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문희별자도>를 보는 조선후기 문사들의 시각 - 오랑캐의 포로, 그리고 실절한 여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03회 작성일 16-02-06 15:55

본문















14547417151475.png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대표적 주전론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전쟁 후 청나라에 압송되어 심양에 억류된 그는 〈문희별자도(文姬別子圖)〉라는 중국 그림 한 폭을 얻었다. ‘문희가 아들과 헤어지다’라는 뜻의 〈문희별자도〉는 중국 후한(後漢) 말의 학자 채옹(蔡邕, 132~192)의 여식이자 뛰어난 문학가이고 음악가이기도 한 채문희(蔡文姬)라는 여인이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다룬 그림이다. 그림을 본 김상헌은 깜짝 놀랐다. 원나라 때의 유명한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가 그린 350년쯤 된 귀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은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의 인장이 찍힌, 황제가 아끼던 궁중 소장품이었다.



14547417162908


그림 1 전(傳) 조맹부(趙孟頫), 〈문희별자도(文姬別子圖)〉
14세기, 비단에 채색, 129×91cm, 스미스 대학 박물관(미국 매사추세츠 노샘프턴) 소장.



<문희별자도>, 조선에 전해지다




명나라의 궁궐 깊은 곳에 놓여 황제가 즐겨 감상하던 그림이 심양관에 갇힌 조선인 포로, 김상헌의 손에 어떻게 하여 이르게 된 것일까? 그렇다. 그것은 청나라 군대가 명나라의 수도 연경을 함락했을 때 탈취되어, 세간을 떠돌게 된 수많은 명화 중 하나였다. 김상헌은 1645년 심양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 그림을 가져왔고, 후에 손자인 김수증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김수증이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게 발문을 의뢰하면서부터 조선에 들어온 중국의 그림 〈문희별자도〉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문희별자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또한 송시열의 발문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14547417176601


그림 2 전 조맹부, <문희별자도> 부분


그림이 현재 전하지는 않으나 그림에 대한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을 보면 “한나라 사신은 앞서 가고 문희가 뒤따라가는데 괴롭고 비통한 기색이다”라고 하였다. “두 아들이 옷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남편인 흉노족 좌현왕(左賢王)도 기분 좋은 기색이 아니다”라는 내용 또한 실려 있다. “얼굴 묘사가 핍진하고 절묘하다”는 평도 덧붙어 있다. 미국 스미스 대학 박물관(Smith College Museum of Art)은 조맹부의 전칭작(傳稱作: 해당 작가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인 〈문희별자도〉를 소장하고 있는데, 산수와 흉노의 천막을 배경으로 문희와 시녀들, 두 아들과 좌현왕이 비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기록에 전하는 그림 설명과 서로 통한다(그림 1). 특히 꼼꼼한 필치로 인물의 표정을 상세히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어 기록의 내용에 부응한다(그림 2). 이 그림이 조맹부의 진작(眞作)이라 여겨지지는 않지만 배경을 이루는 산수 표현과 공간 처리에서 원대의 화풍이 엿보여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가가 그린 명작의 경우 임모본(臨摹本: 모방하여 만들어진 작품)이 반복적으로 제작된 것을 감안할 때, 김상헌이 가지고 온 그림도 조맹부의 그림이거나 이를 임모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송시열이 〈문희별자도〉를 보고 발문을 쓰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작품의 표현이나 예술성, 혹은 ‘문희’라는 여인의 기구한 사연이 담긴 그림의 내용이 아닌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어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준, 그러나 이제는 멸망한 왕조인 명나라의 황제, 신종이 아낀 그림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송시열에게 〈문희별자도〉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충족시켜준 그림으로만 머물고 말았을까?


신종 황제의 애장품 <문희별자도>와 대명의리론




송시열은 〈문희별자도〉 발문에 “아홉 개나 되는 인장이 해와 별처럼 찬란하여 감히 가까이하기 힘들 정도”라고 묘사하면서 그림이 내뿜는 이른바 ‘포스(force)’를 표현하였다.

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온 천지에 세워져 있다. 명나라 황제의 은덕이 있고 없음은 감히 말할 바 아니지만, 삼가 생각건대 본조(本朝) 임진년 변란에 신종 황제의 지극한 인덕(仁德)을 입어 초목과 티끌까지도 모두 우로(雨露)에 젖었거든, 하물며 혈기(血氣)가 있는 무리들이야 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긴 느낌이 어떠하랴.

〈문희별자도〉에 붙인 송시열의 발문 핵심은 바로 이 구절이다. 춘추대의가 세워져 있다는 ‘존주론(尊周論)’과 임진년의 변란에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의리,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이다. ‘대명의리론’이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망할 뻔한 조선이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존주론’은 천하가 무수한 소국으로 분립하여 쟁투하던 중국 고대의 춘추전국시대에 천명(天命)을 받들어 정통성을 보유한 주나라만이 존중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혼란한 세상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당시는 남방 오랑캐라 할 수 있는 왜(倭)와 북방 오랑캐인 여진(女眞)에 의해 동아시아 질서가 파괴된 천하대란의 시기로 인식되었고, 주나라와 같은 상징성을 가진 한족(漢族)의 정통국가인 명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화 질서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이론이 팽배했다. 그런데 1644년 명나라의 멸망은 중화 문화 질서의 붕괴 위기를 의미했으니, 송시열에게는 정신적으로나마 이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신종과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萬東廟)의 설치는 이를 구현하기 위한 장치였다.

효종 연간에 북벌론의 실패 이후 송시열은 자신이 열렬히 추종했던 주희(朱熹)를 본받아 충북 괴산의 화양동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본뜬 화양구곡을 정하고, 암서재(巖棲齋)라는 정사를 운영하며 화양동을 성리학적 은거와 대명의리의 관념이 융화된 장소로 만들었다. 그는 의종의 글씨 ‘비례부동(非禮不動)’을 구해 화양동 계곡의 첨성대 암벽에 모각하였으며, 신종과 의종의 어필(御筆)을 수집하여 보관하기도 하였다. 신종이 아끼던 그림 〈문희별자도〉에 발문을 쓰고, 당시 조선 최고급의 화가라 일컬어지던 조세걸에게 그것을 임모하게 하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송시열은 〈문희별자도〉를 명나라 황제의 어필과 함께 고이 모시게 되었지만, 내심 문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여겼다. 송시열은 “그 족자의 사실에 대하여는 주자가 [초사후어(楚辭後語)]에 자세히 논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주자가 문희의 실절(失節)에 대해 비판한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희별자도>, 문희의 삶과 문학이 담긴 그림




문희는 중국 후한시대의 대학자 채옹(蔡邕)의 여식으로 본명은 채염(蔡琰)이고, 문희(文姬)는 그의 자(字)이다. “박학하고 재변이 있었으며, 음률을 잘하였다”고 전한다. 그녀가 여섯 살 무렵의 일이다. 아버지 채옹이 밤에 거문고를 타다가 현이 끊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듣고 있던 문희가 “두 번째 현이 끊어졌습니다”라고 맞혔다고 한다. 채옹은 우연히 맞혔을 것이라 짐작하고 일부러 현을 하나 끊고 물었는데, 문희가 “네 번째 현이 끊어졌습니다” 하면서 모두 맞혔다고 한다. 무남독녀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복하게 자랐을 문희는, 성장하여 하동(河東)의 위중도(衛仲道)라는 인물에게 시집갔지만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남편이 일찍 죽었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문희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흥평(興平, 194~195) 연간에 흉노가 침입해오자 좌현왕 휘하의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간 것이다. 이역만리 오랑캐 땅 낯선 곳에서 12년을 머물며 문희는 좌현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채옹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애석히 여긴 조조(曹操)가 사자(使者)를 보내 금과 옥으로 값을 치르고 문희를 속량(贖良: 몸값을 주어 신분을 풀어줌)시켜주니, 문희는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다시 둔전도위(屯田都尉)를 지낸 동사(董祀)라는 인물과 결혼하였다.

문희의 뛰어난 재변은 세 번째 남편 동사가 죄를 지어 사형당하기에 이르렀을 때 힘을 발휘하였다. 문희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조조를 알현하고 선처를 청하면서 “명공(明公)의 마구간에는 말이 만 필이 있고, 범 같은 용사가 숲을 이룰 만큼 많사옵니다. 어찌 발 빠른 말 한 필은 아깝게 여기면서 (사람의) 죽을 목숨은 구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여 조조를 감동시키고 남편을 구해냈다고 한다. 이때 조조의 명을 받들어 문희는 선친이 소장하고 있던 책 4천여 권 중에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4백여 권을 직접 써서 올렸는데 그 문장에 탈자나 오류가 없었다고 전한다.

[후한서]에 실린 채문희에 대한 기록으로 인하여 그의 학문과 재변은 조선의 문사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채문희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집안의 똑똑한 여식으로 부친의 문학과 예술을 이은 딸의 대명사가 되어 아들 없이 죽은 이들의 만사(輓詞)에 종종 비유로써 등장하였다. 그러나 문희의 인생에서는 흉노의 포로로 오랑캐 자식을 낳아 기르며 지낸 12년이 가장 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한서]에는 채문희가 지은 오언시와 초사체로 쓰인 〈비분시(悲憤詩)〉 두 편이 수록되어 있고, 송시열이 발문에서 언급하였듯 주희의 [초사후어]에도 문희가 지었다고 알려진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라는 서사시가 있다. 이들 시편에는 문희가 흉노에게 잡혀간 정황, 그들에게 당한 능욕, 타향에서의 이질감과 애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이 녹아 있다. 또한 한나라 사자(使者)의 극적인 출현과 귀향, 이로 인한 자식과의 이별이 절정을 이룬다.

〈문희별자도〉는 가장 핵심이 되는 바로 그 장면, 즉 오랑캐 땅에서의 오랜 고생 끝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기쁨보다 거기서 낳은 자식과의 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문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호가십팔박〉 18수 중에서는 제13박에 해당한다.







남은 생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 했지만,不謂殘生兮却得旋歸
오랑캐의 아이를 안은 채 눈물이 흘러 저고리를 적시네.撫抱胡兒兮泣下霑衣
한나라 사신 나를 맞으러 와 수레는 떠나려 하는데,漢使迎我兮四牡騑騑
아이 목이 쉬도록 울부짖어도 누가 알아주리오.胡兒號失聲兮誰得知
나와 생사를 함께하려 했는데 이러한 일을 당하니,與我生死兮逢此時
자식 걱정에 해도 빛을 잃는구나!愁爲子兮日無光輝
어찌하면 날개 돋아 너희와 함께 돌아갈 수 있으랴.焉得羽翼兮將汝歸
한 걸음 뗄 때마다 또 한 걸음 멀어져 발길 떼기 어려운데,一步一遠兮足難移
그 모습 사라져 넋은 빠져도 사랑만 남았구나!魂消影絶兮恩愛遺
열세 번째 가락은 곡조 급하고 구슬픈데,十有三拍兮弦急調悲
애간장이 무너져도 내 마음 아는 이 없네.肝腸攪刺兮人莫我知


수많은 ‘문희’의 이야기






14547417189024


그림 3 전(傳) 이당(李唐),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 중 제13박
대만 대북 고궁박물원 소장.


오랑캐 땅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한나라 귀족 여인 채문희의 이야기는 일찍이 5대(五代) 시기부터 그림으로도 그려졌음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남송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12세기 여진족의 침략으로 북송의 수도 변경은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 휘종의 황후인 위태후를 비롯한 백여 명의 황족들이 대거 포로가 되어 여진족의 금나라로 잡혀가자, 휘종의 아홉째 아들인 고종은 양자강 이남의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주)을 수도로 정하고 남송을 세운다. 그는 18년에 걸친 외교적 노력 끝에 간신히 부왕 휘종의 시신과 모친 위태후의 생환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휘종을 닮아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고종은 남송의 도화원(圖畵院)을 적극 후원하며 화원들의 다양한 회화적 성취를 끌어냈다. 문희의 이야기를 담은 [호가십팔박]의 제작이 그중 하나였는데, 당나라 시인 유상(劉商)이 지은 〈호가십팔박〉 18수를 손수 쓰고 빈 공간에 이당(李唐)으로 하여 그림을 그려 넣게 하였다. 이 같은 고종의 예술 활동은 오랑캐 여진과 대치한 정세 속에서 희생된 모친 위태후와 수많은 ‘문희’의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종이 주문하여 이당(李唐)이 그렸다고 하는 그림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대만 대북(臺北)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호가십팔박]이 이당의 전칭작으로 전하고 있어,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짐작게 한다. 총 18폭의 연작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 중 13번째 그림을 보자(그림 3). 단정한 해서로 쓴 시가 화면 위에 자리하였고, 아래에 문희가 두 아들과 이별하는 장면이 보인다. 유목민의 천막 앞에서 문희는 두 아들을 잡고 울먹이고 남편 좌현왕 또한 슬픔으로 눈물을 닦는다. 왼편에는 문희를 위한 행차가 준비되었는데 낙타가 끄는 화려한 차가 눈길을 끈다. 언덕 너머 왼쪽 상단에 그를 호위하여 귀환시키려는 한나라 병사 일행이 보인다.

이처럼 연작 형식으로 이루어진 [호가십팔박] 서화 작품은 이외에도 중국 남경박물관, 미국 보스턴 미술관, 일본 야마토분카칸 등 여러 곳에 전하고 있다(그림 4).



14547417202702


그림 4 작자 미상, [호가십팔박] 중 제13박
12세기, 비단에 채색, 5×55.8cm,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한편 오랑캐에게 잡혀간 여인 ‘문희’의 사연은 17세기 명청 교체기의 중국에서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조선에서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계문란(季文蘭)이라는 명나라 여인이 있었다. 계문란은 강남의 양갓집 규수였는데, 집안이 오랑캐에게 전복되어 북쪽 심양으로 끌려가다가 진자점(榛子店)을 지나게 되었다. 계문란은 진자점의 벽에 시를 써서 자신의 억울하고 괴로운 심사를 표현하고는, 마지막 줄에 “천하의 유심한 남자들은 이것을 보면 가엾게 여길 것이다(天下有心男子 見而憐之)”라고 썼다. 진자점은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는 길에 들르는 곳이라 이 벽서는 쉽게 눈에 띄었다. 이를 본 조선의 사행원들은 저마다 계문란의 참담한 사정을 동정하며 자신의 심회를 읊은 시를 지었다. 시 속에서 계문란이 문희에 비유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문희’ 이야기




다시 17세기 조선으로 돌아가보자. 〈문희별자도〉는 조선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기도 하다. 1637년, 병자호란과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에 이어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여진족 청나라의 근거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군은 이들 인질들과 함께 수많은 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달했으며 대부분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빈궁과 원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 왕실 일족과 백관의 처자식 등 가족들이 모두 강화도에 피란을 갔고, 강화성은 청군의 집중 공격과 약탈을 겪었기 때문이다. 청군은 철군하면서 강화도의 피란민뿐 아니라 인근의 경기와 도성 일대, 남한산성 주변에서 사대부 집안 부녀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을 주도한 최명길은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에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은 인구가 ‘무려 50여만 명’이었다”라고 했다. 또 [심양장계]는 “세자 일행을 데리고 철군하는 청군 행렬은 사로잡힌 남녀가 산과 들에 꽉 차 있어 하루 30~40리밖에 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다 후대의 기록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하였다. 이들이 발버둥 치며 울부짖으니 청군이 채찍을 휘두르며 몰고 갔다”라는 당시 상황이 전한다.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여인들 중에 확인되는 이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 ~ 1644)의 딸이 있었다. 청의 강화도 함락 때 붙잡혔는데, 종실의 딸이라 하여 황제에게 바쳐졌고 청 태종이 청의 고위 문관인 피패박씨(皮牌博氏)에게 결혼시켰다고 한다. 회은군은 붙잡혀간 종실 사람들을 속환하기 위한 사은부사로서 쇄환자(刷還者)를 속환하기 위한 진주사(陳奏使)로 청을 드나들었지만 자신의 딸을 속환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피로인(被虜人: 적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속환사를 파견하고 청과 교섭을 하여 일괄 타결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청인들이 요구하는 몸값에 맞추어 개인적으로 속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로인들은 가족이 찾아와서 속환해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거나 몸값이 부족하여 속환하지 못한 경우에는 이역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청에 끌려간 사대부가의 여인들은 속환되어 돌아와도 정절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되었으리라는 의심 때문에 이혼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어렵게 돌아온 여인들에 대한 이혼을 금지시키는 임금의 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절(失節)하였으니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없고 가풍을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남편이나 자식에게 내쫓김을 당했던 것이다.

17세기 조선에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이른바 ‘환향녀’의 문제. 결국 〈문희별자도〉는 한나라 때 채문희의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이야기였다. 명나라 여인 계문란을 동정하며 수백 년 전 문희와 연결 지어 시를 짓던 조선의 문사들은, 그러나 심양으로 잡혀간 수많은 조선의 여인,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여인들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최대의 사회문제로 논란이 된 이른바 ‘환향녀’의 문제에서는 감상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문사들의 의식 속에 문희는 실절한 여인의 대명사로 자리 잡아 갔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학자 이덕무가 〈문희별자도〉를 보고 남긴 시가 있다.







들뜬 봄날, 놓던 자수 잠깐 놓고서惱春稍減繡工夫
채문희가 자식 이별하는 그림 보며 웃는다!笑着文姬別子圖
부끄러워라, 박명해 오랑캐에게 잡혀갔으면羞渠薄命胡中沒
죽음을 당할망정 두 아이는 왜 낳았던가.抵死那能生二雛


19세기 초 성해응이 〈문희별자도〉에 대해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대와 문물을 함양한 자로서 오랑캐에게 의탁하는 누를 저질렀으니 진실로 중국의 큰 수치로다. 신종 황제 때 섬나라 오랑캐가 조선을 어지럽히고 여진족이 동북 변경으로 들어와 범하니 임금께서 문희처럼 오랑캐에게 빠질까 봐 항상 이 그림을 보며 경계하였다”고 하여 문희는 ‘오랑캐의 포로’, ‘실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문희별자도〉가 어느새 교훈을 삼기 위한 감계화(鑑戒畵: 본보기나 경계로 삼을 만한 그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문희별자도〉는 오랑캐에게 잡혀간 중국 귀족 여인의 기구한 사연, 오랑캐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지만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 앞에 비통해하는 모자간의 애절한 정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에게 이 그림은 유교적 덕목의 위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성리학자들에게 ‘실절’은 최대의 오욕이었던 것이다. 17세기 병자호란 후 환향녀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청으로 잡혀간 60만이 넘는 포로들, 애초에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문희의 이야기, 이것은 우리에게 병자호란 후에 있었던 역사 속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타의에 의해 일본 땅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수많은 포로와 정신대의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7203336.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유미나 | 원광대학교 미술사학과 조교수
한국회화사를 전공하였다. 전란과 기근이 연이은 피폐함 속에서도 문화적 성취가 이어졌던 17세기 조선의 회화를 중심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조선 중기 오파화풍의 전래―‘천고최성첩’을 중심으로〉(2005), 〈‘만고기관첩’과 18세기 전반 화원 회화〉(2007), 〈17세기, 인·숙종기의 도화서와 화원〉(2010), 〈심하전투의 명장 김응하와 ‘충렬록’ 판화〉(2011) 등 다수의 논문과 [History of Korea](2001) 등의 번역서가 있다.


발행2013.02.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