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카페와 돈 - 카페, 영국 경제를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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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6회 작성일 16-02-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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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일상의 휴식이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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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위치해 있는 카페 플로리안(Caffe Florian). 1720년에 탄생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다.


현대인의 삶 속에서 카페는 일상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커피 그 자체만큼이나 카페라는 공간도 삶의 팍팍함을 덜어내는 고마운 요소이기 때문이다.

카페가 본격적으로 탄생하게 된 곳은 커피의 원산지인 이슬람 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커피를 팔고 마실 수 있는 장소는 존재했겠지만, 이것이 현재와 같은 카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554년의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이 최초였다.

최초의 카페인 카네스(Kanes)가 생겨난 이래 불과 50년도 지나지 않아 이스탄불에는 600개가 넘는 카페가 성업하게 된다.

유럽에 최초로 카페가 들어서게 된 것은 1645년의 일이다. 베니스에 세워진 커피가게(Bottega del caffe)를 시작으로, 1650년에는 영국의 옥스퍼드에 영국 최초의 카페가 세워졌다. 2년 뒤인 1652년에는 런던에 최초의 카페가 들어섰고 10년 사이에 런던에만 3000개가 넘는 카페가 존재할 정도로 급속하게 늘어났다.

당시의 ‘커피하우스’란 말을 ‘카페’로 정착시킨 프랑스는 이보다 20년 가량 늦은 1670년대에야 최초의 카페가 들어섰으며 오스트리아 빈에는 1680년대에 최초의 카페가 등장한다.1)

당시 영어에는 ‘카페’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베네치아의 ‘Bottega del caffe’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커피 가게’였으며, 그 뒤를 이어 커피하우스를 들여온 영국은 꾸준히 커피하우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된 장소를 뜻하는 말이 카페로 자리잡은 것은 프랑스에서의 일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에서 카페라는 용어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여기에 맞춰 고유명사를 제외한 모든 유사한 용어를 카페로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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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모이고 사상이 움튼다




“카페는 자유를 위한 길이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철학자

“나는 커피 스푼으로 인생을 측량해 왔다.”- T.S. 엘리엇(T.S.Eliot),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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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허기를 때우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토론을 하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들, 뭔가를 끄적거리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린다. <출처: Jorge Royan at commons.wikimedia.org>


카페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로서 존재해 왔다. 카페에서 태어난 위대한 시, 희곡, 소설은 차마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앙드레 지드,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와 같은 소설가들뿐만 아니라, 지방시, 이브 생 로랑들과 같은 패션 디자이너, 피카소나 고흐, 고갱과 같은 화가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

“카페의 아나키스트”라고 불리는 사르트르와 같은 철학자는 10년 넘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카페에 와서 사색을 즐긴 결과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또한 카페는 사르트르가 그의 짝인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와 그 기묘한 연인 관계를 만끽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프랑스 혁명의 핵심이 되는 계몽주의가 피어난 곳이기도 하며, 오스트리아학파나, 시카고학파와 같은 유명한 경제학파들도 카페에서 모임을 갖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지식이 활발히 교류되는 카페를 ‘1페니짜리 대학’이라고 불렀다.

특히 17세기에는 영국의 존 로크를 비롯하여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사상가들이 카페를 즐겨 찾았으며 이곳에서 펼쳐낸 그들의 계몽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은 현재의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 역시 바로 이 카페에서 성숙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두 축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에는 모두 카페가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커피 한잔 하며 사업 얘기 해볼까



커피와 설탕 재배에 들어가는 막대한 노동력으로 인해 발달한 노예무역이나 초콜릿 시장과 무역의 발달, 영국의 홍차와 인도 식민지 및 아편 전쟁에 이르기까지 카페에서 소비되는 음료가 자본주의에 끼친 영향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료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카페는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요람이 되어주었다.

17세기 중반부터 런던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카페는 런던의 모든 도로(Street, Avenue, Etc.)에 반드시 한 두 개의 카페가 들어설 정도로 많아졌다.

1708년에 런던의 카페는 3000여 개가 넘었지만 런던의 도로는 2000개 남짓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런던에 거주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모여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카페가 존재했던 셈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경제를 주름잡던 상인과 자본가들도 그들만의 아지트로서 카페를 골라 끼리끼리 모여들었다.

이 자본가들이 주로 둥지를 틀었던 곳은 이른바 거래소 골목(Exchange-Alley)이라는 곳이었다. 본래 영국의 경제는 왕립거래소(Royal Exchange)를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이 왕립거래소를 중심으로 주식을 매매하고, 투자처를 물색하였으며, 보험을 들고, 물품을 매매하곤 했다.

그러나 이 왕립거래소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카페가 들어서게 되면서 무역상은 무역상대로, 주식 중개인은 주식 중개인대로, 보험 중개인은 보험 중개인끼리 그들만의 카페를 찾아 흩어지게 되었다.

런던의 상인들도 드디어 ‘커피 한잔 하며’ 사업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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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거래소 골목(Exchange Alley)을 나타내는 지도. 왕립거래소(The Royal Exchange)가 위치한 콘힐(Cornhill) 가(街)부터 롬바르드 출신 상인들이 많이 활동해 이름 붙여진 롬바르드 거리(Lombard Street) 사이의 삼각형 지역을 말한다.


자메이카와 교역하고 있던 상인들은 ‘자메이카 커피하우스’에서 자메이카 무역에 관련된 모든 고급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버지니아와 발트해로 무역을 떠나는 무역상들은 ‘버지니아 앤 발틱 커피하우스’에 모였으며, 동인도 무역의 주역들은 ‘개러웨이즈 커피하우스(Garraway`s Coffeehouse)’에서 그들의 사업을 논의했다.

지중해 교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은 그 이름도 거창한 ‘예루살렘 커피하우스’에서 커피와 일을 병행했다.

이 모든 무역상들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 해상보험을 다루는 보험업자들은 ‘로이즈 커피하우스(Lloyd`s Coffeehouse)’에서 그들의 업무를 봤다.

이 밖의 상인들도 각자의 전문 분야에 맞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그들만의 공간을 마음껏 향유하였다. 심지어 지금의 주식거래소에 해당하는 카페도 존재했다.

당시의 모든 주식 보유자, 중개인, 구매자, 판매자들은 모두 ‘조나단 커피하우스(Jonathan's Coffeehouse)’에 모여 주가를 분석하고 투자를 결정했다.

이렇게 각 사업별로 분화된 카페들은 단순히 공통 화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그 이상의 효과를 내었다. 각자 공통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이게 되면서 사람들은 손쉽게 사업 파트너를 구할 기회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카페는 그 업계의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고급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각자의 사업 분야를 둘러싼 모든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경쟁 상대를 물리칠 수 있는 그들만의 전략을 개발할 회의실도 얻게 된 셈이었다.

모든 정보는 그 카페 안에서만, ‘우리 편’인 사람들 사이에서만 빠르게 공유되었다. 해당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카페는 업계에 갓 들어온 신출내기들에게는 좋은 배움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그 업계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로이드의 전신, 로이드 커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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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해롤드가 묘사한 1798년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풍경.


당시 영국에서 거의 모든 사업 분야에 걸쳐 난립했던 카페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을 꼽는다면 단연 해상보험업자들이 모인 로이드 커피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1687년 개업한 로이드 커피하우스에 모인 해상보험업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드 협회(Lloyd`s Society)를 결성했고, 이 협회는 지금까지 로이드(Lloyd`s of London)로 발전하여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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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 에드워드 로이드가 경영하던 커피하우스에서 시작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험조합으로 발전한 로이드(Lloyd’s). <출처: Lloyd's of London at en.wikipedia.org>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험 조직인 이곳은 아직까지도 커피하우스 시절의 로이드를 기억하고 있다. 즉, 로이드는 카페로 시작하여 보험업자라는 직군의 발달과 전문화 과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현재에까지 이르는 회사인 것이다.

해상보험과 재보험에 특화된 현재의 로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보험회사 중 하나이다. 일례로 대부분의 우주선은 로이드에 보험을 들게 되며 몇 년 전 김연아 선수의 다리 부상 보험을 받아준 곳도 로이드였다.

또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 선수가 우승할 경우 특별 상품을 적용하기로 한 국민은행이 이 사항에 관련해 보험을 걸어둔 곳 역시 로이드이다.

당시의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그야말로 카페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해상보험업자들이 운집한 보험 거래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타워 스트리트에 처음 문을 연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테이블은 커피도 커피이거니와 각종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험을 들고자 찾아온 손님들은 자신이 보험을 들고자 하는 물품과 보험료를 적은 슬릿(Slit)을 테이블에 얹어 놓고 기다렸다. 그러면 이 슬릿을 본 해상보험업자들이 보험의 수익성을 재빠르게 계산한 뒤 그 자리에서 보험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당시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해상보험업자들을 위해 커피를 파는 것 이외에 선착장에서 카페까지 달려와 항상 최신의 해운 소식을 알려주는 러너(runner)를 고용하였다.

이 러너는 항상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배가 들어오거나 침몰 소식과 같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카페로 돌아와 정보를 전달했다.

이렇게 카페에 들어온 소식은 카페 한 구석의 키드니(Kidney)라는 직원에 의해 일정한 간격으로 모두에게 반복해서 낭송되었다.

심지어 1696년부터는 자체적으로 해상 정보지인 ‘로이드 뉴스’를 발간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출간 중인 <로이드 리스트(Lloyd`s List)>의 전신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로이드의 정보 체계는 매우 큰 효과를 발휘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739년 젠킨스의 귀 전쟁(War of ear of Jenkins)이 발발할 당시의 것이다.

로이드의 정보원에게 수집된 ‘스페인에 의해 젠킨스의 귀가 잘렸다’는 소식은 영국 해군이 이 소식을 입수하기 하루 전에 이미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보험업자들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당시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독자적인 연락 체계를 구축한 영국 해군보다도 빠른 정보망은 곧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소식통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로이드는 커피하우스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해상보험 집단으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해상보험업자들이 현재의 로이드로 발달하면서 해상보험 그 자체의 성장을 견인해가는 뒷이야기는 추후의 연재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런던증권거래소의 모태, 조나단 커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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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에 설립된 런던증권거래소. 조나단 커피하우스를 효시로 만들어졌다. <출처: (cc) Kaihsu Tai at en.wikipedia.org>


당시 로이드 커피하우스만큼이나 독자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던 카페 중 하나는 주식거래가 이루어지던 조나단 커피하우스였다.
조나단 커피하우스는 당시 이미 실질적인 주식거래소로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런던증권거래소(London Stock Exchange)가 바로 조나단 커피하우스가 위치하던 그 자리에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왕립거래소가 그 주변에 각종 상업과 금융 관련 카페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나단 커피하우스 또한 그 주변에 주식업에 종사하는 브로커, 투자자, 그리고 각종 주식회사의 사무실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나단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지는 주식거래에서 한 몫을 잡기 위한 투자자들이 모이는 카페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조나단 커피하우스가 주식거래소를 대체하게 된 것은 아직 미성숙했던 당시의 주식시장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에 그 원인이 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주식 그 자체와 주가가 오르내리는 현상 모두가 생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지불하는 돈은 어디로 가게 되며 주식가격은 왜 오르고 내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거래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지식과 이해 없이 무작정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다.

1697년 이전까지는 영국의 주식거래도 다른 모든 상업 및 금융 분야와 마찬가지로 왕립거래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주식시장에 나돌던 수많은 유령 회사들의 주식으로 인한 피해를 비롯하여 전문 투기꾼, 주가조작으로 인한 피해가 점점 늘어나자 정부로서도 더 이상은 그냥 넘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00명 남짓한 공식 주식중개인을 제외한 모든 주식중개인을 왕립거래소에 출입금지 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갈 곳 잃은 수많은 주식중개인과 투자자들은 조나단 커피하우스로 몰려들었고, 이곳이 사실상의 주식거래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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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커피하우스의 당시 풍경.


일개 커피하우스가 신뢰와 전통의 왕립거래소를 제치고 주식거래의 중심지가 된 이유는 비교적 간단했다. 왕립거래소에 출입이 가능한, 면허를 보유한 공식 주식중개인들이 제시하는 거래는 하나같이 안전하고 수익이 높지 않은 거래였다.

조나단 커피하우스도 로이드 커피하우스와 같은 정보원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수많은 정보와 루머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들었다. 오늘날 온갖 소문의 근원이 되는 증권가 소식통이 이미 17세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각종 소문들은 주가를 널뛰듯 춤추게 했다. 당시 조나단 커피하우스의 모습을 그린 한 풍자 희곡에는 어느 해운 회사의 주가가 100파운드에서 20파운드로 떨어졌다가 300파운드로 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금 과장된 면이 있지만, 조나단 커피하우스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영국 주식시장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주식시장은 당시의 시대 흐름에 맞추어 급격한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된다.

물론 17세기부터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카페 문화는 사교 모임, 예술 공간, 지식 공유와 토론의 장으로도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랑스에서 꽃피운 계몽주의의 시작이 영국임을 볼 때 영국의 카페들도 충분히 공론장(Public Sphere)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카페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함은 이곳의 카페가 정치나 문화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카페는 로이드나 조나단 커피하우스처럼 금융의 한 분야를 주관하는 위치로 성장하기도 했으며, 영국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자신이 속한 업계를 발전시키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김대륜, <상인과 정부 – 무역부(the Board of Trade)에서의 아메리카 상인 로비들, 1763-1782>, [영국연구] 제 16호, 2006.
  • 전무부, <로이즈보험시장의 실태분석>, [무역학회지] 제 25권 제 4호, 2000.
  • 김성준, <18세기 영국에서의 해운 전문인의 대두와 해상 보험의 발전>, [한국해운학회지] 제 32호, 2001.
  • Peter Clark, [British Clubs and Societies 1580-1800], Oxford, 2000.
  • 이은섭 지음, [로이즈보험시장], 부산대학교출판부, 1994.
  • 케네스 포메란츠, 스티븐 토픽 지음, 박광식 옮김,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심산, 2003.




강종무
글쓴이 강종무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현상과 제도들의 역사적 기원을 파악하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학위 논문의 주제는 <남해 거품 사건을 통해 본 18세기 초 영국의 사회문제>이다.


발행2013.08.1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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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어에는 ‘카페’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베네치아의 ‘Bottega del caffe’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커피 가게’였으며, 그 뒤를 이어 커피하우스를 들여온 영국은 꾸준히 커피하우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된 장소를 뜻하는 말이 카페로 자리잡은 것은 프랑스에서의 일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에서 카페라는 용어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여기에 맞춰 고유명사를 제외한 모든 유사한 용어를 카페로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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