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호텐토트의 비너스 - 19세기의 인간 전시와 사르키 바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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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8회 작성일 16-02-0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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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전시물, 죽어서는 박제가 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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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런던과 파리의 유흥가에 전시되었고, 죽어서는 200년 동안 자연사박물관의 유물로 전시되었던 사르키 바트만. 181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가 몇 주 뒤에 이 거대도시 런던을 떠납니다. 사르키와 같은 종류의 ‘전시물’만을 매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한때는 영국에서 ‘가장 특이한’ 여자이자 ‘자연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나 지금은 그런 관념을 완벽하게 극복했다는 점에서 사르키는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녀의 외형과 몸매는 유럽에서 본 그 누구보다도 특이합니다. 아니, 어쩌면 지구상에서 최고일지도 모릅니다. 아직까지도 이 비범하고 놀라운 존재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꼭 와서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르키가 떠난 후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일로 땅을 치고 후회할 것입니다."1)
                                                                                                - [모닝포스트] 1811년 4월 30일자의 광고문

작은따옴표는 필자의 주관에 따라 표시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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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1789년에 태어나 1815년에 죽어 2002년에야 묻힌 한 여성이 있다. ‘전시물’이자 ‘자연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나 분명히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사르키 바트만(Saartjie Batman, 1789~1815).2) 살아서는 옷이 벗겨진 채 런던과 파리의 유흥가에서 전시되었고, 죽어서는 박제가 되어 무려 187년 동안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Musée de l'Homme)에 전시되었던 여성. 또한 그녀는 유흥가였던 런던의 피카디리와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서 수많은 관객을 휘어잡는 스타이자, 우생학과 과학적 인종주의로 포장된 사이비 과학자들을 유혹하는 자연사(自然史)의 대상이었다.

사라 바트만(Sarah Baartman)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세례명을 사용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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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가까이 박물관의 ‘유물’이었던 그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정부와 국제적인 인권단체 등의 노력으로, 2002년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내걸었던 만델라는 사르키 바트만의 추모사업을 새 정부의 첫 번째 국책 사업으로 선정했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게 유해 반환에 관해 거론했다. 이로써 그녀는 역사 속에 다시 등장했다.

오늘은 사르키 바트만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녀는 왜 전시물이 되었으며, 그녀의 어떤 점이 그녀를 가장 독특한 여자로 만들었던 것일까? 또한 어떻게 인간을 전시하는 행위가 당연하게 여겨졌을까? 이런 의문들은 19세기 제국주의에 관한 논의와 맞닿아 있다. 인종과 성의 범주에서 최하층에 위치했던 사르키의 삶은 당시의 인종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와 결합된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성적 환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르키 바트만, 그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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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호텐토트’로 알려진 코이코이족 남성.


사르키는 1789년 케이프 식민지 동부 감투스 강가의 어느 골짜기에서 코이산(Khoisan) 부족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코이산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던 코이코이(Khoi-Khoi)인(人)과 산(San)인(人)을 함께 지칭하는 단어로, 유럽인들은 코이코이인을 호텐토트(Hottentot)로, 산인을 부시먼(Bushman)으로 불렀다. 호텐토트 부족의 여성들은 엉덩이가 거대해지는 둔부지방경화증(Steatopygia)이라는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가 [약속의 땅(Covenant)]에서 호텐토트 여성에 대해 남긴 묘사를 보자. “여자들의 엉덩이는 엄청나게 컸다. 어떤 엉덩이는 뒤로 불쑥 튀어나와 있어서 그 위에 아기를 앉힐 수 있을 정도였다. ‘스테아토피기아’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외국인들이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것이었다.” 사르키 역시 이런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10대 후반, 혼례날에 백인 정찰대에게 납치되어 케이프타운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녀는 케이프타운에서 피터 세자르라는 자유민 신분의 흑인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데, 곧 피터의 동생이었던 헨드릭 세자르의 아이를 돌보며 설거지 및 청소 등의 가사일을 했다. 차후 그녀는 아일랜드인 영국 군악대원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아기는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남편도 그녀의 곁을 떠나면서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한편, 케이프타운의 군의관이자 헨드릭 세자르의 상관이던 윌리엄 던롭은 사르키의 고용주였던 세자르 형제에게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사르키를 영국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그곳 사람들의 과학적 호기심을 끌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유럽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엉덩이와 전설적인 길이의 음순을 가진 호텐토트족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이는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유럽 여행객들과 학자들이 퍼트린 것이었다. 이런 허풍에 찬 이야기들은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 흑인 여성에 대한 환상을 조장하면서 그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던롭은 사르키가 “호텐토트족에 환상을 갖고 있던 유럽인들의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를 설득해 전시에 대한 계약을 맺었다. 그 이후, 어떤 코이산도 총독의 허가 없이 케이프 식민지를 떠날 수 없다는 호텐토트 법령을 피해 이들은 런던으로 밀항했다.


런던,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성적 환상을 건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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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찰스 윌리엄스가 그린 사르키 바트만의 풍자화.


1810년 5월 사르키 일행은 런던에 도착했다. 당시 오락의 본거지였던 피카디리, 이곳에서 9월 24일 드디어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가 개막했다. 이 쇼는 당시 피카디리에서 유행하던 프릭쇼3)(freak show, 괴물쇼)의 일종으로, 사르키의 공연 일정은 하루 4시간씩 6일 동안 진행하는 것으로 짜여졌다. 그녀는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즈와 아프리카 전통 장신구를 착용한 채 공연 중 코이 민요를 연주하거나 원주민처럼 춤을 춰야 했다.

한국에서는 ‘괴물쇼’로 번역되는 프릭쇼(freak show)는 생물학적인 기형 등을 내세운 쇼를 의미한다. 출연자들은 주로 샴 쌍둥이나 난쟁이, 거인 등 신체적으로 특이한 사람들이거나,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성적 특징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 그리고 희귀한 병으로 인해 모습이 달라진 사람들 등 관객에게 충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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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아프리카에는 놀라운 몸매를 한 호텐토트족 여성들이 있다는 소문이 런던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지만 쉽사리 실물을 보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물밀듯이 공연장으로 밀려들었다. “140센티 정도의 작은 키, 숯처럼 반들반들한 검은 피부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먼 곳을 바라보는 불가사의한 표정과 보조개가 깊이 팬 하트형 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단박에 집중시켰”지만, 관객들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거대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엉덩이와 놀랄만한 길이의 소음순을 확인하는 데 있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가 개막한 뒤 불과 하루 만에 사르키는 피카디리의 독보적 스타가 되었다. 던롭과 세자르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주말마다 그녀를 마차에 태워 런던 시내를 돌며 공연을 홍보했다. “비너스가 탄 마차가 지나가면 노점상과 거지들, 거리를 바쁘게 혹은 느릿느릿 활보하던 사람들은 그 유명한 아프리카의 우상을 보기 위해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1811년 5월, 런던에서의 쇼는 막을 내렸고 사르키 일행은 영국의 지방을 돌며 박물관, 전시회, 극장, 선술집 등에서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를 이어갔다.4)

사르키 바트만은 1812년부터 1814년까지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와 이후 파리에서의 공연 시기를 놓고 사창가에서 일했다는 설도 있지만, 레이첼 홈즈의 기록에 따르면 “정확히 확인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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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전시’의 대상에서 ‘탐구’의 대상이 되다



사르키의 법적 보증인이었던 윌리엄 던롭이 사망한 2년 뒤인 1814년, 사르키와 세자르는 파리의 유흥가 팔레 루아얄로 향했다. 이곳 또한 그녀의 엉덩이와 소음순을 보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손님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녀의 공연시간은 6시간에서 10시간으로 연장되었고, 밤이 되면 그녀는 레스토랑, 선술집, 카페, 저녁만찬, 파티, 사교 모임 등 온갖 장소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했다.”

연일 마셔댄 술로 인해 그녀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공연을 하지 못하던 1815년의 어느 날, 사르키는 결국 레오라는 악랄한 공연 관계자에게 팔리고 말았다. 레오는 식어가던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를 부흥시키기 위해, 쇼를 재정비한 뒤 몽테스키외가(街)로 공연장을 옮겼다. 이곳에서 사르키의 공연시간은 무려 12시간. 게다가 그녀는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홍보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파리 시내를 끌려 다니며 길거리에 전시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같은 해 레오는 자연사박물관을 이용해 상상할 수도 없는 돈벌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단순히 호기심 가득한 관객들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과학자들 또한 그녀의 비정상적 신체 -엉덩이와 소음순-에 대해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희귀하거나 특이한 동ㆍ식물이 과학자 집단이나 박물관, 식물원 등에 비싼 값에 팔리던 때였다. 이와 관련해 희귀식물이라면 아무리 비싼 값이라도 구입했다는 린네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동물조련사이기도 했던 레오는 사르키의 희귀하고 특이한 신체가 과학자 집단에게서 돈을 뜯어낼 훌륭한 미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르키는 결국 레오가 파리의 자연사박물관 위원회와 체결한 계약에 의해 벌거벗은 채 3일 동안 모델노릇을 하는 특별 전시를 감내해야 했다. 이 특별 전시는 “계몽주의 시대 근대과학을 추구한 곳으로는 유럽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기관이자 생명과학 연구의 본산”이었던 파리의 자연사박물관과 왕립식물원을 이끌었던 조르주 퀴비에 (Georges Cuvier)와 앙리 드 블랭빌(Henri de Blainville) 같은 저명한 비교해부학자와 동물학자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생리학자들과 박물관 및 식물원에 소속된 화가들이 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들은 신화와도 같은 호텐토트 여성의 신체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 환희했으며, “정말로 축 늘어진 음순이라는 주름치마, 즉 앞치마살을 하고 있는지 밝혀낼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 3일 동안,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적나라하고 정밀한 그녀의 초상화들이 그려졌다. 사르키의 특별 전시가 끝난 며칠 뒤, 드 블랭빌은 [호텐토트족 출신의 한 여자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 초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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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키는 파리 자연사박물관에서 3일 간의 특별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 3일 동안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녀의 초상화들이 그려졌다.


사르키의 건강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자연사박물관의 과학자들은 레오에게 “사르키가 죽으면 돈을 줄 테니 시신을 해부용으로 건네달라는 요청”을 했다. 사르키에 대한 학자들의 집착은 단순히 그녀를 관찰하는 것에서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1815년 12월 29일 사르키가 숨을 거두자마자, 그녀의 시신은 빠르게 이송되었다. 당시 파리대학 의학부와 프티 병원만이 정부로부터 인가받은 정식 해부기관이었기 때문에, 자연사박물관에서 해부용으로 그녀의 시신을 가져가는 것은 엄밀히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절차는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특별 전시에 이어 해부작업 역시 책임자는 조르주 퀴비에였다.

사르키의 시신 전체가 갈려졌고, 그녀는 박제가 되었다. “신화의 지점”이던 음순, 둔부 등의 생식기와 뇌 또한 초벌본이 떠진 뒤 유리병에 담겼다. 그녀의 박제, 뼈대, 뇌, 생식기 등은 퀴비에의 연구실에 하나의 희귀한 수집품으로 놓여졌다. 그리고 19세기 초엽의 어느 날부터 이 수집품은 일반인에게 전시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호텐토트의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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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인디언 여성 줄리아 파스트라나. 사람과 오랑우탄의 혼혈로 소개되었던 그녀 역시 동물처럼 끌려다니며 전시되었다.





피그미족 오타 벵가. 진화가 덜 된 종족으로 소개된 그는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 안에 갇힌 채 사람들의 눈요깃감이 되어야 했다.




‘전시’되어야 했던 사람들은 비단 사르키만은 아니었다. 183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 조이스 히스(Joice Heth)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161세 흑인 유모로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미국 전역의 온갖 카바레와 술집, 박물관과 전시관, 심지어 기차역과 콘서트 홀에 전시되었다. 멕시코 인디언 여성 줄리아 파스트라나(Julia Pastrana)나 피그미족 오타 벵가(Ota Benga) 또한 사르키 바트만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외모가 흉하고 털이 많아서 사람과 오랑우탄과의 혼혈로 소개되었던 파스트라나는 고용주에게 “동물처럼 끌려 다니다 5년 뒤 아이를 낳다가 숨졌다.” 더 끔찍한 사실은 사망 후 그녀와 아기의 시체가 미라로 만들어져 돈벌이에 계속 이용됐다는 것이다. 한편, 오타 벵가는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서 ‘진화가 덜 된 사람들’로 전시되었던 피그미족이었다. 그는 이후 동물원으로 팔려갔고 원숭이 우리 안에 마련된 특별 전시실에 갇힌 채 백인 구경꾼들의 눈요깃감으로 지내야 했다. 차후 그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하는 여론이 거세지면서 동물원은 그를 풀어주었지만, 오타 벵가는 우울증과 사람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괴로워하다 35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왜 전시되어야 했을까



인간을 전시한다는 생각은 근대적 인권 개념이 자리잡은 지금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적 사고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던 19세기에는 이러한 인종 전시가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종주의는 점점 과학과 의학의 외피를 둘러쓰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인종의 기원 등의 논의에 불을 지핀 비교해부학, 두개골 연구를 통해 인종의 차이를 설명하는 골상학, 유전학적 방법으로 인종을 개량할 수 있다는 우생학 등의 논의가 학계를 넘어 사회 곳곳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인종의 차이를 주장하는 담론이 극명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시각적 효과’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인종 전시나 인간 동물원이라 부를 수 있는 전시들이 유행했다. 앞서 언급된 조이스 히스, 줄리아 파스트라나 등 개인의 쇼 외에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유럽 박람회에서는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이 ‘검둥이 마을’이나 ‘세네갈 마을’처럼 집단으로 전시되어 인기를 끌었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는, 그 내부에 무려 1200명의 필리핀 원주민을 옮겨와 그들이 사는 모습을 전시한 ‘필리핀 박람회’를 운영했다.

사르키 바트만의 경우는 어떨까. 과학자들은 논의되고 있던 인종적 차이와 호텐토트족의 신체적 특이성 및 열등성, 그리고 이들이 동물과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을 실제로 관찰하고 싶어했다. 그녀의 특별 전시와 해부를 진두지휘했던 조르주 퀴비에가 자연사학자, 동물학자, 비교해부학자이자 동시에 박물학자이기도 했다는 점, 그리고 특별 전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주로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였다는 점은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사르키 바트만을 보고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쇼가 끝난 뒤, 그녀의 뇌와 뼈대는 학자들 사이에서 인종의 차이와 서열을 당연시 하는 과학의 표본으로 이용됐다.

또한 백인 관객들은 그녀의 쇼를 보며, 여기저기서 접했던 인종주의 담론에 실체를 부여하고 그녀와 자신의 인종적 차이를 절감했을 것이다. 언급했던 박람회 등의 인종 전시 또한 시각적으로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박람회의 인종 전시는 문명과 야만을 극명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관람객들은 의도대로 백인과 유색인의 차이를 온몸으로 실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르키 바트만의 쇼는 단지 인종주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애칭이었던 호텐토트의 비너스. 열등함을 나타내는 ‘호텐토트’에 에로스를 상징하는 ‘비너스’가 합쳐진 이 애칭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의 쇼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그녀가 단지 흑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커다란 둔부와 거대한 음순을 가진 흑인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백인 관객들은 그녀의 둔부와 음순을 통해, 오랫동안 유럽에 퍼져 있던 ‘흑인 여성은 성욕이 넘친다’는 허황된 신화의 흔적을 찾았다. 던롭과 세자르는 사르키의 몸이 이런 환상을 가진 관객들을 충분히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는 단지 전시물일 뿐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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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만들어진 영화 <블랙 비너스(Vénus noire)>의 한 장면. 실존 인물 사르키 바트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사르키 바트만의 삶은 “인종주의와 성의 식민화에 대한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용’되고 ‘전시’되었다. 하지만 사르키 바트만에 대한 저작을 쓴 영문학자 레이첼 홈즈(Rachel Holmes)는 그녀가 자신의 의지 없이 일방적으로 이용당한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녀가 주목하는 대목은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의 지속적 인기와 사르키의 신분에 대한 법정공방 후 사르키가 취한 대응이다.

홈즈는 사르키의 쇼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특이한 신체 때문이 아니라 뛰어난 가무 실력, 무대매너, 기예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런 재주와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이 몇 년 동안이나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에 그렇게까지 열광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사르키가 피카디리에서 공연하던 도중, 그녀가 과연 자유인 신분인지 노예 신분인지를 두고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던롭 및 세자르 간에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사르키는 당시 법정에서 “당장 현 상황을 바꾸거나 귀향할 의사가 없다고 볼”만한 대응을 했고,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패소했다. 이 지점에서 홈즈는 사르키가 진정 원했던 것은 희망이 없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런던에서 일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아니었을까라고 분석한다.

195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고인류학자 필립 토바이어스(Philip Tobias) 교수는 파리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사르키의 유해를 처음 봤다. 이후 그는 그녀의 유해를 돌려받기 위한 노력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90년대 중반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권단체들은 그녀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투쟁했다.

하지만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프랑스 정부 및 박물관 측과의 협상 과정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고 규정한 프랑스의 법이 끝까지 사르키의 발목을 붙잡았고, 그녀의 유해가 남아프리카로 가는 것보다 프랑스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궤변이 이어졌다. 협상 테이블의 한 쪽에서 그녀는 여전히 사람이 아닌 유물일 뿐이었다.

프랑스 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던 사르키의 유해 반환 문제는, 2002년 1월 말 상원의원들의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 직전, 의회에서는 사르키 바트만에게 바치는 헌시가 낭독되었다.


나 당신을 해방시키려 여기 왔나이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집요한 눈들로부터

제국주의의 마수를 가지고

암흑에서 사는 괴물

당신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내고

당신의 영혼을 사탄의 여혼이라 말하며

자신을 궁극의 신이라 선언한 괴물로부터!- 다이애나 퍼러스(Diana Furrus),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여기 왔나이다>

이후, 사르키의 유해 반환을 막았던 프랑스 국내법은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후 개정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2년 5월 3일, 죽은 지 187년 만에 사르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땅을 다시 밟았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그녀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용서는 한다. 그러나 잊어버리지는 않겠다.”라고. 그리고 지금, 사르키 바트만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적 폭력의 국제적 상징’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참고문헌

박진빈, [백색국가 건설사], 엘피, 2006; 박형지, 설혜심, [제국주의와 남성성], 아카넷, 2004; 양홍석, [고귀한 야만],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8; 이재원, [식민주의와 ‘인간동물원(Human Zoo)’- ‘호텐토트의 비너스’에서 ‘파리의 식인종’까지], 서양사론, vol.100, 2010, pp. 5-31; 레이첼 홈즈, 이석호 옮김, [사르키 바트만], 문학동네, 2010; 제임스 미치너, 이윤기 옮김, [약속의 땅(上)], 주우출판사, 1983; Sung Hee Choi, “Human Curiosities” from the Orient, [미국사연구] 14, 2001.11, pp. 23-41;
Elizabeth Alexander, “The Venus Hottentot(1825)”, [Callaloo], Vol. 24, No. 3, (2001), pp. 688-691; Zine Magubane, “Which Bodies Matter? Feminism, Poststructuralism, Race, and the Curious Theoretical Odyssey of the "Hottentot Venus"”, [Gender and Society], Vol. 15, No. 6 (2001), pp. 816-834; EBS 지식채널e, [이상한 쇼], 70화, 2006.3.20 방영.






김지혜
글쓴이 김지혜는 문화사 전반에 관심이 많다. 연세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문화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석사논문으로 <19세기 후반 영국 정기간행물에 나타난 남성 히스테리>를 제출한 이후, 남성사 및 젠더사 등을 문화사적 관점으로 읽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쉽고 대중적이며 재미있는 역사 쓰기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으며, 이런 관심사의 연장선상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도서 [르네상스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2010)를 썼다.


발행201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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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따옴표는 필자의 주관에 따라 표시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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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바트만(Sarah Baartman)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세례명을 사용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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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괴물쇼’로 번역되는 프릭쇼(freak show)는 생물학적인 기형 등을 내세운 쇼를 의미한다. 출연자들은 주로 샴 쌍둥이나 난쟁이, 거인 등 신체적으로 특이한 사람들이거나,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성적 특징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 그리고 희귀한 병으로 인해 모습이 달라진 사람들 등 관객에게 충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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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키 바트만은 1812년부터 1814년까지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와 이후 파리에서의 공연 시기를 놓고 사창가에서 일했다는 설도 있지만, 레이첼 홈즈의 기록에 따르면 “정확히 확인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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