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히스테리의 역사 2 - 남성 히스테리, 특정 계급과 인종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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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16-02-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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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히스테리’의 이질적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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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히스테리 환자의 사진. 19세기 말 남성 히스테리는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었다. <출처: (cc) russavia at commons.wikimedia.org>


1890년 7월 25일, 영국 신문 [펠멜 가제트(The Pall Mall Gazette)]와 [데일리뉴스(Daily News)]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의 단신(短信)이 실렸다. 기사는 얼마 전 프랑스에서 실시된 전국 징집제의 최종 과정에서 징집자의 5%가 면제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면제의 이유다. “지나치게 추한 자들”과 “남성 히스테리”를 보이는 장정들이 의사의 소견에 의해 징집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며칠 후 8월 9일 [펀치(Punch)]에도 동일한 두 가지 연유에 의해 군대에 “부적절하다”고 판명된 자들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언급된 대중매체 외에도 19세기 후반의 영국 대중매체에는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기사가 종종 실리곤 했다.1)

그리고 몇 년 뒤인 1895년,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내용을 담은 논문으로 비엔나 의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렇듯 19세기 후반에는 ‘남성’과 고대 그리스어 자궁(hystera)에서 유래된 ‘히스테리’의 이질적인 조합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었다.

19세기에는 대중매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기록이 이전 시기보다 빈번히 나타나게 된 것은 Fin de Siècle(세기말)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고, 대중매체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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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을 통해, 우리는 돌아다니는 자궁 이론으로부터 시작된 히스테리에 관한 담론(히스테리의 역사 1)을 간략히 살펴봤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여성에게 배타적으로 사용되어 온 경향이 다분한 이 ‘히스테리’의 역사를 생각했을 때, 어떻게 남성 히스테리라는 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사들은 언제부터 남성 히스테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원인과 증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남성 히스테리 또한 여성 히스테리와 마찬가지로 담론적ㆍ사회적으로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오늘은 이런 의문을 품고 남성 히스테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2)

이 글은 1, 2부를 통해 히스테리가 여성 히스테리로 불리든, 남성 히스테리로 불리든(물론 양성을 구도로 히스테리를 명확히 나눌 수 없음은 결미에서 서술한 바 있다) 히스테리의 역사에 있어 환자로 진단된 집단이 성, 계급, 인종 등의 범주에서 ‘타자'인 경향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쓰여졌다. 따라서 지면 관계상 여성 및 남성 히스테리에 대한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지 못했음을 밝힌다.

일단 남성 히스테리에 관해서 언급하자면, 문학계에서는 19세기 말 양성구유의 개념에 매료되어 히스테리를 남성의 것으로 전유했던 프로스트 등의 남성 문학가들을 다루는 남성 히스테리 연구가 있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처럼 1차 대전 후쓰여진 문학작품들 중 전쟁신경증(남성 히스테리의 일종이다)을 앓는 퇴역 군인들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에 관한 연구도 있다. 관심이 있는 독자는 읽어보길 권한다. 한편 전통적인 정신과 치료에서 최초로 인정한 남성 히스테리 형태는 전쟁신경증(혹은 포탄쇼크, shell-shock)이었다. 레일웨이 스파인(혹은 열차사고 증후군, railway spine) 및 전쟁신경증은 여성의 “전환 히스테리”와 달리 “정신적 외상에 의한 히스테리”라고 분류되었는데, 트라우마 개념은 이 두 부류의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전쟁신경증은 전쟁 노이로제, 전쟁 히스테리라고도 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환자들이 주로 만연했다. 20세기에는 프로이트 등의 학자들을 위시로 하여 히스테리가 심리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1차 대전 후에는 이들 환자들이 보였던 여러 이상증세들이 심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남성 히스테리는 병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이들은 꾀병을 부린다고 비난받았고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의료보험 및 연금보험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병을 연기하는 자들로 지탄받았다. 이들 역시도 이러한 비난을 통해 타자화된 것은 맞지만, 이 글의 논지상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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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남성 히스테리가 가능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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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우울(Melancholia I)>
1514년, 판화, 24 x 18.5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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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기, 사후 부검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해부학에서는 혁명적인 발전이 있었고 자궁이동설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다. 물론 의학과 다른 관점에서는 히스테리와 자궁과의 오랜 관련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17세기에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돌아다니는 자궁이 아니라, (자궁보다 성적인 함의가 훨씬 덜 느껴지거나 느껴지지 않는) 머리(뇌)와 신경체계였다. 바로 이 시기에 남성 히스테리에 주목하는 의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남성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기록도 작성되기 시작했다.

16세기 말의 프랑스 의사 샤를 르푸아는 남성 히스테리에 관해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광범위한 임상경험을 통해 히스테리 환자들이 느끼는 증후들은 머리(뇌)에 의한 것이며, 히스테리가 “남자와 여자에게 전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기록했다.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는 히스테리의 근원을 뇌로 명확히 이론화했고, 토마스 시든햄(Thomas Sydenham, 1624~1689)은 히스테리의 남성적 형태를 가리키기 위해 “히스테리성-심기증(hystero-hypochondriasis)”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히스테리는 남녀 모두에게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더욱 두드러졌다.

히스테리성-심기증이라는 명칭을 이해하려면 심기증(hypochondriasis)과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심기증과 멜랑콜리아의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복잡하지만 17세기의 양상을 살펴보자면, 이 시기 심기증은 멜랑콜리아라는 보다 커다란 병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당시 멜랑콜리아는 심기증을 비롯해 간질, 히스테리 등 온갖 잡다한 병과 수많은 증세 및 예후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항상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나 책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들(주로 남성 인문학자나 남성 과학자들)에게 주로 발생하는 병, 즉 ‘남성적인 멜랑콜리아’라고 부를 수 있는 병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학자들은 남성적 멜랑콜리아의 직접적인 원인이 지나친 공부로 인한 검은 담즙의 과잉이라고 믿었다. 또한 이 병은 환자의 “신체를 유약하게 만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며” 감정과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도 생각했다.3)

심기증과 멜랑콜리아의 문화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복잡하다. 현재에도 기분이 우울할 때 ‘멜랑콜리하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데, 17세기 사람들은 ‘멜랑콜리아’가 체액 중 하나인 검은 담즙의 과잉으로 비롯된, 육체적이고 심인적인 원인을 가진 병이라고 여겼다. 멜랑콜리아에는 간질, 히스테리, 심기증, 발작, 우울증 등 많은 병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원인과 증세는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인 것들까지 너무 잡다해서 차마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로버트 버턴(Robert Burton, 1577~1640)의 [멜랑콜리의 해부(Anatomy of Melancholy)](초판, 1621)는 전문 의학서적은 아니지만, 병의 종류, 원인, 증상, 예후, 치료법, 그리고 이 병에 대한 철학적, 의학적, 역사적 고찰까지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특히 남성과 여성에 따라 젠더화된 두 가지 유형의 멜랑콜리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녀, 수녀, 과부의 멜랑콜리>에 묘사된 여성의 멜랑콜리아는 원인, 증상의 측면에서 고전적으로 묘사된 여성 히스테리와 유사하고, <학문을 좋아하거나 과도한 학문으로 인해 얻게 되는 학자의 병>에 묘사된 멜랑콜리아는 남성에게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병은 주로 천재들의 병으로 묘사되면서 ‘항상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나 ‘책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들(주로 남성 인문학자나 남성 과학자들)’에게 쉽게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설명은 당대의 심기증에 관한 설명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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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남성적 멜랑콜리아의 증세와 원인은 당시의 심기증과 비슷했다. 게다가 심기증의 환자 또한 주로 섬세하고 공부를 많이 하는 남성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심기증은 멜랑콜리아의 남성적 유형으로도 여겨졌다. 17세기 이후 심기증으로도 불릴 수 있는 이러한 남성적 멜랑콜리는 복잡다단한 멜랑콜리아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이는데, 시든햄은 바로 이 시점에 심기증을 ‘히스테리의 남성적 버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히스테리와 심기증을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증세를 보이는 같은 병으로 규정했다.

해부학적 증거를 통해 이론적으로는 남성 히스테리가 가능해졌을지라도, 히스테리가 여성의 병이라는 오랜 인식 때문에 남성 환자에게 히스테리라는 병명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심기증은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는 주로 히스테리가, 남성에게는 주로 심기증이 발병한다”고 진단되었다. 이에 대해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는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에서 히스테리와 심기증의 불평등한 역사를 서술하며, “마치 조광증과 우울증에 의해 매우 일찍 구성된 것과 유사한 잠재적 짝패를 (성(性)에 관해서는) 히스테리와 심기증이 형성하기라도 하는 듯이, 히스테리와 심기증을 함께 다룰 당위성이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의 지적처럼, 남성 히스테리의 역사에서 “히스테리와 심기증을 한 가지 동일한 질병의 두 가지 형태로 점점 더 동류시하는 경향이 있는 작업은 느리지만 실현되는 중”이었다.



19세기, 샤르코와 프로이트의 남성 히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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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신경병리학자 장 마리 샤르코는 여성의 질병으로 여겨지던 히스테리를 남성에게도 부여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19세기 남성 히스테리 연구 확장에 기여하였다.


히스테리에 관한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던 장 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 1825~1893)를 필두로 19세기에는 남성 히스테리에 관해 이전 시기보다 훨씬 많은 연구결과가 나왔다. 파리의 여성 공중 정신병원 살페트리에르(Pitié-Salpêtrière Hospital)의 의사였던 샤르코는 수많은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을 연구하던 중, 피에르 브리케와 오귀스트 클렌의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저작을 읽고 남성 히스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이미 여성 히스테리의 권위자로 유럽 내 명성이 자자했던 본인의 연구결과를 인종과 성에 상관없이 논리적으로 확장시키고 싶었다. 남성 히스테리를 연구했던 의학사가 마크 S. 미케일(Mark S. Micale)은 샤르코가 “히스테리의 보편성을 확고히 하고자” 남성에게도 히스테리를 진단내렸다고 지적했다. 여성 병원인 살페트리에르가 남성 환자에게 개방된 것도 샤르코가 남성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샤르코는 정신적 증후를 동반하며 신경계에 문제가 생기는 남녀 공통의 ‘육체적인 병’으로서 히스테리를 이해했는데, 그 증세는 크게 중앙 감각 신경계의 기능부전과 운동신경의 장애로 나뉜다. 그의 진료 기록에 따르면 전자에는 전체 환자의 79퍼센트가 속하며, 이들은 감각 중추의 마비, 무감각, 신경과민, 실명, 색맹 등의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운동신경 장애의 경우 약 47퍼센트가 경련, 근육마비, 히스테리성 급성 통증, 호흡곤란, 부정확한 발음 등의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남성 히스테리의 병인학과 증후학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히스테리의 발병 원인으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개념을, 히스테리의 진단과 치료를 위해서 최면술을 도입했는데, 이 두 가지는 이후 프로이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여성 및 남성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샤르코의 연구를 직접 관찰했던 프로이트는 1895년,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논문으로 비엔나 의학계에 데뷔했다.

자, 지금까지 의사 및 학자들에 의해 남성 히스테리가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진단되고 서술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1부에서 여성 히스테리 담론을 둘러싼 시선에 주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 히스테리가 담론적ㆍ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었고 이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성 히스테리 담론을 둘러싼 학자들의 시선은 과연 어떠했을까?



남성 히스테리와 계급: 상층계급의 병 혹은 하층계급의 병



언급된 것처럼, 영국의 경우 히스테리성-심기증으로 표현되는 17세기의 남성 히스테리는 남성 학자나 천재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 병이었다. 그리고 18세기가 되면 심기증은 신경증(nervous illness)에 포섭되어 주로 신사계급(gentle class)의 섬세함을 특징짓는 병으로 여겨졌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남성 히스테리로 분류될 수 있는 이러한 병들에 대해 사람들은 주로 ‘상층계급에서 발생하는 병’이라고 인식했고, 환자들은 하나같이 “외모는 연약하고 행동에는 활기가 없다”거나, “여성적”이며 “수동적”이라고 묘사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설명되었다.

샤르코를 필두로 한 19세기 후반 파리학파의 연구를 보자. 남성 히스테리를 연구했던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 병을 ‘하층계급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또한 이 병에 취약한 요주의 인물들로 ‘육체노동자 계급’을 지목했다. 실제로 샤르코의 진료 기록에 히스테리 환자라고 진단된 남성들은 거의 일괄적으로 노동계층이거나 사회 최하층의 실직자들이었고, 그는 “남성 히스테리가 하층계급 사이에서 훨씬 더 빈번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의 기록이나 논문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광부, 막노동꾼, 기차나 기선의 화부, 기계 수리공, 잠수부, 담배공장의 노동자, 선원 등 “대부분 노동자로서 (정신적 외상을 유발할 수 있는) 우연한 사건들이나 중독들에 빈번히 노출되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남성 히스테리는, 17, 18세기의 남성 히스테리 환자들이 ‘여성화가 연상되는 연약한 육체’로 설명되었던 것과 반대로, “이들(육체 노동자들)의 육체에서 연상되듯 매우 남성적(masculine) 특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남성 히스테리는 왜 하층계급의 병인가



남성 히스테리는 왜 하필 하층계급의 병이었을까? 이것은 샤르코가 인종과 성을 불문하고 히스테리를 남녀 공통의 보편적인 병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부르주아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함의된 히스테리를 적용할 수 없었던 모순에 기인하기 때문이었다.

미케일은 사회의 새로운 주도계층으로 자리매김했던 남성 부르주아 계층을 위협할 수 없었던 샤르코가 의도적으로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남성 환자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환자의 계층에 따라 선택적인 진단을 내린 샤르코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미케일의 분석을 따르자면 이렇다. 샤르코가 (그때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던 자궁과의 관련성 때문에) 여전히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히스테리라는 병을 이용해, 남성 히스테리라는 이름을 하층계급에게 덧씌움으로써 사회에서 육체노동자를 ‘비정상’적 집단으로 규정하고 배제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샤르코의 히스테리 강의나 공개 치료에 참석했던 자들은 대부분이 부르주아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성에게나 있을 법한 히스테리에 걸린) 남성 히스테리 환자는 사회의 근본적 법칙을 전복하는 자들”이었으므로, 남성 히스테리는 사회의 불안요소로 취급된 하층 노동계급 남성에게 아주 적합한 병이었다.

남성 히스테리가 계급과의 관련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은 19세기 영국에도 해당된다. 남성 히스테리와 여성 히스테리를 놓고 비교ㆍ대조하느라 바빴던 프랑스 의학계의 경향과는 반대로, 영국에서는 의학전문 잡지인 [란셋(Lancet)]이나 [영국 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 등에는 남성 히스테리를 다루는 글이 별로 없다.

뿐만 아니라 영국 의사들은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저작도 거의 쓰지 않았다. 미케일은 이에 대해 17,18세기와 달리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형성되었던 강력한 중간계급 남성성의 이상(理想)때문에, 남성성을 상쇄시킬 수 있는 남성 히스테리가 의학계 내에서 논의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남성 히스테리와 인종: 주변부 인종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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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방랑하는 유대인(The Wandering Jew)>.
유대인에 대한 편견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한편 19세기는 유럽 열강들의 침략이 더욱 노골적으로 행해졌던 제국의 팽창기였다. 식민지 건설과 함께 유럽인들은 다양한 국가와 인종을 서열화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발맞춰 남성 히스테리 또한 인종의 차원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

남성 히스테리를 인종과 연결짓는 논문은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곳곳에서 나타났다. 놀라운 점은 국내의 남성 히스테리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던 영국에서도, 유색인종인 남성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사례는 의학저널에 비교적 빈번히 언급되었다는 점이다.

“(식민지) 소년에게 나타나는 흥미로운 히스테리 사례”나 “(식민지 인종의) 젊은 남성에게 나타나는 생소한 히스테리성 발작”뿐만 아니라 “식민지인 남성에게 나타나는 히스테리 사례” 등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들이 게재되었다.4)

또한 “남성 히스테리는 확실히 현대 니그로들에게 매우 흔하다”거나 “중국인과 몽골인종의 남성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신경체계를 가지고 있고, 아시아 남성이 세계에서 가장 히스테리적”이라는 표현도 논문에 등장했으며 “히스테리가 남북전쟁 이전, 남쪽의 미국 노예들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흔했다”는 의견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남성 히스테리 환자로 가장 빈번하게 지목된 것은 유대인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저널은 [인도의 진료 기록(Indian Medical Record)], [오스트랄라시아의 식민지 의학 저널 (Intercolonial Medical Journal of Australasia)]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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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히스테리는 왜 ‘특정한’ 인종의 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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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은 유전적 요소라는 미명 아래, 과학의 탈을 쓰고 인종을 우등과 열등으로 나누는 데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왜 유럽의 백인 남성은 히스테리에 잘 걸리지 않지만, 식민지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히스테리가 빈번하다고 주장되었던 것일까? 주변부의 인종을 중심부의 인종과 비교 혹은 대조함으로써 그들을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했던 담론에 관한 연구는 포스트모던 이후의 역사학과 문학비평 등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런 연구들은 특히 과학과 의학지식이 ‘주변부 인종이 비정상이며 열등하다’는 편견을 절대적인 진리로 둔갑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는, 현재에 와서야 “사이비 과학의 요소가 많다”고 평가되는 프란시스 갈톤(Francis Galton, 1822~1911)의 우생학이 당시에는 합리적인 과학으로 여겨져 인종분류와 차별의 도구로 숭배되다시피 했던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생학은 두개골 치수, 코의 길이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몸’을 통해 인종의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우등과 열등을 나누었다.

그런데 남성 히스테리 담론 내에서도 인종을 중심부 인종과 주변부 인종으로 나누고 비교ㆍ대조하는 경향이 보인다. ‘남성 히스테리’라는 병명을 기준으로 중심부 및 주변부 인종이 구분되고 더 나아가 우열과 열등의 가치가 부여되는 조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경계까지도 재단의 기준이 된 것이다. “남성 히스테리 환자의 거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라거나 유대인 남성은 “특히 히스테리성 노이로제”에 취약하며 과민한 신경계로 인해 “걸어 다니는 노이로제”라는 의사들의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중국인과 몽골인종 남성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신경체계”를 가지고 있다거나 “아시아 남성이 가장 히스테리적”이라는 설명은 어떤가? 이런 서술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민감하며 신경적이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해 인종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중국인과 몽골인종 남성, 즉 아시아 남성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발달한 신경체계 때문에 태생적, 생물학적으로 유럽인 남성에 비해 더 여성적이며 히스테리에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통해 서구의 학문이 서양과 동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왔고, 그 결과 서양에는 적극적인 남성성을, 동양에는 수동적인 여성성을 투영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여성은 불완전하다’는 유럽 내의 오랜 관념이 이러한 동양/서양,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구조와 연결되고 ‘문명/미개’라는 구도로 이어져, 동양이 서양에 비해 불완전하며 열등한 집단이라는 점을 재생산해 왔다고 분석했다. 동양, 여성, 수동/서양, 남성, 적극과 같은 이러한 구도는 남성 히스테리의 담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나치게 발달한 신경계로 인해 ‘더 여성적인’ 동양의 주변부 인종은 서양의 유럽인 남성에 비해 불완전하며 열등하다. 유색인종과 유대인들은 강건하고 굳건한 신경을 가진 서양 유럽인 남성의 정반대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이들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대조군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성 히스테리와 남성 히스테리의 문화사를 짧게 살펴봤다. 필자는 1, 2부에 걸쳐 여성 히스테리와 남성 히스테리라고 나누어 히스테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히스테리를 둘러싼 담론은 여성 히스테리와 남성 히스테리라는 양성(兩性)의 구도로 명확히 나눌 수 없다.

히스테리에 관한 담론이 돌아다니는 자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히스테리는 주로 성적인 요인에 바탕을 둔 여성의 병으로 연구되었지만, 살펴본 것처럼 이 외에도 계급과 인종 등의 요소가 복잡하게 교차하며 우월한 중심부 집단과 열등한 주변부 집단을 나누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히스테리가 시대별로 다르게 이해되었을지라도, ‘히스테리적’ 혹은 ‘히스테리 환자’라고 진단된 집단은 주로 성, 계급, 인종 등의 측면에서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집단으로 여겨지곤 했다는 점이다. 명확하고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경우에도 말이다. 바로 이것이 ‘히스테리’를 어디까지나 “타자에 대한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박형지, 설혜심, [제국주의와 남성성], 아카넷, 2004;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광기의 역사], 나남, 2003;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07; Ilza Veith, [Hysteria: The History of a Diseas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5; Jennifer Radden ed., [The Nature of Melancholy : from Aristotle to Kristeva],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Mark S. Micale, [Approaching Hysteri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Mark S. Micale, [Hysterical Men: The Hidden History of Male Nervous Illne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Mark S Micale, "Diagnostic Discriminations: Jean-Martin Charcot and the nineteenth-century idea of masculine hysterical neurosis", Ph D diss,. Yale University, 1987; Michael S. Kimmel edit., [Changing Men : New Directions in Research on Men and Masculinity], Sage Publication, 1988; Jan Ellen Goldstein, "Male Hysteria: Medical and Literary Discourse in Nineteenth-Century France", Representation, No.34 (Spring, 1994), pp. 134-165; John P. Wright, "Hysteria and Mechanical M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41, No. 2 (1980), pp. 233-247; Ursula Link-Heer, Jamie Ower Daniel trans., "Male Hysteria : A Discourse Analysis", Cultural Critique, No. 15 (Spring, 1990), pp. 191-220.





김지혜
글쓴이 김지혜는 문화사 전반에 관심이 많다. 연세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문화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석사논문으로 <19세기 후반 영국 정기간행물에 나타난 남성 히스테리>를 제출한 이후, 남성사 및 젠더사 등을 문화사적 관점으로 읽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쉽고 대중적이며 재미있는 역사 쓰기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으며, 이런 관심사의 연장선상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도서 [르네상스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2010)를 썼다.


발행2013.05.31.



주석


1
19세기에는 대중매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남성 히스테리’에 관한 기록이 이전 시기보다 빈번히 나타나게 된 것은 Fin de Siècle(세기말)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고, 대중매체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이 글은 1, 2부를 통해 히스테리가 여성 히스테리로 불리든, 남성 히스테리로 불리든(물론 양성을 구도로 히스테리를 명확히 나눌 수 없음은 결미에서 서술한 바 있다) 히스테리의 역사에 있어 환자로 진단된 집단이 성, 계급, 인종 등의 범주에서 ‘타자'인 경향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쓰여졌다. 따라서 지면 관계상 여성 및 남성 히스테리에 대한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지 못했음을 밝힌다.

일단 남성 히스테리에 관해서 언급하자면, 문학계에서는 19세기 말 양성구유의 개념에 매료되어 히스테리를 남성의 것으로 전유했던 프로스트 등의 남성 문학가들을 다루는 남성 히스테리 연구가 있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처럼 1차 대전 후쓰여진 문학작품들 중 전쟁신경증(남성 히스테리의 일종이다)을 앓는 퇴역 군인들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에 관한 연구도 있다. 관심이 있는 독자는 읽어보길 권한다. 한편 전통적인 정신과 치료에서 최초로 인정한 남성 히스테리 형태는 전쟁신경증(혹은 포탄쇼크, shell-shock)이었다. 레일웨이 스파인(혹은 열차사고 증후군, railway spine) 및 전쟁신경증은 여성의 “전환 히스테리”와 달리 “정신적 외상에 의한 히스테리”라고 분류되었는데, 트라우마 개념은 이 두 부류의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전쟁신경증은 전쟁 노이로제, 전쟁 히스테리라고도 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환자들이 주로 만연했다. 20세기에는 프로이트 등의 학자들을 위시로 하여 히스테리가 심리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1차 대전 후에는 이들 환자들이 보였던 여러 이상증세들이 심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남성 히스테리는 병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이들은 꾀병을 부린다고 비난받았고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의료보험 및 연금보험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병을 연기하는 자들로 지탄받았다. 이들 역시도 이러한 비난을 통해 타자화된 것은 맞지만, 이 글의 논지상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3
심기증과 멜랑콜리아의 문화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복잡하다. 현재에도 기분이 우울할 때 ‘멜랑콜리하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데, 17세기 사람들은 ‘멜랑콜리아’가 체액 중 하나인 검은 담즙의 과잉으로 비롯된, 육체적이고 심인적인 원인을 가진 병이라고 여겼다. 멜랑콜리아에는 간질, 히스테리, 심기증, 발작, 우울증 등 많은 병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원인과 증세는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인 것들까지 너무 잡다해서 차마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로버트 버턴(Robert Burton, 1577~1640)의 [멜랑콜리의 해부(Anatomy of Melancholy)](초판, 1621)는 전문 의학서적은 아니지만, 병의 종류, 원인, 증상, 예후, 치료법, 그리고 이 병에 대한 철학적, 의학적, 역사적 고찰까지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특히 남성과 여성에 따라 젠더화된 두 가지 유형의 멜랑콜리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녀, 수녀, 과부의 멜랑콜리>에 묘사된 여성의 멜랑콜리아는 원인, 증상의 측면에서 고전적으로 묘사된 여성 히스테리와 유사하고, <학문을 좋아하거나 과도한 학문으로 인해 얻게 되는 학자의 병>에 묘사된 멜랑콜리아는 남성에게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병은 주로 천재들의 병으로 묘사되면서 ‘항상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나 ‘책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들(주로 남성 인문학자나 남성 과학자들)’에게 쉽게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설명은 당대의 심기증에 관한 설명과 유사하다.
4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저널은 [인도의 진료 기록(Indian Medical Record)], [오스트랄라시아의 식민지 의학 저널 (Intercolonial Medical Journal of Australasia)]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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