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중세의 유럽연합 계획 - 하나의 유럽에 대한 생각, 중세 말기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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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0회 작성일 16-02-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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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아이디어,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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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의 국기. 1986년 유럽공동체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의 상징으로 채택한 이 깃발은 12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12라는 숫자는 일년 12달, 시계의 12시간과 같이 ‘완벽함’을 상징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유럽 중앙은행 건물. 유로화를 기반으로 하는 유럽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곳으로, 경제 분야의 성공적인 통합을 이루어냈다. <출처: (cc) ArcCan at en.wikipedia.org>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은 유럽연합(European Union)의 근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이란?


유럽의 정치ㆍ경제의 통합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유럽 국가들의 연합 기구.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를 계승했으며, 이후 1993년 11월 1일에 발효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유럽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더 깊이 파보면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필자도 전공 시험을 치를 때 유럽공동체가 만들어진 순서를 외우려고 고생깨나 했던 경험이 있다. 가장 먼저 프랑스와 독일 간에 이루어졌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를 바탕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거쳐 유럽공동체(EC)로 확대·발전되고, 이어서 유럽연합(EU)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당시에는 ECSC가 먼저인지, EEC가 먼저인지 그 순서가 헷갈려서 곤혹스러웠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럽의 공동체가 내부적으로 끊임없는 갈등과 마찰을 겪었던 수많은 유럽의 국가와 민족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평화를 보장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유럽연합에 대한 사전적 지식은 역사적 맥락이 결여된 단편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생각해보자. 과연 유럽연합이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평화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해서 각기 다른 정치ㆍ문화ㆍ사회체제를 유지해왔던 유럽이 하나의 이름으로 힘을 모을 수 있었을까?

이번 연재에서는 현재 유럽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실체화된 거대한 공동체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졌던 몇 명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14세기 이후 등장한 ‘아이디어’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



정치적으로 유럽의 각국들이 통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등장한 때는 일반적으로 14세기로 여겨진다. 사실 멀고 먼 옛날 샤를마뉴 이후의 유럽은 기독교 제국이었다. 유럽은 종교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서임권이라는 권력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권이 서로 싸우면서 균형을 이루는 세계였다. 그런데 14세기가 되면서 유럽 세계에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적 단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바로 프랑스의 왕이 된 공정왕 필립(Philip the Fair, 필리프 4세)부터이다. 필립은 프랑스 내에서 황제나 교황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의 왕국 내 황제라고 주장하며 처음으로 국민국가의 ‘독립 주권’을 주장하였다. 이후 유럽 세계는 수많은 국민국가들의 독립 주권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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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아이디어 - 황제를 중심으로!



샤를마뉴 대제 이후, 유럽 세계는 ‘기독교’라는 공통된 종교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였다. 하지만 그 세계는 항상 혼란스러웠다. 특히 성직자의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권력 갈등은 중세 유럽을 혼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2).



주로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일어난 서임권 투쟁이란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인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에 대한 임명권을 누가 갖느냐를 두고 황제와 교황이 대결을 벌인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이러한 관직은 결국 교회가 갖고 있는 거대한 자산을 누가 활용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두 세력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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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약 14세기경, 항상 갈등이 끊임없었던 유럽에 새로운 긴장 관계가 나타났다. ‘국민국가’라는 민족주의적이며 분파주의적인 단위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예전 중세의 유럽 세계가 교황과 황제, 그리고 그 양쪽에서 줄을 서는 여러 군주들의 유럽이었다면, 이제는 여러 개의 국민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연합하는 국민국가의 유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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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의 군주, 즉 황제가 여러 국민국가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꿈꾼 단테.


이러한 상황에 위협을 느낀 사람 중에 한 명이,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였다. 그는 [군주에 대하여(De Monarchia)](1306~1311)라는 저서를 통해 당시 유럽의 상황에 대해 입장을 정리했다.

단테는 이 책에서 종교적인 권리와 세속적인 권리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교황은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는 자이고, 황제는 사회적 질서의 으뜸가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세속 세계에서 사회적 질서와 통합을 위해서는 어떠한 지배자도 황제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정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단테는 더 나아가 황제는 공평무사하고 전능하므로 개인적 야심이 없고 고결한 존재라고까지 표현한다. 황제는 로마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의 대표자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배하도록 예정하신 자이므로 교황이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는 자인 것과 같이, 황제는 모든 민족들을 세속적인 행복으로 인도하는 자가 된다. 요약하자면 단테는 여러 국가들이 독립적인 주권을 갖는 것은 혼돈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생각하여 단 하나의 군주, 즉 황제가 여러 국가들을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곧 신의 뜻이라고 본 것이다.

황제에게 희망을 건 단테의 아이디어는 단테답지 않게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 이 책이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게 된 하인리히 7세(Heinrich VII, 1274? ~ 1313)에게 헌정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3) . 아무튼 단테의 이러한 생각은 유럽이 기독교적 공동체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면서도, 교황의 권위를 배제하고 세속 권력인 황제로 권력이 수렴되는 유럽을 생각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12~13세기 경 유럽 세계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와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으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을 반복했다. 이 역시 서임권 투쟁으로부터 빚어진 정치적 갈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단테는 처음에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추방된 이후, 피렌체를 장악한 구엘프에 맞서 점차 기벨린과 뜻을 같이 하였고, 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하인리히 7세를 지지하였다. 그는 하인리히 7세의 힘을 빌어 구엘프파를 몰아내고 피렌체로 돌아갈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테의 꿈은 평생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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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뒤부아의 아이디어 - 교황을 중심으로!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단테와 달리,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정치사상가인 피에르 뒤부아(Pierre Dubois, 약 1250~1320)는 보다 현실적인 분석을 통해 유럽의 통합에 대해 고민했다. 뒤부아는 단테와는 달리 유럽 통합의 중심으로 황제 대신 교황을 선택했다. 그가 보기에는 각 국가의 민족들은 서로 다른 지세와 지형을 갖춘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성격 또한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하나의 군주가 이들을 모조리 통치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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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뒤부아 당시의 프랑스 왕이었던 필리프 4세. 뛰어난 미모로 ‘미남왕’이라고도 불렸다.





필리프 4세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뒤부아는 황제보다는 교황에 의한 유럽연합을 꿈꿨다.




대신에 뒤부아는 종교적 영역을 중심으로 유럽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교황을 중심으로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마다 절대적인 독립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여러 국가들이 교황이 주재하는 공의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형태의 통합적 정치체제를 구상했다. 유럽을 일종의 기독교 연방국가로서 정의하려고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교황에게 공의회 산하의 사법부를 총괄적으로 관장하고 재판의 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능마저 부여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교황의 절대적 권한을 확실한 수준에서 보장하고자 했다. 뒤부아의 구상에 따르면 이 공의회를 통해 교황은 유럽 각국의 분쟁이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유럽의 평화에 해를 끼치면, 공의회는 이 국가에게 제재를 가하여 동방의 십자군에 군대를 파견하도록 강제하는 등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었다. 유럽을 일종의 단일한 ‘기독교 공화국’으로 이해했던 뒤부아에게 이러한 제재 조치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제재로도 부족하면 모든 국가들이 그 국가를 둘러싸고 국내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봉쇄함으로써 더욱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보헤미아의 왕 게오르그의 아이디어 – 황제와 교황 모두 배제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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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교황을 배제하고 독립적인 주권국가들의 군주들이 참여하는 유럽연합체를 구상한 보헤미아의 왕 게오르그 폰 포디브라트.


뒤부아는 프랑스를 비롯한 민족국가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교황이라는 권위체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 각각의 민족국가들이 절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뒤부아의 아이디어는 프랑스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왕은 결과적으로 뒤부아의 아이디어를 실현에 옮기지 않았다. 오히려 150년 정도 후 유럽의 반대쪽 끝자락에서 다른 군주가 비슷안 제안을 채택했으니, 바로 게오르그 폰 포디브라트(George v. Poděbrady, 1420~1471)다.

보헤미아의 왕 게오르그는 그르노블 출신의 실용주의적인 외교관이었던 앙투앙 마리니(Antoine Marini)를 통해 기발한 계획을 만들었고, 타국의 왕들에게 동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게오르그 왕은 폴란드의 왕과 헝가리의 왕, 그리고 브루군트 공과 바바리아 공이 즉각 참여하는 연방을 구상하였다. 반면 황제와 교황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그러므로 이 계획은 어떤 면에서 매우 근대적인 것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게오르그의 아이디어는 민족국가들이 발흥하던 당시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이 독립적인 주권국가들의 갈등으로 야기될 무정부 상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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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여성화한 이 지도에서는 독특하게도 보헤미아가 유럽의 심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 아이디어는 뒤부아의 아이디어와 비슷하지만,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업그레이드 되었다. 게오르그의 아이디어를 몇 가지 살펴보면 연방의 공동의회를 설립하여 각 국가들이 1표씩을 똑같이 부여받아 단순 과수에 의해 표결을 진행하도록 한다는 것과, 사법재판소를 만들고, 국제적인 중재자와 유럽 공통의 군대를 구성하도록 하며, 이때 필요한 예산은 교회 십일조를 통해서 꾸려지게 한다는 것 등이 있다.

결과적으로 게오르그의 독특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는 정중하게 게오르그 왕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교황은 십일조를 예산으로 활용하겠다는 그의 계획에 분노하여 게오르그 왕을 파문하고 보헤미아 왕위를 박탈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이러한 계획에 동참함으로써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웠던 다른 왕들도 게오르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렇게 해서 게오르그 포디브라트의 신선한 아이디어는 망각 속에 묻히고야 말았다. 사실 여전히 중세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유럽 세계에서 교황과 황제를 모두 배제한 아이디어가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의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유럽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단일한 실체로 존재했던 것 같지만, 수천 년간 결코 하나였던 적이 없었다. 고대 이래로 수많은 부족과 민족, 국가들이 서로 난립하며 부와 영토를 뺏고 빼앗기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연출했던 곳이 바로 유럽이었으며,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재앙 또한 유럽 각국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근대 이후 하나의 유럽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으며,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경제적 블록화와 유럽 내의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만들어졌다.

유럽에 대한 개념은 항상 바뀌어왔고 유럽을 구성하는 이들도 계속 변해왔지만,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이 유럽의 평화를 위해 고민해왔다. 유럽을 기독교라는 종교적 개념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교황이나 황제가 있는가 하면, 무력으로 통합된 제국을 건설하려 한 로마제국 혹은 현대의 나치 독일도 있다. 또, 지금의 유럽연합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연방을 생각했던 중세 말의 단테, 뒤부아, 게오르그 같은 사람들도 있다. 흥미롭게도 혈연과 상속으로 유럽 세계의 대부분을 얻게 되면서 다소 시대착오적인 기독교 단일 제국을 꿈꿨던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도 있었다.

만리장성이 하루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니듯이 유럽연합 역시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의 고민을 거듭하며 만들어졌다. 물론 그 구체적인 실현은 어두운 전쟁과 갈등으로 인한 수많은 과오를 겪고 난 다음인 20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졌기는 했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 Denis de Rougemont, [The idea of Europe], Merdian Books, 1968.
  • Jacques Le Goff , [The Birth of Europe (Making of Europe)], Wiley-Blackwell, 2006.
  • 볼프강 슈말레, 박용희 역, [유럽의 재발견], 을유문화사, 2006.
  • 조셉 폰타나, 김원중 역, [거울에 비친 유럽], 새물결, 2000.
  • 찰스 틸리, 윤승중 역, [유럽 혁명 1492-1992 지배와 정복의 역사], 새물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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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12.2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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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유럽의 각국들이 통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등장한 때는 일반적으로 14세기로 여겨진다. 사실 멀고 먼 옛날 샤를마뉴 이후의 유럽은 기독교 제국이었다. 유럽은 종교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서임권이라는 권력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권이 서로 싸우면서 균형을 이루는 세계였다. 그런데 14세기가 되면서 유럽 세계에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적 단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바로 프랑스의 왕이 된 공정왕 필립(Philip the Fair, 필리프 4세)부터이다. 필립은 프랑스 내에서 황제나 교황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의 왕국 내 황제라고 주장하며 처음으로 국민국가의 ‘독립 주권’을 주장하였다. 이후 유럽 세계는 수많은 국민국가들의 독립 주권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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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일어난 서임권 투쟁이란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인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에 대한 임명권을 누가 갖느냐를 두고 황제와 교황이 대결을 벌인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이러한 관직은 결국 교회가 갖고 있는 거대한 자산을 누가 활용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두 세력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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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기 경 유럽 세계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와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으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을 반복했다. 이 역시 서임권 투쟁으로부터 빚어진 정치적 갈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단테는 처음에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추방된 이후, 피렌체를 장악한 구엘프에 맞서 점차 기벨린과 뜻을 같이 하였고, 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하인리히 7세를 지지하였다. 그는 하인리히 7세의 힘을 빌어 구엘프파를 몰아내고 피렌체로 돌아갈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테의 꿈은 평생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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