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라쿠카라차와 멕시코 혁명 - 흥겨운 리듬 속 혁명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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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2회 작성일 16-02-0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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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혁명과 라쿠카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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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From the Dictatorship of Porfirio Diaz to the Revolution> 중 부분
1957~1965, 벽화, 멕시코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희한하다 그 모습

이 동요는 누구나 흥얼거려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3/4박자의 흥겨운 노래, 라쿠카라차. 이 노래가 멕시코 민요라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노래에 담겨진 이야기를 듣게 되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첫 번째, ‘아싸라비아’ 정도의 흥겨운 추임새일 거라고 추측하는 스페인어 ‘라쿠카라차(La cucaracha)’의 뜻이 ‘바퀴벌레’라는 사실. 영어로도 바퀴벌레를 나타내는 단어는 ‘Cockroach’이니, 스페인어도 영어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여 비슷한 형태의 단어로 귀결되었다는 것 정도는 추측이 가능하다.

두 번째, 이 노래가 흥겨운 행진곡이나 무곡이 아니라 ‘멕시코 혁명’이라는 다소 진지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멕시코 농민들과 원주민들의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구슬픈 이야기가 이 노래에 담긴 메시지라는 사실.1)

이러한 번안 가사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스페인어 원곡을 번안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번안된 곡을 한국어로 다시 번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어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When the soldiers go on marching, Through the valleys and our home towns, Children all come out to greet them with happy smiled and laughter. La cucaracha, La cucaracha, I guess it was good old times La cucaracha, La cucaracha, I remember all their fa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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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필자도 즐겨보는 한 교육채널의 프로그램에서 이 내용이 방영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이 노래에 담긴 멕시코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특히 국내에 생소한 멕시코 혁명이라는 주제를 환기시키고, 그 혁명의 과정에서 멕시코 농민들의 빈곤의 아픔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준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다만 5분이라는 짧은 시간만이 할애된 프로그램의 특성상 멕시코 혁명의 다양한 면모를 자세히 보여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

오늘은 필자의 전공을 살려,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멕시코 혁명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물론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설키고, 서로 다른 욕망이 충돌하거나 연합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사건들을 멕시코 혁명이라는 한 단어에 함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그리고 어떤 사건들을 멕시코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도 학자들 간에 여전히 논쟁 중이라는 점을 우선 서두에 밝히고자 한다.


라쿠카라차의 원 가사




라쿠카라차는 사실 기원을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스페인의 민요 가락이었다. 본래 음악에 붙여진 가사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슬림을 몰아내던 ‘레콩키스타(Reconquista)’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불리던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De las patillas de un moro무어인들의 구레나룻으로
tengo que hacer una escoba,빗자루를 만들어야겠어,
para barrer el cuartel왜냐하면 스페인 병영의
de la infantería española.바닥을 쓸어야 하거든.


무어인, 즉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무슬림들을 비하하는 내용이 담긴 이러한 내용의 노래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노래가 ‘라쿠카라차’라는 제목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스페인 본토가 아닌,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 멕시코에서였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에서 이 선율에 가사가 붙여져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향유된 시기는 바로 멕시코 혁명기였다. 그리고 이때 붙여진 가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와 우리가 즐겨 듣는 라쿠카라차가 된 것이다.

당시 만들어진 라쿠카라차의 가사는 한 가지 버전이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형태의 가사가 존재했는데, 지금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불리곤 한다.

다만 멕시코의 전설적인 마리아치 밴드 ‘로스 트리오스 판초스(Los Trios Panchos)’가 유럽 및 미국, 그리고 멀리 아시아에까지 큰 인기를 얻은 이후로 그들의 가사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다. 그럼 여기서 라쿠카라차 가사의 일부를 살펴보자.





La cucaracha, la cucaracha바퀴벌레, 바퀴벌레,
ya no puede caminar더 이상 걸을 수가 없네.
porque no tiene, porque le falta왜냐하면, 더 이상
un cigarro que fumar피울 담배 한 개비도 없기 때문에.






Todo se ha puesto muy caro이 혁명 중에
con esta Revolución,모든 것들이 다 비싸졌어.
venden la leche por onzas우유도 찔끔찔끔
y por gramos el carbón석탄도 몇 그램밖에는 팔지를 않아


바퀴벌레는 바로 가난한 농민들을 은유하는 말이다. 피울 담배도 없이 힘이 들어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는 신세를 처량하게 한탄하는 가사가 담겨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본래는 담배(Un cigarro) 대신 마리화나(Marihuana)로 불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리화나라는 향정신성 물질을 대중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넣을 수는 없는 법. 널리 알려진 버전은 그나마 순화된 담배로 바뀌었다.

또 혁명 중에 생필품을 구할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는 가사도 등장한다. 우유나 석탄 같은 생필품을 풍족하게 구하지 못하는 현실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라쿠카라차는 멕시코 혁명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사가 담겨져 있다. 멕시코판 민중가요라고나 할까?

하지만 라쿠카라차가 재미있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내용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의 가사들을 살펴보자.





Con las barbas de Carranza카란사의 턱수염으로
voy a hacer una boquilla장식을 만들러 쫓아가야겠어.
pa' ponerla en el sombrero위대하신 판초 비야의
del famoso Pancho Villa모자에 씌울 장식을 말이야.






En el norte vive Villa북쪽에는 비야가 살아있고
en el sur vive Zapata남쪽에는 사파타가 살아있지.
lo que quiero es venganza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por la muerte de Madero마데로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것.


무어인의 구레나룻이 카란사의 턱수염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염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가사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카란사와 판초 비야, 사파타, 그리고 마데로. 이 사람들은 모두 멕시코 혁명의 중심에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 노래를 부르는 멕시코 대중들에게는 어떤 이는 영웅으로 어떤 이는 악당으로 느껴지리라.


혁명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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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피리오 디아스 대통령. 장기간의 군부독재 기간 동안 멕시코의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이끌었지만, 불균형한 경제발전과 반민주적인 정치형태로 인해 전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출처: (cc) Aurelio Escobar Castellanos at en.wikipedia.org>


1876년 포르피리오 디아스(José de la Cruz Porfirio Díaz Mori, 1830~1915)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했을 때, 멕시코는 정치적 불안정과 낙후된 경제로 존립 자체가 희미한 상태였다. 1810년 독립선언 이후 무려 36명의 대통령 혹은 황제가 바뀌면서 멕시코를 통치할 정도였고, 산타안나 대통령은 영토의 반 이상을 미국에게 팔아버리는 얼토당토않은 짓거리를 했으니 말이다. 경제는 더욱 참혹한 상태였다. 텅 빈 국고와 지나친 외채, 식민지 시절의 기술과 도구에 의존하는 낙후된 농업과 광업. 게다가 운송수단도 소달구지 아니면 사람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직접 걸어야만 하는 수준이었다.

이에 사명감(?)을 느끼고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계몽하여 근대화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포부를 품은 인물이 포르피리오 디아스였다. 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외국 자본을 들여와 철도망을 갖추기 시작했고, 각종 산업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멕시코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어느새 멕시코는 원면수입국가에서 수출국가로 탈바꿈했고, 석유개발에 있어서도 국제적으로 수위권을 다투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이 외국의 소유였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군대의 힘을 바탕으로 한 철권통치 덕택이었다. 무엇보다도 디아스는 ‘싱코데마요(Cinco de Mayo)’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사라고사 장군의 부관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디아스는 표면적으로는 근대화를 내걸었지만, 멕시코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지방의 소수 지주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이중적인 정치에도 능했다. 그들은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인디오나 농민들이 공동체로 소유하고 있는 공유지들을 자신들에게 집중시켰고, 디아스는 이를 농촌의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주었다.2)

심지어 이러한 토지의 집중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외국자본을 통해 이루어지기 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의하면 1910년 멕시코 영토의 22%가 미국의 소유였고, 미국 신문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800만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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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 속에 디아스의 통치 시기 동안 멕시코의 농경지는 98%가 소수의 지주 혹은 기업이 소유하는 ‘아시엔다(Hacienda)’라는 이름의 대농장으로 변모했고, 농민의 90%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다.3) 농민들이 멕시코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당연히 이러한 현실에 속에서 농민들의 저항과 소요는 여러 번 발생했지만 디아스의 군사정권은 이들을 처참하게 군화발로 짓밟을 뿐이었다.

사실 아시엔다의 문제는 단지 토지의 소유관계로 단순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기는 했지만, 아시엔다의 운영 자체는 매우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거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가 없는 노예와 같은 수준으로 일했으며, 이들은 아시엔다 내의 농장주 직영 상점을 통해서만 생필품을 구입하고 돈을 빌리는 등의 상상도 못할 착취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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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바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희생을 치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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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마데로 대통령. 디아스의 독재를 비난하고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혁명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1876년부터 1911년까지 무려 30년 이상 독재를 꾸려온 디아스 체제에 포문을 연 것은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Ignacio Madero González, 1873~1913)였다.4) 마데로는 1910년,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la San Luis Potosí)’을 발표하면서 디아스의 독재를 비난하고, 정당한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계획에는 새로운 멕시코를 위해 외세 배척, 농지 개혁, 그리고 노동 조건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새로운 멕시코를 세우기 위해 모든 멕시코의 민중들이 궐기해야만 한다고 외쳤다.

멕시코의 역사에서 1876년에서 1911년에 이르는 시기를 일반적으로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기간 동안 멕시코를 통치했던 대통령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중임 금지 조항이 명시된 헌법에 의해 몇 년 간 마누엘 곤살레스(Manuel Gónzalez)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기간(1880~1884)을 제외하더라도, 디아스의 독재체제는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물론 곤살레스 역시 디아스의 허수아비 정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디아스는 끊임없이 35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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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침에 수많은 지식인들, 중산계급들 혹은 디아스 체제에서 소외된 지주나 군부세력들, 그리고 농민지도자들이 일거에 멕시코의 역사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멕시코 북부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판초 비야(Pancho Villa; 본래 이름 José Doroteo Arango Arámbula, 1878~1923)’가 등장했다. 사실 비야는 미국이나 북부 농장의 소나 말을 도둑질하던 강도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훔친 돈이나 가축들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농민 및 인디오들의 지지를 얻었고, 디아스의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혁명군의 북부 대표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임꺽정 같은 인물이라고 보면 대충 맞겠다.

남부에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날카로운 표정과 강렬한 눈매, 그러나 더없이도 순수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Salazar, 1879~1919)가 등장했다. ‘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라는 구호를 외치며 등장한 사파타는 비록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농민과 노동자들은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가난한 민초들의 지지를 얻은 판초 비야와 사파타는 멕시코 혁명 최고의 영웅이었다. 결국 혁명군은 1911년, 연방군을 물리치고 마데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디아스는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데로는 바로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확립하려 했고, 삼권분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시민들이 정당을 결성하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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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2월 4일 멕시코시티에 함께 입성한 비야(왼쪽)와 사파타(오른쪽). 이때만 해도 혁명은 그들의 승리로 귀결될 것처럼 보였다. <출처: (cc) Grimaldydj14 at commons.wikimedia.org>


그렇지만 멕시코의 상황은 이러한 소극적인 개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전히 아시엔다를 중심으로 한 문제가 남아있었고, 당연히 토지를 되찾지 못한 농민들의 불만은 해소될 수 없었다. 디아스의 권력을 지키던 군 세력도 여전히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혁명군 연합 세력 중 가장 먼저 등을 돌린 것은 사파타였다. 그는 마데로의 소극적인 토지 개혁에 실망하여 투쟁을 시작했다.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1913년 2월 마데로는 자신의 국방장관이었던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 1850~1916)에게 살해당하고야 말았다.

마데로의 비극적인 죽음은 다시 혁명군을 결집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북부 코아우일라 주의 주지사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 1859~1920)였다. 그는 우선 분열된 혁명군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리고 과달루페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외세나 대지주 등 다양한 혁명의 적이 있지만, 우선은 정권을 찬탈한 우에르타를 몰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판초 비야와 사파타는 다시금 힘을 합쳐 각 지방에서 우에르타의 군을 몰아내는 투쟁에 나선다. 아마도 이때 비야와 사파타를 따르는 농민 혹은 노동자들은 힘차게 라쿠카라차를 불렀을 것이다. “북쪽에는 비야가 살아있고, 남쪽에는 사파타가 살아있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마데로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것.”

마침내 오브레곤 장군(Álvaro Obregón Salido, 1880~1928)을 앞세운 카란사가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면서, 우에르타는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1917년 카란사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혁명의 내전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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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대통령. 비야와 사파타를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대치했던 그 역시 측근에게 배반당하면서 암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카란사가 비야나 사파타 등을 진정한 동지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란사는 그들이 멕시코를 문란하게 만드는 도적들이라고 생각했다. 카란사를 지지하는 세력은 지식인들과 중산계층, 그리고 디아스 시절 동안 소외되었던 지주계층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줄 합법적이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꿈꿨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농민이나 노동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농촌 공동체의 회복과 자치를 꿈꾸는 사파타나 비야의 혁명은 그들의 이상과는 대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은 명확하게 분리되고야 만다. 대통령이 된 카란사는 비야와 사파타를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면 비야와 사파타는 카란사 진영을 혁명의 배반자라 생각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카란사의 수염을 떼어 비야의 모자 장식을 만들겠다는 라쿠카라차는 아마 이때 농민측 혁명군의 노래였을 것이다.

이 내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가장 먼저 사파타가 카란사 정부의 음모로 처절하게 암살당했다. 카란사 역시 믿었던 오브레곤에게 배신당하고 암살당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비야 역시 정부군의 사주를 받은 이름 모를 자들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렇게 혁명의 한 국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어찌 보면 조연에 불과했던 오브레곤에게 정권이 넘어가면서 혁명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라쿠카라차로 기억되는 멕시코 민중의 영원한 영웅, 비야와 사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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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마리아치의 흥겨운 연주에 맞추어 라쿠카라차를 부르는 멕시코 민중들은 비야와 사파타의 혁명을 기억하고 있다. <출처: gettyimages>


멕시코의 대문호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1928~2012)는 멕시코 혁명에는 두 개의 혁명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북부의 판초 비야와 남부의 사파타 같은 민중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혁명으로, 그들은 지방자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의를 꿈꿨다. 또 하나의 혁명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지식인들, 농장주, 그리고 상인들의 혁명으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축으로 근대적이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멕시코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마도 마데로, 그리고 카란사 등의 혁명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민중의 영웅 비야와 사파타는 제거되었고, 그들의 꿈도 그들과 함께 부서지고야 말았다. 반면 국가주의적이고 중앙집권주의적 근대화를 요구했던 카란사, 그리고 이후 오브레곤에 의해서 계승된 정부가 내세운 혁명은 승리했다.5)

결국 오브레곤을 계승한 정권은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변함없이 멕시코를 지배했다. 이들은 모두 멕시코 소노라 지방 출신이었는데, 이 시대를 멕시코 역사는 ‘소노라 왕조(Sonora Dynasty)’ 시대라고 부른다. 오죽하면 ‘왕조’라고 부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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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멕시코 민중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승리한 자들의 혁명이 아니라, 패배한 비야와 사파타들의 혁명이라는 점이다. 라쿠카라차의 가사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라쿠카라차가 불리고 또 불리는 동안, 비야와 사파타에게 희망을 걸었던 민초들의 이상, 비록 가난하고 고달프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던 그들의 바람은 바퀴벌레처럼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임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백종국, [멕시코 혁명사], 한길사, 2000; 엔리케 크라우세, 이성형 역, [멕시코 혁명과 영웅들], 까치, 2005; 존 H. 엘리엇, 김원중 역, [히스패닉 세계], 새물결, 2003: Frank McLynn, [Villa and Zapata: A History of the Mexican Revolution], 2001; Michael J. Gonzales, [The Mexican Revolution, 1910-1940], 2002; Friedrich Katz, [The Life and Times of Pancho Villa], 1998; Womack, John, [Zapata and the Mexican Revolution], 2011; Walter D. Mignolo, "The Zapatistas's Theoretical Revolution: Its Historical, Ethical, and Political Consequences", [Review (Fernand Braudel Center)], Vol. 25, No. 3, 2002, pp. 245-275; William Schell Jr., "Emiliano Zapata and the Old Regime: Myth, Memory, and Method", [Mexican Studies/Estudios Mexicanos], Vol. 25, No. 2, 2009, pp. 327-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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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06.07.



주석


1
이러한 번안 가사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스페인어 원곡을 번안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번안된 곡을 한국어로 다시 번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어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When the soldiers go on marching, Through the valleys and our home towns, Children all come out to greet them with happy smiled and laughter. La cucaracha, La cucaracha, I guess it was good old times La cucaracha, La cucaracha, I remember all their faces ……”
2
심지어 이러한 토지의 집중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외국자본을 통해 이루어지기 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의하면 1910년 멕시코 영토의 22%가 미국의 소유였고, 미국 신문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800만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
사실 아시엔다의 문제는 단지 토지의 소유관계로 단순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기는 했지만, 아시엔다의 운영 자체는 매우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거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가 없는 노예와 같은 수준으로 일했으며, 이들은 아시엔다 내의 농장주 직영 상점을 통해서만 생필품을 구입하고 돈을 빌리는 등의 상상도 못할 착취에 시달렸다.
4
멕시코의 역사에서 1876년에서 1911년에 이르는 시기를 일반적으로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기간 동안 멕시코를 통치했던 대통령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중임 금지 조항이 명시된 헌법에 의해 몇 년 간 마누엘 곤살레스(Manuel Gónzalez)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기간(1880~1884)을 제외하더라도, 디아스의 독재체제는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물론 곤살레스 역시 디아스의 허수아비 정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디아스는 끊임없이 35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
결국 오브레곤을 계승한 정권은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변함없이 멕시코를 지배했다. 이들은 모두 멕시코 소노라 지방 출신이었는데, 이 시대를 멕시코 역사는 ‘소노라 왕조(Sonora Dynasty)’ 시대라고 부른다. 오죽하면 ‘왕조’라고 부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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