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이인상과 그의 서화 속 심회 -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치유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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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1회 작성일 16-02-0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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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골도(沒骨圖)’라고 불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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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옥간(玉澗), 〈산시청만(山市晴巒)〉
남송(南宋), 종이에 먹, 33.3×83.3cm, 도쿄 이데미츠미술관(出光美術館) 소장.

남송시대는 시와 그림을 결합시켜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는, ‘위대한 결합’의 시대였다. 몰골도의 사례로 들 수 있는 이 그림은 ‘소상 팔경(瀟湘八景)’의 한 장면인데, 추상적인 붓의 자취와 먹색의 변화로 여러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여 다양한 감상의 여지를 준다.



동양화에서 형상을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윤곽선으로 형태를 그려내는 방법으로, 이를 ‘구륵법(鉤勒法)’이라고 한다.

나머지 하나가 ‘몰골법(沒骨法)’인데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물감을 찍어서 모양을 한 붓에 그리는 화법이며, 북송시대 화조 그림에 쓰이기 시작했다.

구륵법으로 그린 구륵도는 그 소재의 윤곽을 뚜렷한 선으로 그리기 때문에 형상을 한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반면에 몰골법으로 그린 몰골도는 윤곽선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모호하여 무엇을 그렸는지 헛갈리거나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헛갈림과 모호함이 바로 몰골도의 매력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뚜렷한 윤곽으로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덕에 다양하고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둘 수 있다는 점이 구륵도에서 찾을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화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면, 몰골도는 사람이 지닌 내면의 자유로움을 이미지로 그리려는 의도가 실행에 옮겨진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당나라 때로, 그 문화가 절정을 이루던 성당(盛唐)에서 중당(中唐)에 이르는 시기였다.

특히 당 현종이 황제의 자리에 있던 중당시대의 몇몇 서화가는 머리칼에 먹물을 묻혀 산수화를 그리고 글씨를 쓰는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 같은 전위적 예술은 중국의 구륵화 전통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혁신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그 뒤로 동아시아 서화 예술의 중요한 화두이자 기법으로 작용하며 면면히 이어졌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글씨와 그림이 출중하여 친구들에게 ‘몰골도’라고 불린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인상(李麟祥, 1710~1760), 18세기 문인서화가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인상은 ‘몰골도’로 불렸을까?



유쾌하게 엉뚱한 ‘몰골도’ 선비 이인상




서얼 출신이기는 했지만 이인상은 매우 유머가 풍부하고 심성이 따뜻했다. 그의 벗들은 그러한 그를 좋아했고, 그의 빼어난 서화 솜씨도 사랑하여 작품을 많이 얻으려 그에게 애써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어떤 이는 그림이 좋아도 욕심은 없어 변변히 친구의 그림을 한 점도 가지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러자 그가 ‘유쾌한 계략’을 꾸몄다.

임백현[임매(任邁)]은 욕심을 부리는 이는 아니지만 때때로 나에게 억지로 그림 그리도록 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면 한 번 웃으며 만족을 표하고 마니 다른 사람이 얼른 주워 소매에 넣고 가버리고는 했다. 그래서 백현의 집에는 내 그림이 없다.

내가 다시 이 지(識)를 그 끝에 달아서 남이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하리니, 백현은 아마 이 넓은 오지랖을 웃을 것이다.




任子伯玄心澹, 絶嗜好時强余作畵. 旣成便一笑彈指而已, 任人袖去. 故任子簏中, 無麟祥畵. 余復作此識其尾, 以沮人袖去. 任子必呻余之多心.(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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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이인상,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
종이에 먹, 33.7×59.7cm, 개인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그림 왼쪽 끝에 있는 글은 이인상이 자신의 그림을 가지려 하지 않은 친구 임매가 꼼짝없이 가지도록 만든, 짓궂으면서도 재치 있는 내용의 제사(題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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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그림과 글씨에 ‘아무개에게 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면 그 그림은 남이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임매가 그려달라 해서 기껏 그려준 그림을 정작 다른 사람이 가져가버리는 것을 보면서 이인상은 슬그머니 부아가 솟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참에는 아예 위의 내용을 딱 적어 넣음으로써 남이 가져가봐야 쓸모없도록 만들어 임매가 하릴없이 소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림에 욕심이 없던 담담한 성품의 선비 임매가 친구의 이 글귀를 보고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의 이러한 발랄함을 잘 보여줄, 다른 이야기가 연암 박지원의 산문 〈불이당기(不移堂記)〉에 실려 있다.

이양천(李亮天, 1713~1755)이라는 친구가 없는 살림에 비단까지 장만해 보내면서 그림을 부탁했는데, 그 비단에 정작 담겨온 것은 글씨였더라는 일화다.

삼국지의 주인공 제갈량을 모신 사당 앞에 선 측백나무를 그려달라는 부탁에 〈설부(雪賦, 눈 이야기)〉를 써주고, 사철 푸른 그 나무는 눈 속에서 변치 않는 절개를 뽐내는 법이니, 그 글에서 눈을 보면 나무도 보인다며 시치미를 뚝 떼었다.

몇 년이 지나 이번에는 절묘한 은유로 친구를 위로하며 놀려주기도 했다. 임금에게 직언으로 상소했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이양천에게 편지를 보내 “자네의 측백나무 그림이 여기 서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네! 자네도 훌륭한 화가야!”라고 하여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양천이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지만, 만고의 절개를 상징하는 측백나무에 군주의 귀를 거스르며 직언한 그의 상소를 비유한 것은 이인상의 해학이 가득한 따뜻한 위로였다.

이처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비유로 변화무쌍하게 표현하는 이인상을 이양천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원령[이인상의 자(字)]은 ‘몰골도’라고 할 만하구나!(元靈可謂沒骨圖)”



그림을 대신한 글씨, 어떤 글씨였나




그러면, 이처럼 자유롭고 재치 있는 이인상은 과연 어떤 글씨로 친구의 부탁과 전혀 다른 ‘글씨’를 써서 돌려보냈을까?

이인상은 문인화가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특히 매력이 넘치지만 희귀했던 고전(古篆: 옛날 전서)을 이 분야 명가로 찬사받을 만큼 독보적으로 잘 썼다.

그의 고전은 전서(篆書) 가운데 ‘금문(金文)’이라는 서체이다. 이 서체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까지 제작되던 청동종, 혹은 솥 따위에 새겨진 문자를 기반으로 한 글씨체이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 불린다. (그림 3)

이처럼 이 글씨체가 연원이 오래된 만큼 이인상이 살았던 당시에 이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며,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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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이인상의 고전(古篆) 〈난정서(蘭亭序)〉의 부분(왼쪽, 1748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주나라 청동기에 새겨진 고전(오른쪽).
이인상의 전서(篆書)는 18세기에 조선은 물론 중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고대의 금문(金文)을 바탕으로 한 글씨체를 자랑했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찬사와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앞에서 친구 이양천이 공명(孔明) 사당 앞에 있는 측백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인상이 돌려준 것은 고전으로 쓴 〈설부〉라는 글이었다고 했다.

이 〈설부〉가 현전하지 않아 아쉽지만 마침 〈고백행(古柏行: 공명 사당 앞의 나이 든 측백나무)〉을 ‘옛날 전서’로 쓴 작품이 현재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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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이인상, 〈고백행(古柏行)〉
1740년대 말, 종이에 먹, 28.3×50.0cm, 개인 소장.

절친한 벗 김상숙(金相肅, 1717~1792)에게 준 이 글씨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가 지은 시다.

두보가 제갈공명을 추모하여 읊은 시가 몇 편 있는데, 이 작품은 사당 앞의 측백나무를 소재로 공명의 충절을 기렸다. 이 시를 가지고 이인상은 자신의 장기인 고전으로 이처럼 멋지게 써내어 벗에게 선물했다.



옛 문물에 관심이 깊은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청동기에도 큰 호기심을 보였는데, 그들은 그릇 자체만이 아니라 거기에 새겨진 글귀와 그 서체에서 고인(古人)들의 흔적을 찾으며 감상했다.

청동기의 글귀는 음각이나 양각으로 새겨지는데 둘을 아울러 ‘관지(款識)’라고 하고, 그 서체가 금문이다. 금문의 서체는 흔히 옛것을 숭상하던 동아시아에서 감상의 대상이 된 지는 오래지만 정작 쓸 줄 아는 이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이인상이 있음으로써 그 주변의 사대부들은 이런 옛 전서체를 구경하고 얻기도 했기에 무척 호사를 누린 셈이다. 종현(鍾峴, 지금의 명동)에 살던 문인 권헌(權攇, 1713~1770)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종현에서 원령을 만나鐘峴逢元靈
함께 한묵으로 놀았다지만共作翰墨戱
각서(刻書)나 종정문이야 알 도리 없으니磨崖勒鍾不可得
붓일랑은 내던지고 드러누워 가을비나 읊조리련다.撲筆飢臥吟秋雨

- 권헌, 〈원령의 옛 전서를 장난삼아 노래하다(戲作元靈篆籕歌)〉의 일부, [진명집(震溟集)] 권3

이인상의 옛날 전서를 두고 읊은 권헌의 이 시는, 절친했다 하더라도 당대의 사대부들 가운데 이인상이 구사하는 고전을 잘 아는 이가 드물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 해보려고 애쓰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포기해버리는 권헌의 모습에서, 문예로 이름을 얻었다 하더라도 고전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이인상의 명망으로 볼 때 고전을 제멋대로 쓰거나 간혹 틀리게 써도 알아볼 이가 없기도 했겠지만, 그랬더라도 감상자들의 눈에는 고전미가 넘치는 글씨였다. 그에게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학적 트릭, 소전(小篆)을 고전(古篆)으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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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이인상 고전(古篆)의 비밀 풀어볼 수 있도록 집자하여 재구성한 표.
이인상이 금문 기법으로 소전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이 왕성해지고 과학적 복원이나 보존 처리가 가능해지기 전에 옛 전서, 그러니까 고전은 자료가 매우 희귀했다.

금문, 즉 종정문의 경우는 그나마 북송시대에 문헌으로 정리해둔 것이 있어 그 덕을 후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지만, 천이나 종이, 나무에 쓰여 있던 것들을 18세기 사람들이 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인상은 어떻게 고전을 저토록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가? 거기에는 비밀이, 트릭이 있었다.

그림 5에서 보듯이 그는 천연스럽게 소전(小篆)을 쓰면서 고전처럼 보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글꼴은 진나라 시황제 때 통일되고 당나라를 거치면서 정비된 소전인데, 그 획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청동기에 새겨진 글씨, 금문처럼 썼다는 말이다.

이는 주어진 환경을 놀랍도록 반전시킬 줄 알았던 그의 능력이 빚어낸, 매우 재미있는 아이디어다.

소전은 획의 시작과 끝이 모두 둥글고 획의 굵기에 변화가 없으며 글자 형태는 위아래로 긴 장방형이다.

반면에 금문은 칼 따위로 청동기 표면이나 주물용 거푸집에 새기기 때문에 획의 양끝이 뾰족하다. 이인상의 고전을 보면, 금문의 획법을 썼으나 글자의 기반은 소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인상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상상을 넘어서는 트릭을 구사하는 재기가 있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들은 대개 그 그릇을 주조하게 된 사연이나 제작자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문장에 사용된 글자가 특정 글자로 한정되었다.

이는 후대 사람들이 문장을 금문으로 쓰고 싶어도 글자 용례가 부족하여 포기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이인상도 마찬가지였겠으나 그는 소전을 이용하는 기발한 방법을 창안했고, 당시에 누구도 시도할 엄두조차 못 낸 금문으로 많은 텍스트를 쓸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인상의 기발함을 그저 눈속임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소전의 글꼴을 이용했다 하더라도 금문의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운용한 그의 창의력이 글자 수의 한계라는 ‘굴레’를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형상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의 형상화, 이인상의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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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고백행〉의 탁월한 조형 능력의 사례.



이인상의 전서는 꾸준한 학습에 발랄하고 자유로운 창의력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형상이다. 이것은 그가 쓴 〈고백행〉의 낱글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림 6)

①은 천(千)이다. 첫 획의 삐침을 마치 말려 있는 용수철처럼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금문이든 소전이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형상이다. 흔히 청동기에 새겨진 예를 보면, 이 글자는 14547418863489.jpg으로 쓰는데 이인상은 첫 획을 감성어린 나선으로 말아놓았다. 이와 같은 예는 ③의 출(出)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②는 전형적인 소전체로 쓴 군(君)이지만 획의 형상은 금문의 특징을 보여준다.

④의 지(枝)는 이 〈고백행〉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멋스러운 조형이다. ‘가지’를 뜻하는 글자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인상은 뜻을 전달하는 문자를 시치미를 뚝 떼면서 저렇게 재미있게 ‘그려’놓았다. 글씨와 그림을 넘나드는 이 쾌활한 조형미는 그의 명랑한 성품에서 기인했으리라. 그처럼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천진함을 드러낼 수는 없다.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힐링의 메시지, ‘심회(心會), 마음으로 이해함’




전예(篆隸)의 명가가 여럿 나타나 활동한 것은 18세기 조선 서예의 특징이다.

이인상의 후속 세대로서 전서의 명가로 꼽히는 사람이 이한진(李漢鎭, 1732~?)이다. 마침 그에게도 두보의 〈고백행〉을 전서로 쓴 작품이 있어서 이인상의 고전과 함께 볼 수 있는 것은 희한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 7) 그런데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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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이인상(왼쪽)과 이한진(오른쪽)의 〈고백행〉(부분)
이한진, 〈고백행〉, 종이에 먹, 26.7×56.8cm,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18세기 중기와 후기의 전서 명가인 두 사람이 같은 텍스트를 남긴 것은 큰 다행이다. 한 자씩 대조해 보면 이인상의 탁월한 창의력이 돋보이는 자유분방함과 이한진의 엄정한 법도 준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한진의 전서에서는 엄격한 법도를 준수하는 전형적인 소전 글씨를 볼 수 있다. 세로로 긴 글꼴, 엄격한 획법, 정연한 자간과 행간 등을 보면, 이한진이 ‘엄정함’을 우선으로 이 작품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인상은 그와 다르다. 얼핏 보기에 질서가 없는 듯 단정해 보이지 않지만, 이인상만이 지닌 천부적인 창의력과 밝고 쾌활한 자유정신이 표출해놓은 형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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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이인상, 〈구룡연(九龍淵)〉
1752년, 종이에 먹, 111.7×58.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점은 이인상의 서화 예술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데, 1752년에 그린 〈구룡연(九龍淵)〉에 이 원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그림 8)

이 그림은 금강산 여행길에서 만난 장대한 폭포에 대한 감흥을 함께했던 어른에게 15년 뒤에야 그려 선물한 작품이다.

묘사가 세밀하지도 색을 곱게 칠하지도 않은, 매우 졸박(拙樸)하게 먹만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 이인상은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자 했다. 이 의도는 그림의 왼쪽 하단에 적은 제사에 잘 드러난다.

정사년(1737) 가을에 나는 삼청 임씨(任氏) 어른을 모시고 구룡연을 구경했다. 15년이 지나 조심스레 이 그림을 그려 드린다.

모지라진 붓으로 그을음을 묻히고, 뼈대를 그렸으나 살집은 그리지 않았고 색도 칠하지 않았으나, 감히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한 것(心會)에 두었기 때문이다.



丁巳秋, 陪三淸任丈, 觀第九龍淵. 後十五年, 謹寫此幅以獻. 而以乃禿毫瀆煤, 寫骨而不寫肉, 色澤無施, 非敢慢也, 在心會.


조심스럽게 그려 어른에게 드린다는 그림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겸재 정선의 웅장하고 멋들어진 진경산수가 풍미하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이런 그림은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여겨졌을까?

그러나 이런 의문은 이인상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그 절경의 인상(印象)을 왜곡하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내어 드림으로써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진심을 그려내려는 의지, 이것이 그림을 부탁 받고 글씨를 써주며, 친구의 상소문에 담긴 정신을 알아보고 그것이 곧 상록수의 마음이라 표현할 줄 알았으며, 소전을 고전으로 바꿀 줄 알았던 선비, 몰골도 같은 사대부 문인 이인상의 예술 정신이자, 곧 시대 예술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말한 ‘심회(心會)’는 그의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세의 온갖 질곡을 맛보았으나 그에 간섭받지 않은 채 자신만의 존엄한 세계를 서화로 드러낸 그의 예술혼은 오늘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온갖 허울에 싸여 참모습을 잃기 쉬운 우리에게 ‘몰골도’ 선인들은 수준 높은 문화의 정수로써 끊임없이 마음의 대화를 걸어온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일상과 사회 경쟁 속에서 다치곤 하는 ‘이 마음’을 치유 받으려면 그분들이 걸어주는 말에 귀기울여봄 직하다.

세속적인 장벽에도 전혀 걸림 없이 자유로웠던 ‘몰골도’ 이인상의 예술혼이야말로 300년 세월 뒤 우리에게 필요한 힐링 메시지가 아닌지!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8889081.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유승민 | 문화재청 인천항 문화재감정위원
18세기 문인사대부들의 글씨와 그림에 주목하여 연구하고 있다. 특히 노론 사대부이면서 동시대의 문인서화가들과 차별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이인상, 이윤영, 송문흠, 김상숙 등의 글씨와 그림을 중심으로, 그들의 서화와 이론이 당시의 서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가늠하려는 논문을 집필 중이다. [한국서화가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했고,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논문으로 〈능호관 이인상의 산수화 연구〉(2007), 〈배와 김상숙의 종요체 수용과 그 의의〉(2012) 등이 있다.


발행201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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