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서양의 설탕 이야기 - 달콤한 설탕의 씁쓸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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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6회 작성일 16-02-0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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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함이라고 다 같은 달콤함은 아니었다. ‘달다’라는 말은 문화권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훨씬 더 긍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감탄고토(甘呑苦吐), 감언이설(甘言利說) 같은 표현에서 이르는 달콤함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내포된 것이지만, 영어에서 ‘달다(sweet)’는 표현은 훨씬 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인, 특히 영국인들은 달콤한 맛이 나는 모든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달콤한 맛의 치명적 유혹은 씁쓸한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서양인들은 사탕수수를 심느라 세계 곳곳의 광대한 평야를 파괴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노예 노동자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은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그들의 막대한 재산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설탕, 흑인 노예가 맛본 고통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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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뒤 테르트르(Jean-Baptiste Du Tertre), 〈프랑스인 거주 앙티유의 일반 역사(Histoire générale des Antilles habitées par les François), II〉
파리, 1671, 카미유 수르제 고서 전문 서점(Camille Sourget Librairie) 소장.

카리브 해 지역의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정제 과정을 보여주는 판화. 설탕을 얻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했다.


사탕수수는 남태평양, 뉴기니 일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처음 재배되었고, 인도(기원전 4세기), 중국(기원전 3세기), 페르시아(6세기), 이집트(8세기)의 통상로를 통해 서양에 전해졌다. 10세기경에 설탕은 중동 지역의 주요한 작물이 되었다. 설탕은 처음에는 불교와 함께 전파되었는데 후에는 이슬람교의 포교 지역으로 퍼져나가 15세기 말엽에는 서아프리카를 포함하여 마데이라ㆍ카나리아ㆍ카보베르데 제도 등지에서도 재배되었다.

사탕수수는 다 자랐을 때 키가 4미터 남짓으로 매우 크고, 한번 심으면 쉽게 뿌리내리고 퍼져나가서 다시 심지 않아도 여러 계절 동안 추수가 가능하다. 그러나 작물의 특성상 해마다 같은 밭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는 과육이 급격히 줄기 때문에, 한 번 사용된 밭은 곧 버려지고 인근의 새 땅으로 밭을 옮기기 일쑤다. 이 때문에 2004년 세계야생동물기금(World Wildlife Fund)은 “사탕수수 재배는 지구상 단일 작물 중 야생생물에 가장 막대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만큼 설탕은 생산이 어렵고 노동 집약적인 작물이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사탕수수의 줄기를 잘라 달콤한 과육을 눌러 짠 다음, 이것을 당밀이 될 때까지 끓인다. 그런 뒤에 몇 가지 가공 과정을 더 거쳐야 잘 정제된 설탕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 이 기술은 인도에서 처음 개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설탕을 얻기 위해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이를 가공하려면 어마어마한 자원과 인력이 필요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야 했고, 엄청나게 큰 용광로에서 설탕을 끓이기 위해 땔감으로 쓸 나무를 확보해야 했으며, 이런 일을 하려면 수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열대지방인 카리브 해 지역에 새로 개척된 유럽의 식민지가 최적의 사탕수수 원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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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William Clark), 〈안티구아의 열 가지 풍경(Ten Views of Antigua)〉
1823, 세인트크로이 문화재 협회(St. Croix Landmarks Society) 소장.


그런데 경작지나 땔감보다 더 부족한 것은 노동력이었다. 흑사병이 돌면서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에 그리스, 불가리아, 터키 인구의 삼분의 일 가량이 사망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납치하여 포로로 삼기 시작하면서 설탕을 먹는다는 것은 흑인과 백인의 대립 문제로 비화되었다. 노예 상인들은 천 삼백만 명 이상의 노예를 ‘신세계’로 끌고 갔다. 그곳은 카리브 해 근처의 설탕 농장이었다. 끌려간 노예들은 견디기 힘든 기후와 용광로의 엄청난 열기로 고통 받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새 주인에게 시달리며 겪어야 하는 잔혹한 육체적 학대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탕의 달콤한 맛은 흑인 노예가 맛본 온갖 고통의 대가였다.



달콤한 중독, 품위의 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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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1825년경 사부아 왕족들을 위해 일한 제과업자 프라티(Prati)가 소유했던 설탕장식 제작용 도안 중 하나.


설탕은 처음에는 값이 매우 비싸서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데 아주 적합한 음식이었다. 하얀 수정같이 맑게 정제된 설탕은 최고의 사치품으로서 페르시아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축제를 빛내는 호화로운 장식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주최자의 부를 과시하고자 설탕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나무와, 탁자만 한 크기의 성, 이슬람 사원이 사치스러운 연회를 장식했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막대한 양의 설탕과 기름, 으깬 아몬드와 땅콩을 혼합하여 화려한 설탕장식(soteltes)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다. 1515년 웨스트민스터에서 행해진 울지(Wolsey) 추기경의 호화로운 취임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굽거나 건조한 설탕으로 만든 멋진 성과 탑, 말과 곰, 그리고 원숭이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달콤한 사탕과자를 곁들임으로써 하객은 주최자의 권력을 눈으로 맛으로 직접 확인하였기 때문에 설탕은 문자 그대로 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어쩌면 힘의 과시와 관련된 이러한 특성 때문에 ‘단 것을 좋아하는 이(sweet tooth)’로 대변되는 서양인들의 악명 높은 단맛 중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설탕이 함유된 음식을 유난히 좋아한 탓에 이가 모두 검게 썩어버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옛날 고위층의 휘황찬란한 설탕장식에서 시작된 설탕 간식이 오늘날 대중들의 일상적인 군것질거리로 변모해 자리잡기까지, 영국은 설탕 간식의 선구자였다. 상류층 집안의 식탁에서는 코스와 코스 사이에 접시를 치우는 '빈(void, dessert)' 시간을 설탕으로 만들어진 코스로 채우는 것이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식사 관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 설탕을 디저트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푸딩이나 고기 또는 스프의 풍미를 돋우는 데도 풍부하게 사용하였다. 설탕은 모든 것을 더욱 맛있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아이스크림이 들어왔을 때 영국인들이 열광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설탕은 씁쓸한 ‘제국의 맛’과 결합하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설탕은 유럽인, 특히 영국인이 점차 맛들이기 시작한 차, 커피, 초콜릿에 가미되어 쓴맛에 단맛을 더해주었다. 이에 따라 그야말로 설탕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발생했다. 중국인이 녹차에 어떤 것도 가미하지 않고 그대로 마셨던 것과 달리, 유럽 선원들은 인도인들로부터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을 배웠다. 이러한 방식은 영국 최상류층에 직접 전해져 점차 다시 가장 낮은 계층까지 확산되었다.

17세기 찰스 2세의 왕비인 캐서린(Catherine of Braganza)이 설탕을 넣은 차를 영국으로 들여오자 달콤한 차를 마시는 것은 화려한 궁중의식이 되었고, 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영국의 모든 명망 있는 가문에서 가정의 품위를 보여주는 징표가 되었다. 설탕의 가격이 마침내 극빈층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떨어졌을 때, 차는 평범한 가정의 식사에서조차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었다. 설탕을 넣은 차와 커피는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촉매제였던 동시에, 중산층의 교양을 가늠하는 지표로도 자리잡았다. 또한 설탕은 방직 공장과 산업 현장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음식이 되기도 했는데, 가장 고된 노동을 하는 세탁부들에게 설탕을 넣은 따뜻하고 달콤한 ‘차 한 잔(cuppa)’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중요한 기호품이 되었다.



설탕 섭취를 중단하라, 여성과 노예의 구원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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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산 채로 교수대에 늑골이 매달린 니그로(A Negro Hung alive by the Ribs to the Gallows)〉
1796,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소장.

블레이크가 존 가브리엘 스테드만(John Gabriel Stedman)의 [수리남의 니그로 폭동에 대항한 5년간의 탐험 이야기(Narrative of a Five Years Expedition against the Revolted Negroes of Surinam)](1796)을 위해 제작한 열여섯 점의 판화 중 하나.


설탕의 가격은 서인도제도의 설탕 생산량 증가에 반비례하여 하락했다. 사탕수수는 서구인의 가장 성공적인 작물이었다. 하지만 이는 무고한 희생과 파괴의 결과물이었다. 유럽인들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정복지의 토착민을 대량 학살했으며, 아프리카인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원시 자연환경을 파괴했다. 1562년에는, 3백만 명에서 8백만 명에 이르렀던 현지 토착민인 타이노족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는데, 그중 90퍼센트는 유럽인이 옮긴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대체하고자 1517년에 4만 명가량의 흑인 노예를 서인도제도로 데려왔고, 이를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흑인 노예를 이주시켰다.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인해 1567년에는 유럽인들이 “그 땅이 마치 에티오피아 현지 같았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간혹 백인 노동자, 중죄인, 정치범, 심지어 종교적 박해를 받은 비국교도들도 서인도제도로 보내졌지만, 그들 중에서 설탕 재배 지역에 보내진 백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설탕 재배 환경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했는지를 쉽게 짐작게 한다. 이는 담배가 주작물이었던 쿠바나, 커피가 주작물이었던 푸에르토리코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백인이 생활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1350년에서 1500년 사이 설탕 10파운드의 가격은 금 1온스의 35퍼센트 가량이었던 반면, 1700년 무렵 같은 양의 설탕 가격은 6펜스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러한 가격 하락 현상은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을 서인도제도에 공급하면서 급속히 나타났다. 설탕이 널리 보급되자 빈민층은 부유층보다 더욱 열광적으로 설탕을 받아들였다. 차에 넣은 설탕은 원기를 북돋워준다고 알려졌고, 행복과 경제적 성공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면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음식으로 유명세를 탔다.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애벗(Elizabeth Abbott)은 설탕이 심지어 사람들에게 아편의 역할까지 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설탕이 “기운을 북돋아주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심리적으로 중독성이 강한 물질이며, 식욕을 감퇴시키고 극심한 공복감을 채워주며 이전에는 일부 계급에 한정되었던 특권을 더 많은 이들이 소비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 같은 설탕 소비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퀘이커교도인 윌리엄 폭스(William Fox)는 <영국 국민들에게 고하는 서아프리카의 설탕과 럼을 삼감에 관한 탄원(An Address to People of Great Britain on the Propriety of Abstaining from West India Sugar and Rum)>(1791)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팸플릿을 써서 설탕 소비를 크게 감소시켰다. 그는 설탕 1파운드를 소비하는 것이 인간의 살을 2온스 없애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고, 설탕을 섭취하는 행위를 동료인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 행위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폭스는 만약 한 가정에서 일주일에 평균적으로 섭취하는 설탕 5파운드를 먹지 않는다면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덟 가구가 19년 6개월 동안 설탕을 먹지 않으면 100명을 살릴 수 있으며 그의 계산에 따라 38,000 가구가 설탕 섭취를 중단한다면 설탕 교역 전체가 중단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인기 있는 풍자만화가인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는 서인도제도에서 자행되는 만행에 관한 이야기를, 백인 고용주가 흑인 노예들의 살을 삶아 설탕을 만드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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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 <서인도제도의 만행(Barbarities in the West Indies)〉
1791,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 소장.


한편, 이 같은 논란 속에서 여성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전의 강건하고 남성적인 미덕을 지닌 문화가 달콤한 사치품에 대한 애정을 앞세운 부패하고 여성적인 문화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염려하였다.

그런 비판에 직면하여 중산층 여성들은 야만적인 설탕 사업과 노예무역을 중지시키고자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미덕을 증명하고자 했다. 교양 있는 여성들은 폭스의 팸플릿에 자극을 받아 1791년 노예 폐지론자들이 조직한 설탕 불매운동에 참여하였다. 노예들이 일하는 재배장의 환경에 경악한 여성들은 가정식을 만드는 주부이자 티타임의 주재자로서 설탕 소비를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강력한 정치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초기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운명을 노예의 지위에 견주어 생각하였다. 이것은 당대 여성들에게 노예 폐지론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잘 말해준다. 예컨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같은 남성 자유주의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남자들이 “여성은 결코 잠시도 독립심을 느낄 수 없는 존재이며 이런 여성의 천부적인 간교함을 통제하려면 그들을 무섭게 다스려야 하고, 남성이 휴식을 취하고자 할 때에는 언제든지 여성은 ‘달콤한’ 동반자로서, 더욱 매혹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요염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여성을 평가하는 것에 분노했다.1)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 Authoritative Text 2nd Edition) <여성에 대한 여러 견해(The Prevailing Opinion of a Sexual Character Discussed)>,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88/1975,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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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란 위치 탓에 그들은 청원서에 서명하거나 의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개방적인 역할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의 식료품을 구입하는 책임을 지닌 가정의 경영자로서 그들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설탕 소비의 주체였다. 미국 독립혁명 당시 차 불매 운동을 벌인 미국 여성들의 역할에 감명을 받은 영국 여성들은 설탕 불매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불매운동이 유행하자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인 웨지우드(Josiah Wedgwood)는 히트 상품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속박된 노예의 모습이 새겨진 카메오(cameo)를 제작하여 브로치, 머리핀, 팔찌와 핀 상자를 장식했다. 선구적인 노예 폐지론자인 토마스 클라크슨(Thomas Clarkson)은 이러한 유행이 “정의, 인간성, 자유의 명분을 고취시키는 훌륭한 작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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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간이자 형제가 아닙니까?” 노예 폐지론에 동의했던 도자기 제조업자 조사이어 웨지우드가 만든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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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 속박된 노예의 모습이 새겨진 카메오. 1787년 제작된 것으로,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장신구에는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나도 인간이자 형제가 아닙니까?(Am I not a Man and a Brother?)”라는 유명한 표어가 쓰여 있다. 흑인 노예와 백인 여성이 히트 상품을 통해 한마음으로 뭉친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다.

반 노예제도 여성협회의 지역지부가 조직한 설탕 절제 캠페인은 행동을 통한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파장은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를 이루어내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1833년 마침내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활동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1791년과 그 이듬해에 삼십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노예가 생산해낸 설탕의 소비를 중단했고, 열 가구 중 아홉 가구가 설탕 절제 운동에 참여했다. 여성들이 국가와 제국의 미덕을 지키기 위해 일어섬에 따라 루소가 여성적 미덕으로 규정한 ‘달콤한’ 복종이 잠시나마 중단된 것이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933608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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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리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세부 전공은 18세기 영국 소설이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학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서사 방식인 ‘자유 간접 화법’의 발달을 연구하고, 근대의 대도시 발생에도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사실주의 소설의 발생과 결부시켜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문화 현상에 관련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싸이(Psy)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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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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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5.07.



주석


1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 Authoritative Text 2nd Edition) <여성에 대한 여러 견해(The Prevailing Opinion of a Sexual Character Discussed)>,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88/1975,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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