점에서 연행사들은 수많은 책을 구매했고, 빌려 보기도 했으며, 희귀본과 조선에 없는 책 목록을 베껴 오기도 했다. 청조에서 금했던 많은 서적들도 유리창 서점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책 거간꾼 역할을 도맡은 서반(序班)도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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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유리창의 거리 판매 풍경
<출전: 진강(陳剛) 주편, [유리창(琉璃廠)](북경출판사, 2005), 33면>.


그런데 유리창에서의 서적 거래는 대형 서점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묘(祠廟)의 간이 좌판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그림 3). 유리창 주변에는 연수사(延壽寺), 화신묘(花神廟), 여조사(呂祖祠) 등 여러 사묘가 있었는데, 이 사묘들에서 묘회가 열리면 다양한 물품을 파는 임시 시장이 성대하게 차려졌다. 금은보패와 서화, 필연과 과일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작은 책 좌판도 함께 열려 물건과 책을 흥정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 좌판에 많은 책이 구비되지도 희귀본이 갖춰 있지도 않았지만, 도서 거래의 한 창구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거래 규모나 파급력은 거대 서점만 못했어도 도서 거래 공간으로써 유리창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더하여 유리창에서는 열흘마다 7, 8, 9일 연이어 3일간 시장이 열렸는데, 유리창에 장이 서는 날이면 유리창 바깥에서 온 서적상과 화거(貨車)들이 대거 모여들어 새벽부터 다양한 책이 땅에 진열된 채 흥정이 이루어졌다. 서점보다 싸게 판매되는 데다 강남에서 올라온 희귀본들이 거래되어 청조의 많은 문인 학사들이 이곳에서 책을 구매했다. 〈유리창 서사 후기〉를 쓴 무전손은 이곳에서 송나라 때의 판본인 [범문정집(范文正集)], 원나라 때의 판본인 [유도전집(柳道傳集)], 정통본인 [소평중집(蘇平仲集)]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의 벗 중 한 사람인 성백희(盛伯希)는 때때로 보자기와 이불을 챙겨 가서 묶어 올 정도였는데, 그 또한 송나라 때의 판본인 [예기 주소(禮記注疏)] 70권과 [두시 황학주(杜詩黃鶴注)] 및 [구초 유학경오(舊鈔儒學警悟)]를 얻었다고 했다.

서점가로 성시를 이룬 유리창에서 조선의 연행사들은 청조의 학술과 문학, 출판문화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 확인한 바를 조선으로 적극 끌어들인다. 그 결과 유리창 서점에서 수입된 각종 서적은 조선의 학문과 문학과 예술뿐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추동하게 된다. 조선후기 학문에서 나타나는 고증학 열풍, 문학에서 보이는 소품문 유행, 일상에서 드러난 기벽(奇癖: 기이한 취미) 추구 등은 유리창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유리창 서점과 그곳에서 수입된 서적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북경 유리창은 말하자면 지식 구매 창고였다.


연희, 놀이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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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사담자(耍罈子)의 공연 모습.
19세기 청나라의 풍속화다.


각종 재화와 무수한 사람으로 넘쳐난 유리창 거리는 연행사들의 주요 소비 공간인 동시에 청나라의 민간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둥근 통 두 개를 메고 다니며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사람을 보고 ‘중국의 살림이 힘들어졌다’는 억측을 하기도 하고, 춘화도를 붙여놓고 돈을 받는 화장실에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언어와 행동에서부터 복식과 음식 등 다양한 민간 풍속의 정보가 이곳 유리창을 통해 기록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유리창은 당대에 발달한 다양한 민간 잡기 공연이 지속적으로 펼쳐진 공간이기도 했다. 잡기 공연은 유리창 빈 공터에서 가림막 없이 소규모로 진행되기도 하고, 김정중(金正中)이 증언한 것처럼 천막이 쳐진 임시 가설무대에서 제법 크게 다양한 레퍼토리로 공연되기도 했다. 김정중은 1792년 1월 8일 유리창 임시 무대에서 펼쳐진 잡기 공연을 관람하였다. 5푼의 입장료를 내고 의자에 앉아 보았는데, 손재주형 잡기와 각종 동물 놀음이었다. 김정중이 처음 본 것은 바로 사담자(耍罈子)란 손재주형 잡기다(그림 4). 사담자는 청대에 유행한 대표 잡기 중 하나로, 단지를 공중에 던졌다가 머리로 받거나 혹은 어깨, 팔 등을 이용해 다양하게 놀리는 기예를 말한다. 사담(耍罈) 혹은 담기(罈技)라고도 불렀는데, 그 손재주가 매우 경쾌하고 날렵하여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 곰, 범, 원숭이를 길들이는 자가 있는데, 전부 철사로 목을 묶었다. 범은 발톱과 어금니를 잘랐으나, 혹 눈을 번뜩이고 입을 벌리면 맹렬한 기에 바람이 일었다. 되놈 아이가 마하라(麻霞羅)를 벗고 빤질빤질 대머리를 범의 입안으로 바로 들이밀자 범은 그 머리를 피해 물러서서 움켜쥐고 씹어 먹으려는 뜻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등 위에 올라가 꺾어 돌며 춤추고 뛰는 것이 하나하나 절도에 맞았다. 곰은 거꾸로 잠깐 사이 세 번 뛰어오르는 것이 광대의 모양 같았다. 원숭이는 높은 막대 끝에 올라가 혹 춤을 추고 혹 눕기도 하는데 평지처럼 쉽게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 김정중(金正中), [연행록(燕行錄)], 연행록전집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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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원숭이 놀음인 후희(猴戱)의 공연 모습.
1923년 무렵 중국에서 출간된 [대아루 화보(大雅樓畵寶)]에 실린 삽화이다.


사담자 공연이 끝난 다음에 김정중은 세 가지 동물 놀음을 더 보았다. 곰을 데리고 노는 웅희(熊戱)와 호랑이를 놀리는 호희(虎戱), 그리고 원숭이 놀음인 후희(猴戱)(그림 5)였다. 만주족 아이가 호랑이를 타고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변발한 머리를 호랑이의 아가리에 집어넣기도 했다. 호랑이의 어금니와 발톱이 잘렸다고는 하나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웅희의 경우, 곰이 광대처럼 거꾸로 잠깐 사이에 세 번 뛰어오르는 기술을 선보였고, 후희에서는 원숭이가 높은 막대기 끝에 올라 다양한 몸짓을 연출하였다. 이외에도 한 노인이 공작을 타는 놀음과 두 여인이 배를 모는(行船) 놀음도 보았다.

연행사들은 유리창과 그 주변 극장에서 희곡과 잡기 등 여러 민간 공연예술을 감상했고, 이를 통해 그 시대와 역사와 문화를 사유하려 하였다. 유리창과 관소에서 여러 잡기 공연을 관람한 홍대용은 “인간의 기교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라고 탄식하였고, 손용주(孫蓉洲)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잡기 공연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더하여 연극의 경우 그 공연이 사치스럽고 내용이 음탕하여 왕도 정치에 맞지 않음을 극력 피력하면서도, 그 의복 속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유리창 주변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한 김경선(金景善)과 유리창 거리에서 희자(戱子)를 본 홍석모(洪錫謨, 1781~1857)도 연극에서 중화 문명의 흔적들을 찾고 이를 통해 비분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변치 않은 대청(對淸) 의식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유리창 임시 희대에서 곰과 호랑이와 원숭이 놀음을 관람한 김정중은 끝내 슬픔을 느끼고 이렇게 토로한다. “세력을 잃어버리면 먹을 것을 찾아 이웃에 구걸하는 처지가 되어 평범한 아비가 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세 마리와 비교해 뭐가 다르겠는가? 이와 같아 저들을 슬프게 여기는 바다.” 야성을 잃고 순한 양처럼 공연하는 세 짐승을 통해 같은 처지의 인간을 떠올린 것인데, 형가(荊軻, ?~BC227, 전국시대 연나라의 자객)의 호기를 잃고 청조에 기대어 살아가는 당대의 한족 지식인들에 대한 탄식을 겹쳐두었다.

반면에 북학파의 일원이었던 이희경은 유리창에서 호랑이 놀음을 보고 난 뒤에 오히려 호랑이를 길들이는 방법에 생각이 미치는데, 호랑이를 길들이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가정과 논증은 실학적 관심의 확장과 학적 태도로 이해된다. 그가 지은 [설수외사(雪岫外史)]에는 벽돌, 수차, 가마, 농기구 등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청조 문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에 바로 호랑이 놀음과 호랑이 길들이기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실학적 관심이 이러한 분석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북경 유리창은 오랜 기간 청조 민간 연희의 대표적 연행 공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제 기능을 발휘해왔다. 이곳에 자주 들른 홍대용을 위시한 여러 연행사는 연극과 잡기 등 청대에 유행한 다양한 공연예술들을 직접 보았고, 그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더하여 그 속에 민간 연희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청조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겹쳐둠으로써 공연 공간으로서의 유리창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분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냈다.


우정, 천고의 벗을 사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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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엄성(嚴誠), 〈홍대용 초상화〉.
항주 출신 문사 엄성이 건정호동에서 홍대용을 만난 뒤에 그린 것으로 엄성의 문집인 [철교전집(鐵橋全集)]에 실려 있다.


유리창은 조선과 청나라 문사들의 우연하고 사적인 만남이 수시로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했다. 유리창과 그 주변에는 청조의 문인 학사들이 대거 거주한 데다가 사고전서 편찬에 참여한 학사들이 유리창을 자주 찾게 되면서 조선후기 한중 문화교류사에서 주목할 만한 만남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유리창 남쪽에 위치한 건정호동에서 이루어진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강남 문사인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均)과의 만남(그림 6)과 유리창 동변 초입에 위치한 관음각(觀音閣)에서 이루어진 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양주화파의 거장 나빙(羅聘, 1733~1799)과의 만남(그림 7, 8)이 특히 유명하다. 이 만남은 비록 짧았지만 당대 조청 문인들은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조청 문화 교류의 한 전형을 형성했다.

유리창의 육일재에서 황포 유세기를 처음 만났는데 자가 식한(式韓)이었다. 눈이 맑고 눈썹이 수려한 것이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축덕린(祝德麟),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 듯했다. 이 사람들은 앞서 나보다 교유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이나 얼굴의 모습이 마치 수염과 눈썹을 헤아릴 수 있을 듯 눈에 선하였다.

- 박지원(朴趾源), 〈피서록(避暑錄)〉, [열하일기(熱河日記)]

특히 청조 문사들의 살롱 역할을 한 서점은 조청 문인 지식인들의 중요한 만남의 장으로 거듭난다. 1780년 8월 3일 박지원은 유리창 선월루(先月樓) 남쪽에 있던 사천신회관(四川新會館)으로 원항(鴛港) 당낙우(唐樂宇)를 만나러 간다. 당낙우는 박제가, 이덕무 등과 이른 인연이 있었고, 이덕무의 소개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때 유리창 동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위치한 육일재(六一齋)에 들러 유세기(兪世琦), 서황(徐璜), 진정훈(陳庭訓) 등을 만나 필담을 나눈다. 박지원이 열하에서 돌아온 뒤에도 이들과 일곱 번을 만났고, 거인(擧人) 능야(凌野), 태사(太史) 고역생(高棫生), 한림(翰林) 초팽령(初彭齡), 한림(翰林) 왕성(王晟), 거인(擧人) 풍성건(馮乘健) 등을 소개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박지원의 〈양매시화(楊梅詩話)〉가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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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나빙의 자화상인 〈양봉도인 사립도(兩峰道人簑笠圖)〉의 부분.1780년, 종이에 채색, 59.8×56cm,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그림 8 나빙, 〈박제가 초상화〉(1790년 사진).나빙이 이별의 증표로 박제가에게 그려준 초상화로, 원작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이외에도 서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만남은 아주 많다. 1766년 1월 26일 홍대용은 미경재(味經齋)에서 감생(監生)인 주응문(周應文)과 장광려(彭光廬)를 만나 필담을 나누었고, 1792년 1월 10일 김정중은 취호재(聚好齋)에서 정소백(程少伯)을 만나 우의를 다졌다. 1801년 연행 당시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은 취영당과 오류거 등에서 조강(曹江), 전동원(錢東垣), 진전(陳鱣) 등 여러 인사를 만나 정을 토로했고, 1804년 1월 7일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은 유리창 서루(書樓)에서 한림(翰林) 동이공(佟貽恭)을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1855년 12월 5일 서경순(徐慶淳)은 문화당(文華堂)에서 방소동(方小東)을 만나 학문 논쟁을 기약했고, 1863년 1월 17일 이항억(李恒億)은 유리창 서남쪽의 보문당(寶文堂) 서점에서 한림(翰林) 황상운(黃翔雲), 서자잠(徐子潛) 등을 만나 종일 술을 마셨다. 보리떡 두 쟁반, 익힌 거위 한 쟁반, 찜닭 세 마리, 삶은 돼지 한 마리, 양 내장국 한 그릇, 햇과일 두 쟁반, 임안주 한 병, 계주주 한 병, 남변주 두 병, 잉어 한 마리, 채소 두 쟁반, 금고병 한 큰 그릇, 포도 한 쟁반, 설리 한 쟁반, 땅콩 한 그릇, 귤병 한 쟁반, 오화당 한 큰 그릇은 그들이 마신 술과 먹은 안주의 대략이다.

그 밖에도 많은 만남이 실재했고, 유리창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그 만남은 더 다채롭다. 홍대용이 유리창의 거문고 가게에서 주인 유생(劉生)을 만나 거문고 연주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새로운 연주법을 배우려 했던 것도,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경학가로 서예에 능한 설산(雪山) 저유인(褚裕人)과 문인 오사권(吳思權)을 만나 시와 그림을 주고받은 것도 좋은 예가 될 터이다. 물론 문사들의 역량이나 만남의 깊이 등이 제각각이라 교유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리창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조청(朝淸) 문사들의 만남은 한중 문화 교류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초여름의 날씨가 무더웠다. 나는 매일 수레를 빌려 취영당에 가서 답답함을 풀었다. 갓을 풀고 의자에 기대 앉아 마음대로 책을 뽑아 보는 것이 굉장히 즐거웠다. 때때로 오류거로 가 도생과 이야기했다. 과거 보는 해라서 각 성에서 거인(擧人)들이 도성 문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유리창에서 많이 노닐었기에, 그들과 말하다가 종종 마음이 맞는 자를 만나기도 했다.

- 유득공(柳得恭),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연행록전집 60

유득공이 잘 증언해주고 있는 것처럼, 연행사들에게 유리창 서점은 단순히 책만 사는 공간이 아니었다. 연행사들의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공간이자 식견 있는 서점 주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청조 문사들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약속 장소가 되기도 했고,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으며, 술집마냥 거나하게 취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때로는 서양의 살롱처럼, 때로는 우리네 사랑방처럼, 새롭고 다채로운 만남이 가능한 곳이 바로 유리창이었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6915256.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홍식 | 한양대학교 교수
한국한문학을 전공하였다. 조선후기 지식인의 사유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특히 박제가(朴齊家), 이옥(李鈺), 홍길주(洪吉周) 등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인물들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연구 영역을 확장하여 연행록과 통신사행록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문화 교섭의 구체적 양상을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홍길주의 꿈, 상상, 그리고 문학], [상상의 정원], [한시로 읽는 경기] 등이 있으며, 몇몇 테마의 문화사 집필을 꿈꾸고 있다.


발행20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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