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소금을 굽다 - 햇빛과 바람이 보내준 바다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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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5회 작성일 16-02-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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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소금이 더 소중한 염부들은 너나없이 소금이 ‘온다’라고 말했다. 소금은 염부의 손으로 만들어져 생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햇빛과 바람이 바닷물을 익혀주기 기다리면 시간의 레일을 타고 마침내 눈부시고 가뿐한 결정체(結晶體)로 찾아와주는 귀빈이 바로 소금이었다.


- 박범신, [소금]



햇빛과 바람이 익혀주는 결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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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에서 햇빛과 바람의 도움으로 소금 결정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금꽃이 핀다'고 말한다. <출처: 연합뉴스>


햇빛과 바람이 바닷물을 익혀주기를 기다려 찾아와주는 귀빈이 바로 소금이다. 염부들은 소금이 ‘온다’라고 말한다. 그런 표현에는 그만큼 소금을 소중하고 반가운 것으로, 인격을 갖춘 손님으로까지 대접하여 섬기고 받드는 마음이 담겨 있다.

농부가 논밭에서 봄, 여름, 가을 동안 햇빛과 바람, 비에 의지해 땀으로 알곡을 생산하듯이 염부는 해안가 소금밭에서 햇빛과 바람에 의지해 땀으로 소금꽃을 피워낸다. 염전은 보통 네 단계 구조로 되어 있었다. 첫 단계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불순물을 가라앉히는 저수조다. 둘째 단계는 제1증발지인 ‘난티’, 셋째 단계는 제2증발지인 ‘느티’, 그리고 소금을 거두게 되는 마지막 결정지가 바로 최종 단계이다. 결정지에 와서 25도 이상으로 염도를 높여야 소금물은 비로소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맑고 정결한 소금꽃으로 핀다. 천일염(天日鹽)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염정(鹽井: 짠물을 모아두는 웅덩이)의 간수를 솥에 넣고 달여서 만든 자염(煮鹽)이 주로 생산되었다.

염정은 짠 흙을 이용해 염도를 높이는 생산 시설이며 불순물을 걸러내는 여과 장치다. 염정은 지역마다 명칭, 크기와 구조 등에서 차이가 난다. 전라도에서는 ‘섯등’, 경상도에서는 ‘섯’, 충청도의 서산ㆍ태안에서는 ‘간통’, 강원도에서는 ‘간수통’이라 한다. 염정은 대개는 바닷물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만들어 두고 거기에 바닷물을 길어와 부었다. 전라도 지도(智島)의 군수였던 오횡묵(吳宖黙, ?~?)은 그의 정무일지에다 염막에서 소금 굽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체로 소금을 굽는 법은 먼저 염등(鹽磴: 전라도의 섯등으로 짠물을 만드는 여과 장치)을 쌓고 나무를 옆으로 펴고, 나무 위에 솔잎을 쌓는다. 솔잎 위에는 바다 모래를 여러 번 갈아 말려 이를 덮고, 물을 부어 거르기를 잿물 받는 것과 같이 한다. 그 아래를 파서 구덩이를 만드는데 이를 염정(鹽井)이라고 한다. 염막(鹽幕: 소금가마에 불을 때는 장소)을 높고 넓게 만들고 위로 연통을 만들며, 가운데 둥근 구덩이를 한 길 정도 판다. 네 모퉁이에 흙을 쌓아 기둥을 만들고 긴 나무를 그 위에 옆으로 건다. 그 위에 서까래를 듬성듬성 펴놓고 서까래 아래에는 대나무를 조밀하게 편다. 또 쇠갈고리를 서까래 위와 대나무 위에 걸어둔다. 그리고 먼저 짚을 깔고 다음에 주먹만 한 작은 돌을 깔며, 그 다음에 굴 껍질로 만든 회를 바르는데 이를 염부(鹽釜: 소금솥)라고 한다. 염정의 물로서 가마솥을 채운 후 밑에다 불을 지피면 반나절쯤 되어 물이 끓어서 소금이 된다. 한 솥에서 소금 4석(石)이 생산되며 매일 두 번씩 구워낸다.


오횡묵(吳宖黙),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鎖錄)]

염정에서 만든 짠물을 염막에 옮겨와서 저장고에 넣어두고 생산량을 감안해 짠물의 일정량을 소금가마에 붓고 하루 내내 쉼 없이 불을 땐다. 쇠가마〔鐵釜〕는 소나무 장작을 사용하고 횟가마〔土釜〕는 잡목과 잡풀을 땔감으로 쓴다. 쇠가마로 소금을 굽기 때문에 서해안의 소나무가 헐벗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바닷물을 끓여 수분을 증발시키고 결정된 소금을 걷어올린 것이 자염이다. 이 자염은 색깔도 하얗고 분말이 고우며 맛이 뛰어났다.

고려시대 이곡(李穀, 1298~1351)이 자연도(紫燕島)를 지나가며 읊은 시에 “소금 연긴 근처 물가 깔려있는데, 바다 달은 먼 멧부리 솟아오른다(鹽煙橫近渚, 海月上遙岑)”라고 하였다. 자연도는 지금의 영종도다. 이곳에서 자염을 구웠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짠물’이란 말이 전해지는 것도 인천 지역에서 소금을 구운 일과 관련이 있다. 젓갈로 유명해진 소래포구에는 염창(鹽創)이 남아 있고, 주안에는 일제 때 염전이 있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글에도 경기도 서해의 여러 섬과 남양의 대부(大府)ㆍ성감(成甘)ㆍ연흥(連興)과, 인천의 자연(紫燕), 삼목(三木), 용린(龍鱗) 등의 소금 생산은 모두 별도의 방편을 세워 함께 다스리게 하도록 건의한 일이 있다.



소금이 소통시킨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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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정(權用正), <보부상(褓負商)>
제작연도 미상, 견본담채, 16.5×13.3 cm ,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소금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어 매력적이었다. 보부상들은 구운 소금을 등짐에 지고 해안 지방의 소금을 내륙으로 유통시켰다. 작품 보러가기


옛날 서해안은 염전이 지천이었다. 이 염전과 연결된 크고 작은 ‘소금길’의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서울 마포구의 염리동은 소금 장수가 많이 살아서 불리던 이름이고, 염전교는 소금 상점이 있던 곳의 흔적이다. 고창의 질마재길은 1400여 년 전 검단리 사람들이 검당포에서 화덕에 불을 지펴 구운 소금을 등짐에 지고 선운사로 가던 길이다. 제염법(製鹽法)을 가르쳐준 검단선사에게 보답하고 부처님께 봉양하려고 걸었던 보은(報恩)의 길이었다.

소금배는 해안의 어염을 싣고 강을 따라 올라왔다가 내륙의 농산물을 싣고 내려가면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취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물도 아울러 유통시켰다. 우리나라는 산악이 많았기에 교통이 불편했던 이전 시대에는 마소에 짐을 싣고 움직이는 육로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물길이 닿는 곳이면 그 물길을 따라 사람이 움직이고, 재화가 이동하고 교역이 이루어져 나루와 포구가 형성되어 상업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소금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라 소금은 대부분 해안 지방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바닷가에서 해염(海鹽: 바닷물로 만든 소금)을 생산하여 내륙에서 소비하곤 하였다.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소금 가격은 더 비싸지기 마련이고, 반면에 곡물 생산이 많았던 내륙에서는 곡물 가격이 해안 지방보다 낮았다. 따라서 해안의 어염(魚鹽)을 내륙에 팔고, 또 내륙의 곡물을 해안에 팔면, 싼 것을 가져다가 비싸게 팔 수 있어 상당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이윤을 따라 자연스레 소금길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소금을 중요한 품목으로 여겼다. 소금장수들은 물길을 따라 소금배를 운행하면서 강을 따라 내륙으로 올라갈 때는 해안의 소금 및 건어물, 젓갈 등을 실었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는 내륙의 쌀, 보리, 밀, 팥, 깨와 같은 곡물을 실었다. 한양의 상인들은 남한강 수계를 거슬러 올라와 단양, 영춘, 영월뿐만 아니라 횡성, 평창 등 영서 산간 지역에까지 서해안의 소금을 공급했다. 다음 시에서도 한강 수계를 따라 소금을 무역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배에다 황해 소금 가득 싣고서                         滿船黃海鹽

내일이면 충주 향해 떠나신다네.                      明日忠州去

충주에는 목화가 많이 난다니                          忠州多木綿

첩은 이미 베틀을 정리해뒀죠.                         妾已理機杼



- 이덕무(李德懋), <강마을(江曲)>

이덕무가 강마을의 풍경을 노래한 이 시는 서울에서 충주로 소금 장사 떠나는 남편을 둔 아낙의 목소리로 읊고 있다. 한강에는 서강, 마포, 용산, 망원, 두모포, 뚝섬 등의 포구가 있었다. 서해에서 만들어 거둬들인 소금과 새우젓은 마포의 염창에서 하역되어 절반이 서울로 유통되었고, 나머지는 남한강, 북한강의 수로를 따라 경기, 충청, 강원 등지로 퍼져나갔다. 이 소금을 사서 배에 가득 싣고서 내일이면 충주로 떠나간다. 충주에는 목화가 많이 난다니 서방님은 소금을 팔고 나면 충주의 목화를 사서 소금배에 가득 싣고서 돌아올 것이다. 아낙의 할 일은 그 목면으로 베를 짜는 일이니 이미 베틀을 손질해두었다. 남편더러 소금 장사 잘 다녀오라 당부하며 집안이 넉넉해질 것을 꿈꾸는 아내의 부푼 마음을 그리고 있다.


우리집은 강가에 자리해 있고                         吾家江上在

문밖에는 장삿배들 매여 있는데                      門外繫商船

달빛 비친 너른 모래 닻을 내리고                    下碇平沙月



안개 깔린 옛 골짝에 돛을 내리네.                   落帆古峽煙

한강의 어귀에서 바람 타고와                         乘風漢水口

탄금대 가에서는 노 두드리니                         扣枻琴臺邊



내일은 생선 소금 파는 날이라                        明日魚鹽販

시골 백성 백 명 천 명 모여들겠지.                  村氓集百千






- 김득신(金得臣), <괴강취묵당팔영(槐峽醉墨堂八詠)ㆍ강구상선(江口商船)>

김득신이 괴산 괴강(槐江) 주변 장삿배를 읊은 시다. 달천(達川)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박대천이 되어 북쪽으로 흘러 괴산군 청천면에서 화양천과 합류하여 청천강이 된다. 청천강은 괴산읍에 이르러 쌍천, 음성천과 만나 괴강이 되고, 충주시에 이르러서는 달내강이 되어 칠금동 탄금대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뱃길로 번성했던 충주의 서쪽은 목계(木溪)로, 강을 오가던 생선배와 소금배들이 정박하여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이 모두 이곳에 모여드니, 주민들이 모두 장사를 하며 부유하다. 금천나루는 두 강이 마을 앞에서 만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돌아들어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시는 목계나루와 금천나루에서 서해안 소금과 동해안 소금을 판매하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소금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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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대표적 천일염 생산지인 화성 서신면 염전에서 천일염 수확이 한창이다. 천일염은 단순한 염분이 아니라 생명을 조화시키는 물질로, 그 자체가 미네랄의 보고이다. <출처: 연합뉴스>


소금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인데다 그 값도 비쌌으니, 확실히 전매(專賣: 어떤 물건을 독점하여 팖)하기 좋은 물품이었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의 통치 원리를 밝힌 [조선경국전]에서 ‘국가가 백성과 함께 이익을 나누고자 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조선이 시행하려는 소금 제도의 개혁을 요약했다.


가파른 골짝 멀리 전매장이 열리는데                            絶峽遙開榷利場

고려 적의 옛 이름인 염창 아직 남았으니                       高麗舊號尙鹽倉

그 누가 알았으랴, 유안의 상평염법이                           誰知劉晏常平法

동파에게 고기 맛을 잊도록 만들 줄을.                          解使東坡肉味忘



- 정약용(丁若鏞) , <천우기행(穿牛紀行)>

다산은 춘천에 소금을 매매하는 장이 열리고 있음을 보았고 춘천에는 고려 때부터 있던 염창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 시의 주에 보면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 ‘염세조(鹽稅條)’에 “오직 서민들은 포(布)를 바쳐서 관염(官鹽: 관청에서 제조하고 판매하거나 관청의 허가를 얻어 제조하여 판매하던 소금)을 무역하기 때문에 여러 도(道)에서 모두 소금의 이익을 독차지했다. 춘천에 염창을 둔 것도 이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각리장(榷利場)은 정부에서 물품을 전매하여 이익을 독차지하는 곳을 말한다.

다산이 생각한 이상적인 염법은 상평염법(常平鹽法)이었다. 이 법은 당(唐)나라 때 유안(劉晏)이 염철사(鹽鐵使: 중국 당, 송나라 때에 소금 전매 등을 관장한 관직)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제정한 염법이다. 소금이 적은 지방에 한하여 일정한 소금을 관청의 창고에 저장해두었다가 소금이 귀할 때에 이를 싼 값으로 백성들에게 팔던 정책이다. 유안은 소금 값을 조절하여 누구나 소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던 상평염법을 시행하였다. 다산은 백성의 마음을 읽어 시행한 염법을 살피고 소동파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를 칭찬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당시 염법에 따라 관가에서 소금을 구워 팔았기에 이는 늘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소금을 구워 파는 것을 허가하여, 소금이 흔할 때에는 값을 올려서 사들이고 소금이 귀할 때에는 값을 내려서 팔게 해야만 상평이라 할 수 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正〕이요 고르게 하는 것〔均〕이니, 이것이 다산이 시행하고 싶어한 염법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 ‘염세(鹽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염법으로는 균역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 중국에서 소금을 독점하는 법과 비교하면 맑은 바람이 온 세상을 시원하게 할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상평의 정사는 왕자가 귀하게 여기는 바로서, 소금과 오곡(五穀)을 가르지 않는다. 유안이 상평염법을 마련해서 나라 용도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곤궁하고 급한 상황을 펴지게 하므로 상하가 편리함을 일컬었고, 역사책에서도 좋게 일컬었다. 그때에는 관에서 구워서 관에서 팔 경우에도 오히려 편리하다고 일컬었는데 하물며 백성이 굽고 관에서 판매하는 경우에 있어서랴?




다산은 백성을 위한 염법이라면 강하게 추진하여 세심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다산은 소금 제도에 대해 여러 곳에서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지만, 그의 제안은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술은 어찌하여 좋은가 누룩 섞은 탓이로다

국은 어찌하여 좋은가 염매(鹽梅) 탄 탓이로다

이 음식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 하리라


윤선도(尹善道), <초연곡(初筵曲)>

윤선도의 <초연곡>은 잔치를 시작할 때 부르는 노래다. 술과 국을 만들 때에 거기에 알맞은 재료를 통해서 만든다는 뜻을 알면 만수무강할 것임을 노래하였다. 술은 어찌하여 좋은가? 누룩을 섞은 탓이다. 국은 어이하여 맛이 좋은가? 소금을 타서 맛을 낸 탓이다. 이 음식의 원리를 알면 나라를 다스림에 만수무강하리라. 여기서 ‘좋은 술과 국’이 나라가 태평한 상태를 가리킨다면, ‘누룩’과 ‘염매’는 임금과 신하가 제각기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조는 나라가 오래도록 번성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서경(書經)]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는 짐의 뜻을 가르쳐다오. 만약 술과 단술을 만들거든 그대가 누룩과 엿기름이 되고, 만약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다오(爾惟訓于朕志 若作酒醴 爾惟麴糱 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다. 소금에는, 모든 맛이 다 들어 있다.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 것과 신 것에 소금을 치면 더 달고 더 시어진다.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맛을 변화시키니, 이는 소금에 포함된 미네랄이나 아미노산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조화다.

소금은 생명이다. 사람은 음식을 안 먹고도 일정 기간 동안 살 수 있지만 숨을 쉬지 않거나 소금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소금은 단순한 염분이 아니라 생명을 조화시키는 물질이다. ‘소금은 몸에 나쁘다’는 편견은 정제염이라는 염화나트륨 덩어리를 섭취하는 데서 발생한 비극이다. 바닷물은 그 자체가 미네랄의 보고이다. 바람과 햇빛과 대지가 고루 익힌 바닷물의 결정인 소금은 갖가지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다. 우리의 천일염은 태양과 바람, 그리고 바닷물이 만나서 느리게 익어가는 착한 소금이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 맛은 곧 소금 맛이다. 적당한 염도의 짠맛을 내어서 음식 고유의 맛을 내게 하는 좋은 소금이야말로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727015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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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노래로 읽히는 우리 한시, 그 시정 속에 담긴 우리 선인들의 진실하고 소박한 심성을 느끼기 위해 시인의 마음과 솜씨를 살려 이를 현대 언어의 가락으로 살려 읽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저서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서늘하고 매혹적인 명품 한시와 옛 시인 마음 읽기], [영조어제 해제(英祖御製 解題)·5]와 [역사, 길을 품다](공저)가 있으며, 역서로는 [송천필담](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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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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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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