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그림을 향유하는 조선의 여인들 - 그녀들은 왜 그림을 통해 삶을 기록하려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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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1회 작성일 16-02-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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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여인들의 일상, 소설 그리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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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윤덕희(尹德熙), 〈독서하는 여인〉
18세기, 비단에 담채, 20×14.3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윤덕희의 아버지 윤두서가 중국 화본(畵本)을 보고 그린 〈미인독서도〉의 조선식 번안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그림 속 화재(畵材)의 조선식 변용만큼이나 여성의 글 읽기와 관련한 조선의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힌다.작품 보러가기


조선의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특히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직접적인 생산 활동에 바치지 않아도 되었던 상층 사대부집 여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 이상의 다채로운 문화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소박한 궁금함은 ‘기록의 나라’ 조선이 남긴 무수한 문헌 속에서도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그 광활하고도 세세한 기록들에서 조선 여인의 일상을 재구(再構)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성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와 금기의 서술이 당장 우리 눈앞을 가득 채운다. 따라서 그 너머에 있는 그들의 생활 문화에 다가서기가 참 어렵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는 위대한 여인이 몇몇 있다. 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과 김호연재(金浩然齋), 성리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이들은 사실 조선 사회가 여성의 할 일이 아니라고 규정한 일에 몰두했다. 그 당시 예외적인 여러 조건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래서 조선의 특별한 여인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혹 이 특별함의 이면에는 글 읽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렸을 여인들의 생활 문화가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옛 여인들이 여가 시간에 누린 문화생활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소설이다. 특히 조선후기 상층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은 대하소설이라고 할 만한 서사적 편폭(篇幅)과 분량을 가진 한글 장편소설을 탐독했다. 이들에게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책 이상의 교양서적이었다. 옛 여인들은 소설을 통해 유교 이념을 배우고 상층의 문화와 교양을 체험했다. 소설을 거짓말이라 여겨 부정하는 중세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사대부집 여인들이 긴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소설을 읽고 소설책을 유산처럼 자식들에게 남겨준 데는 이 같은 현실적 효용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나’를 지키는 힘 – 소월영




17세기 한글 대하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소현성록(蘇賢聖錄)]에는 불행한 결혼 생활 탓에 친정살이하는 소월영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남편과의 불화, 그리고 여기에 촉매 역할을 하는 첩 때문에 소월영은 정실부인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핍박의 세월을 지낸다. 그 때문인지 소월영은 대부분의 시간을 친정에서 보내며 오히려 여유로운 일상을 누리는데, 여가 활동의 핵심이 바로 그림 그리기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소월영은 한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다. 그녀는 개인 서실 ‘선적루’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이 궤짝에 가득했다.

소월영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가까이는 예쁜 조카들부터 세상 만물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는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그림으로 포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편은 정실부인인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타박한다. 남편의 총애를 믿는 첩조차 감히 자신을 찾아와 죄를 따지며 매질까지 하려 든다. 소월영은 이 둘의 패행(悖行: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두고두고 세상에 전해질 이야깃거리가 될 만하다 여겨 그림을 그려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 그림을 마주한 남편은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기막힌 결혼 생활의 실상은 소월영이 처첩 갈등이라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조카며느리를 위로하는 중에도 드러난다. 이미 결혼했는데도 황제의 명령으로 공주와 강제 혼인한 조카는 여전히 첫 부인을 지극히 사랑하여 공주의 불같은 질투심에 기름을 끼얹는다. 조카의 일방적인 사랑과 그로 인한 공주의 핍박 탓에 조카며느리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 순간 소월영은 자신이 했던 것처럼 그저 재미있게 웃으며 공주가 하는 짓을 구경이나 하라고 충고한다.

일상의 기록으로서 소월영의 그림 그리기는 자족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소월영은 그림을 통해 남편의 진심 어린 개과를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모욕과 고난의 현실로부터 한발 물러나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편과 첩의 패행을 남의 일인 양 ‘구경’하며 ‘웃기’까지 할 수 있었고, 이제 비슷한 처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조카며느리에게도 그처럼 ‘재미있게 웃고 구경하며 근심을 풀라’고 충고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전소설에서 처첩 갈등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건 유형이다. 그런데 소월영처럼 대처하는 여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웃어넘기는 태도가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서 자결로 끝을 맺는 대다수의 여성과 견주어보면 소월영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여성이다. 소설 안에서 이 저력은 그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성찰한 데서 추동(推動)된 힘이다.



그림으로 삶의 순간순간을 남기다 – 박 부인과 유필염 모녀




19세기에 널리 읽힌 [유이양문록(劉李兩門錄)]에는 여성들의 그림 활동에 대한 또 다른 양상이 보인다. 작품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는 유씨 가문의 어머니 박 부인은 한가한 때 딸과 며느리에게 바둑을 두어보라고 권한다. 간간이 다투며 승부를 겨루는 모습에 흐뭇해하던 중 때마침 남편과 아들도 들어와 자리를 함께한다. 딸이 오빠에게 새언니 편을 들지 말고 자기편을 들라 하지만 내리 세 판을 지자 오빠가 새언니 편만 든다며 투정을 부리는 가운데 바둑 두기는 계속된다. 온 가족이 모인 정겨운 상황을 맞아 박 부인은 그동안 숨겨둔 그림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

박 부인은 문득 비단 한 필을 내놓고 가족이 모인 이 단란한 장면을 그린다.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 하여 결혼 후 3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박 부인이 지극히 사소할 수도 있는 이런 일상의 순간을 그리게 된 이유는 작품 초반 권력 다툼 과정에서 죽어버린 여섯 아들에 대한 그리움, 더불어 그 아들들과의 행복했던 때를 남겨두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 그림을 계기로 박 부인의 딸 유필염도 그림을 익힌다. 어머니의 재주를 이어받아 그림에 상당한 솜씨를 발휘하는 유필염 역시 혼인 후에는 그림 그리기를 삼갔다. 그런 그녀가 붓을 잡게 된 것은 고난에 처한 자신을 걱정할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자신의 안부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유필염은 혼인 후 남편의 둘째 부인과 시누이의 모해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벽운산으로 은신한다. 그리고 벽운산 일대와 자신이 머무는 암자를 그려 어머니에게 보낸다. 벽운산과 그 산중에 머무는 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보고 어머니는 딸을 마주한 듯 반기며 기뻐한다. 유필염의 이 그림은 자신의 무사함을 고하는 편지글보다 더 적실(的實: 틀림이 없이 확실함)하다.

유필염이 그림을 그린 주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울적함을 풀기 위해서이다. 벽운산 그림에 대해 그곳 암자의 법사가 훗날 남편이 개과하여 이 그림을 보게 되면 눈물을 흘릴 것이라 하자, 유필염은 그저 한때 울적함을 없애고자 한 것일 뿐 구차하게 남편의 돌아봄을 노린 것이 아니라 한다. 마음에 맺힌 것을 풀고자 그렸을 뿐 이후에 대한 기대나 의도는 없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필염이 옛 자취로 남기겠다며 그림에 글까지 써두는 것이나 오빠가 이 그림을 족자로 만들어 보관하게 되면서 이후 남편의 진심 어린 후회를 불러오는 장면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는다.

마음에 맺힌 것을 그려내면서도 거기에 거는 기대는 없다는 부정의 말, 그러나 그림을 통해 어느 순간을 영영 잊히지 못하도록 하는 부정의 부정, 나아가 어머니에 대한 위로와 효성 때문에 그림 그리기가 불가피했다는 명목에 이르기까지 유필염의 벽운산 그림은 중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유필염의 그림 그리기는 그 시대 여성의 말하기, 글쓰기만큼이나 매서운 통제의 시선이 담긴 자기표현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림은 내 삶의 결정적 승부수 – 양연화




[유이양문록]의 양연화는 하늘이 점지해준 자신의 남편감에게 둘의 첫 만남을 그림으로 그려 보낸다. 그녀는 자신의 천생연분을 알려주는 꿈을 꾼 후, 봄 풍경 구경에 나섰다가 우연히 자신의 후원에 들게 된 남편감을 만난다. 외간 남성과의 마주침에 당황해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첫눈에 천생연분을 직감한 양연화는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만남의 장면을 그려 보냈던 것이다.

이야기의 복선과 진행에 따라 이 그림은 둘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매개로 작용한다. 명민한 재능과 상황 판단을 온전히 담고 있는 양연화의 그림은 여성이 새장 안의 새처럼 규방 안에만 갇히지 않고 그 바깥으로 비상하려는 꿈을 은연중에 함축하고 있다.



일상의 그림으로 남겨두는 조선의 기록화 문화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는 특별한 행사나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두는 기록화가 많다. 과거 합격, 출세와 승진, 생신과 회혼 등 경사를 기념하기 위한 사가기록화(私家記錄畵)는 특히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왕성하게 제작되었다. 이런 그림들은 집안 대대로 전승되며 여러 사람의 시문(詩文)을 받는 데 이용되었고, 그렇게 해서 거질(巨帙: 매우 많은 권수로 이루어진 책)의 가전보첩(家傳寶帖)으로 바뀌어갔다. 가문의 위세와 영광을 기념하고 과시하기 위해 보첩은 더 커지고 풍성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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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작자 미상, 〈기영회도(耆英繪圖)〉
16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163×12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물 1328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만 70세 이상 원로대신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그려진 이 그림은 참석자 중 한 사람인 노수신(盧守愼)의 후손가에서 보관해오던 것으로, 노수신을 비롯한 7인의 참석자 명단과 이들의 자필 찬시(讚詩) 등이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고전소설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화법(畵法)을 익히는 인물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이들의 그림 활동이 이야기의 전개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이러한 인물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 데는 사가의 기록화 문화가 배경이 되었을 듯하다. 실제의 기록화가 전문적인 화가에 의해 제작된 경우가 많다 할지라도 사가의 기록화 문화가 소설에 영향을 끼쳤을 여지는 적지 않다. 대하소설을 향유한 계층이 주로 상층 사대부 집안이었음을 떠올려보면, 가문의 영광과 기록화의 상관성이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가문의 기록화와 가문의 영광이 연결되는 문화에서 여성들 또한 자연스럽게 이런 연관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림 그릴 줄 알고, 그림을 그려 남겨둔다는 행위는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림 그리기는 상층 가문의 욕망을 대변하는 문화적 상징과 코드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드라마가 귀공자나 기업가를 등장시켜 고급스러운 장소나 대저택의 정원을 포착하는 동기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소설을 향유했던 상층 가문의 여성들이 그림을 통해 소설 안에서 혹은 소설 밖에서 자신의 삶을 기록하려 했던 욕망, 그것은 소설과 소설 바깥의 현실이 동반한 문화적 흔적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중국소설 삽화를 체험하는 또 하나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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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청나라 초기의 필연각(筆煉閣)이 엮어 쓴 [오색석(五色石)]의 삽화 가운데 한 장면.
<출처: 주심혜(周心慧) 엮음, [고본소설판화도록(古本小說版畵圖錄)](수정증보본) 제5책(북경: 학원출판사, 2000), 110면.>


소설 속의 그림 그리기에 영향을 준 문화적 요인으로 소설 속의 삽화를 하나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양연화가 소설 속에서 그려놓은 그림의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장계성이 열 걸음 정도 들어가 (……) 소나무 아래 숨어 다시 보니 화려한 차림새의 한 미인이 시녀와 함께 난간에 앉아 있었다. (……) 그 미인과 눈이 마주치자 미인이 깜짝 놀라 들어갔다. (……) 양연화가 문득 한 꾀를 내어 (……) 평생의 재주를 펼쳐 한 수 그림을 그리고 족자를 만들었다. 자기 집 후원을 그린 뒤, 그 가운데 온갖 기이한 꽃과 풀을 그렸다. 한편에는 영롱한 채단이 표묘히 서 있는데 누각 문을 열어두고 자기가 시녀 부용과 더불어 옥난간에 의지해 풍경을 구경하는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서편 소나무 아래 한 신선 같은 남자가 훔쳐보는 모습, 그리고 자기가 놀라 걸음을 돌이키며 들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하여 그림인 줄 깨닫지 못할 지경이었다.


- [유이양문록] 권51

장계성의 시선으로 둘의 만남을 묘사한 부분과 양연화가 그린 그림에 대한 묘사이다. 후원 건물을 두고 가운데로는 풀과 나무가 있다. 누각 문밖으로는 양연화가 시녀 부용과 함께 시냇가 난간에 의지해 앉아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 서쪽 소나무 아래에서 한 남성이 자신을 훔쳐보자 이에 놀란 양연화가 몸을 돌이킨다. 세 인물과 배경에 대한 이 같은 작품의 느낌을 염두에 두고 오른쪽의 그림(그림 3)을 살펴보자.

등장인물 셋을 중심으로 한 구도와 핵심 배경 설정이 작품의 서술과 거의 일치한다. 이 그림은 청나라 초기에 필연각(筆煉閣)이 편술(編述: 엮어서 지음)한 [오색석(五色石)]의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오색석]은 중국 화본소설의 하나로, 조선후기 화원 김덕성 등이 그린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1762)과 윤덕희의 〈소설경람자(小說經覽者)〉(1762)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작품이 조선에 일찌감치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유이양문록]은 기존 소설의 작중 인물을 차용하기도 하고, 당시 유행했던 금강산 와유(臥遊)의 정보를 담고 있기도 하다. 당대 문화에 대한 여러 갈래의 지식과 관심이 적극적으로 수용된 작품이 곧 이 작품인 것인데, 그런 시선에서 앞의 그림과 소설의 묘사가 유사함을 고려하면 중국소설의 영향 또한 배제할 수는 없는 셈이다.



옛 여성의 삶과 그림 그리기 소재가 남긴 화두




대부분의 고전소설과 마찬가지로 한글 대하소설의 작가 또한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희소하나마 대하소설의 작가로 여성이 언급된 경우가 더러 있다. 조선시대, 그것도 소설이라는 ‘천한’ 장르에서 여성이 이름을 남기거나 그 존재적 자취를 남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열악한 시대의 조건에서 새어 나온 이 파편적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겹겹의 베일을 뚫고 살짝살짝 드러나는 옛 여인들의 그림 그리기 소재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손짓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만사,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현실에 없는 것을 소망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일진대, 옛 여인들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현실의 그것만이라 여길 수는 없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7312025.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서정민 | 홍익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조선후기 한글 대하소설 〈명행정의록 연구〉(2006)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고전 대하소설을 대상으로 한 문화사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 한글 대하소설 속 여성의 한시, 그림, 바둑 문화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발행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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