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차(茶), 표류선이 깨워준 미각 - 술보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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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16-02-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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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차문화와 무너진 다풍(茶風)




고려청자 다완(茶碗)의 비췻빛은 고려시대 차문화의 은성(殷盛)했던 기억을 떠올려준다. 고려시대의 차문화는 불교의 성행과 함께 더욱 활성화되었다. 구한말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할 때 일이다. 지관이 3대에 걸쳐 군왕이 날 땅으로 지목한 터가 하필이면 고려 때 절 가야사 탑이 서 있던 자리였다. 대원군은 절에 불을 지르고, 우뚝 선 돌탑을 허문 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 그런데 돌탑을 허물자 탑 안의 사리공(舍利孔, 탑 안에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에서 여러 가지 장엄과 함께 이상한 물건이 나왔다.

꺼내보니 700년 전 탑을 처음 세울 때 함께 넣어둔 용단승설(龍團勝雪, 사각형 틀에 넣어 표면에 용무늬를 찍어낸 고급차) 떡차(찻잎을 찧어 둥글고 네모진 덩이로 만든 차) 네 덩이였다. 새긴 글씨까지 또렷한 진품이었다. 송나라 황제에게 바칠 공물로 만들어진 이 희귀한 차가 어떤 경로로 고려의 불탑 속에 간직될 수 있었을까? 이 실물은 당시 이상적(李尙迪) 등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고려 탑 속의 떡차는 당시 고려의 차문화 융성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실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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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충남 예산에 있는 남연군의 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허문 불탑 안에서 발견된 네 덩이의 떡차는 수준 높은 고려의 차문화를 보여주었다.


고려 멸망 이후 왕실과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이어오던 차문화의 맥락은 완전히 끊겼다. 중국과 활발하던 교역이 단절되면서 고급차는 더 이상 반입되지 않았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에 따라 절집의 다풍(茶風)도 점차 무너졌다. 사찰에서 생산되는 차의 양은 승려들이 약용으로 먹기에도 부족했다. 예나 지금이나 차 마시기는 일종의 문화적 소비 행위에 속한다. 차는 그 자체의 효능보다 분위기를 타는 기호음료다. 분위기가 사라지자 차문화도 시들해졌다.

세종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도대체 중국인들은 어째서 차를 저렇게 마시고, 우리는 이처럼 차를 안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궁금해했다. 실록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명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조선은 왜 차를 만들어 무역하지 않느냐고 선조에게 물었다. 조선 산야에 자생하는 차나무가 잡목 취급 받는 현실을 그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개화기 때 원세개(袁世凱)도 이여송과 같은 말을 했다. 왜 조선은 차를 만들어 무역하지 않는가? 국부 창출의 좋은 기회를 어째서 제 발로 차버리는가? 조선 초기부터 구한말까지 중국인들이 같은 질문을 계속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면 알고도 무시했다. 왜 그랬을까? 차는 우리와는 그토록 무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행들은 일본인들이 날마다 나눠주는 지급품 중에 차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까짓 차를 마시느니 막걸리 한 사발을 통쾌하게 마시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가는 길 가에는 차를 끓여주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사람도 눈에 띄게 많았다. 어딜 가서 앉으면 차부터 내왔다. 조선 사람들은 차를 마시지 않는데도 어떻게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오는 일본인까지 있었다. 원중거(元重擧)는 이 질문을 받고 습성의 차이일 뿐이니 그것으로 어찌 병의 유무를 판단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중국에 간 연행사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그들이 서적 구입을 위해 날마다 찾았던 북경 유리창 거리의 서점에 들어가면 중국인들은 대뜸 차부터 내왔다. 향기가 독특해도 그게 물일 뿐이지 꿀물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갈 때마다 주고, 가는 곳마다 주니 그들의 습속이 그런가 보다 했다. 그 맛에 특별히 끌리지는 않았다. 호기심에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사오기도 했지만, 조선에 와서 끓이면 중국에서 마시던 그 맛이 좀체 나지 않았다. 속아 산 조악한 제품이거나, 아예 복통과 설사를 유발하는 가짜까지 많았다. 가끔 좋은 차를 구해도 갖춰진 차도구가 없고, 있더라도 방법을 몰라 제대로 된 맛과 멋을 누릴 수가 없었다. 그 한 통을 다 마시고 나면 다시 잇대어 구할 도리도 없었다. 수요와 공급의 통로가 거의 막히고 보니 애초에 차가 생활에 뿌리를 내릴 여건이 못 되었다.



관습화된 차그림 속의 음차(飮茶) 모습




18세기 중반 이후 중국은 남방의 소요를 종식시켜 명실상부한 대일통(大一統)의 제국을 이루었다. 그 자신감을 반영하듯 폐쇄로 일관했던 바닷길도 개방해, 선박의 통행량이 급증했다. 북경에 연행사로 간 조선 지식인이 한족들과 사적 교유를 나누고 접촉하는 일도 활발해졌다. 이들은 유리창 서점가 근처에 거주하던 한족 지식인들의 집을 수시로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교유에 임했다. 이렇게 맺어진 활발한 왕래는 이후로도 오랜 세월 서신 교환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속 깊은 교류를 낳았다.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중국의 각종 사치성 소비재와 기물의 도입도 부쩍 늘었다. 연행을 다녀온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견문한 중국의 화려한 살림살이를 선망하면서, 청조 지식인들의 사랑방 풍경과 이른바 살롱 문화에 대한 동경을 함께 키웠다. 자신들도 해보고 싶었다. 대부분 가짜에 불과했던 각종 청동기며 유명 서화가들의 가짜 작품들이 조선 사대부의 사랑방에 놓이고 내걸렸다. 여기에 한 가지 반드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차였다. 설령 차를 잇대어 마실 형편은 못된다손 쳐도 사대부 사랑방의 격조를 말함에 있어 차와 차도구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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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
1764년, 종이에 수묵담채, 28.7x42.0cm, 간송미술관 소장.

와룡암은 상고당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기에 그려진 여러 장의 그림이 이런 분위기를 증언한다. 먼저 볼 그림은 심사정이 그린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다. 18세기 중엽의 유명한 골동품 수장가였던 김광수(金光遂, 1699∼1770)의 거처 와룡암에서 열린 조촐한 아회(雅會)의 광경을 담았다.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은 옆 장에 붙은 발문에서 “1744년 여름, 내가 김광수를 와룡암으로 찾아가서 향을 사르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평하였다”고 적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다. 좀을 먹어 디테일이 분명치 않지만, 갓 비가 개인 초여름 와룡암을 배경에 두고 솔 그늘 아래 자리를 편 채 네 사람이 둘러앉아 담소한다. 나무 아래 동자는 화면에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앉은 품새나 위 김광국의 언급으로 보아 차를 끓이는 중이다. 당시 그의 집에 갖추고 있던 다로와 다관은 모두 중국제 골동품이어서 각별한 운치와 격을 더했을 법하다.

김광수는 골동품뿐 아니라 차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박제가는 “차 끓임은 오직 다만 김성중(金成仲)을 허락하니, 송풍성(松風聲)과 회우성(檜雨聲)을 알아듣기 때문일세(煎茶獨許金成仲, 解聽松風檜雨聲)”란 시도 남겼다. 김성중은 바로 김광수다. 송풍성과 회우성은 찻물을 끓일 때 차를 넣어야 할 타이밍을 가늠하는 물 끓는 소리를 정도와 상태에 따라 묘사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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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간, <와룡강(臥龍岡)>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28.2x40cm, 개인 소장.


한용간의 <와룡강(臥龍岡)>이란 그림에서도 당시 서울의 경화세족 사이에 성행한 중국풍의 모방 풍조를 볼 수 있다. 중국식 난간을 두른 넓은 사랑에는 역시 둥근 중국식 창이 열려있다. 주인은 보료에 기대 비스듬히 누워 있고, 마당에는 총각머리를 한 시동이 다로(茶爐) 곁에 앉아 부채질을 한다. 마당에 놓인 탁자 위에는 수입제 화분에 귀한 화초가 심겨 있다. 집 모퉁이의 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은 중국 강남의 태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태호석이다. 이 또한 수입품이라는 얘기다. 마당의 두 마리 학과 함께 그 뒤의 파초와 대숲은 주인의 고결한 인격을 대변한다. 이런 그림은 18, 19세기 고사의 은거를 그린 그림에서 거의 공식처럼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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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취후간화(醉後看花)>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담채, 98.2 x 48.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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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전다한화(煎茶閒話)>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21.8 x 26 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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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김홍도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방 안에는 선비 두 사람이 술병을 앞에 두고 고담준론(高談峻論)이 한창이다. 마당 앞쪽에는 고매(古梅) 한 그루가 용틀임을 했고, 그 앞의 괴석에는 일본에서 수입해온 소철이 심겨 있다. 마당의 탁자 위에 역시 귀한 중국제 화분에 수입 화초가 담겼다. 그 앞에 쌍상투를 쓴 총각 머리의 시동이 차를 달인다. 집 뒤란은 역시 대숲이고 학 두 마리가 빠지는 법은 없다.

김홍도의 다른 그림에는 야외에서 선비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곁에 다동이 차를 달인다. 탁자 위에는 거문고와 향로, 벼루 등이 놓였고, 화병에는 산호가 꽂혀 있다. 마당의 구조도 어쩐지 익숙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태호석을 중앙에 두고 소철과 파초가 양 옆에서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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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관, <팽차도(烹茶圖)>
개인 소장.


이재관의 <팽차도(烹茶圖)>도 예외가 아니다. 방안에는 앉은뱅이 의자에 걸터앉은 주인이 붓을 들어 글씨를 쓴다. 문짝도 없이 이렇게 개방된 구조의 집에 의자 생활을 하는 모습은 실제 광경과는 거리가 있다. 마당에는 의당 있어야 할 소품처럼 총각머리의 동자가 언제나 똑같이 생긴 다로 앞에 부채를 들고 쪼그린 채 앉아 있다. 매화나무가 소나무로 바뀐 것 말고는 위의 그림과 구도까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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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1820년, 종이에 수묵담채, 57.7 x 86.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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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이 그린 <누각아집도>에서도 중국풍의 난간식 건물, 의자에 앉은 사람들, 뜨락 한켠의 차 달이는 소동(小童)의 풍경은 여전히 판박이로 재생된다. 이런 그림들의 예는 얼마든지 더 들어 보일 수가 있다. 마당엔 파초나 소철과 괴석이 놓이고, 탁자 위에는 수입제 화분과 거문고 같은 악기가 놓인다. 주인은 좌식 생활에 익숙한 조선 사람답지 않게 굳이 의자에 앉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마당 한켠에는 차를 달이는 동자가 꼭 쌍상투를 틀고 앉아 있다.

이 정형화된 그림의 구도가 이처럼 계속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이 그림이 내걸렸을 사랑채 주인들의 정서 속에 어느 정도 공식화된 사유가 공유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제는 술이 아니라 차라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야 주인의 인격이 고아(高雅)해보이고, 집의 품격과 자리의 운치가 한층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과연 차는 실제로 그림 속에서만큼 일상적으로 소비되었던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온 조선이 10년간 마신 표류선이 싣고온 차




1760년 남해안에 이상한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탐문하고 보니, 그 큰 배에 가득 실은 것이 모두 차였다. 중국 경험을 한 서울의 높은 관리도 아닌 호남 지역의 일반 백성들은 중국에서 생산된 차란 물건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구경했다. 중국 사람들은 표류를 당한 난감한 처지에서도 특유의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배에서 그 차를 팔았다. 호기심에서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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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중국 선박의 일반적 모습. 일본 화가 이시자키 유시(石崎融思)의 그림이다.


그런데 국가의 공식 기록에서 이 표류선의 존재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기록에 그 자취가 아주 구체적이고도 강렬하게 남았다. 박제가(朴齊家)는 1778년에 쓴 [북학의]에서 강남과 절강 지역의 상선과 통상하자는 주장을 펴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황차(黃茶)를 실은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남해에 정박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온 나라가 그 황차를 10여 년 동안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또 1785년을 전후해 진도에서 유배중이던 이덕리(李德履, 1728~?)가 지은 [동다기(東茶記)]에도 1760년에 표착한 표류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풍습이 비록 작설을 사용하여 약에 넣기는 해도, 대부분 차와 작설이 본래 같은 물건인 줄은 모른다. 때문에 예전부터 차를 채취하거나 차를 마시는 자가 없었다. 혹 호사가가 중국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올망정, 가까이 나라 안에서 취할 줄은 모른다. 1760년에 배편으로 차가 오자, 온 나라가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알게 되었다.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따서 쓸 줄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또한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두 기록은 내용이 거의 같다. 1760년에 남해안에 차를 가득 실은 표류선이 왔다. 그 배의 차가 시장으로 나와 전 조선이 10년간 이 차를 마셨다. 조선의 일반 백성이 이를 통해 처음으로 차의 생김새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그 차가 떨어지자 다시 사람들은 차를 마시지 않는다.

이덕리는 [동다기]에서 표류선에서 팔던 차를 더 묘사했다. “차서(茶書)에 또 편갑(片甲)이란 것이 있는데 이른 봄에 딴 황차다. 차 파는 배가 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황차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창처럼 뾰족한 가지가 이미 자라, 결코 이른 봄에 딴 것이 아니었다.” “중국 배에서 파는 차를 보니, 줄기에 몇 치쯤 되는 긴 잎이 너댓 개씩이나 잇달아 매달린 것이 있었다.”

이 두 대목의 인용은 대단히 흥미롭다. 일단 황차라고 불린 차는 우렸을 때 녹색이 아닌 누런빛이 나는 발효차였다. 긴 잎이 너댓 개씩 매달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첫물의 고급차가 아니라 많이 자란 찻잎을 따서 발효시킨 것이었다. 편갑(片甲, 갑옷의 한 비늘조각 같이 생겼다는 뜻)이란 말을 쓴 것을 보면 그냥 잎차가 아니라 덩이로 만든 발효 떡차 형태였음이 분명하다. 떡차가 아니고서야 잎차를 어찌 10년이나 두고 마실 수 있었겠는가?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차를 약용으로만 알았지 기호음료로 마시지는 않았다. 앞서 본 그림 속의 풍경은 그저 관념 속에서나 나오는 것이었다. 차는 고기 먹고 체했을 때 푹 삶아 고약처럼 고아 구급약으로 먹었다. 다기도 없고 마시는 법도 몰랐던 터라 애초에 격조 있는 찻자리를 운위할 형편이 아니었다. 도대체 중국 배 한 척이 풀어놓은 차가 얼마나 많았기에 전 조선이 10년간 먹었다는 걸까? 이 말은 또 조선이 그때까지 얼마나 차에 관한 한 불모의 땅이었는지 웅변한다.

서울 살던 박제가가 그 말을 한 것을 보면 이 물건이 서울까지 흘러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한꺼번에 풀린 차가 조선의 입맛을 조금씩 바꾸었다. 특히 약용이 아닌 음용으로 경험한 차의 효능은 놀라웠다. 무엇보다 각성 효과가 대단했다. 공부하는 서생들이 차를 마시고 공부를 하면 집중력이 현저하게 향상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이덕리는 [동다기]에서 말한다. “차는 능히 잠을 적게 하며, 혹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공무에 있거나, 혼정신성(昏定晨省,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 안부를 물으며 효성을 다함) 하며 어버이를 봉양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필요한 것이다. 닭이 울자마자 물레에 앉는 여자나, 한묵의 장막 아래서 학업에 힘 쏟는 선비도 모두 이것이 적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열심히 돌아보지 않고 쉬지 않으며 밤을 새우는 군자라면 즉시 받들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체증을 내리는 약효도 여전했다. 이덕리의 설명이 이어진다. “배로 차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이를 또한 설사를 치료하는 약제로 여겼다. 지금 내가 딴 차로는 겨울철 여름철 감기에 두루 시험해보았을 뿐 아니라, 식체나 주육독(酒肉毒), 흉복통(胸腹痛)에도 모두 효험이 있었다. 설사병 걸린 자가 소변이 잘 안 나와 지리려 하는 것에 효과가 있으니 차가 수도(水道)를 조화롭게 해주어서이다. 학질 걸린 자가 두통도 없이 잠시 후 병이 뚝 떨어지니, 차가 머리와 눈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염병을 앓는 자도 이제 막 하루 이틀 앓은 경우, 뜨겁게 몇 잔만 마시면 병이 마침내 멈춘다. 염병을 앓은 날짜가 오래되었는데도 땀을 내지 못한 자가 마시면 그 즉시 땀이 난다. 이는 고금의 사람이 논하지 않았던 내용이나, 내가 몸소 시험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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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리의 [동다기(東茶記)]. 차를 가득 실은 표류선에 대한 기록부터 당시 조선의 차문화와 차의 효능, 차 제조 방법과 차 전매 제도 운용법 등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차는 놀라운 각성 효과뿐 아니라 전천후 만병통치약이기까지 했다. 이렇듯 표류선의 차는 이후 10년 동안 조선 사람들에게 특별한 소비 형태로 각인되었다. 이를 곁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이덕리는 차에 급격한 흥미를 느끼게 된 듯하다. 그는 당시 역모죄로 유배되어 진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젊어 서울 생활 당시 앞서 본 김광수의 와룡암에서 차를 얻어 마신 경험이 있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고급차를 골동 다기에 끓여 마셨다. 그 흐뭇한 기억이 오래 남아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유배지에서 다시 차와 대면했다. 그가 유배 왔을 당시 표류선의 차는 이미 흔적도 없는 옛일이었지만, 차에 관한 강렬한 인상은 그 지역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마셔본 사람들은 차가 중독성이 있는 음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각성 효과가 대단했다. 더욱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 차가 돈이 된다는 점은 놀랍고도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주변을 문득 둘러보았다. 거처하는 뒷동산의 자락에도 중국 표류선에서 팔던 것과 꼭 같은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차나무는 어디나 흔했다. 잡목 취급해서 땔감으로나 쓰던 천덕꾸러기 나무였다. 그것이 돈이 된다니 신통하고 신기했다. 이덕리는 이 차를 직접 만들어 보았다. 효과가 괜찮았다. 맛도 좋았다. 이만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는 [동다기]란 책을 지어, 차 제조 방법과 차 전매 제도 운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이와 별도로 [상두지(桑土志)]를 저술해서 차 판매로 얻어진 재정을 국가 안보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 보였다.

그의 말대로 실현되었더라면 조선은 생각지 않게 엄청난 국부 창출의 기회를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방책으로 국가에 지은 죄를 속죄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모죄를 저지른 유배 죄인이 유배지의 골방에서 파지 조각에 적어둔 이 저술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책도 그의 죽음과 동시에 잊혀졌다. 이것이 뒤에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을 거쳐, 초의 선사를 통해 추사 김정희와 자하 신위, 금령 박영보 등이 어우러진 차문화의 장관을 연출하는 성황을 빚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인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이 글에서 다룰 범위를 넘어선다.

때로 문화는 뜻밖의 한 장면을 통해 뜬금없이 진화한다. 표류선의 차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여기에 무슨 필연성이나 정합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차는 당시까지 약용 음료였고, 나중에 기호음료로 변했다. 반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차가 필수적인 일상 음료였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차가 없는 일상이란 상상하기 힘들었다. 조선 사람들의 눈에는 저들이 차를 왜 마시는지, 절차는 어찌 저리 까다로운지 이해되지 않았다. 표류선에서 흘러나온 차가 지속적으로 조금씩 이런 인식을 바꿔놓았다. 차는 더 이상 괴상한 음료가 아니라, 뜻밖에 잘하면 엄청난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유형 자산이면서 입맛과 건강을 담보해줄 블루 오션이었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971779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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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충북 영동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다.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며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다산 정약용이 창출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과 그 삶에 천착하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삶을 바꾼 만남]을 펴냈다. 더불어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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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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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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