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파의 토지개혁 -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의 토지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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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0회 작성일 16-02-0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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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형원의 공전제(公田制) 토지개혁



조선은 처음부터 명확한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나라였다. 고려 말의 혼란한 상황에서 우연히 생겨난 국가가 아니었다. 물론 건국 초기 복잡한 상황에서 건국 세력의 계획들이 모두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 계획의 변화된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이 처음 세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후일 그 계획을 종합한 문서가 바로 『경국대전』이다. 말 그대로 ‘나라를 경영하는 큰 원칙’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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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간을 이루는《경국대전(經國大典)》<연합뉴스 제공>



그런데 나라가 세워지고 200여 년이 지나면서 조선의 현실은 건국 초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더구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은 커다란 위기를 연속해서 겪었다. 이때 유형원(1622~1673, 광해군 14∼현종 14)이 저술한 책이 『반계수록』이다. ‘수록’이란 여러 책을 읽다가 그때그때 적어놓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대단히 겸손한 표현이지만,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으로 잘 짜인 국가 개혁 청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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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의《반계수록》 본문 일부.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통해 국가 운영과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반계수록』은 모두 26권으로 구성되었는데 1권, 2권의 제목이 ‘전제(田制)’이다. 뒤따르는 모든 내용은 ‘전제’라는 기초 위에 잘 쌓아올려진 건축물처럼 구성되었다. ‘전제’를 글자 뜻대로 한글로 바꾸면 ‘토지제도’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토지제도’와 ‘전제’는 같은 뜻은 아니다. ‘토지제도’에 대해서 우리는 토지 소유권에 대한 내용만을 연상하지만, ‘전제’는 토지소유권에 대한 내용과 조세제도에 대한 내용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유형원이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생각했던 것은 중국 고대에 실시되었다고 하는 ‘정전제(井田制)’이다. 고전적 정전제는 글자 정(井)의 모양으로 9등분으로 구획된 토지제도의 운영을 뜻한다. 이 정자형(井字形) 토지에서, 주위에 있는 토지가 사전(私田)이고 가운데 있는 토지가 공전(公田)이다. 사전에서 수확한 곡식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대신 사전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하여 수확한 곡식 모두가 국가의 몫이 되었다. 소유권이 아닌 그 땅에서 수확된 곡식의 귀속에 따라 붙여진 말이다. ‘사전’을 경작하는 사람은 국가에서 ‘사전’을 받는 반대급부로 ‘공전’에서 일하는 것 이외에 한 가지 의무를 더 졌다. 군인으로 복무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유형원은 당시의 조선 현실에서 적어도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은결(隱結)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은결이란 숨겨진 땅, 즉 중앙정부가 파악하는 대상에서 빠져 있는 땅을 말한다. 당시 고을마다 은결이 없는 곳이 없었는데, 은결은 경제적 무질서와 부패의 온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토지 겸병(兼倂) 문제였다. 겸병이란 소수의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 토지를 소유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넓이가 고정된 땅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반대편에 다수의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겸병이 불러온 폐해는 은결의 폐해보다 훨씬 심각했다. 겸병이 확대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은 자기 땅을 잃고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지어야 했고, 이렇게 되자 경작자들은 지력(地力)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지력 향상을 위해서는 여러 해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데, 나중에 그 노력의 결과가 자기 것이 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결국 지력은 점차 고갈되었고, 경작지는 황폐화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겸병의 더 큰 문제는 겸병이 국가와 백성(民) 간의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땅을 연결고리로 하여 백성들과 연결되었다. 겸병이 확대되어 자영농민이 전호(佃戶), 즉 소작인이 되면 그들은 국가가 아닌 지주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국가로서는 세금과 군역을 부과할 수 있는 백성을 잃게 된다. 한 번 이렇게 되면 국가가 세금을 아무리 가볍게 해도 그 혜택은 땅 없는 백성들이 아닌, 지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결국에는 어떤 국가정책도 효과를 내기 어렵게 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국가 수준의 경제 제도가 충족시켜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떤 경제제도도 지속되기 어렵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 제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경제적 삶을 가능하게 하고, 국가 운영을 위한 경제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전제는 그것을 단순한 형태로 잘 보여준다. 정전제는 토지와 노동을 결합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서 백성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자(物資)를 얻고, 정부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조세와 국방을 위한 병력을 안정적으로 조달받는다. 요컨대 정전제는 경작지와 노동력을 결합시켜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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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정전제
토지를 글자 정(井)의 모양으로 9등분하여 운영하는 토지제도



유형원은 고전적 정전제를 그대로 실시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전제가 가진 원래 취지를 실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집요했다. 유형원이 추구하는 핵심 목표는 정전제를 자기 시대 현실에 맞는 개혁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그가 주장한 것이 공전제이다. 공전제는 고전적 정전제처럼 토지를 정자형(井字形)으로 구획하지 않고도 정전제와 동일한 효과를 내도록 계획된 제도였다. 요약하면 공전제는 토지사유와 거래를 금지하고,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직역(職役: 신분별로 개인이 국가에 대해 갖는 의무. 예를 들면 평민 성인 남자의 군역(軍役)이 대표적이다.)에 상응하게 차등적으로 토지를 지급받고, 세금은 토지 소출의 1/10을 내는 것이었다.

『반계수록』은 조선이 청나라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겸병이 급속히 확산되는 현실에서 저술되었다. 이 책은 당시 조선 현실에 대한 유형원의 깊은 고민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공전제 자체도 그 현실의 강고함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의 공전제론에서 가장 핵심적 문제는 땅 없는 백성들이 어떻게 땅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유형원은 이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는 훌륭한 왕이 마음을 다해서 공전제를 실시하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국가의 선포에 의해서 토지제도가 사전제에서 공전제로 순조롭게 전환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서 『반계 유형원 연구』를 통해서 실학 연구의 장을 처음 열었던 천관우는 유형원이 자신의 주장이 자기 당대에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성호 이익의 한전제(限田制) 토지개혁



이익(1681~1763, 숙종 7∼영조 39)은 유형원보다 59년 늦게 태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약 60년의 시간차가 있었다. 겸병 문제는 이미 유형원이 국가운영과 민생 차원에서 그 폐단을 정확히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익의 시대에서 보면 유형원 시대의 겸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익은 전제(田制)에 대해서 유형원과 다르게 이해하거나 다른 원칙을 천명하지 않았다. 다만 겸병 확대로 인한 토지 소유의 양극화 정도에서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두 사람의 토지개혁의 내용을 다르게 했는데, 이익은 유형원이 주장한 공전제 대신에 한전제를 주장했다.

이익 역시 정전제를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보았다. 하지만 이 제도를 현실에서 곧바로 실현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토지 소유 양극화의 당연한 귀결인,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경제적 부는 늘 정치적 힘 그 자체이거나 혹은 그것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익은 중국 전한(前漢) 말에 정전제 시행을 시도했던 왕망(王莽, BC 45~AD 23)이 거대 지주들의 반대로 패망하고 그 개혁도 중단된 사실을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거대 지주들의 반발을 최소화시키면서 점진적으로 빈부를 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전론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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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 말기의 정치가 왕망의 개혁이 기득권 세력에 좌절되었음을 성호 이익은 지적하고, 점진적인 방법을 새로이 제안했다.



한전제에서 핵심 개념은 영업전(永業田)이다. 평균적 소농이 자활할 수 있는 최소 넓이의 토지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그는 영업전 규모를 넘는 양반 지주의 토지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매매의 허용을 주장했다. 국가가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는 것에 따른 지주들의 저항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또, 그는 장기간에 걸쳐서 토지가 분할 상속되는 과정에서 거대 지주가 점차로 소멸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업전 개념에서 더욱 중요한 측면은 영업전을 매매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거대 규모의 토지소유에 대해서는 그 분할을 유도하고, 일정 규모 토지소유에 대해서는 국가가 그 안정적 유지를 도와주는 정책이 바로 한전제였다. 겸병이 전염병처럼 확대되는 상황에서 소농의 토지소유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익은 영업전을 사고 파는 사람 모두에 대한 엄벌을 주장했다.




연암 박지원의 한전제(限田制) 토지개혁



연암 박지원(1737~1805, 영조 13∼순조 5)은 이익보다 56년 뒤에 태어났다. 그는 63세가 되던 1799년에 지은 저서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한전제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책의 장점은 당시의 생생한 농촌 현실을 담았다는 점이다. 그는 1797년(정조 21) 7월에 충청도 면천(현 충남 당진군 면천읍) 군수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이 그의 『한민명전의』에 온전히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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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건곤일초정. 연암 박지원이 충남 당진군 면천군수로 있을 때 건립되었다. 이 시기 박지원은 자신이 직접 겪었던 농촌 현실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 담았다. <연합뉴스 제공>



박지원의 토지개혁안은 유형원과 이익의 토지개혁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조선 농촌의 가장 큰 문제를 거대 지주들에 의한 토지겸병으로 보았다. 이들에 의한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점진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또 토지 소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면 수십 년이 지나면서 상속 등의 방법으로 토지 소유가 점차 균등해질 것이라고 예상한 것도 이익과 생각이 같았다.

이익과 박지원 모두 토지 소유 규모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여, 겸병으로 인한 양극화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 제한을 가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겸병 현상에 대한 이해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반영했다. 이익은 영업전에 대한 매매 금지, 즉 자영농이 자활할 수 있는 최소단위 경작지인 영업전을 지키는 방식으로 겸병 확대를 제한하려 하였다. 반면에 박지원은 토지 소유 규모의 상한을 정하는 방식으로 겸병 확대에 제한을 가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가 농촌에서 관찰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저 호부(豪富) 겸병자들도 빈민들의 경작지를 강압적으로 팔게 하여 단번에 모두 자기의 소유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 부강한 자산에 의거하여 편안히 앉아 아무 소리 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경작지를 팔려는 사람들이 제 손으로 토지문서를 가지고 매일 부잣집 문전에 찾아옵니다.” 자영 소농들은 자주 돌아오는 흉년을 버틸 여유가 없었다. 어느 해가 되었든 흉년은 들게 마련이었다. 그때 농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내년은 어찌되든 땅이라도 팔아서 당장 그해를 넘기는 것이었다. 이익의 한전제는 영업전을 지키는 방식인데, 이것은 현실성이 없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 정전법(井田法)



실학이란 실제 현실에 대한 학문을 뜻하기에, 그 속에는 늘 긴장감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단순히 현실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바꾸는 것이 실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실학은 현실 이해와 그에 대한 개혁을 모두 아우른다.

정약용(1762~1836, 영조 38∼헌종 2)은 유형원에 비해서 140년, 이익에 비해서는 81년 뒤에 태어났다. 이러한 시간 차이가 그의 토지개혁론을 이전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과 다르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다.

정약용은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지만, 스스로 자신의 대표저술로 꼽은 것들은 ‘1표(表) 2서(書)’이다. 그것은 바로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심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이다. 『목민심서』는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준칙을, 『흠흠심서』는 조선시대의 형옥(刑獄)을, 『경세유표』는 조선시대 세금 문제를 중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 권의 책이 모두 국가 운영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국가 운영에서 그가 가장 중요시한 문제는 결국 세금과 형벌의 운영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졌지만, 역시 그 중심은 조선의 경세(經世) 문제였던 것이다. 그의 토지개혁론인 정전제는 『경세유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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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經世遺表)》는 토지, 부세 등 모든 제도의 개혁 방향을 서술한 책이다. <실학박물관 제공>



그가 주장한 정전제는 얼핏 보기에 유형원이 말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는 경작지 10결에서 1결을 공전으로 만들고, 9결을 사전으로 만들어, 9결의 사전 경작자들이 1결의 공전을 가꾸어서 국세에 충당하는 것을 정전제로 이해했다. 이때 9결의 사전에 대해서는 일체의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사전은 유형원이 말하는 사전과는 의미가 많이 달랐다.

본래 정전제에서 사전은 그 수확한 곡식의 귀속에 따라 붙여진 말이었다. 하지만 정약용의 사전은 사적 소유지를 뜻했다. 그는 확실히 자기 시대의 지배적 토지관계가 지주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전 경작자에 대한 언급에서 그가 그 땅의 주인인지 땅을 빌려 농사짓는 전호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문맥으로 보아서 그런 구분 자체를 일부러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주제를 인정했다. 최소한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에게 사전은 사적 소유지를, 공전은 관유(官有) 즉 국유지를 뜻했다. 때문에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전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였다. 유형원이나 이익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는 국가 자산을 이용해서 공전을 확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나아가 그는 국가가 공전 모두를 사들일 필요는 없고, 지주들의 자발적 기부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전들의 탐학에 지친 부자들의 자발적 양도를 기대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기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주제에 대한 태도와 함께 정약용이 이전 실학자들과 구분되는 또 하나는 노동력과 경작지를 짝 지우는 방식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유형원은 정전제의 핵심이 백성들에게 항산(恒産), 즉 자활 가능한 일정한 넓이의 경작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력을 기준으로 경작지를 나누어야 했다. 하지만 정약용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경작지를 기준으로 노동력을 배치하는 것이 정전제라고 주장했다. 토지 소출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노동력이 배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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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도 농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산업이지만, 유일한 산업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연합뉴스 제공>



이러한 노동력과 경작지의 결합방식에 대한 인식 차이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유형원이 살았던 17세기 중반에는 백성들이 경작지 말고는 다른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도 농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하지만 농업이 유일한 산업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수공업과 상업이 일정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경작지와 짝 지워지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직업으로 농부와 더불어 그들의 생산물과 기능을 교환하여 살아간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서는 밥 이외에도 수공업자가 만들고 상인이 운반하는 다양한 물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직접 나눠주는 방식으로 백성들의 살림을 책임질 수는 없다고 보았다. 대신에 정약용은 다른 두 가지 방식이 민생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조세 운영을 원칙대로 하는 것이고, 둘째는 농업을 포함한 다른 다양한 직업을 권장하는 것이다. 국가의 일은 백성들 모두가 경작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적절한 일자리를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민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유형원이 정전제를 통해서 목적하는 것은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물자를 얻고, 동시에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정약용도 결코 이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변화된 현실에 알맞은 변화된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정약용은 그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개혁의지를 놓치지 않았다.




이정철 |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조세개혁인 대동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온전히 개인의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 우리 각자의 사적 삶이 사회제도에 의해서 어떻게 얼마나 영향 받는지를 살피는 것에 관심이 있다. 현재는 임진왜란 이전 선조 대를 공부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드높은 이상을 가졌던 젊은 사림들이 현실 정치와 만났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저서로는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비평사, 2013]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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