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취선(醉仙) 이백을 그리다 - 술과 달, 방랑의 천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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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9회 작성일 16-02-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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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물에게는 신화가 따른다. 신비로운 출생과 죽음. 탁월한 재능과 비범한 기행(奇行). 갖가지 미담과 일화가 덧붙여지며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탄생한다. 술과 달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은 이 모든 요소를 갖춘 인물이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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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작자 미상, 〈이백 초상〉
[역대 도상 화첩(歷代圖像畵帖)], 조선후기, 종이에 채색, 26×18cm, 개인 소장.


이백의 생애는 대부분 논란이 되고 있어 실상을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천재 시인, 의협가, 방랑자, 주광(酒狂), 민의(民意)를 살피는 관리, 충군(忠君), 신선(神仙) 등 복합적인 캐릭터의 인물로 추앙되어왔다. 이백의 독특한 페르소나(persona)는 탈속적(脫俗的)이고 자유분방한 인간적 기질, 낭만적인 시풍(詩風), 사후(死後)의 윤색(潤色) 작업이 종합된 결과이다. 역사적 인물이 후대로 갈수록 미화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백은 실상을 넘어선 새로운 성격과 다양한 면모를 부여받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위대한 중국 시인, 이백은 조선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 이 글은 이백의 예술적 초상이 조선시대 그림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백, 고력사(高力士)에게 자신의 신을 벗기게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중기의 문인화가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선객도(仙客圖)]라는 흥미로운 작품이 전한다. 표제에는 ‘음중팔선지도(飮中八仙之圖)’라고 되어 있으나 근래 한 연구에 따르면 이백의 전기(傳記)를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는 두루마리로 장황(裝潢: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를 꾸미어 만듦)이 되어 있지만 원래는 화첩 형태로 그려진 작품이다. 여기에는 아홉 장면이 실려 있는데, 출사(出仕)하기 전후의 모습을 그린 〈죽계육일(竹溪六逸)〉과 〈채석기야유(采石磯夜遊)〉를 제외하면 나머지 일곱 장면에는 현종의 부름을 받고 1년(742~744) 남짓한 기간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낸 장안(長安) 시절의 일화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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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전(傳) 이경윤, 〈역사탈화(力士脫靴)〉
[선객도(仙客圖)], 조선중기, 종이에 수묵, 30.5×2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마지막에 실려 있는 〈역사탈화(力士脫靴)〉이다.(그림 2) 사모에 관복 차림을 한 이백은 서탁(書卓)에 살짝 기댄 채 돈(墩)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뻗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다.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이백의 신발을 벗기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수염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환관임이 분명하다. 이 흥미로운 장면은 술에 취한 이백이 당시 최고의 권세가였던 환관 고력사(高力士, 684~762)에게 자신의 신을 벗기게 했다는 일화를 그린 것이다. 이 대담무쌍한 행동이 실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널리 회자되며, ‘불의에 항거하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역사탈화’ 고사(古事)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당나라 서예가 이양빙(李陽冰)은 이백이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인물로, 이백의 문집을 최초로 간행하고 서문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이백의 집안 내력과 장안 생활, 장안을 떠난 경위와 술과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기질을 비교적 차분히 전달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현종이 손수 국 맛을 본 후에 이백에게 먹게 했다”는 ‘어수조갱(御手調羹)’ 일화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역사탈화 고사는 이백 사후인 중당(中唐, 766~835) 시기의 시인 장호(張祜)의 시에 처음 보인다. 이후 당나라 필기소설 [유양잡조(酉陽雜俎)]와 위예(韋叡)의 [송창록(松窗錄)]을 인용한 [태평광기(太平廣記)](977)에 수록되어 각각 [구당서(舊唐書)](945)와 [신당서(新唐書)](1060)에 포함된다. 특히 [태평광기]를 인용한 [신당서]에는 고력사가 자신에게 신을 벗기게 한 이백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시를 트집 잡아 양귀비(楊貴妃)를 격노케 했으며, 현종이 이백에게 관직을 내리려 할 때면 귀비가 이를 저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실재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의 사망 이후부터 송대까지 다분히 소설적인 상상과 극적 장치에 의해 과장된 이야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현종이 이백의 얼굴을 씻기고 붓을 잡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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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전(傳) 이경윤, 〈이수쇄면(以水灑面)〉
[선객도(仙客圖)], 조선중기, 종이에 수묵, 30.5×2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곱 번째 장면 〈이수쇄면(以水灑面)〉은 현종이 술에 취한 이백을 불러 얼굴을 씻기고 붓을 잡게 해 새로운 악부(樂府)를 얻었다는 일화를 담고 있다.(그림 3) 화면 오른쪽의 병풍 앞에 반가(半跏: 반가부좌)를 한 인물이 현종이며, 사모에 관복 차림의 이백은 시동(侍童)의 부축을 받으며 술에 취한 듯 눈을 감고 있다. 그 사이에는 두 명의 환관이 각각 버드나무 가지와 능형반(菱形盤)을 들고 있는데, 청정(淸淨)을 의미하는 버드나무 가지는 그릇에 담긴 물과 함께 세면(洗面)이라는 동작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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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황응신(黃應紳) 각(刻), 〈이백〉
[감감재주패(酣酣齋酒牌)], 만력 연간(萬曆年間, 1573~1620).


이 이야기 또한 후대의 기록인 양(兩) 당서와 [태평광기]에 수록된 내용을 도해(圖解)한 것이다. 황제의 부름을 받는 궁정 시인의 신분으로 광음(狂飮)을 일삼는 이백의 행위는 범상치 않아 보인다. 술에 취해서도 현종을 흡족게 하는 글을 단번에 지어내는 것도 범인(凡人)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다. 따라서 이백은 전통적인 규범을 무시하는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이며,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신안(新安)의 각공(刻工) 황응신(黃應紳)이 만력 연간(萬曆年間, 1573~1620)에 판각한 [감감재주패(酣酣齋酒牌)]의 〈이백〉과 유사한 면이 발견되어 흥미를 끈다.(그림 4) 현종 옆의 가리개를 든 두 인물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구도에 인물의 자세 또한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다른 장면, 예컨대 〈주팔선인(酒八仙人)〉과 〈채석기야유(采石磯夜遊)〉[부이등주(扶以登舟)로 보기도 함]에서도 이 판화와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선객도]가 이경윤의 전칭(傳稱: 누구의 작품으로 전하여 일컬어짐) 작품인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감감재주패] 또는 이런 유(類)의 중국 출판물이 참고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명대 후기의 인물화와 인물 판화 가운데 가장 유사한 도상(圖像)을 보인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조선초기에도 이백의 일화는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성현(成俔, 1439~1504)은 〈이적선 백련지 승주도(李謫仙白蓮池乘舟圖)〉를 감상하고 그 모습을 생생히 묘사했다. 일부를 옮겨본다.







얼음 대접에 우유같이 엉긴 냉수水寒氷盌凝似酥
취한 낯에 뿌리니 정신이 되살아났네.灑頮醉面精神蘇
붓을 들어 ‘청평사’ 열 수筆底十首淸平詞
해타가 일일이 주옥을 잇는구나.咳唾一一聯珠璣
 
당 앞의 만 손가락이 사죽을 연주하여堂前萬指調絲竹
먼저 시를 아뢴 뒤에 새 곡 올리네.先奏詩章上新曲
지존이 빙그레 금포를 하사하니至尊含笑賜錦袍
신 벗기고 창피해하는 고력사의 꼴.脫靴愧恥將軍高
 
(……)
 
어떤 이가 신필로 이 그림을 그렸는가?誰人描寫妙入神
척소 안에 당시 진경을 환같이 그려냈네.尺素幻出當時眞

- 〈제 이적선 백련지 승주도(題李謫仙白蓮池乘舟圖)〉, [허백당 시집(虛白堂詩集)] 권7.


이백, 화음(華陰)의 현령(縣令)을 꾸짖다




성현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백화음도(李白華陰圖)〉라는 작품도 언급하여 눈길을 끈다. 그는 당시 유 판서(柳判書) 집에 소장되어 있던 옛 그림 24폭 가운데 이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이백화음도〉는 어떤 그림이었을까? 현재까지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발굴되지 않아 회화적인 표현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일화는 원나라 때 신문방(辛文房)이 저술한 [당재자전(唐才子傳)](1304)에 수록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현종에게 황금을 하사받고 장안을 떠난 이백은 사방을 부유(浮遊)하다가 화산(華山)을 오르고자 한다. 그는 술에 취한 채로 나귀에 올라 화음현(華陰縣)의 관아 앞을 지나는데, 그곳 현령은 이백을 알아보지 못하고 노하여 그를 관청 뜰로 끌고 간다. 그에게 나귀에서 내리라고 명하며 이렇게 소리친다.



“너는 어떤 인사(人事)이기에 감히 무례하게 구느냐?”



이백은 글을 써서 보여주었는데 글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일찍이 내가 취하여 토하였을 때 임금이 직접 수건으로 닦아주었고 임금이 손수 내 국에 간을 맞추었으며, 양귀비가 나를 위해 벼루를 받쳐 들었고, 고력사가 나를 위해 신을 벗겨주었다. 천자(天子)의 문 앞에서도 말을 탄 채 다니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 화음현(華陰縣)에서는 나귀조차 타지 못한단 말인가?”



현령은 깜짝 놀라 그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사과한다.



“한림(翰林)께서 이곳에 오신 것을 몰랐습니다.” 이에 이백은 한참을 웃고는 떠나버렸다.


이백의 오만방달함과 그의 명성을 극대화시킨 이야기 구조로 다분히 후대에 각색된 일화이다. 이외에도 [당재자전]에는 붓 끝에서 꽃이 피는 꿈을 꾸고 천재성이 섬일(贍逸)해졌다는 ‘필두생화(筆頭生花)’를 비롯해 갖가지 미담으로 채워져 있다.

이백의 일화가 그려진 기록은 고려 말부터 확인되며, 그의 시는 청자(靑磁)의 장식 문양으로 사용될 정도로 고려시대에 애독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이백의 일화와 시문(詩文)을 주제로 한 작품이 크게 늘어났는데, 아마도 그의 시집 [분류 보주 이태백 시(分類補注李太白詩)]와 산문집 [당한림 이태백 문집(唐翰林李太白文集)]이 세종 연간에 간행된 것과 관련 있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에 [당재자전] 같은 중국 시인들의 전기집(傳記集)이 애독되면서 다양한 화제(畵題)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채석강에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다




이백의 일화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아무래도 그의 죽음이다. 술에 취해 선성(宣城)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도 하고, 채석강(采石江)에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심지어 물에 빠져 죽은 뒤 고래를 타고 승천(昇天)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명 말기에 간행된 [열선전전(列仙全傳)](1600)에서는 신수(神獸)를 타고 승천하는 신선(神仙)으로 입적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화원화가 양기성(梁箕星, ?~약 1755)이 그린 〈채석착월도(采石捉月圖)〉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물속에 빠지려는 순간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그림 5) 흐릿한 산수 너머로 떠 있는 달과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 두 팔을 내밀고 물에 떨어질 듯한 이백, 깜짝 놀라 당황한 시동의 모습까지 해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기에 그려진 것처럼 이백은 대부분 사모를 쓴 관복 차림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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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양기성(梁箕星), 〈채석착월도(采石捉月圖)〉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 조선후기, 종이에 채색, 38×30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고독과 낭만을 상징하는 달은 이백을 표상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달을 벗하며 지은 여러 명작 가운데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읽어보자. 부분을 옮겨본다.







꽃숲 속에 한 동이 술을 두고서花間一壺酒
벗도 없이 나 홀로 권하고 마시다獨酌無相親
잔을 들어 밝은 달 청하여오니擧盃邀明月
그림자와 너와 나 셋이로구나.對影成三人
달이야 술 마실 줄 알 리가 없고月旣不解飮
그림자 하릴없이 나를 따르네.影徒隨我身

꽃향기에 취해 홀로 술을 마시며, 지기(知己)가 없는 쓸쓸함을 달과 달빛에 비친 그림자를 벗 삼아 달래는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물상(物象)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마음을 달에 기탁했던 그였기에, 이승의 삶이 달과 함께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그럴싸해 보인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병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이양빙의 말은 위대한 영웅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평범하게 읽힌다. 이렇듯 위인의 신화는 죽음에서 빛을 발하는 법인가 보다.



음중팔선도를 보고 글을 짓다




이백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나누었던 두보(杜甫, 712~770)는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그를 지독한 음주 애호가로 묘사했다. 음주(飮酒)는 문인들에게 호연한 기운을 고취시키고, 영감을 자극하며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는 매개물 역할을 한다. 오랜 전통을 갖는 기주(嗜酒: 술 마시기를 좋아함) 경향은 죽림칠현(竹林七賢), 도연명(陶淵明) 등 수많은 음주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180여 수의 음주시(飮酒詩)를 남긴 이백은 광음(狂飮)을 일삼은 ‘주광(酒狂)’으로서 가히 독보적이다.

1790년 3월, 정조는 당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던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등을 불러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를 보고 글을 지어 올리라고 명한다. 그리고 친히 글을 읽고 성적을 매겨 상을 내린다. 이때 정조와 세 사람이 보았던 작품은 누가 언제 어떻게 그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유득공의 서문에 근세의 화가가 그렸다는 언급이 있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장원(壯元)을 한 이덕무의 글은 그림에 묘사된 인물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한다. 이백을 그린 여섯 번째 장면은 이렇다.

푸른 벽돌 언덕 깎은 듯하고 파란 물결은 넘실대는데 크고 붉은 배 하나가 높은 버들 그늘로 빗겨 든다. 구름 깃발은 펄럭이고 별은 드물게 깜박이는데 소용(昭容: 후궁의 품계 중 하나)과 황문(黃門: 환관)은 계속해서 재촉한다. 오사모 높이 쓰고 거북 도장 끌었으니 신수는 훤한데 손을 짚고 멍청하니 머리 조아리며 앉아 있네.


第六. 碧甃岸如削 綠波盈盈 大紅船橫 入高柳陰. 雲麾星罕 飛揚掩映 昭容黃門 催呼絡續. 岸烏紗拖金龜 神彩煥發 據地瞢騰 稽首而對.

산수를 배경으로 한 인물화이며, 술에 취해 땅에 주저앉은 이백과 그를 부르러 온 환관이 함께 그려진 작품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림은 모두 여덟 폭의 비단 족자라고 하여 음중팔선을 각각 한 폭씩 묘사한 8폭 작품으로 추정된다.

정조 연간에 활동한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와 그의 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음중팔선 가운데 각각 하지장(賀知章)과 소진(蘇晋)을 그렸지만 이백을 그린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본 취태백상(醉太白像)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의 아들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김기서(金箕書, 1766~1822)가 당인(唐寅, 1470~1523)의 〈음중팔선도〉를 소장한 것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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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우구(尤求), 〈취태백도(醉太白圖)〉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 16세기, 종이에 수묵, 31.4×228.9cm 중 부분, 소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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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김득신(金得臣), 〈부취도(扶醉圖)〉
조선후기, 종이에 수묵담채, 61×11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16세기에 소주(蘇州) 지역 화단에서는 당인, 구영(仇英), 우구(尤求) 등이 음중팔선도의 새로운 전형을 마련한다. 인물을 중심으로 음중팔선을 한 화면에 그리던 방식은 산수 배경을 활용하여 각 인물을 독자적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또한 “이백은 한 말 술에 시 백 편을 짓고는 장안의 시장 술집에서 잠잔다(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는 시구에 충실하게 주막에서 쓰러져 잠든 모습으로 그려지던 것은 시동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려 하거나 걸어가는 모습으로 표현된다.(그림 6) 따라서 정조와 세 검서관이 감상한 그림은 우구의 작품에 산수 배경이 보다 강조된 장면이었을 것이다.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부취도(扶醉圖)〉 역시 환관이 생략되긴 했으나 사모에 관복 차림을 한 인물과 그를 부축해 가는 동자의 모습은 명 말기에 확립된 도상(圖像)을 따른 예이다.(그림 7)



중국 출판물, 이백의 이미지를 만들다




19세기에는 ‘주중(酒中)의 신선’ 이백의 모습이 어떻게 변모했을까? 유숙(劉淑, 1827~1873), 백은배(白殷培, 1820~1901),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은 대체로 바닥에 주저앉아 환관의 재촉을 받거나 동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을 여러 가지로 변주한다. 〈음중팔선도 서(飮中八仙圖序)〉를 짓기 위해 감상했던 작품 계열을 따르면서 배경을 간략히 하거나 서탁(書卓), 술동이 같은 기물(器物)을 적절히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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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유숙(劉淑), 〈취태백도(醉太白圖)〉
[백납도8곡병(百衲圖8曲屛)], 19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20~30cm 내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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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이청련(李靑蓮)〉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4집, 1818년.



유숙의 〈취태백도(醉太白圖)〉는 환관과 시동이 모두 생략되고 술동이에 기대앉은 이백의 모습만 간략히 그려져 있다.(그림 8) 우구의 작품(그림 6)이 단순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1818년에 간행되어 당시 조선에 소개되었을 법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4집 [가경판(嘉慶版)]의 이백 상과 거의 유사한 도상을 보여 흥미롭다.(그림 9) 이 판화는 양주(楊州)에서 초상화의 명수로 활약한 정고(丁皐)가 편찬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자원화전] 초집(初集), 2집, 3집과는 무관하게 그 이름만 차용한 위탁본(僞託本)이다. 청대 인물 판화를 집대성한 본격적인 회화 교본으로, 이백을 그린 장면은 청초(淸初)에 간행된 [무쌍보(無雙譜)](1690)에 전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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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지운영(池雲英), 〈취태백도(醉太白圖)〉
1917년, 종이에 수묵담채, 24×18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조선말기와 근대기에 활동한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은 시동의 부축을 받으며 엉거주춤 들려 있는 이백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낸다.(그림 10) 오른쪽에는 두보의 시 구절까지 써 넣어 시의도(詩意圖)다운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19세기 후반에 상해에서 발간된 [점석재 총화(點石齋叢畵)](1885~1886)에 실려 있어 그가 이 화보를 참고한 것이 확인된다. 인물의 자세는 그대로 따르되 얼굴 표현에서는 자신만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晋, 1853~1920)의 작품이 보다 전통적인 도상을 따른 것에 비해 새로 유입된 중국 출판물을 적극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중국 시인 가운데 이백만큼 생애와 행적에 논란이 많은 인물도 드물다. 때론 과장된 일화와 황당한 이야기도 실재처럼 회자되며, 그의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술과 달, 방랑, 천부적인 재능, 용기, 오만, 좌절된 꿈, 도교. 이 모든 요소가 그를 중세적인 낭만성의 화신으로 자리 매겼다. 짧지만 강렬했던 관직 생활, 신비로운 죽음, 광음(狂飮). 이 특이한 삶의 궤적이 시인의 삶을 그림에 담게 했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7461373.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유순영 |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한국과 중국의 회화 교류에 관심이 많다. 그림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문화와 취향을 읽어내는 작업을 병행하려 한다. 〈이정직의 [석정가묵(石亭佳墨)]과 석인본 [개자원화전]〉, 〈이백의 이미지 유형과 이백 문학의 회화〉, 〈명대 후기 화훼원예취미와 화훼도권〉 등의 글을 썼다. 현재 명대 오파(吳派) 화풍과 조선시대 회화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발행201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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