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자들의 국가 체제 개혁론 - 공공성에 바탕한 국가 건설을 위하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06회 작성일 16-02-06 16:23

본문















14547434255109.png


실학자들은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방안은 토지 문제, 교육 문제 등으로 분류될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국가 체제에 집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학자들은 왜 국가 체제의 개혁을 주장했는가? 아래에서는 그 이유를 ‘공(公)’·‘사(私)’ 담론 속에서 찾아보고, 이런 입장에서 실학자들의 국가 체제 개혁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공(公)·사(私) 담론과 국가 체제 개혁론의 위상



동양사회에서 ‘공’과 ‘사’라는 문자는 중국에서 출발하여, 이후 한국과 일본 등에 전파되었다. 다만 ‘공’과 ‘사’란 용어는 각국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의미나 지칭하는 바가 달랐다.

중국에서 ‘공’의 의미에는 천자(天子)나 제후를 지칭하는 공동체의 대표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하늘〔天〕의 초월성을 기반으로 최고 권력자를 견제하거나 비판하는 도덕적 규범성이 내포되어 있다. 공평(公平), 공정(公正) 등의 윤리적 측면에는 견제의 측면이 있던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공은 오오야께(おおやけ, 정부·국가·관청)를 가르키며, 사는 와타쿠시(わたくし, 개인)를 가르켰다. 이로 인해 공적 영역의 최상위인 천황과 국가가 모든 권위를 독점하고 견제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의식을 보였다.





14547434264488





정도전 <출처: By Steve46814 @wikipedia (CC BY)>



한국의 경우도 대개는 중국의 ‘공’·‘사’ 개념과 유사한 형태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역사상에 바탕 한 본격적인 연구가 제출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그 의미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이미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서부터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正體性)과 관련해서 ‘공’ 담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선 건국의 밑그림을 주도한 정도전의 논의 속에 ‘공’ 담론이 내재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공도(公道)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들이 강구되었다. 토지국유제의 이념인 왕토사상(王土思想)의 적용이라든지, 공론(公論)의 정착을 위한 노력 등이 이에 해당된다.

조선에서 ‘공’은 국가를 의미하는 공가(公家)나 공실(公室) 이외에 공족(公族) 등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에서부터 공전(公田)을 비롯해 공의(公義), 공공(公共) 혹은 공평, 공정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에 대비해 ‘사’의 경우도 사가(私家)를 비롯해 사전(私田)이나 사사로운 의리를 뜻하는 사의(私義) 또는 사은(私恩) 등 다양한 용례가 확인된다. 양자를 조합한 빙공영사(憑公營私, 공을 빙자해 사를 영위함)나 협사배공(挾私背公, 사에 통하고 공을 배반함) 등의 용어 등도 확인된다.

‘공’·‘사’론에서 그 범주는 동심원적(同心圓的)인 구조로, 상대적이며 연속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 가족, 사회, 국가로 외연이 확장되면서 ‘공’․‘사’의 범주가 변화하게 된다. 개인에서 대해서 가족이 ‘공’이고, 가족에 대해서 사회가 ‘공’이며, 사회에 대해서 국가가 ‘공’이 되는 구조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몸을 닦고 집을 안정시킨 후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함)는 이런 ‘공’·‘사’ 범주의 상대성과 연속성을 반영한 표현이다. ‘공’의 범주에서 최고는 국가이다. 조선은 가족 관계인 부자 관계를 국가의 군신관계로까지 확대한 가부장적인 공동체를 상정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최고의 공적 영역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실학자들이 다양한 부분에서 개혁론을 제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국가 체제 개혁론으로 모아지는 이유이다.




‘사(私)’가 횡행하는 세상



실학자들이 국가 체제 개혁을 주장하게 된 계기는 당대의 국가나 사회에 ‘사’가 횡행하고 있는 역사적 현실에 기인한다.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17세기 조선을 평가하여 공평하고 올바른 도리가 없어지고 대신 사사로운 마음에 따라 법을 만들게 됨으로써 ‘중화’인 명은 이적(夷狄)인 오랑캐에게 어지럽게 되고, 조선은 큰 치욕, 즉 병자호란의 치욕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사심으로 만들어진 법으로 인해 사의(私意)가 만연하게 되고, 결국 사의(私意)로 인해 토지 제도 역시 왜곡되었다고 하였다. 유형원은 당시의 극심한 빈부 격차의 원인을 토지가 공에 있지 않고 사유(私有)가 되어 대대로 전승되는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의 횡행에 대한 우려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이익은 문벌을 숭상하는 폐해를 지적하는 가운데 과거 급제자 등급을 문벌을 기준으로 매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는 국초에 제정된 법이나 규정이 아니고 중간에 제 뜻에 따라 사정(私情)을 행사하는 무리가 한 짓인데, 그대로 그릇된 규례가 된 것이다”〔『성호사설』 인사문 상벌(尙閥)〕이라고 하였다. 토지 제도의 문란상을 지적하면서도 “대개 토지란 본래 국가의 소유인만큼 개인으로는 자기의 것이라고 감히 단정할 수 없으니 예나 지금이나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사전(私田)에 대한 폐단이다. 사의 반대가 공(公)이라면 어느 것인들 공전(公田)이 아니겠는가? 전주(田主)란 공전을 빌어서 경작하여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성호사설』 인사문 전제(田制)〕라고 하였다.





14547434277774





정약용 생가 여유당 전경<실학박물관 제공>



다산 정약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정약용은 저서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의가 망해져서 선왕(先王)의 전장(典章)과 법도가 다 찢기고 없어지니, 임금된 자는 천하를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물건〔私物〕인 양 여긴다. 대저 천하는 큰 물건이요, 천하의 이(利)는 큰 이인데, 이것을 국왕이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 생각하여 진실로 천하 사람을 위엄으로 협박하고 통절하게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제 요령껏 혹독한 형벌을 제정하여 천하를 호령하면서, 그것을 법이라 하였다. 이 법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사리(私利)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하늘의 질과 서가 아니었다. …(중략)…지금은 법을 제정할 때 하늘에 근본을 두지 않고 사람의 사심으로써 만든다. 사람이 제 마음대로 만들었으니 그 규제를 기꺼이 받겠는가?
〔『경세유표』 방례초본서(邦禮草本序)〕

정약용은 천하를 개인적인 물건으로 여기는 임금이 사리(私利)와 사심(私心)에 근거해서 법을 제정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형원을 비롯해 이후 이익이나 정약용 모두 ‘사’가 횡행하는 국가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궁극에는 ‘사’를 배제한 공적인 국가 질서를 모색하게 되었다.




‘공’이념에 바탕한 국가와 제도 개혁



실학자들의 국가 체제 개혁은 ‘공’이념을 통해 ‘사’를 극복한 국가와 제도 정비를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법을 만드는 자는 털 끝만치도 사사로운 의사를 가지면 만사가 모두 그 올바름을 잃는다”(『반계수록』)고 하면서 ‘공’을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방안은 국가와 정부(당시는 조정)의 역할을 통해 공공성을 강조하는 방안이었다. 유형원은 제도와 정책을 수립하고 운영하는 “조정(朝廷)”이 “정(正)”의 근본이 된다고 하여 시비나 인심의 향배를 결정하는 공공성의 주체로서 중시하였다. 이때 국왕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유형원의 입장에서 국왕은 사심(私心)을 경계해야 하며 백성을 공평하고 차등이 없이 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유형원은 이를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력을 높일 수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주목한 것이 토지 제도이다. 유형원의 토지 제도는 토지 사유를 부정하고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공전제론(公田制論)’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형원의 공전제론은 비단 토지 제도의 개혁을 위한 것은 아니다. 유형원에게 토지 제도는 재정과 군사 운영 등 국가 운영의 모든 영역을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로서, 국가와 사회의 공동체적 결속력을 높일 수는 있는 중요한 부문이었다. 국가 소유의 공전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생활기반을 갖추어줌으로써 안정적인 국가와 사회의 출발점을 삼고자 한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호적 제도와 군사 제도는 물론이고 관료의 선발이나 임용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14547434286911




반계수록, 유형원의 국가 체제 개혁안을 담고 있는 책으로, 18세기 많은 지식인에게 읽혔다.



주목되는 것은 유형원의 개혁 구상이 이후 18세기에 현실적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18세기 이후 지식인들에게 주목받은 저술이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홍계희(洪啓禧)이다. 홍계희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정조 즉위 직후 그와 그의 후손들이 ‘역적’으로 규정된 대표적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영조대 중반 각종 제도 개혁이나 국가적인 사업의 추진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인데, 그가 추진한 각종 제도 개혁의 이념 중 하나가 유형원의 논의였던 것이다.
홍계희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실로 동방에 없었던 책”이라 극찬하며, 책에서 제시했던 개혁안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 하나의 예가 당시에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며 제도 개혁이 추진되던 양역(良役)1) 문제 대한 대책으로 제시한 결포론(結布論)이었다. 결포폰이란 토지를 단위로 포를 징수하자는 논의로, 그 논의의 이념 중 하나가 유형원이 제기했던 공전제론이었던 것이다. 홍계희는 양역 문제의 해결을 국가의 공공재인 “공전(公田)”에서 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유형원의 이념을 기반으로 홍계희가 제출한 결포론은 균역법 제정 과정에서 부담의 축소로 인해 부족분을 메우기 위한 대책 중 하나인 결전(結錢)으로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양역(良役)


조선시대 군역은 신분을 불문하고 16세이상 60세 이하의 정상적인 남성에게 부과된 역이었다. 단, 노비는 제외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양반들이 역에서 빠지면서 군역은 양인들만이 담당하는 역이 되면서 양역이라 불렸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공’이념을 국가 체제 개혁의 이념으로 삼은 것은 성호 이익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익의 경우 군신 관계에 대해서 “대개 천하란 천하의 공물(公物)이고 한 개인의 사유가 아니다”〔『성호사설』 권23, 경사문 주봉동성(周封同姓)〕이라 하여 국가가 임금의 사물(私物)이 아니라 만백성의 공물(公物)임을 재확인하였다. 비록 이러한 이념을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공’이념을 바탕으로 임금의 무소불위 전제권력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의 토지 개혁론인 균전론 역시 기본적으로 토지는 공공재라는 인식의 전제인 것이다. 이익은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고 이익의 원천을 독점하는 행위를 강력히 규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에는 균부(均賦)와 균산(均産)과 같은 ‘균(均)’을 위한 것이었다. 이익은 군졸(軍卒) 등 다섯 가지의 불균등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아들처럼 기르는 데 있어, 어찌 경중(輕重)과 원근(遠近)의 구별을 용납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백성 부리기를 마땅히 고르게 하여야 한다. 진실로 한쪽은 수고롭고 한쪽은 편하다면, 아버지가 자식들에 대하여서라도 그 원망을 금할 수 없는 것이거든, 하물며 나라의 많은 백성에 있어서랴? 고르게 하려면 먼저 명목(名目)이 번다하지 않아야 한다. 명목이 같으면 역사(役使)가 고르게 되고 역사가 고르게 된 뒤라야 원망이 없어진다.
〔『성호사설』 권7 인사문 오불균(五不均)〕

균등함의 가치를 역설한 부분이다. 백성을 균등하게 사역할 뿐만 아니라 조세를 고르게 하고 생산수단까지 고르게 하고자 했던 의도인 것이다.

정약용은 임금이 없는 나라는 있어도 백성이 없는 나라는 없다는 인식을 전제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임금은 통치자이고 백성은 통치를 받는 자이므로 임금으로 하여금 이 정신을 구현하는 장치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저술인 「원목(原牧)」에서는 원시사회에서 통치자가 선출되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통치자는 백성들에 의하여 선출되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탕론(湯論)」에서는 천명을 어긴 천자의 경우 제후들의 추대에 의하여 천자를 교체하는 일인 방벌(放伐)이 정당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제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제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제도나 법제의 정비가 필수적이었다. 정약용은 제도 정비의 기준을 “선왕(先王)”의 왕정(王政)으로 제시하되, 그것은 주로 『상서(尙書)』와 같은 옛 경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념적 측면을 계발함과 동시에 왕정의 유제가 『주례(周禮)』에 담겨져 있다고 인식하였다. 『주례』를 기준으로 통치체제를 구상한 것이 유명한 저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이다. 『경세유표』에서는 모든 통치권을 임금에게 귀일시키면서 임금과 백성이 직접 상대하는 체제를 구상하여 중간 농단을 지양하였다. 또한 이의 시행을 위한 경제적 기초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며 토지 소유는 국유를 전제로 직접 생산자가 점유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자고 하였다.

참고문헌

  • 김태영, 「다산의 국가개혁론 서설」, 『다산의 정치개혁사상』, 창작과 비평사, 1990
  • 송양섭, 「반계 유형원의 '公' 이념과 이상국가론」, 『조선시대사학보』64, 2013
  •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 도록』, 2010
  • 원재린, 「성호 이익, 함께 사는 길을 찾아 나서다」, 『내일을 여는 역사』44, 2011
  • 이근호, 「담와 홍계희의 사회경제 정책 구상-양역변통론을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27, 2014 ; 「조선후기 ‘공(公)’담론 연구의 현황과 전망」, 『역사와 현실』93, 2014
  • 이헌창, 「성호의 안민부국론」, 『성호이익연구』, 사람의무늬, 2012



이근호 |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하였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07.07.



주석


1양역(良役)


조선시대 군역은 신분을 불문하고 16세이상 60세 이하의 정상적인 남성에게 부과된 역이었다. 단, 노비는 제외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양반들이 역에서 빠지면서 군역은 양인들만이 담당하는 역이 되면서 양역이라 불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