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미식의 즐거움을 공유하다 - 그리모와 친구들, 미식가의 탄생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68회 작성일 16-02-06 15:55

본문















14547417062380.png




먹는 즐거움 VS 식탁의 즐거움






14547417074935


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Jean-Francois de Troy), <굴이 있는 점심 식사(Le déjeuner d'huîtres)>
1735년, 캔버스에 유채, 180×126cm, 콩데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그리모를 비롯한 당대의 미식가들에게 식탁은 유쾌한 관계 안에서 미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었다.

작품 보러가기




“먹는 즐거움은 하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위로부터 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다. 한편 식탁의 즐거움은 식사 자리를 되돌아보는 회고(回顧)에서 생겨나는 감각으로, 장소나 사물, 사람과 같이 식사할 때 존재하는 여러 정황으로부터 나온다.”




미식가로 유명한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은 ‘먹는 즐거움(plaisir de manger)’과 ‘식탁의 즐거움(plaisir de la table)’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러나 과연 이 두 가지 즐거움을 이처럼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이 두 가지 즐거움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먹는 즐거움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즉, 사교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연회를 개최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교의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즐거움은 먹는 행위에서 생겨나는 감각적 쾌락을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인가? 이 질문을 화두로, 이 글에서는 브리야 사바랭과 같은 시대를 산 미식가 알렉상드르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Alexandre Balthazar Laurent Grimod de la Reynière, 1758∼1837)가 친구들과 개최한 연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모와 친구들의 연회 : 첫 번째 ‘공유’




어떤 모임을 계기로 연회를 여는 것이 아니라, 식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모이는 일은 의외로 별로 없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들이 확인된다. 음식 문화가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는 15ㆍ16세기에 이미 미식 클럽과 같은 모임이 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몽테뉴는 마치 신학에 대해 논하는 것처럼 요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탈리아인을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요리의 패권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고,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미식 클럽’을 열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14547417082681



브리야 사바랭과 더불어 “미식 문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미식가 알렉상드르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의 초상.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구체제 말기부터 혁명 후에 걸쳐 가장 유명했던 미식가, 그리모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브리야 사바랭과 함께 “미식 문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구체제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징세 청부인(徴税請負人) 집안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미각과 미식에 눈을 떴고, 혁명 후에는 미식에 관한 식견을 무기 삼아 1803년부터 [미식가 연감(Almanach des Gourmands)]을 출판해서 유명해졌다. 문학가로 자부한 그리모는 혁명 이전부터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여럿 주최했다. 이들 모임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식사를 함께하는 자리였지만, 모임에 따라서는 ‘식사’보다 ‘교류’ 그 자체에 중점을 둔 것도 있었다. 이들 모임 가운데 여기서는 그가 먹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듯한 모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그리모가 조직한 요리 및 식재료 감정 조직인 ‘미식 심사 위원회(Jury dégustateur)’였다.

미식 심사 위원회는 다수의 심사위원으로 구성된 심사 기관으로, 이들은 [미식가 연감] 중에서도 특히 <영양 만점의 여행, 또는 파리 각 지역을 돌아보는 어떤 미식가의 산책(Itinéraire nutritif, ou promenade d’un gourmand dans divers quartiers de Paris)>이라는 장에서 다루는 가게와 그곳의 상품에 대해 미리 평가를 내렸다.



14547417095005



미식 심사 위원회의 모임을 묘사한 삽화. 그리모의 [미식가 연감] 제3권 첫머리에 실려 있다. 여러 명의 미식가가 원탁에 모여 앉아 요리나 식재료의 맛을 평가했다.


그리모의 [미식가 연감] 제3권 첫머리에 실린 삽화에 보이는 바와 같이, 모임은 하나의 원형 식탁에 여러 명의 ‘미식가’가 모여 앉아서 이루어졌다. 규정 가운데에는 식탁에 오르는 요리나 식재료는 반드시 한 번에 한 가지여야 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이들 요리나 식재료는 ‘연속적으로(successivement)’ 식탁에 등장해야 했다. 즉, 식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시에 동일한 것을 먹는 것이다. 실제로 삽화를 보면, 식탁 한가운데에 커다란 접시 하나만 놓여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방법의 가장 큰 이점은 “음식을 개별적이고 논리적으로 고찰하게 되므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심사위원이 모두 적극적으로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나아가 미식 심사 위원회에서는 식사를 보조하는 사람의 존재를 철저히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사람의 존재가 음식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식사의 즐거움에만 집중하고자 한 그리모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여성도 식탁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성은 다른 모든 곳에서는 매력을 발산하는 존재지만, 미식가의 만찬에서는 자신이 잘못 왔다고 느낄 것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그들의 주의력은 식탁을 덮은 것으로만 향하며 식탁을 둘러싼 것들로는 향하지 않는다. 이 중요한 기회에는 가장 어리석은 거위조차도 가장 매력적인 여성을 이긴다.




이러한 전제하에 그리모의 미식 심사 위원회에서는 먹는 즐거움을 공유했다. 처음에 이 미식 심사 위원회를 구성하는 회원은 그리모의 정의에 따른 ‘미식가(Gourmand)’로 한정되었다. 이 위원으로 선발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던 듯한데, 위원회에 들어가려면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회원 전원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리모가 생각한 미식가의 정의는 매우 엄격했다. 미식가는 평가할 만한 음식에 대해 오판을 해서는 안 되며 개인적인 호오나 변덕에 따라 평가 대상이 되는 음식을 부당하게 판단해서도 안 되었다. 절대적인 미각이라고 부를 법한 이러한 기준은, 다른 곳에서는 ‘미각의 일치’라고 표현된다.



식도락을 즐기는(Gourmand) 회식자(会食者)들 사이에서는 여타 회식자들 사이에서보다 연대감이 더욱 강하게 형성된다. 이는 진실이며, 따라서 미각이나 성향의 일치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원하게 하고 서로를 바라보게 하며 서로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없다.




위의 인용문에서 그리모는 회식자들 간의 미각의 일치가 서로의 유대감 구축을 한층 강화시킨다고 말했다. 그리모는 이 밖에도 비슷한 연회를 여러 개 운영했다. 미식 심사 위원회의 직접적인 모태가 된 ‘수요회(Société des Mercredis)’가 그 중 하나다.

1780년에 창립된 수요회는 매주 수요일 오후 네시에 레스토랑 르 가크(Le Gaque)에 모였다. 회원으로는 훗날 법률가 캉바세레스(Jean-Jacques Régis de Cambacérès, 1753∼1824)의 집사가 되는 데그르푀이유(D’Aigrefeuille), 파리 대학의 산문학(散文学) 교수였던 조프루아 사제(l'abbé Geoffroy), 극작가 샤제(René Alissan de Chazet) 등이 있었다. 수요회에서는 칠면조 선생(Maître Dindon), 오마르 새우 선생(Maître Homard), 찰광어 선생(Maître Turbot)과 같이 서로 별명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리모는 가재 선생(Maître Ecrevisse)이라 불렸다. 이는 식탁에서만큼은 속세의 사회적 지위나 직업과 상관없이 모두 대등한 관계에서 식사의 기쁨을 나누고자 고안된 방식으로 생각된다. 수요회라는 이름은 [미식가 연감]에도 때때로 보이는데, “미식에 관한 ‘판례(判例)’를 제공하는 신뢰할 만한 모임”이라고 자랑스레 언급된다.

미식 심사 위원회와 수요회 사이에는 확실히 미식에 대한 진지함이라는 점에서 온도차가 느껴지지만, 두 모임 사이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모는 수요회에서 미식 심사 위원회로 옮겨갈 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엄격한 규칙을 두어 일종의 제도화를 꾀함으로써 ‘공유(共有)’라는 성격을 더욱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규칙의 철저함이라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모와 친구들은 두 모임에서 모두 제1단계의 공유, 즉 개인적인 경험인 먹는 즐거움을 다수의 동료와 공유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수요회는 이때 갑자기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원형은 이미 18세기 초에 나타난 ‘카보(le Caveau)’라는 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카보회와 기관지 : 두 번째 ‘공유’




카보회(Société du Caveau)란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주로 노래를 짓고 요리와 술을 함께 즐길 목적으로 결성된 문학 서클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각 시대의 걸출한 가수와 문인이 모인 일종의 음악 아카데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임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중단될 때까지 식탁을 둘러싸고 노래 짓기를 즐기는 자리로서 번성했다. 그리모 등이 결성한 수요회는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서 탄생했던 것이다.

1805년 12월, ‘카보 모데른(Caveau Moderne)’은 가수이자 출판업에 종사했던 카펠(Pierre Capelle)이 유명한 레스토랑인 로셰 드 캉칼(Rocher de Cancale)에서 모든 회원의 저녁식사 비용을 댄다는 조건을 걸고 옛 카보 멤버들에게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결성됐다.



14547417102627



카보 모데르느의 모임을 묘사한 삽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 모임이 수요회와는 달리 독자적인 기관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카보 모데른은 창립 다음 달인 1806년 1월에 이미 기관지 [미인과 미식가 신문(Journal des Gourmands et des Belles)]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미인과 미식가 신문]에 실린 것은 미식에 관한 고찰이나 ‘식탁의 위생학’, 다수의 시가(詩歌)와 악보(楽譜), 음식을 주제로 한 수수께끼 등이었다. 집필은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나누어 맡았다. 미식에 관한 식견이 높은 그리모는 식사에 관한 고찰을, 의사 우르생(Marie de Saint-Ursin)은 식탁과 관련된 의학 이야기를, 멤버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수들은 노래를 실제로 식탁에서 공개하고 모두 식사를 둘러싼 즐거움을 공유했을 것이다. 즉, [미인과 미식가 신문]은 원래 그 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즐기던 모임의 분위기를 그대로 글로 써 발행한 것이었다. [미인과 미식가 신문]은 회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더욱 광범위한 독자를 상정하여 출판되었다. “웃자, 노래하자, 사랑하자, 마시자. 이것이 우리의 정신(Rions, chantons, aimons buvons; Voilà toute notre morale).” 이는 [미인과 미식가 신문]의 속표지에 인쇄된 경구로, 보드빌 만찬회가 지향한 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정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미인과 미식가 신문]은 1806년 1월부터 1815년 12월까지 매달 간행되었다. 이처럼 출판을 통해서, 식탁을 둘러싼 기쁨을 더욱 광범위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상대로 이 신문은 독자들의 식욕을 자극하였으며, 때때로 독자들은 저자들에게 카보의 모임에 참가시켜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당신들의 훌륭한 식사와 노래 덕분에 모든 독자들의 입에는 침이 가득 고입니다. 당신들이 벌이는 만찬회의 유쾌한 분위기는 [미인과 미식가 신문]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매우 멋진 그 유쾌함을 저도 함께 느껴보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로셰 드 캉칼에서 열리는 연회에 저도 어떻게든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저자들은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는 말했지만, 이러한 청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책을 통해 이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려 했을 뿐, 실제로 모임에 불러 찰나적인 쾌락을 함께하는 것이 출판의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판물의 형태로 자신들의 즐거움을 세상에 전하면 이를 읽는 사람의 수만큼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그 기쁨이 공유되는 법이다. 이리하여 두번째 단계의 공유, 즉 여러 동료와의 내밀한 모임에서 나누던 먹는 즐거움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모가 본격적으로 미식의 세계에 눈을 뜨고 집필을 시작한 것은 혁명 후부터였다. 그리모에게 식탁이란, 좋은 인간관계 안에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미식가 연감]에 그치지 않고, 연회 초대나 식사 예절, 고기를 잘라 나누는 방법, 연회에서 제공해야 할 메뉴, 식사 중에 나누어야 할 대화 등을 안내하는 [초대자의 안내서(Manuel des Amphitryons)]를 1808년에 집필했다. 이 또한 유토피아를 자신이 주도하는 식탁 바깥으로까지 널리 퍼뜨리고자 한 의지를 표명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7103260.jpg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14547417103887.jpg




하시모토 지카코 (橋本周子) |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
2012년 교토대학 인간ㆍ환경학 연구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PD)으로 재직중이다. 전공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사이의 프랑스 미식(美食) 문화사. 특히 이 글에도 등장한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Grimod de la Reyniere)에 주목하고 있다. 박사논문은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와 “미식가"의 탄생: 프랑스 혁명 전후의 식(食) 행위에 관한 연구>다.



14547417104885

번역
김시덕 | 서울대학교 연구원
고문헌과 고문서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고 있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ㆍ류큐열도ㆍ에조치](가사마쇼인)로 제4회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2011년에 일본에서 간행한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제2777회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단행본 [그들이 본 임진왜란―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와 전쟁의 기억],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을 비롯한 10여 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와 40여 편의 논문을 출간하였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14547417105528

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책정보 보러가기


발행2013.02.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