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하얀 아르헨티나 - 라틴아메리카 인종 문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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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5회 작성일 16-02-0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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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멕시코, 피부색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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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는 리오넬 메시. <출처: (cc) LG전자 at 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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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소속의 공격수 하비에르 에르난데스. 멕시코 출신의 치차리토와 아르헨티나의 메시가 축구 실력 외에 다른 점은 무엇일까? <출처: (cc) Ed Schipul at en.wikipedia.org>



잠시 눈을 감고 몇 명의 아르헨티나 출신 사람들에 대해서 떠올려보자. 누가 먼저 떠오르는가? 남자들의 경우 대부분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Lionel Messi)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이자 FC 바르셀로나의 주전 공격수 메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축구 선수 중 하나다. 필자는 콘솔 게임으로 발매된 축구 게임을 즐겨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Gabriel Omar Batistuta)였다.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골을 넣는다고 해서 ‘바티 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예수’라는 또 다른 별명도 있을 만큼 긴 머리와 잘생긴 얼굴의 전설적인 공격수 중 한 명이다.

아마도 뮤지컬을 사랑하거나 아르헨티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에바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 ~ 1952)을 생각할 수도 있다.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ón, 1895 ~ 1974) 대통령의 아내로 국제적인 인사로 떠올랐던 에바 페론. 아마도 그녀는 마돈나가 분했던 영화 <에비타>로 더욱 잘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번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멕시코로 넘어가보자.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있을 때 함께 뛰었던 공격수 하비에르 에르난데스(Javier Hernandez)를 아는지 모르겠다. ‘치차리토(Chicharito)’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이 선수는 멕시코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다.

앳된 얼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골을 넣을 때만큼은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선수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 ~ 1957)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 ~ 1954)를 떠올릴 수도 있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초현실적인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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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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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가 그린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Frieda and Diego Rivera)>.



굳이 이렇게 아르헨티나와 멕시코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떠올려보자고 한 이유를 알겠는가? 잘 모르겠다면 지금까지 언급한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나 피부색에 주목해보자. 어떤가? 눈치 챘는가?

왜 아르헨티나를 떠올리면 주로 유럽인에 가까운, 코가 높고 눈이 움푹 팼으며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날까? 반면 멕시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부색이 황색 혹은 갈색의 소위 메스티소라고 부르는 인종들이 대부분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르헨티나는 백인의 비율이 월등히 높고, 멕시코의 경우에는 메스티소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다. 1)

사실 ‘백인’과 ‘메스티소’는 함께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눈에 보이기에 백인이라고 해서 그 혈통이 완전히 백인이라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메스티소 또한 그냥 보기에는 거의 라틴계 백인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원주민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계를 낼 때에는 스스로가 자신을 어떠한 인종 혹은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곤 한다. 물론 통계상 아르헨티나의 경우 스스로를 백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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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근대화의 길을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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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인구구성을 나타낸 통계. <출처: Fran cisco Lizcano Fernández, <Composición Étnica de las Tres Áreas Culturales del Continente Americano al Comienzo del Siglo XXI>, 멕시코주립자치대학(UAEM) 인문사회과학조사연구소의 2005년도 통계>


사실 확인을 위해 자료를 살펴보자. 도표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인종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오늘과 다음 주의 주제인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에 집중해보자.

멕시코는 대다수가 메스티소라고 불리는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이 주를 이루는 반면,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거의 대다수가 유럽인에 가깝다.

더 자세하게 수치화된 통계를 보면, 두 나라의 차이는 극명하다. 멕시코는 인구 약 1억 1천만 명 중 메스티소가 70%, 백인이 15%, 그리고 인디오가 14% 정도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백인이 무려 85%, 메스티소는 11.1%에 불과하다.

지난 화에도 살펴보았지만,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모두 스페인의 식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분명히 원주민들이 생활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백인이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인 15세기 말부터이며, 두 지역 모두 300년간 기나긴 스페인의 식민 지배가 지속되었다.2) 그리고 모두 1810년대부터 독립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스페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시기도 비슷하다.

굳이 시기를 따지자면, 오히려 멕시코에 백인들이 더 먼저 정주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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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왜 두 나라는 이렇게도 다른 인종 구성을 보이는 것일까? 왜 아르헨티나에는 유럽인에 가까운 백인들이 많고, 멕시코에는 인디오와의 혼성인 메스티소들이 많은 것일까? 답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독립 이후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그리고 각 독립국가들이 걸어온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독립 후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스페인의 지배를 떨쳐버리고, 식민지 시절의 낙후된 경제를 복원하며, 자율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근대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라틴아메리카의 ‘근대화 프로젝트’라고나 할까?

부연하자면, 근대화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첫째, 하나의 통합된 국민으로 이루어진 독립국가를 만들어낸다. 둘째, 전근대적인 정치 경제를 벗어나 근대화된 국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과정 속에서 각 나라들은 서로 걸어온 길이 달랐던 것이다.3)

이번 연재 글에서는 먼저 아르헨티나가 선택한 길을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원인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지리적 특성과 원주민들의 계층계급 구성, 그리고 기나긴 세월에 걸친 유럽인들의 이주 역사를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연재 글에서는 식민 독립 이후 ‘근대화의 문제’라는 동일한 과제를 맞닥뜨린 두 국가가 보여준 서로 다른 사회ㆍ문화적 현상에 국한하여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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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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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정복 전투에 나선 로카 장군과 그의 부대.


“발포하라!”

“탕탕탕!”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Alejo Julio Argentino Roca Paz, 1843 ~ 1914) 장군의 명령이 울려 퍼지자, 아르헨티나 병사들은 겨누었던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적들은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물리친 로카 장군의 기병대는 곧이어 민가에 들이닥쳤고 가옥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그들은 곳곳에 불을 놓고 창고와 집을 불태웠다. 울면서 버티는 여성과 어린이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로카 장군의 아르헨티나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살육했다. 혹은 살아남더라도 포로 신세가 되었다. 로카 장군의 군대는 이들을 모조리 붙잡아 아르헨티나의 국경 너머로 추방시켜버렸다.

1870년대부터 1884년까지 이루어진 정복 전쟁. 아르헨티나는 과연 누구와 전투를 벌였던 것일까? 전쟁이나 전투? 이런 단어가 옳기는 한 것일까? 사실 그것은 전쟁이나 전투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아르헨티나 부대들은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국경 안에 포섭된 파타고니아(Patagonia) 지역을 정복했다. 그리고 정복 과정 속에 파타고니아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을 공격하여 짓밟고, 그들의 농지를 모두 몰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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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지역을 그린 18세기의 지도.


아르헨티나는 당시의 전쟁을 ‘사막의 정복(Conquista del desierto)’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사막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파타고니아라는 사막 지역에 대한 정복을 말한다.

파타고니아는 지리적으로 남아메리카의 최남부를 포함한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콜로라도 강 이남 지역을 말하는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양국 걸쳐 있으며, 서쪽에서 남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동쪽으로는 고원과 낮은 평원을 포함한다.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이 안데스 산맥에 부딪치기 때문에 안데스 서편인 칠레는 강우량이 많은 편이지만, 반대로 아르헨티나 지역은 다소 건조한 편이다. 물론 콜로라도 강 주변은 넓은 팜파 평원이 펼쳐져 있어 농경과 목축이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다.

아무튼 사막의 정복이 말 그대로 파타고니아 사막에 대한 정복을 말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것은 사막의 또 다른 의미다.

사막은 불모지의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다’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파타고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문명화되지 않은 것들, 즉 원주민들에 대한 살육과 정복이야말로 사막의 정복 작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국가 건설



우선 아르헨티나의 독립부터 잠깐 살펴보자. 아르헨티나의 출발은 리오데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으로부터 비롯된다. 현재의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를 포괄하는 지역에 설치되었던 리오데플라타 부왕령은 스페인이 세운 부왕령 중에 가장 나중(1776년)에 건설되었다.

사실 오랜 식민기간 동안 리오데플라타 지역은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다. 오히려 현재의 멕시코 지방인 누에바에스파냐 지역과 칠레와 페루 지역을 포괄했던 페루 부왕령이 스페인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4)

페루 부왕령에서 생산하는 직물, 광산업이 점차 경쟁력을 잃어감에 따라 페루 부왕령의 리마 항구보다는 동부 항구를 통한 대서양 무역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게다가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18세기 중반부터 말비나스 제도(현재 포클랜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영국의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스페인 제국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이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리오데플라타 지역을 부왕령으로 격상시키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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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델플라타 부왕령에서 실제 스페인 제국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곳은 지금의 우루과이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불과했다.5)

리오데라플라타의 대부분은 파타고니아 혹은 팜파스 초원지대였고, 이 광활한 땅은 카우디요(Caudillo)라고 부르는 일종의 지방 호족들에 의하여 분권적으로 통치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는 으뜸 산물은 은이었다. 리오데플라타라는 이름 자체가 ‘은의 강’이라는 뜻이고, 국명 아르헨티나 역시 라틴어로 아르젠툼(Arzentum), 즉 ‘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그리고 리오데플라타 부왕령이 스페인 제국에서 갖는 위상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산물은 목축이었다. 팜파스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목축업은 당시 리오데플라타 최고의 무역품 중 하나였고,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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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가 시작되자마자 활발해진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우루과이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근거지로 한 크리오요들은 독점 교역을 고집하던 스페인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결국 1810년 라플라타 부왕령은 무너지고야 말았다.

이윽고 1816년 아르헨티나는 ‘라플라타 연합주(Provincias Unidas del Río de la Plata)’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그렇지만 말이 연합이었지, 아르헨티나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당연히 식민시대의 전통을 단절하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왔던 수많은 카우디요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안데스 및 파타고니아 지역에 거주했던 원주민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백인들인 크리오요들과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몇 달이나 걸려야 도달할 수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는 오히려 칠레의 산티아고(Santiago), 멘도사(Mendoza) 등이 그들에게 가까운 도시였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아르헨티나에게 국민 통합을 통한 근대국가의 건설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요원했다.


남미의 유럽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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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콜롬버스) 극장.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축물과 기념물들은 대부분 유럽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출처: (cc) Marianocecowski at commons.wikimedia.org>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크리오요들은 새롭게 건설되는 자신들의 나라, 아르헨티나를 최고의 근대적인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모델은 선진국 유럽의 것이었다. 남미의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귀족 자제들이라면 누구나 파리나 영국에 한 번쯤은 유학을 가야만 했다. 파리에 유행하던 살롱 문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똑같이 복제되어 나타났다.

도시 곳곳의 박물관과 공원, 극장은 모두 유럽의 그것들을 모방하며 나타났다. 당연히 그들에게 근대적인 것은 곧 유럽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그 어떤 유럽보다도 유럽적이어야만 했다. 그런 그들에게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헨티나 남부지방, 즉 파타고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의 존재였다.

독립 후 연방주의자들과 카우디요의 분권화 요구를 겨우 막아내고 중앙집권적인 아르헨티나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군대는 또 다른 분열의 요소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파타고니아 지역의 원주민들이 그들의 타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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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지역의 원주민들. 이들은 광활한 사막과 산맥으로 막혀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 칠레의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더 가까웠고, 이는 중앙집권적 아르헨티나 건설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원주민 말살의 이유가 되었다.


마침 19세기 중반부터 칠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안데스 서편에만 머무를 줄 알았던 칠레가 슬금슬금 산맥을 넘어 파타고니아 지역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마침 파타고니아의 원주민 마푸체(Mapuche) 족의 족장 칼푸쿠라가 아르헨티나 인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난세에 ‘영웅(?)’이 있다고 했던가?

항상 이러한 정세는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는 법이다. 1870년 당시 군사요직에 있던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장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파라과이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인기를 얻은 로카 장군은 칠레와의 국경선을 명확하게 정리한다는 명분하에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사막의 정복’ 작전이다.

사실 파타고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마푸체 족과 같은 원주민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동질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리적으로 광활한 사막과 산맥으로 막혀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멀고도 먼 당신’에 불과했다. 이들 원주민들은 오히려 언어적으로도 칠레의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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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장군. 그는 파타고니아 원주민들을 철저하게 말살할 것을 주장했고, 사막의 정복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지켜낸 공로로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러한 점은 로카 장군의 군대가 원주민들을 말살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들이 아르헨티나보다는 칠레의 편을 들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로카는 이들을 ‘아르헨티나의 부를 약탈하는 야만인’으로 규정했고, ‘철저하게 말살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1878년 첫 원정에서 그는 50명의 원주민을 죽이고 270명을 사로잡는 것을 시작으로, 당해 연도에만 4,000명 이상의 원주민을 포로로 잡고 400명을 죽였다.

1879년에는 6,000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1,300명 이상의 원주민을 죽이고 15,000명이 넘는 포로들을 잡았다. 사로잡힌 원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칠레 쪽으로 쫓겨나고야 말았고, 이들이 소유했던 토지와 가축은 모두 아르헨티나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 후로도 사막의 정복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승승장구를 바탕으로 로카 장군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전투는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지켜낸 영광적인 승리로 기려졌다.

파타고니아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이후 이 드넓은 땅에서 키운 가축, 특히 인구보다도 많은 소는 훗날 아르헨티나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수출을 기반으로 아르헨티나는 한때 세계 10대 경제강국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이 전쟁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기념이 되는 것은 맞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하얀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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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100페소 지폐. 앞면에는 로카 장군의 얼굴이, 뒷면에는 ‘사막의 정복’ 작전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에 유럽계 백인이 훨씬 많은 이유는 유럽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이민의 영향이 가장 컸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지속적이고 대규모로 유럽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엄마 찾아 삼만 리’에 등장하는 마르코의 이야기가 아르헨티나 이민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을 혹시 알고 있는가? 이탈리아의 어린 소년 마르코는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로 간 엄마를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 속에는 철저하게 유럽적이고자 했던, 그래서 결코 유럽인이 될 수 없었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몰아냈던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사막의 정복’은 그 아르헨티나의 핏빛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전투 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아르헨티나 역사 속에서 ‘사막의 정복’은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원주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지 못한 살육과 학살이었다고 비난한다.

아르헨티나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원주민들과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겪어야 했고, 그렇게 평화적으로 아르헨티나를 건설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이것이 아르헨티나의 국가를 건설하고,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근대화를 저해하는, 미개하고 전근대적인 존재였다고 말한다.

오히려 칠레와 같은 안데스 지역과 가까웠던 원주민들은 아르헨티나의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였다는 것이 이들의 항변이다.

해석이야 어떻든지 수많은 원주민들은 죽임을 당했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들의 전통과 삶의 기록은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파괴의 기록은 100페소 지폐에 남아 아르헨티나 ‘백인’들의 손에서 열렬히 사랑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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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ane Nagel, <Ethnicity and Sexuality Ethnicity and Sexuality>, [Annual Review of Sociology], Vol. 26, (2000), pp. 10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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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07.1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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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백인’과 ‘메스티소’는 함께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눈에 보이기에 백인이라고 해서 그 혈통이 완전히 백인이라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메스티소 또한 그냥 보기에는 거의 라틴계 백인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원주민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계를 낼 때에는 스스로가 자신을 어떠한 인종 혹은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곤 한다. 물론 통계상 아르헨티나의 경우 스스로를 백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2
굳이 시기를 따지자면, 오히려 멕시코에 백인들이 더 먼저 정주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3
물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원인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지리적 특성과 원주민들의 계층계급 구성, 그리고 기나긴 세월에 걸친 유럽인들의 이주 역사를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연재 글에서는 식민 독립 이후 ‘근대화의 문제’라는 동일한 과제를 맞닥뜨린 두 국가가 보여준 서로 다른 사회ㆍ문화적 현상에 국한하여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4
페루 부왕령에서 생산하는 직물, 광산업이 점차 경쟁력을 잃어감에 따라 페루 부왕령의 리마 항구보다는 동부 항구를 통한 대서양 무역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게다가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18세기 중반부터 말비나스 제도(현재 포클랜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영국의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스페인 제국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이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리오데플라타 지역을 부왕령으로 격상시키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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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는 으뜸 산물은 은이었다. 리오데플라타라는 이름 자체가 ‘은의 강’이라는 뜻이고, 국명 아르헨티나 역시 라틴어로 아르젠툼(Arzentum), 즉 ‘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그리고 리오데플라타 부왕령이 스페인 제국에서 갖는 위상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산물은 목축이었다. 팜파스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목축업은 당시 리오데플라타 최고의 무역품 중 하나였고,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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