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교황에 대한 이야기 - 예수의 후계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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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16-02-0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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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시국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는 어디일까? 모나코? 산마리노? 어떤 이들은 영국 근해의 마이크로네이션인 시랜드 공국(The Principality of Sealand)을 가장 작은 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국가 중 가장 작은 나라는 바로 바티칸 시국(바티칸 市國,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이다. 이탈리아 로마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면적 0.44㎢에 인구가 800여 명 정도라고 하는 바티칸 시국은 사실 로마에 거주하는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교황청에 봉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뿐이지만 엄연히 독립적인 국가의 지위를 갖고 있다.

바티칸 시국이 가진 영토가 작다고 해서, 교황의 힘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에게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든, 교황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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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시국의 국기. 왼쪽의 황금색(노란색)과 오른쪽의 은색(흰색)은 각각 하늘과 지상을 의미한다.





3층의 황금관과 두 개의 열쇠로 이루어진 교황의 문장.




아무리 영토가 작다고 해도 국가인 만큼 바티칸 시국 역시 국기를 가지고 있다. 독특하게도 바티칸 시국의 국기는 공식적으로 정사각형이다.

우선 바탕을 살펴보자. 정중앙을 가로질러 왼쪽은 황금색(실제로 깃발을 제작할 때는 노란색으로 표현한다는 규칙이 있다), 오른쪽은 은색(마찬가지로 하얀색으로 표현한다는 규칙이 있다)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각각 하늘과 지상을 의미하는 색깔이다.1)

아마도 교황의 권위가 하늘과 땅 모두에 퍼진다는 의미, 혹은 교황이 대표하는 기독교와 유일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두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문장 혹은 도상에서 금속의 색깔인 황금색과 은색은 함께 쓸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바티칸 시국의 국기는 이런 규칙을 깨고 있는데, 이는 바티칸 시국이 인간의 규칙이 아닌 신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변명 혹은 예외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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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번에는 국기에서 핵심적인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교황의 문장을 살펴보자. 교황의 문장은 황금관과 두 개의 열쇠로 이루어져 있다. 맨 위의 십자가 아래로 세 개의 왕관이 겹쳐있는 듯 3층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황금관은 일반적으로 삼중관으로 부르고 있다.

이 관은 교황이 대관식 등의 공식 행사 때 쓰게 되며, 교황만이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교황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황이 처음부터 삼중관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원래 교황은 그냥 일반적인 관 혹은 이층으로 이루어진 관을 썼고, 무려 3층이나 되는 관을 사용하게 된 것은 14세기 초인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PP. V, 1264~1314) 때부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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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관을 쓴 교황 비오 12세(Pius PP. XII, 1939~1958). 홀로코스트를 묵인했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이 유대인 수천 명을 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삼중관이 3층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상징한다는 설. 둘째, 교황이 갖는 신품권(1층), 교도권(2층), 사목권(3층)을 상징한다는 설. 셋째, 군주들의 아버지, 세계의 통치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뜻한다는 설 등.

이 세 가지 설 모두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필자 생각에는 그저 상징적으로 교황을 진정 높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던 요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교황은 왕보다도 높고, 왕 중의 왕인 황제보다도 높게 여겨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럼 교황의 문장에서 삼중관 아래에 위치하는 열쇠 두 개는 무엇일까? 열쇠의 색깔은 황금색과 은색이다. 이 색깔은 바티칸 시국의 깃발을 구성하는 황금색과 은색, 즉 하늘과 지상을 의미한다. 즉, 이 열쇠는 각각 하늘의 열쇠와 땅의 열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열쇠는 대체 교황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왜 열쇠가 교황을 상징하는 문장과, 교황의 통치령인 바티칸 시국을 상징하는 깃발에 그려져 있는 것일까?



교황의 열쇠,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열쇠의 이미지는 유럽 미술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 미술에 나타나는 열쇠의 이미지는 교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몇 가지 예술 작품을 통해 열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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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Saint Peter>1610~1612년, 107 x 82cm,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엘 그레코, <Saint Peter>1610~1613년, 209 x 136cm,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 산 로렌초 수도원 소장.





프란시스코 고야, <st Peter Repentant>1823~1825년, 29 x 25.5cm, 미국 워싱턴 필립스컬렉션 소장.




좌측으로부터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가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힌트가 필요한가? 그림을 잘 살펴보자. 이번에도 반복되는 상징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중세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이 가장 즐겨 표현했던 소재가 [성경]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예술가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나 인물들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곤 했는데, 문제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성경] 혹은 구전을 통해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 신체적 특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겠지만, [성경]의 시대는 사진은커녕 초상화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기 아닌가? 결국 어떤 인물을 그렸을 때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고, 그러한 이유에서 등장한 것이 각 인물들에 부합되는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그림 혹은 조각을 보다가, 특정한 상징이 나오면 그 인물이 “아, 누구로구나!”라고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고대, 중세, 그리고 근세를 아울러 대부분의 예술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는 그 작품에 숨겨진 상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회화 작품들에서는 ‘열쇠’가 정답이다.

회화만이 아니라 조각에도 이러한 열쇠의 이미지는 반복된다. 아래 사진은 각각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밖과 안에 위치한 조각이다. 두 그림 모두 자세히 살펴보면 열쇠를 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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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바깥의 조각상. 주세페 데 파브리스(Giuseppe De Fabris)의 작품이다. <출처: (cc) SteO153 at en Wikipedia.org>





성당 안에 위치한 조각상.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제 순서는 ‘열쇠’라는 상징과 부합하는 성경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열쇠를 쥔 자, 과연 누구일까? 정답은 바로 예수가 ‘가장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제자, 베드로다.



천국의 열쇠를 쥔 자,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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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예수(Christ Delivering the Keys of the Kingdom to Saint Peter)>
1482년경,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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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베드로는 아마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 예수를 가장 의심했던 사람도 베드로고, 기적을 본 후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도 베드로다.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을 주저하지 않았던 자도 베드로고, 예수가 홀로 기도하러 떠났을 때 가장 먼저 발 벗고 그를 찾으러 나선 이도 베드로다.

예수를 잡아가기 위해 폭도들이 들이닥쳤을 때 칼을 들어 폭도 한 사람의 귀를 자른 사람도 베드로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제자였음에도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뒤 두려움에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 역시 베드로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는 신성에 가까운 예수의 이미지와 대비되면서 성질이 급하고, 어리석으며 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나타나듯이 베드로의 이러한 면모를 예수는 몹시 아끼고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베드로에 대한 사랑은 다음의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제16장 제17~18절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어받을 교회를 베드로를 통해 굳건히 세우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제16장 제19절

마태복음의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왜 열쇠가 베드로의 상징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훗날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를 통해 천국으로 가는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길게 돌고 돌아 교황의 문장 속에 담긴 베드로의 상징, 곧 열쇠를 언급한 이유, 그리고 그 열쇠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했던 마태복음에 전해지는 말과 관련이 있음을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가 훗날 중세 유럽 세계를 지배하고 지금까지도 세계 인구 6분의 1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2)

2011년도 교황청의 통계연감에 의하면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는 12억 1,359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17.5%를 차지한다고 한다. 인구 1/6 이상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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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를 계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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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시국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진 이후 1506년부터 재건축을 시작하여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온 곳이다. <출처: Gettyimages>


서기 80~90년경, 기독교 공동체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예수 사후 기독교 공동체를 지탱해준 것은 예수와 함께 생활한 제자들, 혹은 예수의 삶을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사도라 불렸던 이들은 모두 죽었고, 특히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 격이었던 베드로와 바울도 로마에서 처형을 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던 예루살렘 교회도 70년경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의지할 곳은 사도들이 남긴 말씀뿐이었다. 베드로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으며 바울이 어떤 서신을 남기고 공동체에 어떤 가르침을 남겼는지가 기독교 공동체에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기독교 공동체가 맞닥뜨린 많은 신앙 논쟁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관련한 논쟁,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련한 논쟁 등이 기독교 공동체를 덮쳤을 때에도 이를 반박하면서 소위 정통 기독교 신앙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승되어 온 사도들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특히 2세기경 유럽 세계를 풍미했던 그노시스파3)(Gnosticism)는 기독교 공동체를 뿌리째 뒤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위기를 느낀 기독교 공동체는 점차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통’신앙과 교회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노시스파(Gnostism)란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유행했던 종파 중의 하나다. 외관상 기독교를 표방했지만 그리스, 혹은 이집트의 다양한 토착 종교들이 혼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주로 영혼과 육체, 선과 악의 극단적인 이분법,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수양을 통한 구원 등의 교리를 가진 분파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그노시스파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격인 예수가 육신의 모습으로 탄생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그노시스파의 교리에 따르면 육신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어떻게 육신으로 올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노시스파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1세기 전후의 유럽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당연히 기독교 정통교리와는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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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등장한 것이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마의 세 교회였다. 이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기독교 공동체를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들을 베드로가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 교회 중에서도 로마교회야말로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의 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당시 유럽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있었던 데다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4)

물론 엄밀히 말해 대략 6세기까지는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5대 주교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위에 언급한 바대로, 베드로와 바울의 후광을 입은 로마교회의 상징성은 점차 다른 교회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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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로마의 주교가 점차 모든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교황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Ⅰ, 274?~337)에 의해 로마 세계에 공인되면서부터 보다 정밀하게 조직화된 교회의 서열구조가 만들어지고, 로마의 주교는 점차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교황, 기독교 세계의 황제?



사실 위에서 로마의 주교를 ‘교황’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교황이란 말 그대로 로마의 주교이고,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엄밀히 말해 대략 6세기까지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5대 주교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물론 베드로나 바울의 후광을 입어 조금의 우위를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시 교회의 주교는 사실 세속 권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야말로 ‘기독교 세계 외부에 있는 보편주교’라고 자처했을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기독교와 관련한 문제를 논의하는 공의회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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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임명권을 둘러싸고 대립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권이 세속 황제의 권력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계는 황제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정치권력의 부재로 영향력을 잃게 된 로마가 오히려 기독교의 중심이 되어야만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제 로마는 제국의 문화와 권력의 중심지에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는 예수를 계승한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곳, 베드로와 바울 등 수많은 성인들이 순교를 당한 곳이라는 기독교 문화가 넘실대는 곳이 된 것이다.5)

실제로 마태복음의 언급을 토대로 베드로가 건설한 로마교회, 그리고 그 로마교회의 주교야말로 다른 교회의 수장격이 된다는 언급을 문서로 남긴 사람이 당시 로마주교이자 시인이었던 다마수스 1세(재위 366~38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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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교황이 황제와 대립할 수 있을 만큼 힘을 얻게 되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황제권과 교황권이 부딪혀 표면적으로 교황권의 강력함을 보여주었다는 예로 자주 언급되는 소위 ‘카노사의 굴욕6)’이 11세기 초에 일어난 것이니 말이다.

물론 5세기 중반 로마교회의 수위권과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비견할만한 ‘기독교의 평화(Pax Christiana)’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대교황 레오 1세(Leo PP. I, 400?~461)가 있기는 했지만, 교황이 황제와 비견할만한 힘을 가졌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백 년의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1075년, 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충돌한 사건이다. 수세에 몰린 황제는 눈으로 뒤덮인 카노사에 가서 맨발로 3일 동안 간청하여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 우리는 교황이 황제를 이긴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얻은 것은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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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계승한 베드로, 베드로를 계승한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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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9일 취임식 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인사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전 세계 인구 6분의 1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그는 앞으로 가톨릭의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인가. <출처: (cc) Fczarnowski at en.wikipedia.org>


교황이 기독교 세계의 황제,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평화의 수호자 역할을 맡기까지는 사실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으며 그 길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서로마와 동로마가 분리되면서 가톨릭 세계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분열되는 상처를 겪었고, 정치권력 간의 이합집산과 결부되어 교황이 죽거나 고초를 겪은 일도 많았다.

심지어 오랜 기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에 각각 두 명의 교황이 세워져 서로 대립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역사는 기독교 세계가 영원히 적으로 간주한 무슬림까지 고려해야만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황이 흥미로운 점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큼 강력한 군대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항상 황제와 대립할 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중세 유럽의 역사 곳곳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교황 스스로의 역량, 혹은 교황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던 다양한 세속권력들의 이해관계 등이 교황권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려면, 사람들이 교황을 진정한 기독교의 수호자 혹은 수장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모든 믿음의 근원은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성경], <마태복음>에 남겨진 예수의 말씀 몇 줄 덕택이었다.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울 반석을 마련’하고 ‘천국으로 통하는 열쇠를 베드로에게 맡기겠다’는 약속이 그것이다. 따라서 교황은 예수를, 그리고 베드로를 계승했음을 끊임없이 주장해왔고, 그것은 실제로 통했다.

‘예수―베드로―교황’이라는 계승의 연결고리는 점차 중세를 거쳐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고해졌고, 곧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신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될 정도가 되어버렸다.

황제가 유럽의 지상을 정복하는 사이, 교황은 유럽 기독교인 대다수의 마음을 정복해버린 것이다. 신앙에 근거한 교황에 대한 믿음은 훗날 유럽 세계가 팽창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때, 교황이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교황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신의 섭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과오들을 저지른 적도 많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작금의 시대에도 성적소수자 문제, 낙태 혹은 피임과 관련한 문제 등에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비난과 비판의 직접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7)

사실 교황이 지금처럼 전 인류의 수호자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20세기 중후반, 요한 23세(재위 1958~63)와 바오로 6세(재위 1963~78)의 역할이 컸다. 소위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라고 부르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은 교회의 사명을 ‘전도’로부터 ‘인류 공동선 실현, 인간 존엄성 증진’으로 변모케 했었다. 이후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그리고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에 들어서 가톨릭은 다시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베네딕토 16세 사임 이후 새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의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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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세속화가 진행되고 다양성이 더욱 존중되는 시대를 맞으면서 종교는 갈수록 힘을 잃어 가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은 과거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좀 더 열린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교황은 최소한 전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 대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인류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교황이 국경과 인종, 이데올로기 등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평화적인 공존과 번영을 위한 통합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프란체스코 키오바로, 김주경 역, [교황의 역사-도시에서 세계로], 시공사, 1998; P. G. 맥스웰 스튜어트, 박기영 역, [교황의 역사], 갑인공방, 2005; 마이클 콜린스, 박준영 역, [바티칸: 영혼의 수도 매혹의 나라], 디자인하우스, 2009; 게리 윌스, 박준영 역, [교황의 죄], 중심, 2005;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김수은 역, [교황들], 동화출판사, 2009; Kristina Sessa, [The Formation of Papal Authority in Late Antique Italy: Roman Bishops and the Domestic Sphe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Colin Morris, [The Papal Monarchy: The Western Church from 1050 to 1250],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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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06.2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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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장 혹은 도상에서 금속의 색깔인 황금색과 은색은 함께 쓸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바티칸 시국의 국기는 이런 규칙을 깨고 있는데, 이는 바티칸 시국이 인간의 규칙이 아닌 신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변명 혹은 예외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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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 교황청의 통계연감에 의하면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는 12억 1,359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17.5%를 차지한다고 한다. 인구 1/6 이상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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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시스파(Gnostism)란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유행했던 종파 중의 하나다. 외관상 기독교를 표방했지만 그리스, 혹은 이집트의 다양한 토착 종교들이 혼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주로 영혼과 육체, 선과 악의 극단적인 이분법,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수양을 통한 구원 등의 교리를 가진 분파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그노시스파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격인 예수가 육신의 모습으로 탄생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그노시스파의 교리에 따르면 육신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어떻게 육신으로 올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노시스파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1세기 전후의 유럽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당연히 기독교 정통교리와는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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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엄밀히 말해 대략 6세기까지는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5대 주교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위에 언급한 바대로, 베드로와 바울의 후광을 입은 로마교회의 상징성은 점차 다른 교회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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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마태복음의 언급을 토대로 베드로가 건설한 로마교회, 그리고 그 로마교회의 주교야말로 다른 교회의 수장격이 된다는 언급을 문서로 남긴 사람이 당시 로마주교이자 시인이었던 다마수스 1세(재위 366~38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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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년, 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충돌한 사건이다. 수세에 몰린 황제는 눈으로 뒤덮인 카노사에 가서 맨발로 3일 동안 간청하여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 우리는 교황이 황제를 이긴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얻은 것은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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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황이 지금처럼 전 인류의 수호자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20세기 중후반, 요한 23세(재위 1958~63)와 바오로 6세(재위 1963~78)의 역할이 컸다. 소위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라고 부르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은 교회의 사명을 ‘전도’로부터 ‘인류 공동선 실현, 인간 존엄성 증진’으로 변모케 했었다. 이후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그리고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에 들어서 가톨릭은 다시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베네딕토 16세 사임 이후 새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의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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