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히타이트, 제국이 되다 - 역사를 만든 한 장의 점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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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7회 작성일 16-02-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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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가즈쾨이의 유적, 해독되지 않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하마트석, 그리고 약간의 성서 구절들. 19세기 말, 유럽의 학자들이 히타이트에 대해 모은 자료는 이정도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세이스(Archibald Henry Sayce)나 하마트석의 탁본을 뜬 라이트(William Wright)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히타이트 제국’의 유산인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집트의 한 시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일련의 점토판들은 히타이트의 정체를 밝히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앞으로 펼쳐질 히타이트 제국의 발견과 점토판 해독의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현실이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라는 말은 고고학 발굴사에도 적용된다. 그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낸 것은 배우나 작가가 아닌 끈기와 인내를 갖고 연구한 학자들이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점토판, 히타이트 역사의 서광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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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점토판. 일련의 점토판을 해독한 결과 히타이트 왕의 이름과 재위 연대가 밝혀지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히타이트 제국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1887년,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이집트의 한 시장. 현지인들이 마치 굴러다니는 돌처럼 여겼던 설형문자가 새겨진 점토판들이 유럽인들의 눈에 띠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련의 점토판들의 존재가 알려지자 1888년에는 200여 개의 점토판과 그 조각들이 카이로에서 팔려나갔다. 보가즈쾨이의 유적이 히타이트의 것임을 주장했던 세이스는 이 사실을 목격하여 본국에 보고했고, 곧 몇몇 단체들과 수집가들이 이 점토판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독일의 베를린 박물관도 한 수집상에게서 160여 개에 이르는 점토판들을 사들였고, 이것들은 곧 학술적 조사를 위해 당시 이집트 지역 발굴 전문가였던 영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페트리(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 1853~1942)에게 인수되었다.

페트리는 이 점토판의 출처가 텔-엘 아마르나(Tell el-Amarna)라는 것을 알아내고, 1891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자, 그럼 이 아마르나는 어떤 곳인가? 이곳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약 BC1351~1334)의 도시였다.
‘아크나톤’으로도 알려진 이 파라오는 이집트 역사에서 람세스 2세만큼 유명한 인물로, 다신교인 이집트에서 태양신 아톤만을 섬기자는 유일신주의를 내세우며 수도를 테베에서 아마르나로 옮겼다.1) 수많은 점토판들은 바로 이 새로운 수도의 왕실 문서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의 아들(아우 혹은 조카라고도 한다)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화려한 무덤을 남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투탕카멘이 일찍 죽자 그의 왕비가 히타이트의 왕 수필루리우마 1세에게 아들 중 하나를 자신의 남편으로 달라는 서신을 보내 히타이트의 왕자를 이집트의 파라오로 세우겠다는 뜻을 전했다. 실제로 수필루리우마 1세는 잔난자라는 왕자를 보내지만, 이집트에 도착할 무렵 의문의 죽음을 당해 히타이트 왕자의 파라오 즉위는 무위로 돌아간다. 이 사건은 당시 히타이트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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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 당시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세력권. 붉은색이 히타이트, 녹색이 이집트의 세력권이다. 소아시아와 지중해 영역을 장악하고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히타이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아마르나의 점토판들은 별 어려움 없이 읽혔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1822년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에 의해 이미 해독된 상태여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는 상당 부분 밝혀져 있었던 데다가, 외교 문서가 대부분인 이 점토판의 설형문자는 이미 오래 전에 해독된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국제 교역어인 아카드어(바빌로니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문서들 중 히타이트 제국을 증명해줄 내용들이 있었는데, 이집트의 북단을 넘어 시리아로 쳐들어온 히타이트 전사단에 대한 보고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제껏 누구도 알지 못했던 히타이트 왕의 이름이 한 고문서에 의해 밝혀진다. ‘수필루리우마’라는 “감미로운” 이름의 왕이 아멘호테프 4세의 즉위를 축하하며 보낸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가 중요한 것은 히타이트 왕의 이름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재위 연대가 밝혀진 파라오 덕분에 이 수필루리우마 왕의 연대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밝혀지게 되지만, 수필루리우마는 영토를 확장하여 히타이트 제국의 전성기를 시작한 위대한 왕이었다. 또한 이 편지로 세이스와 라이트가 내세운 히타이트 세력권에 대한 주장도 옮았음이 증명되었다. 히타이트는 약소한 부족도, 카데시 전투2)에서처럼 이집트에 패하기만 한 약한 국가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이집트 측의 사료만 발견되고 해독되었기 때문에 히타이트는 카데시 전투를 포함해 이집트에 패배했던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사료가 과장된 것으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현재는 카데시 전투의 결과가 히타이트의 승리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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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되지 않은 두 개의 점토판, ‘아르자와 서신들’



이처럼 아마르나의 발굴 작업은 히타이트 제국의 정체를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상태였다. 하마트석과 카르케미시(Karkemish) 유적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도 해독하지 못했을 뿐더러, 히타이트의 세력권과 그 힘만이 어렴풋이 확인되었을 뿐, 히타이트의 종교, 문화, 예술, 생활 등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쌓여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를 가로막은 또 한 가지가 있었으니, 아마르나 문서들 중 해독되지 않은 설형문자로 쓰여진 두 개의 점토판이 그것이다. ‘아르자와’라는 나라의 왕에게 보낸 서신으로 알려져 ‘아르자와 서신들’이란 이름의 이 문서에 쓰인 설형문자를 학자들이 해독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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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샤 유적에서 발견된 설형문자판의 탁본. 히타이트의 왕 수필루리우마 1세의 업적을 적은 것으로, 해독 작업을 통해 전설 속의 나라 히타이트의 정체에 차츰 다가가게 되었다. <출처: (cc) Didia at de.wikipedia.org>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분명 다른 설형문자들은 해독되었다고 했는데, 왜 유독 이것은 해독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문자를 사용했지만, 다른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누구입니까?” 한글을 알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후 아 유?”의 경우를 보자. 한글을 알면 읽을 수는 있지만, 영어를 모르면 그 뜻을 알 수 없다. 같은 알파벳을 쓰지만 프랑스어와 터키어가 다른 것도 같은 경우다. 따라서 페트리를 비롯한 당시의 학자들은 이 두 개의 서신을 읽을 수는 있어도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해독 불가능한 언어가 바로 히타이트의 언어였다. 처음에는 아르자와 왕에게 보내는 서신이라 ‘아르자와어’로 불린 이 언어가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었기에 두 개의 점토판은 하마터면 지하 창고에 사장될 뻔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1893년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에르네스트 샹트르(Ernest Chantre, 1843~1924)가 보가즈쾨이에서 똑같은 점토판 조각들을 발견하면서 아르자와어에 대한 흥미진진한 의문이 증폭되었다. 이 언어는 어느 민족이 사용한 것인가? 도대체 어떤 민족이 할리스 강(키질이르마크 강) 북쪽 기슭과 소아시아의 지중해 해안 지역을 동시에 장악했을까? 사실 답은 나와 있었지만 해독하지 못한 문자에 대한 섣부른 주장은 비판만 받게 될 것이 뻔했다.

비록 이 점토판들이 곧바로 해독되지는 않았지만, 독일의 아시리아 학자 후고 빙클러(Hugo Winckler, 1863~1913)의 발굴과 연구로 인해 보가즈쾨이의 유적은 그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1834년, 프랑스의 학자 샤를 펠릭스-마리 텍시에(Charles Félix Marie Texier)에 의해 처음 유럽 세계와 조우한 이후 주인을 알 수 없었던 그 거대한 유적은 빙클러에 의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라는 것이 밝혀진다. 히타이트 제국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카데시 전투의 평화조약문, 보가즈쾨이에서 발견되다



이후 히타이트 연구의 주도권은 독일로 넘어갔다.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로 진출하여 호시탐탐 이권을 노리던 시대였던 만큼, 고고학 연구도 정치ㆍ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영국의 고고학자들도 보가즈쾨이에서의 발굴 작업을 원했지만,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의 에드워드 7세보다 오스만의 술탄 압둘-하미드 2세와 좀 더 친분이 있었기에 독일의 발굴팀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이 독일 발굴팀을 지휘한 것이 바로 빙클러였다.

빙클러가 발굴 작업을 시작할 당시 히타이트에 대해 알려진 중요한 사실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앙 아나톨리아와 북시리아에서 동일한 민족의 것으로 보이는 낯선 기념물, 부조, 금석문이 발견되었는데, 세이스와 라이트는 소아시아 곳곳에 흩어진 이 유물이 히타이트 민족의 것임을 확신했다.


2.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료, 특히 아마르나에서 발굴된 사료를 통해 히타이트가 강대한 세력이었다는 가설이 입증되고, 몇몇 왕들의 이름이 밝혀졌다.


3. 히타이트 민족은 3가지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다고 생각했다. 설형문자인 아카드어(해독 가능), 설형문자로 쓰인 히타이트어(읽을 수는 있으나 해독 불가능), 그리고 히타이트 상형문자(읽는 것과 해독이 모두 불가능)가 그것이다.


4. 모든 문서를 근거로 히타이트의 본거지는 북시리아가 아닌 중앙 아나톨리아라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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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3세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사이에 맺어진 세계 최초의 쌍방 평화 조약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것이 빙클러가 알고 있는 전부였지만, 호기심과 의문들은 학문의 세계에서 늘 새로운 발견을 낳기 마련이다. 1905년부터 시작된 빙클러의 작업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고고학사에 천운으로 기록될 발견이 이루어짐으로써 엄청난 수확을 거둔다. 당시 빙클러는 현장 발굴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지휘본부 텐트에 틀어박혀 현지 일꾼들이 발굴해온 점토판들을 받아 곧바로 해독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것은 그가 고고학자임과 동시에 언어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된 점토판들은 설형문자로 된 아카드어였기 때문에 빙클러는 이것을 바로바로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던 1906년 8월 20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 일꾼이 빙클러에게 출토된 점토판을 가져다주었다. 읽어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본 후 빙클러는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다. 바로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 벽에 상형문자로 새겨진 람세스 2세(Ramses II, BC1303?~BC1213?)와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대왕(Hattushili Ⅲ)이 맺은 조약문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조약문은 각 해당국이 똑같이 갖고 있는 법이다. 이집트에 있는 조약문이 3,000년의 시간을 넘어 직선거리로 1,600km나 떨어진 상대국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두 조약서는 표현까지도 완전히 동일했다.

이 발견은 그때까지 고고학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결실이었다. 아무리 여러 장이 제작되었어도 깨지기 쉬운 점토판에 옮겨진 조약문이 3,000년이 지나 복원 가능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빙클러는 흥분과 경외감에 휩싸였다.


“나는 그것(점토판)을 흘긋 보았다. 순간 이전의 모든 경험들은 아무것도 아닌 양 사라져버렸다. 내가 경건한 마음으로 그리고 어쩌면 농담 삼아 고대하던 바로 그것 -상호조약에 따라 람세스가 하투실리에게 보낸 편지- 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 카르나크 신전 벽에 각인된 상형문자를 통해 알려진 그 유명한 조약이 이제 조약 상대국의 땅에서 새롭게 해명될 참이었다. 조약의 원문에 등장하는 바로 그 람세스가 하투실리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 내용은 조약문의 구절과 문자 그대로 일치했다.”

그리고 행운이 잇따랐다. 아르자와어로 된 수많은 문헌들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제 빙클러는 히타이트의 한 도시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런 중요한 문서들이 모여 있는 곳이 왕실 문서고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청난 발견이었다. 히타이트가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제국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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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카피 요새의 맨 아래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80m 길이의 지하 통로 입구. 이 방어벽은 지금까지도 출입이 가능하다. 사진에도 터널 끝의 빛이 보인다. 빙클러의 발굴팀은 3,0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이 통로를 걸었다. <출처: (cc) China Crisis at en.wikipedia.org>



히타이트 연구에 완전히 빠져든 빙클러는 ‘아르자와어’로 된 수많은 문헌들이 히타이트의 언어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1907년 그는 발굴 결과에 대한 예비 보고서를 내면서 대략 BC1350~1210년에 이르는 동안 역대 왕들의 일람표를 최초로 작성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미 중병에 걸려 있었던 빙클러는 1913년 세상을 떠나면서 히타이트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아마르나의 두 개의 점토판과 보가즈쾨이의 점토판들은 여전히 해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해에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보가즈쾨이의 발굴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이대로 ‘아르자와 서신들’은 미궁 속에 빠지게 될까? 히타이트 제국은 희미한 흔적만을 역사에 남긴 채 오리엔트사(史)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밀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것인가?

하지만 역사는 히타이트를 버려두지 않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생결단의 전투 속에서 이 수수께끼의 언어를 해독한 학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그것도 군에 징집된 상태에서 말이다. 체코의 학자 프리드리히 흐로즈니(Friedrich Hrozny, 1879~1952)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한 오스트리아 중위의 배려 덕에 총을 들고 나가 싸우는 대신 해독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집트학에 샹폴리옹이 있다면, 히타이트학에는 흐로즈니가 있었다.

위대한 고대 문명의 역사는 역설적이게도 인류의 발전과 근대성을 의심하게 만든 1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피어났다.


* 히타이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 비르기트 브란다우, 하르트무트 쉬케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히타이트], 중앙 M&B, 2002.
  • C. W. 세람 지음, 오흥식 옮김, [발굴과 해독], 푸른역사, 2000.
  • Trevor Bryce, [The Kingdom of the Hittites], Oxford UP, 2010.
  • C. W. Ceram,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Discovery of an Ancient Empire], Phoenix Press, 2001.



김경민 | 역사 저술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제국주의와 고고학: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일국제영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으며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제국주의와 문화, 학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발행2013.11.0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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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호테프 4세의 아들(아우 혹은 조카라고도 한다)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화려한 무덤을 남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투탕카멘이 일찍 죽자 그의 왕비가 히타이트의 왕 수필루리우마 1세에게 아들 중 하나를 자신의 남편으로 달라는 서신을 보내 히타이트의 왕자를 이집트의 파라오로 세우겠다는 뜻을 전했다. 실제로 수필루리우마 1세는 잔난자라는 왕자를 보내지만, 이집트에 도착할 무렵 의문의 죽음을 당해 히타이트 왕자의 파라오 즉위는 무위로 돌아간다. 이 사건은 당시 히타이트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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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이집트 측의 사료만 발견되고 해독되었기 때문에 히타이트는 카데시 전투를 포함해 이집트에 패배했던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사료가 과장된 것으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현재는 카데시 전투의 결과가 히타이트의 승리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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