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남인들, 수운 유덕장의 그림에 빠지다 - 조선의 3대 묵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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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6회 작성일 16-0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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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장, 〈묵죽도(墨竹圖)〉종이에 수묵, 100×65.2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신위, 〈묵죽도(墨竹圖)〉종이에 수묵, 1600×47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특정한 화제(畵題)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화가들이 있다. 변상벽(卞相璧, ?~?)은 사람들이 ‘변고양(卞怪羊, 卞古羊)’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고양이 그림에서는 최고였다. 나비 그림은 ‘남나비’라는 별명을 가진 남계우(南啓宇, 1811~1890)가 으뜸이었는데, 나비 박사 석주명도 그의 나비 그림에 대해 극찬했다.

한편 대나무 그림 하면 생각나는 화가가 있으니 바로 유덕장(柳德章, 1675~1756)이다. 변상벽이나 남계우처럼 특별한 화제는 그들의 천재성 못지않게 희소성으로 더 빛을 발할 수 있지만, 대나무를 그린 수많은 작가와 작품 중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선보이기란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다.

유덕장은 이정(李霆, 1541~1622?), 신위(申緯, 1769~1845) 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墨竹) 화가로 꼽히는 동시에, 이정(李霆)-이징(李澄)-김세록(金世祿)으로 이어지는 조선 중기 묵죽화의 계보를 이은 후기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는 자고(子固)ㆍ성유(聖攸), 호는 수운(岫雲)ㆍ가산(茄山)이다. 유성삼(柳星三)의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난 사실 외에 특별히 관직에 오른 이력이나 저술도 남아 있지 않아 행적을 추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의 친구인 이익(李瀷)의 〈수운 유공 묘지명 병서(峀雲柳公墓誌銘幷序)〉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상이 공(公)을 논함에, 세속 일에 악착스럽지 않다고 모두들 말한다. 또한 그 평상시에 거처함을 들으니 꽃을 심고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세속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다. 일찍이 초시(初試)를 보러 갔다가 여의치 않자 곧 종이를 펴고 먹을 갈아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려 대 그림을 그리고서는 즐거워하였다. (……) 대개 공의 선조인 유진동이 그림 그리는 일로 노닐어서 대나무를 그린 그림이 남아 있었는데, 공이 곧 그것을 흠모하여 깊이 정묘함에 들어가니 중국인들도 돈을 주고 사들여 그의 뛰어난 솜씨에 감탄하였다. 나도 몇 장을 얻어서 간직하고 있었는데, 때때로 감상하며 그 사람됨을 생각하곤 한다. 후에 공은 수를 누려 성은을 입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世之論公, 莫不曰非齷齪俗臼. 亦聞其常居, 蒔花撫琴, 軒敞歌吟, 有出塵想. 嘗發解赴擧不利, 便伸紙磨墨, 渾灑作畫竹, 欣欣然也 (……) 蓋公之竹堂先祖遊戲繪事, 寫竹有遺本在, 公卽慕效之, 冞入精妙, 華人亦購得, 歎其絶藝. 余亦得藏數本, 時閱而想見爲人也. 後公以耆壽覃恩, 爲僉知中樞府事, 又陞同知事.

그는 세속의 욕망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꽃이나 심고, 거문고나 타며, 흥이 나면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을 뿐이다. 초시(初試)에 응시하러 갔다가 답안 작성이 여의치 않았는지 답안지에다 대 그림을 그리고 즐거워했다 한다. 게다가 특별한 관직에 오른 적도 없었으니 오로지 그림에 온 인생을 다 건 셈이다. 예술가들의 평범하지 않은 삶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이다. 물론 모든 일화는 윤색되고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대변해주는 데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 내용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가학(家學)의 전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6대조인 유진동(柳辰仝, 1497~1561)은 관직의 경력보다는 문한(文翰: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 더욱 알려져 있고, 조선 초기의 신잠(申潛, 1491~1554),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등과 함께 최고의 묵죽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 작은할아버지인 유혁연(柳赫然, 1616~1680) 역시 묵죽화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덕장은 개인적인 예술가 기질과 함께 가학(家學)의 전통 속에서 화인(畵人)으로서의 꿈을 꾸었다.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대나무 그림 하나만큼은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한 인물로, 그의 그림은 많은 이가 소장하였으며, 그의 그림에 관해 여러 글을 남겼다. 특히 남인(南人)들과는 각별한 만남을 평생토록 유지하였다. 그는 어떤 그림을 남겼으며, 사람들은 그를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사람들, 유덕장을 이렇게 말하다




유덕장은 호가 수운이며 판서 유진동의 후손이다. 유진동도 그림을 잘 그렸는데, 유덕장에 이르러 대를 잘 그리는 것으로 일세에 이름이 났다. 유덕장의 대 그림은 널리 유행하여 정선과 심사정의 산수화에 비견될 정도였다. 단지 먹 색깔이 너무 반질반질해서 대를 그리는 화가에게 얼마간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柳德章, 號峀雲, 判書辰仝之後孫. 判書善畵, 至德章, 以善畵竹名一世. 其竹盛行, 埒鄭沈山水畵, 但帶墨色之太膩, 少詆於竹家云.

이 글은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나온다. [병세재언록]은 당대 걸출한 문인(文人)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화주록(畵廚錄)〉에는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강세황(姜世晃) 등 당대의 굵직굵직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유덕장이 이 안에 실려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비중 있는 화가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유진동의 후손임을 중요하게 언급한 부분 역시 다른 기록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의 대나무 그림을 정선과 심사정의 산수화에 빗대어 후하게 평한 반면, 단점으로는 먹의 빛깔이 너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회화사적 위상, 그림의 장단점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유덕장은 묵죽으로 이름이 났다. 일찍이 그림 병풍을 눈이 내릴 때 걸어두자 새가 와서 부딪쳤으니 그 그림이 묘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공력이 늙을수록 더욱 진척이 있었으니 우리 집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이 일흔에 그린 것이다. 강세황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그린 대나무는 모두 갈대지, 대나무가 아니다. 수운의 그림은 이따금 갈대와 관련이 있지만, 그 득의한 화폭은 자못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 柳峀雲德章, 以墨竹名. 甞挂所畵障子雪中, 鳥雀來投, 可見其畵之妙. 其工老而彌進, 余家所在, 皆七十後所揮灑. 姜豹菴言東國畵竹, 皆蘆也, 非竹也, 峀雲畵往往涉此, 其得意之幅, 殊不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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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장, <묵죽도(墨竹圖)>종이에 수묵, 59×38.5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성해응(成海應)의 〈유수운 묵죽 발(柳峀雲墨竹跋)〉에는 유덕장의 묵죽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 있다. 대나무 그림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던지 새가 와서 그림에 부딪혔다는 것인데, 과장되지만 그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가 말년에 그린 그림들 중에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고 한 것 또한 다른 기록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우리나라 화가들이 대나무라고 그린 것들은 필경 갈대를 그린 꼴에 불과하다며 유덕장의 그림도 종종 갈대의 꼴을 면치 못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잘 그려진 작품들은 온전한 대나무 그림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당대의 거장인 강세황도 그의 묵죽 중 득의작(得意作)인 경우만큼은 인정을 하고 있다.

강세황은 〈서묵난죽권 후(書墨蘭竹卷後)〉에서도 “문동(文同, 중국 북송 시대의 문인이자 화가)이 그린 묵죽도는 대나무를 그린 것 중에 으뜸이다. 그 후로는 오흥(吳興) 조맹부(趙孟頫)가 화단을 주름잡았지만 우리나라에 이르면 취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옛날 석양군(石陽君) 이정(李霆)이 가장 솜씨가 좋았고, 요즘에는 유덕장이 석양군의 뒤를 이었다 할 만하다(文與可之墨竹, 幾爲寫竹之宗. 其後趙吳興擅場, 至於吾東, 殆無可以取之者. 古有石陽公子, 14547416980496.png竗此技, 近世柳岫雲, 可以追蹤石陽)”라고 하여 이정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 유덕장을 꼽고 있다.

우리나라 선비가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유덕장의 낡은 대나무 그림을 (포장지로) 싸서 가지고 갔는데 장 풍자(張風子, 張道渥)가 보고 깜짝 놀라서 재빨리 가지고 가서는 표구를 해서 벽에 걸어놓았다 하니, 안목을 갖춘 이에게 칭송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東士之入中國者, 以峀雲竹敗紙, 裹包以去, 張風子, 見之大驚, 亟要去, 裝池懸壁, 見稱具眼如此.

김정희의 글을 보면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유덕장의 묵죽화를 싸서 중국에 들어간 선비가 장도악(張道渥)을 만나 보여주니 깜짝 놀라며 표구를 해서 벽에 걸어놓았다는 것이다. 장도악은 자가 봉자(封紫), 호가 수옥(水屋)이며, 장풍자(張風子)라 자호(自號)한 인물로 특히 산수화를 잘 그린 청나라의 저명한 화가다. 이렇게 유덕장의 그림이 해외에서까지 인정받은 사실은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용휴의 〈수운 난초첩 발(峀雲蘭草帖跋)〉에 “수운의 그림은 그 전파(傳播)가 남으로는 탐라(耽羅)까지 달하였고 북으로는 옛날 여진과 야인(野人)이 살던 곳까지 미쳤으며, 북경 저자에서까지 팔리는 것도 있었다(峀雲之畵, 其傳盖南達眈羅, 北盡古女眞野人之墟, 至有貨於燕市者)”라고 나오는 걸로 보아, 그의 그림이 우리나라 전역은 물론, 중국의 북경 저자에서 팔릴 정도로 크게 유행했던 모양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열하일기(熱河日記)], [진휘속고(震彙續考)] 등 다양한 문헌에 등장한다.

그를 둘러싼 평가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된다. 6대조인 유진동을 비롯한 가학의 전통을 물려받았고, 묵죽화에 뚜렷한 장처(長處: 장기)가 있었으며, 말년의 작품들 중에 득의작이 많았고, 이정의 묵죽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화가였다. 한마디로 그는 18세기 조선에서 제일가는 묵죽화의 대가였으며, 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이 꼭 소장하고픈 귀한 작품이었다.



남인들, 그의 그림에 빠지다




그는 남인들과 각별한 교유를 나누었다. 유덕장은 그의 묘지명과 만시(輓詩)를 쓴 이익을 필두로 해서 권만(權萬, 1688~1749), 정간(鄭幹), 이용휴, 이헌경(李獻慶), 신광수(申光洙), 이좌훈(李佐薰) 등 당대 남인 인사(人士)들과 깊은 교유를 맺고 있어 그들의 문집에서 유덕장의 그림에 대한 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집에는 서화가 수장되어 있는데 수운의 대나무 그림이 가장 많다. 나는 (그의) 대나무를 좋아하고 수운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수운이 대나무를 그린 것은 20년이 채 안 되는데, 수운이 죽은 것은 이미 10년이 되었다. 대나무 그림 또한 종이와 먹이 희미해져서 지난날 빛깔이 아니었다. 대나무 그림이 옛것이 되었는데 사람은 어찌 오래되지 않았겠는가. 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죽었는데, 이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은 홀로 살아 있구나. 그 그림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그의 대나무 그림을 좋아하여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쓰기를, “이것은 수운 유덕장의 대나무다”라고 하였다.


余家藏書畫, 峀雲之竹最多. 以余喜竹而峀雲喜余也. 余記峀雲爲此竹未二十年, 而峀雲歿已十年. 竹亦紙墨昧昧. 非疇昔顔色. 竹古矣, 人何由不古. 噫! 喜余者亡而喜竹者獨存乎. 思其出於喜余者之手. 而喜竹益珍. 故題以志之曰此峀雲柳公德章之竹也.

이헌경은 유덕장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특히 위의 〈제수운묵죽장(題峀雲墨竹障)〉에는 두 사람의 깊은 사귐이 담겨 있으며, 두 사람은 많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망년(忘年)의 사귐을 나눴다. 이헌경은 집에 제법 많은 서화 작품을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중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이 가장 많았다. 자신은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을 좋아하고 유덕장은 자신을 좋아했다. 결국 그림이 좋으니 그 사람도 좋았고, 사람이 좋으니 덩달아 그림도 좋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애틋한 사람이 죽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고, 남겨진 그림은 지난날의 선명한 빛깔을 잃고 희미하게 바랬다. 이 글은 유덕장의 그림에 붙인 것이지만, 만시나 제문(祭文)처럼 서글프다. 사람은 죽고, 그의 그림만 남아 친구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이종 사촌동생 완산(完山) 이종간(李宗榦)은 성품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는 나의 집에서 우연히 만나 옛 그림을 열람했다. (고화) 수십 장 속에는 보지 못한 명품이 많이 있었으나, 본체만체하였다. 유독 유덕장이 그린 대나무 장자(障子) 한 축을 집고서는 애타게 구하며 말하기를, “아버지의 유지(遺志)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이 그림을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사려고 몇 해나 애쓰시다가 얻지 못하셨는데, 지금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싸가지고 돌아가서 기제사 날에 전향할 때 신위 뒤에 시설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뜻에 감동하여 곧바로 걷어 그에게 주었다.


姨弟完山李宗榦, 性弗嗜畵. 一日於余宅偶値, 閱古畵. 數十紙中, 多有名品, 如無覩也. 獨拈柳峀雲所描竹障子一軸, 求甚力曰: “先志也. 先君處士, 最愛是畵. 購有年未獲. 今已棄諸孤矣. 不肖, 則將賫歸於諱辰奠饗, 施于神位之後, 以寄慕焉.” 余感其意, 卽撤而授之.

이용휴는 이정, 유덕장, 주지번(朱之蕃)의 묵죽에 대해 여러 편의 품평을 남겼는데, 그중 유덕장과 관련된 글이 가장 많다. 〈제수운묵죽장(題峀雲墨竹障)〉에서는 이정과 유덕장의 화풍을 비교하였고, 〈제탄은묵죽장(題灘隱墨竹障)〉에서는 유덕장의 높은 감식안을 언급했으며, 그 외 몇 편의 글에서도 유덕장의 이름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위의 글은 〈화죽장자발 병찬(畵竹障子跋幷贊)〉이다. 평소 그림 따위에 관심이 없는 사촌동생이 이용휴 집에 있던 명품들을 건성건성 보다가, 유덕장의 대나무 병풍 그림을 보고는 갑작스레 돌변하여 애타게 구하였다. 돌아가신 선친이 그리도 좋아하던 그림이니 빌려주면 제사상 신위 뒤에 놓고 싶다고 했다. 유덕장의 그림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죽은 사람마저도 보고 싶은 그림, 그것이 바로 유덕장의 묵죽이었다.

유덕장은 그저 그림 그리는 일 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나간 기록도, 그 흔한 시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그 자신의 삶과 실의(失意)한 남인(南人) 문사들의 심정적인 거리는 매우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남인들은 그의 그림에 보이는 대나무를 통해 낙척불우(落拓不遇: 어렵고 불행한 환경에 빠짐)하지만 절개만은 잃지 않겠다는 하나의 표상으로 삼지 않았을까.



설죽화, 드디어 탄은 이정을 넘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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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장, 〈풍죽도(風竹圖)〉소장처 미상.





이정, 〈풍죽도(風竹圖)〉비단에 수묵, 127.5×71.5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예술에서 2인자란 꼴찌와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2인자의 슬픔은 비단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 중기의 묵죽화를 대표하는 인물은 탄은(灘隱) 이정이다. 묵죽화 하면 언제나 이정과 유덕장을 나란히 입에 올렸지만, 평자에 따라 평가는 엇갈렸다. 이헌경은 “이정은 재주가 몹시 뛰어났지만 갑자기 오른팔이 부러졌으니 솜씨 어찌 보여지리오. 유덕장의 그림은 천고에 묘하여 지난해 내 비단에 그렸도다(石陽公孫藝頗絶, 忽折右臂工何見. 峀雲之竹妙千古, 往年掃我東溪絹)”라고 하며 유덕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남태응(南泰膺)은 세상 사람들의 평을 전하며 “유덕장의 대나무는 이정의 육은 얻었지만 그 골은 얻지 못하였고, 이정의 자취는 얻었지만 그 정신은 얻지 못하였으니, 도리어 정경흠의 맑고 깨끗함을 즐길 수 있는 것만 못하다(柳竹得石陽之肉, 而不得其骨. 得正陽之跡, 而不得其神, 反不如六吾之瀟洒可喜)”라고 하여, 유덕장을 이정보다 낮추어 평가하는 글을 소개했다.

그림의 문외한이 보기에도 이정과 유덕장의 그림은 닮은 구석이 매우 많다. 그러하니 유덕장 생전에 이정과 비교한 이런저런 평가가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이정과 비슷하다는 평가에 흐뭇했을까, 아니면 버럭 화를 내며 불쾌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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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장, 〈설죽도(雪竹圖)〉종이에 채색, 139.7×92cm, 간송미술관 소장.





이정, 〈설죽도(雪竹圖)〉1626년, 비단에 수묵, 94.4×54.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유덕장이 79세에 그린 〈설죽도(雪竹圖)〉(그림 6)는 특이하게도 채색화다. 이용휴는 채색 설죽화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제수운착색설죽장(題峀雲着色雪竹障)〉에서 “대에는 눈[雪]을 그리기가 어렵고, 또 설색(設色)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여긴다. 대개 한 번이라도 색을 입히고 나면 천취(天趣)가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독 이 그림은 그 분록(粉綠)이 잘 조화되어 흐르며 정신이 날고 넘친다(竹, 以雪爲難, 而又以着色爲尤難. 盖一涉染飾, 天趣脧損故也. 惟其粉綠調溜, 神爽飛溢)”라고 하여 일반적인 설죽과 착색의 난점을 먼저 언급한 다음, 유덕장의 그림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초록 빛깔이 잘 채색되어 보기 좋다는 평가를 남겼다.

이 그림에는 두 그루의 대나무, 두 개의 바위, 두 개의 난을 배치했다. 설경에 서 있는 대나무는 채색 때문에 더욱 생생하고, 댓잎에 얹혀 있는 눈은 솜처럼 부드럽게 표현되어 마치 눈 속에 서 있는 대나무를 실견(實見)하는 것만 같다. 눈은 여백으로 대신하고, 눈을 얹은 댓잎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여간 실감 나지 않는다. 또 댓잎은 농묵으로, 바위는 담묵으로 대비를 주어 그려냈다. 다른 논자(이성미)는 “중국에서도 녹색 몰골법 죽화가 간간이 그려져 묵죽만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기도 하였는데 무게 있는 수운의 녹죽은 또 하나의 신경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했다. 이 그림을 보면 말년의 성취가 눈부시다. 유덕장이 비로소 탄은 이정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평생토록 그린 대나무가 남들과 다른 대나무를 그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이 그림은 끝내 그만이 그려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대나무 그림인지도 모르겠다. 짧은 인생에서 무슨 일이든 하나로 이름이 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술가는 무수한 범작(凡作)보다는 하나의 걸작을 통해 기억되는 법이다. 노성(老成)한 대가가 보여준 정점의 성취가 모두 담긴 이 채색 설죽화는 그의 걸작으로 떠올리기에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여기저기 기웃대며 종래는 아무런 성취도 없이 스러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인생 전체를 대나무 하나에 걸어 끝내 최고 명성을 얻어내고야 만 치열한 예술가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7026449.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박동욱 | 한양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에서 〈산운 이양연의 시세계 연구〉(2001)로 석사, 성균관대학교에서 〈혜환 이용휴의 문학 연구〉(2007)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평(一平) 조남권(趙南權) 선생님께 삶과 한문을 배우고 있다. 2001년 [라쁠륨] 가을호에 현대시로 등단하였다.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조교수로 일하며 한문학 관련 논저를 다수 펴냈다. 저서로, [혜환 이용휴 시전집],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아버지의 편지](공저), [승사록, 조선 선비의 중국 강남 표류기], [동국산수기] 등이 있다.


발행201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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