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황제가 사랑한 강남의 맛 - 건륭제, 강남 요리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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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2회 작성일 16-02-0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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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杭州) 왕윤흥주루(王潤興酒樓)의 거지닭. 건륭제가 미복을 한 채 여행을 하다 성경(盛京: 현재의 심양(瀋陽))에서 맛보았다고 전한다. <제공: 정세진>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였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5)는 미복(微服: 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남의 눈을 피하려고 입는 남루한 옷차림)한 채 여행 중이었다. 건륭제와 제남(濟南)의 규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정체를 황제에게 알리지 못한 ‘백일홍〔紫薇〕’, 그녀를 도와주는 ‘제비〔小燕子〕’, 이 두 여인을 좋아하는 청년들과 함께였다. 황제의 여행단은 수레를 멈추고 야외에서 식사를 했다. 닭을 잡아 손질한 후 연잎에 싸고 진흙을 발라 달궈진 모래 속에 넣어 익혀 먹었다. ‘거지닭(叫花鷄: 거지〔叫花子〕들의 조리 방법을 본떠 만든 닭요리)’이라는 음식이었다.

드라마의 이 장면은 건륭제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여행’과 ‘음식’이다. 건륭제는 여섯 차례의 강남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님)에서 강남의 맛에 반했다.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강남의 맛을 강북으로 이식해 만주족의 음식과 한족의 음식이 융합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행과 음식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던 건륭제, 그의 식생활은 황제의 식단이 그대로 기록된 당안(檔案: 청의 정부 문서)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건륭제, 강남 가다




건륭제가 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내가 나라를 다스린 지 오십 년, 그 중에서 두 가지 큰 일을 꼽아보라면, 하나는 서부 변경을 안정시킨 일이고 하나는 남방 순행이다(予臨御五十年, 凡擧兩大事. 一曰西師, 一曰南巡)”라 했듯 그의 정치ㆍ경제ㆍ문화 노선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남방 순행이었다. 건륭제는 재위 16년(1751), 22년(1757), 27년(1762), 30년(1765), 45년(1780), 49년(1784)에 걸쳐 여섯 차례의 남순(南巡)을 했다. 그는 수도인 북경(北京)에서 출발해 산동(山東)을 거쳐 양주(揚州), 진강(鎭江: 장강 하류 지역), 소주(蘇州), 가흥(嘉興), 항주(杭州)까지 순수했는데 이중 양주, 진강, 소주, 가흥, 항주는 모두 강남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강남은 보통 장강(長江) 이남 지역을 지칭하지만, 양주의 경우 장강 이북임에도 불구하고 강남과 매우 인접해 있는 데다 같은 문화권역에 속하므로 넓은 의미의 강남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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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 당시 건륭제와 그 일행들이 탔다는 배의 모형이 왕윤흥주루에 전시되어 있다. 천 여 척의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길을 타고 오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제공: 정세진>


황제의 일행은 수도로부터 항주까지의 구간을 40개의 역으로 나누어 하루에 일정 거리만큼만 움직였으며 도중에 행궁 30곳을 두어 휴식했다. 당시 건륭제는 원칙적으로 자신이 가는 길〔御道〕을 정비하거나 건물을 새로 짓는 등의 일로 재원을 낭비하거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은 황제의 시찰에 앞서 ‘황제가 공식적으로는 원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이때 큰 역할을 한 이들이 소금 생산과 유통을 통해 중국 전체 염상들 중 가장 많은 부를 축적했던 양회염상(兩淮鹽商: 장강과 대운하 지역의 소금 상인)들이었다. 특히 양주 염상들은 양주 천녕사(天寧寺)와 고민사(高旻寺), 평산당(平山堂) 행궁의 건축과 조경 등에 돈을 쏟아 부었다. 첫 남순 때 건륭제가 지은 <평산당의 매화를 읊다(詠平山堂梅花)>라는 시의 자주(自註: 자신의 글에 스스로 단 주석)에서 “평산당에 이전에는 매화가 없었으나 내가 남순한다고 염상들이 돈을 들여 만 그루를 심었다.좋은 경치를 만들 뿐만 아니라 빈민들에게도 이익이 되겠기에 금하지 않았다(平山向無梅, 玆因南巡, 鹽商損資種萬樹, 旣資淸賞, 兼利貧民, 故不禁也)”라고 한 데서도 염상들이 황제의 여행단을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건륭제가 남방을 순시한 명분은 치수 문제를 해결하고 강남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는 데에 있었다. 그는 남방을 순행하면서 숨은 인재를 발굴해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는 한편, 곡부(曲阜: 공자의 고향)의 공자 사당〔孔子廟〕, 소흥(紹興)의 우임금 능묘〔禹陵〕, 강녕(江寧)의 명(明) 태조(太祖) 능묘에 배향하여 자신이 중화의 대통(大統)을 잇는 인물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역마살이 대단한 이 황제에게 남순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미식가 건륭제, 강남의 맛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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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당시의 건륭제. 청나라의 제6대 황제로, 재위 기간만 60여 년에 이르는 등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시와 서화를 좋아했으며 음식의 다양한 맛을 즐길 줄 아는 황제였다.





건륭제의 남순을 기록한 [남순성전(南巡盛典)]에 실린 평산당 전경. 건륭 36년에 양강총독(两江總督) 고진(高晉)이 건륭제의 행적과 시를 모아 편찬한 책으로 120권으로 이루어졌다. <출처: [中國清代宮廷版畫], 安徽美術出版社, 2002)




건륭제의 식생활은 그의 선조들과 달랐다. 할아버지인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의 경우 한 번의 식사에 한 가지 맛만 올라오면 되었다. 예컨대 닭고기면 닭고기, 양고기면 양고기를 먹지 이 두 가지를 한 상에 올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2~1735)의 식습관 역시 매우 소탈하여 정찬이라 할지라도 7~8가지 이상을 넘기지 않도록 했다. 이에 반해 건륭제는 정찬 때마다 40~50가지의 음식을 받았고, 남은 음식은 황후와 비빈, 신하들에게 하사해 자신의 호의를 표시하곤 했다. 대식가는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음식을 받아 다양한 맛을 즐길 줄 아는 황제였던 것이다.

그의 혀끝이 섬세했던 만큼 어차선방(御茶膳房: 황실의 일상적인 음식과 연회 음식 조리를 담당했던 관청)의 조리사들은 재료 선택에서부터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예를 들어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물의 경우 천하제일의 물만을 사용했다. 자금성에 있을 때는 ‘천하제일의 물〔天下第一泉〕’이라고 건륭제가 직접 감별한 옥천(玉泉)의 물을, 강남 순행 때는 진강의 중냉천(中冷泉)과 항주 호포천(虎跑泉: 당나라 승려 성공선사(性空禪師)가 항주의 사찰에 머물 때 호랑이가 와서 파주었다는 유명한 샘)의 물만을 썼다. 건륭제는 특히 호포천 물로 우려낸 서호용정차(西湖龍井茶: 항주 서호 일대에서 생산되는 녹차)를 매우 좋아했다.

건륭제를 따라 어차선방의 조리사〔廚役〕도 남하했다. 그들은 식재료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젖소 75마리, 양 1000여 마리까지 배에 실었다. 황제는 하루에 정찬을 두 끼, 그 사이에 간식을 두 번 먹었는데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먹는 조선(早膳: 아침식사)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먹는 만선(晩膳: 오후 식사), 그 사이에 먹는 조점(早點: 오전 간식)과 만점(晩點: 저녁 간식)이 그것이다.([양길재총록(養吉齋叢錄)]) 남순 때에도 황제의 식사는 북경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가짓수대로 차려졌다. 다만 그 장소만 꽃밭, 염상의 정원, 바닷물이 거꾸로 밀려오는 전당강(錢塘江, 전당강에서는 하루에 두 번 바닷물이 강 쪽으로 역류한다)이 내려다보이는 곳 등으로 다양해졌을 따름이다.

건륭 30년 2월 15일 묘시, 건륭제는 수로를 유람하며 선상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접이식 식탁을 펴고 ‘뜨거운 솥에 담아낸, 볶은 닭고기가 들어간 가정식 모듬 숙회(炒鷄家常雜膾熱鍋)’, ‘실처럼 잘게 찢은 오리 고기가 어우러진 제비집(燕窩鴨絲)’, ‘양고기 편육(羊肉片)’ 등의 음식을 받았다. ‘뜨거운 솥〔熱鍋〕’은 숯을 넣어 열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식기로 만주족 특유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리 고기는 중국 남부 지방의 대표적 식재료로서 본래 유목 생활을 한 만주족이 즐겨 먹던 음식이 아니었다. 만주족이 가장 좋아한 고기는 뭐니 뭐니 해도 양고기였다. 따라서 이날 아침 식사는 만주족의 일상적 식사에 남방의 식재료가 가미된 것이었다. 그러나 건륭제가 반한 것은 어차선방에서 바친 음식들이 아니었다. 소주직조(蘇州織造: 소주 지역 견직물의 생산과 진상(進上)을 담당했던 오품(五品) 관리인데, 실제 권한은 일품(一品) 관리와 다름없었다)인 보복(普福)의 집에서 일하는 조리사들이 만든 ‘찹쌀을 넣은 오리(糯米鴨子)’, ‘실처럼 잘게 찢은 닭고기가 어우러진 제비집(燕窩鷄絲)’, ‘봄 죽순과 술지게미에 절인 닭고기(春筍糟鷄)’, ‘훈제오리로 만든 소를 넣어 지진 완자(鴨子火燻餡煎粘團)’, ‘실처럼 잘게 찢은 닭고기를 넣은 시금치 두부 탕(菠菜鷄絲豆腐湯)’이 건륭제를 감동시켰다. 그는 음식에 만족한 나머지 “보복 집안의 조리사인 장성과 송원, 장동관에게 각각 한 냥 쯤 되는 은덩어리 두 개 씩을 상으로 주어라(賞普福家廚役張成ㆍ宋元ㆍ張東官, 每人一兩重銀錁二個)”라고 명했다.([청궁양주어당(淸宮揚州御檔)])

그날 오후 미시, 건륭제의 식사에는 이들 세 사람의 음식이 또 다시 올랐다. ‘살진 닭과 휘주 두부(肥鷄徽州豆腐)’, ‘봄 죽순과 술지게미에 절인 고기(燕筍糟肉)’는 장성과 송원이 만든 것이었고, 여기에 곁들여진 ‘과일떡(果子糕)’은 장동관이 만든 것이었다. 고기를 술지게미에 넣어 두었다가 조리하는 방식〔糟〕은 남방의 조리법인데, 아침 식사에 이어 오후 식사에도 이런 음식이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건륭제가 그 맛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덕분에 세 사람의 소주 조리사들은 이후에도 건륭제와 일정을 함께하며 음식 솜씨를 선보일 수 있었다.이들은 ‘제비집 모듬 탕(燕窩攢湯)’, ‘달콤한 닭볶음(糖炒鷄)’, ‘식초 소스를 가미한 연잎에 싼 닭고기(醋溜荷包鷄)’ 등으로 건륭제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북경으로 돌아간 황제는 강남의 맛을 잊지 못해 어차선방에 강남의 음식을 재현하라고 명하곤 했다. 이에 따라 건륭 39년 11월에는 술지게미에 절인 거위알(糟鵝蛋), 술지게미에 절인 오리알(糟鴨蛋), 술지게미에 절인 무(糟蘿蔔)가, 건륭 41년 5월 초하루에는 술지게미에 절인 거위알, 술지게미에 절인 오리알, 건조시킨 메주〔豆豉〕가 항주에서 올라왔다.([진소채저당(進小菜底檔)]) 건륭제는 북방에서 남방의 맛을 즐겼던 것이다.

건륭 49년 건륭제 일생의 마지막 남순이 시작되었다. 2월 28일 미시, 황제의 오후 식사가 양주 천녕사 행궁의 화원(花園)에 차려졌다. 여느 때처럼 우유차〔奶茶〕로 시작해 ‘뜨거운 솥에 담아낸 들오리(野鴨熱鍋)’, ‘뜨거운 솥에 담아낸, 계란 떡과 술로 훈제한 오리(鷄蛋糕酒燻鴨子熱鍋)’ 등이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소주에 있어야 할 장동관이 49년의 이 문서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날 ‘뜨거운 솥에 담아낸, 계란 떡과 술로 훈제한 오리’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음식을 잊지 못한 황제가 일부러 그를 다시 부른 것일까?

황제의 식단을 기록한 [절차조상선저당(節次照常膳底檔)] 중, 건륭 48년 5월 30일의 기록을 보자. 건륭제는 열하(熱河: 지금의 청더(承德)) 피서산장(避暑山莊: 청나라 황실의 피서지)의 연훈산관(延熏山館: 피서산장에 있는 전각(殿閣)의 이름)에서 오후 식사를 받았다. 먼저 우유차를 마신 건륭제는 ‘제비집과 술로 훈제한 오리(燕窩把酒燻鴨子)’를 먹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소주에 있어야 할 장동관이 황제의 피서산장에서 음식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장동관이 건륭 30년에 발탁되어 동료 조리사들과 함께 황제의 어가를 따라 북경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황제가 어딜 가든 동행하여 건륭제의 마지막 남순 때에도 일흔이 넘은 몸으로 황제의 식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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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음식(滿席)과 한족 음식(漢席)이 한자리에 차려진 화려한 만한석(滿漢席). 건륭제의 남순을 계기로 서로 다른 두 민족의 음식문화가 교류하고 뒤섞이어 음식의 ‘만한일체(滿漢一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출처: (cc) Charlotte1125 at zh.wikipedia.org>


미식가 황제의 남순은 조리사들의 남하를 의미했다. 이로써 황제의 조리사들은 낯선 식재료와 조리법을 접할 기회를 얻었고, 남방의 조리사들은 황제에게 발탁되어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리사들의 조우는 조리 기법과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청대 음식 문화 발전사에서 건륭제의 역할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건륭제 일생의 두 가지 키워드, ‘전략적인 남순’과 ‘음식에 대한 애호’가 합쳐져 청대 음식문화의 집대성인 만한석(滿漢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본래 광록시(光祿寺: 조정의 연회를 담당하는 기구)의 규정에 따르면 만주족 음식〔滿席〕과 한족 음식〔漢席〕은 한자리에 차려지지 못했다. ‘만석’은 속칭 ‘발발석(餑餑席)’이라고 하는데 신분의 고하, 연회의 종류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발발(餑餑)’은 만주족의 전통 음식으로 찐빵, 국수, 떡 등 우리가 흔히 ‘딤섬(點心)’이라고 부르는 음식에 가깝다. ‘한석’은 예부시의 시험관과 담당 관리를 위해 차려지던 연회상으로 세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이처럼 만석과 한석은 그 목적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함께 차려질 수 없었다. 그러나 건륭제의 남순을 계기로 이 음식들이 한자리에 오르게 되어 건륭 41년(1776), [양주화방록]에 만한석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청나라의 키워드인 ‘만한일체(滿漢一體: 한족 역시 만주족과 똑같은 청나라의 백성으로 대하겠다는 뜻으로 강희제 이후 청나라의 민족 정책)’가 음식의 만한일체로 이어진 것이다.



건륭제 남순의 득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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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왕윤흥주루. ‘윤(潤)’자를 파자(破字)하면 ‘비 오는 날〔氵〕 문에 서있던〔門〕 황제〔王〕’, 즉 비 오는 날 음식을 청했던 건륭제를 의미하게 된다. 건륭제와 한 가난한 백성의 이야기가 담긴 이곳은 황제의 한 끼를 먹고자 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이 지역에만 본점과 분점, 모두 세 곳이 성업 중이었다. <제공: 정세진>





미복을 한 건륭제가 맛보았다는 생선대가리 조림인 ‘건륭어두(乾隆魚頭)’. 황제의 식당으로 이름난 왕윤흥주루에서 직접 찍은 것이다. <제공: 정세진>




건륭제의 남순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시각은 비판적이었다. 강희제가 남순으로 낭비한 국고를 옹정제가 채우고 건륭제가 남순으로 또 다시 비웠다는 지적은 건륭제가 내실을 꾀하기보다는 소비를 앞세웠음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륭제의 소비는 다른 방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건륭제는 자신의 정치권력과 군사력만으로 이토록 다양한 민족을 다스려 나갈 수 없음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는 물리적인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었던 남방을 순수하면서 그의 면면을 과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가는 곳마다 시와 문장을 남겨서 자신이 문화적인 군주임을 알렸고, 미복을 한 채 백성들과 만난 숱한 일화로 민간의 뇌리에 깊게 파고들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인이 문 앞에 서서 한 끼 식사를 청했다. 가난한 주인은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생선대가리 반쪽과 두부 한 덩어리를 두반장(누에콩으로 담근 매콤한 맛이 나는 중국의 장)으로 간한 생선조림을 내놓았다. 그 맛을 잊지 못한 귀인은 3년 후 다시 찾아와 같은 음식을 청하였다. 귀인은 가난한 주인을 위해 은자를 내어주며 ‘왕윤흥주루(王潤興酒樓)’라는 이름의 식당을 차리도록 해주었다. 5년 후 이곳을 다시 찾은 귀인은 또 생선조림을 청했고 변함없는 맛에 감동하여 그 식당에 ‘황제의 식사’라는 뜻의 ‘황반아(皇飯兒)’ 세 글자를 써주었다. 그 귀인은 바로 건륭제였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건륭제는 금방이라도 미복을 한 채 문을 두드릴 것 같은 귀인, 미복을 한 채 관리들을 감찰하여 비리를 척결해줄 것 같은 황제의 이미지로 남았다. 19세기에 완성된 [건륭남순기(乾隆南巡記)]라는 소설에서 건륭제가 미복을 한 채 풍속을 감찰하고 악인을 처단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그가 가진 이미지를 반영한 결과다. 비록 여행과 음식을 위해 적자를 무릅썼지만, 그는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무형의 흑자를 남긴 셈이다.

2012년 9월 30일, 중추절. 항주 서호(西湖)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주변 도로가 한시적으로 일방통행으로 운영된 탓에 차편을 구하려는 사람과 반짝 대목을 보려는 봉고차, 자가용 영업 기사들이 뒤엉켜 실랑이가 벌어졌다. 가까스로 붙잡은 불법 자가용 영업 기사는 왕윤흥주루가 2년 전에 문을 닫았다며 진짜 황제가 밥을 먹은 식당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공안(公安)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혼잡한 대로변에 내려주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 차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다행히 가짜 황제의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진짜 황제의 식당이 있었다. 중추절을 맞이하여 황제의 한 끼를 먹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은 거지닭과 생선조림, ‘솔방울처럼 칼집을 내어 다람쥐꼬리 모양으로 튀겨낸 새콤달콤한 쏘가리(松鼠桂魚, 건륭제가 좋아했다는 생선 튀김)’를 먹으면서 황제의 일화를 떠올리는 듯했다.



“인간이 먹어온 음식에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과거와 연결된 역사가 담겨 있다. (…) 사람들은 그저 단순히 음식을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소비하는 데에는 언제나 의미가 뒤따랐다. 이 의미들은 상징적인 것이며 또 상징적으로 소통되었다. 그 의미들 역시 나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음식의 맛, 자유의 맛], 시드니 민츠

시드니 민츠의 말대로 강남 여행을 즐겼던 황제가 반한 강남의 맛, 그것은 역사가 담긴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유효한 맛이었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795915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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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진 |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강사
경북과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이학 공부를 그만두고 한시(漢詩)가 좋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동대학원에서 <소식(蘇軾) 음식시(飮食詩) 연구>(2006)로 석사, <오대시안(烏臺詩案)의 사회문화적 함의 연구>(2012)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제 출발선에 선 인문학자로서 소식(蘇軾)을 비롯한 송대(宋代) 문인들의 문화사, 동아시아의 필화(筆禍) 사건, 중국의 음식 문화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묵묵히 공부하는 연구자, 학생들과 소통할 줄 아는 좋은 선생이 되는 것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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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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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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