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말레이시아 연방 술탄 - 9명의 술탄이 다스리는 입헌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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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16-02-0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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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군주의 나라



말레이시아의 정치에 대해 논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1981년부터 2003년까지 재직하며 국가 발전을 지휘한 전설적인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Mahathir bin Mohamad)을 떠올리겠지만, 말레이시아는 상당한 정도의 정치력을 구사하는 국왕이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이다. 더구나 총 13개의 주 가운데 9개 주에 술탄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번갈아 가며 5년 임기의 국왕에 취임하므로 전 세계에서 군주가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다가 20세기 중반에 독립을 이루기까지 말레이시아의 술탄들은 말레이인들의 정체성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현재 정치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연방 술탄과 하이테크의 동남아 강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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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는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입헌군주국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사진은 서머싯 몸이 극찬했던 페낭의 정경. Hilmi Z Othman/flickr



러디어드 키플링과 헤르만 헤세 그리고 서머싯 몸이 ‘이곳을 보지 않으면 세상을 다 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찬양했던 페낭,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 앞다퉈 세력 경쟁을 벌이며 요새와 교회들을 세워 놓은 말라카, 고풍적인 영국 식민 공관들이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와 같이 유명한 고층 건물들과 조화를 뽐내는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있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말레이시아다.

말레이시아는 지난 수십 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하이테크 기술력을 보유한 도시적이며 세련된 국가이자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인구는 2012년 기준으로 약 2,933만 명 정도로 한국보다 적지만, 국토의 면적은 대략 33만km²로 한반도의 약 1.5배에 이른다. 말레이시아는 대표적인 다문화 국가로, 인종별로는 말레이계가 67%, 화인 25%, 인도계가 7%, 기타 인종이 1%를 차지하고 있다.

인종적 구분은 종교적 차이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대다수의 말레이계는 이슬람교를, 화인들은 불교나 유교를, 그리고 인도계는 힌두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에는 “이슬람을 믿는다는 것은 믈라유인이 된다는 뜻(masuk Islam masuk Melayu)”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종에 따른 종교적 구분이 동남아시아의 어느 지역보다 분명한 편이다.

관광지로 친숙한 말레이시아가 입헌군주국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의 정체는 선임제 입헌군주제 방식이며, 정부 형태는 양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진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2011년 12월에 현 국왕인 압둘 할림(Yang di-Pertuan Agong Al-Wathiqu Billah Tuanku Abdul Halim Mu'Adzam Shah)이 취임하였다.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가진 나집 툰 라작(Dato' Sri Mohd. Najib bin Tun Abdul Razak) 총리는 2013년 재임에 성공한 인물로서 2009년에 제 6대 총리를 지낸 바 있다. 부총리는 2009년 취임한 무히딘 야신(Tan Sri Muhyiddin Yass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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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상징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좌), 왕궁 이스타나 너가라의 전경(우)




말레이시아의 9개 주에서 종교적 수장이자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술탄들은 ‘연방 술탄’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5년마다 개최되는 군주의회(Council of Rulers 또는 Conference of Rulers)에서 임기 5년의 국왕인 양 디퍼르투안 아공 (Yang di-Pertuan Agong) 또는 술탄 아공(Sultan Agong)과 부국왕을 선출한다. 국왕과 부국왕은 술탄들 가운데 정해진 순번에 의거해 연장자 순으로 선출되는 것이 관행이므로, 엄격한 비밀선거를 통해 선출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사실상 차기 국왕은 예상 가능하다.

국왕이 5년 임기로 선출되는 방식은 말레이시아가 독립했을 때 지역 간 분란을 방지하고 성공적인 연방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타협의 결과였다. 말레이시아의 군주들은 말레이시아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루쿠너가라(Rukunegara)를 통해 그 초법적 권위를 인정받는데, 총 다섯 가지 원칙 중에 첫 번째는 ‘신에 대한 믿음’이며, 두 번째가 바로 ‘군주와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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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는 크게 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로 나뉜다. 지도의 흰색 부분이 말레이시아이다.



그러나 말레이시아가 입헌군주정인 만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실질적인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총리이기 때문에 국왕을 포함한 연방 술탄들은 전통 사회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입헌군주국의 경우와는 달리 말레이 술탄들은 결코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술탄들은 국가와 주의 수반으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이슬람의 수장이며 동시에 토착 말레이인들의 특권과 이익을 보호하는 군주로서 실제로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법적으로 국왕은 군주의회의 소집권, 의회 해산 요청에 대한 동의 유보권, 총리 임명권, 공공서비스 위원회 설립권, 비상사태 선포권, 연방의회를 통과한 법률에 대한 승인권 등을 행사할 수 있다.




술탄은 말레이시아 정체성과 독립의 수호자



말레이시아 13개 주 가운데 9개 주인 조호르(Johor), 커다(Kedah), 클란탄(Kelantan), 느그리슴빌란(Negeri Sembilan), 파항(Pahang), 페락(Perak), 페를리스(Perlis), 슬랑오르(Selangor), 트렝가누(Terengganu)에는 연방 술탄이 존재한다. 술탄이 없는 4개의 주, 즉 말라카(Malacca), 페낭(Penang), 사바(Sabah), 사라왁(Sarawak)은 국왕이 조율하도록 되어 있다. 현재 연방 술탄이 존재하는 9개 주는 과거 동명의 왕국의 영역을 따라 수립되었고, 따라서 각 주의 술탄들은 연방 술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를 나타내는 상징적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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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의 술탄들은 연방 술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를 나타내는 상징적 존재이다. 사진은 미잔 자이날 술탄과 누르 자이라 왕비가 2010년 국왕의회 개회를 선언하는 모습



말레이시아는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여러 왕국들은 수마트라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불교 왕국 스리위자야를 비롯하여 이후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왕국이나 자바나 시암(태국) 또는 크메르(캄보디아) 왕국들에 복속되거나 조공 관계를 맺기도 하고 다시 독립적 왕권을 회복하는 등 역동적인 역사를 전개했다.

말레이 술탄의 기원은 말레이 왕국들 중 가장 먼저 이슬람을 수용한 말라카 왕국에서 유래한다. 말라카 왕국은 15세기 초부터 16세기 초엽까지 번창했던 인도양 국제무역의 거점으로, 중국과 아랍은 물론 유럽에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졌고 말레이반도 내 여러 왕국들에게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구사했다. 오늘날 말레이 인종이라고 할 때의 ‘말레이’라는 말도 원래 말라카의 왕족을 일컫는 용어에서 기원했다고 하니 그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된다.

최초의 술탄은 말라카 왕국의 제 2대 왕인 머갓 이스칸다르 샤(Megat Iskandar Syah)인데, 그는 말라카를 세운 군주인 파라메시와라(Paramesywara)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불교 군주로서 자신을 보살로 칭하고 왕국을 통치했던 것과는 달리, 므갓 이스칸다르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바그다드의 아바스(Abbās) 왕조의 통치 개념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는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종파인 수피즘이 결합한 신성한 왕권 구축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군주는 “땅 위의 신의 그림자”로 상정되었고, “군주는 초자연적 힘으로부터 권력을 받으며, 신의 대리자로 통치한다”는 명제가 주권의 표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는 도리어 말라카의 멸망을 자초했다. 15세기 말 처음으로 동남아시아에 발을 디딘 포르투갈 무역상들이 말라카의 지리적 입지와 국제무역 네트워크를 탐내어 1511년에 무력으로 침공하였기 때문이다. 이후로 말라카의 왕족들은 말레이반도 남부의 조호르로 피신해 조호르 왕국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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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 왕족은 16세기 포르투갈의 침공을 피해 조호르로 피신했다. 현재 조호르는 경제특구로서 번영을 이루고 있다. Stefan Fussan/flickr



포르투갈에 이어 16세기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 동인도 회사들이 동남아시아에 들어섰고, 말라카는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게 되었다. 그러나 트렝가누, 페락, 조호르 등 다른 왕국들은 유럽과의 무역 관계가 강화시킨 국제무역 속에서 독립된 무역 왕조로 전통을 이어 나갔다. 이러한 과거의 다양한 왕국들은 이후 말레이 술탄들에게 정치 형태와 권력 메커니즘 등의 유산을 남겨주며 큰 영향을 끼쳤다.

1786년부터 1941년까지는 영국 무역상들이 말레이시아에서 활발한 국제 무역을 전개한 시기였다. 19세기 이래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영국은 1826년에 말라카, 페낭, 싱가포르 지역을 해협 식민지로 탄생시켰고, 1874년 1월 20일 페락의 술탄 압둘라(Sultan Abdullah)와 체결한 팡코르 협약(Pangkor Treaty)을 기점으로 식민 통치를 본격화하였다. 식민지 행정을 총괄하기 위해 부임한 영국 주재관은 기존의 술탄제를 유지하면서 이들과의 협력을 통한 간접 통치 계획을 수립했다. 이로써 술탄은 관습적 의례와 종교에 관한 기존의 역할 이외에는 실질적인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영국의 뒤를 이어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식민주로 등장한 시기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말레이인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일본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술탄을 명목상의 군주로 남겨 두어 말레이시아의 종교와 관습을 보장하는 식민정책을 사용했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시기에 술탄들은 말레이인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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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독립 후,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 탄생을 선언하는 사바의 정치인 툰 푸아드 스테픈스(좌)와 말라야연방의 지도자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말라야를 재식민화한 영국은 1945년 10월 10일 말라야 연합안을 발표함으로써 전전(戰前)에 존재했던 연방 말레이 주와 비연방 말레이 주, 그리고 싱가포르를 제외한 해협 식민지를 하나로 통합하고 중앙 집중화 정책을 펴고자 했다. 말라야 연합안은 사실상 영국이 말레이 주들을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지위를 바꾸려는 시도로, 이에 따라 술탄들은 각자의 주에 대한 통치권을 식민지 정부에 양도해야 했다. 또한 말라야 연합안은 비말레이인들에게도 말레이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말레이인들의 집단적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때 말레이 술탄들은 사실상 주권을 양도한다는 이 조약에 서명을 하였고, 그 결과 말레이인들의 많은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술탄들은 곧 말라야 연합안의 서명이 영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연합안의 철회를 위한 탄원서를 런던에 보내는 등 말라야 연합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임으로써 말레이인들에게 반식민 항거의 기수로 인식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정당인 말레이연합민족기구[(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 약칭 암노(UMNO)]의 정치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하려면 말레이인의 구심점인 술탄들과 긴밀하게 협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탄들과 암노가 함께 노력한 결과 말라야 연합 체제는 붕괴되고, 1948년 말라야 연방(Federation of Malaya)이 새로 수립되었으며, 마침내 1957년에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라야 연방의 수립은 술탄들이 실질적으로 말레이인들의 수호자로서 중요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내각과 다투며 국가 안정에 기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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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복장을 한 1960년의 슬랑오르의 술탄 아공. 5년 임기의 국왕은 양 디퍼르투안 아공으로 호칭한다. 국왕의 짧은 임기는 내각과 갈등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말레이 술탄들이 가진 정치적 권위는 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의 정치인들과 곧잘 마찰을 빚어 왔는데, 이것이 말레이시아 현대 정치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57년 독립 당시 수립된 머르데카(Merdeka) 헌법에는 국왕과 연방 술탄들이 연방 정부와 주 정부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초법적 권위가 삽입되어 있다. 1965년 말레이시아 정부는 주요 인구가 화인인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에서 탈퇴시켰고, 1969년 말레이시아 내에서 화인들과 토착인 사이의 빈부 격차로 인한 인종 폭동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말레이인의 구심점으로서 술탄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술탄들의 강력한 권위는 총리를 비롯하여 내각과 불협화음을 겪게 되었다. 독립 후 파항, 조호르, 페락 주 등에서 술탄들과 주의 행정 수반인 주 수상 (menteri besar) 사이에 일련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 결과 술탄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자 1981년 총리에 취임한 마하티르는 술탄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술탄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는데, 1993년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과거에 술탄들이 영국에 나라를 팔아 넘겼고, 백성들을 억압하였으며 각종 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나랏돈을 사적인 일에 사용하거나 정부 공무원들을 압박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마하티르는 총 두 차례의 헌법 위기를 통해 술탄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먼저 1983년 그는 “모든 법안이 국왕의 승인을 받아 법이 된다”는 헌법 조항의 수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수정안은 “제출된 법안에 대해 국왕이 15일 내에 승인을 하지 않을 경우 그 법안은 승인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명기하고 있었다. 즉각 이것은 말레이시아 정치사적으로 유명한 이른바 ‘제1차 헌법 위기’를 불러왔다. 술탄들은 이 수정안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암노의 의원들은 의견이 분열되었다.

헌법 위기의 결과 술탄은 연방 정부 차원에서 법안 거부권을 상실하였지만, 술탄과 마하티르 사이에 형성된 정치적 타협 덕분에 국왕은 최장 60일간 입법 과정을 지연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 받음으로써 오히려 술탄들의 실질적인 파워를 증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로도 말레이 술탄들은 내각을 상대로 정치력을 구사하였는데, 클란탄 주의 술탄은 1990년 총선에서 마하티르가 이끄는 집권 연립을 몰아내고 야당이 클란탄 주 의회의 모든 좌석을 차지하게 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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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총리에 취임한 마하티르는 술탄을 비판하여 술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술탄들의 각종 사치 행각과 일부 왕족의 살인 및 납치 등 범죄 스캔들이 언론에 오르내려 왕실의 위신이 추락하기도 하였는데, 1993년 조호르 주의 왕이 스포츠 코치를 구타한 사건 등이 불거지자 마하티르 총리는 이른바 ‘제2차 헌법 위기’를 통해 술탄들의 민형사상 소추 면제권을 박탈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는 국왕에 대한 민법상이나 형법상의 기소가 불가능했지만, 1993년 이후에는 국왕이라도 형법상 범죄를 저지를 시에는 특별 법정에 기소될 수 있으며, 이 경우 국왕의 모든 기능은 정지된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거의 여느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마하티르와 기타 정치인들은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유용한 무기로 술탄들을 이용하려면 그들의 파워를 어느 정도 부활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2009년 야당인 민주행동당(DAP: Democratic Action Party)의 의장이 페락 주의 술탄 아즐란 샤(Azlan Shah)가 헌법의 범주를 넘는 월권 행위를 한다며 고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데 대해 암노의 여러 의원들이 그를 술탄 모욕죄로 고소해 버린 사건은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마하티르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2008년 총선에서 집권연합인 국민전선(Barisan Nasional) 이 더 이상 정치적 독점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술탄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발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하티르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는 마하티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리더였기에 술탄들과 내각 사이의 기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2008년에는 평소 조용하던 페를리스의 술탄마저도 바다위 총리가 선택한 주 수상을 거부하고 그의 측근을 자리에 앉혔다. 2014년에 조호르의 술탄은 주의 토지개발 규정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그리고 슬랑오르의 술탄은 자신의 사업을 위해 의회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내각이 행정권을 강화해 오거나 혹은 술탄들이 나라 안팎으로 논란거리를 제공하더라도, 국왕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은 식지 않고 있으며, 왕의 존재가 국가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해 온 것도 사실이다. 말레이계와 화인, 인도계로 이루어진 복합 사회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는 데 말레이 술탄들의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 특히 술탄을 영적인 지도자이자 이슬람의 수호자로 섬겨 온 전통은 이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말레이 서민 계층의 술탄에 대해 지지는 여전히 강력하다.




말레이시아의 주요 군주





술탄 압둘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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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압둘 라만



술탄 압둘 라만(Al-Marhum Tuanku Abdul Rahman Ibni Al-Marhum Tuanku Muhammad, 1895~1960년, 재위 1957~1960년)은 말라야 연방의 초대 국가원수(Supreme Head of State)를 지냈으며, 느그리슴빌란 주의 두 번째 술탄이었다. 1895년 8월 24일에 출생한 압둘 라만은 초년 시절 쿠알라룸푸르에서 수학하였고, 1925년 영국으로 건너가 법학사를 받았으며 1928년에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영국에서 그는 말레이 민족주의 단체인 ‘재영(在英) 믈라유인 연맹(Kesatuan Melayu United kingdom)’의 초대 의장을 지낸 바 있다.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말라야의 공직자로 근무하던 압둘 라만은 193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느그리슴빌란 주의 술탄으로 취임했다. 일제 점령기에 친일적 연설을 하기도 했고 말라야 연합 조약에 서명을 하기도 했지만, 말라야 연합 서명의 경우 영국 측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말라야 연합의 해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압둘 라만은 말레이시아의 독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57년 독립 말라야 연방의 초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압둘 라만은 의회민주주의를 강하게 신봉하고 지지하여 현재의 안정된 입헌군주제를 확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술탄 아즐란 샤


술탄 아즐란 샤(Sultan Azlan Shah Ibni Almarhum Sultan Yusuf Izzuddin Shah, 1928~2014년, 재위 1989~1994년)는 말레이시아의 제9대 국왕으로, 생전에 말레이시아의 법과 교육 및 스포츠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1928년 페락 주 태생으로 영국의 노팅엄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말레이시아에 귀국한 뒤 판사로 임명되었고, 1965년에는 말라야 지방법원장에 임명됨으로써 영연방에 속한 국가들 사상 최연소 지방법원장이 되었다. 또한 1982년에는 최연소 연방법원장에 임명됨으로써 말레이시아 사법계의 최고 수반에 올랐다.

1984년 페락의 제34대 술탄으로 취임한 아즐란 샤는 1989년 제9대 말레이시아의 국왕에 선출되었다. 5년간의 임기 후 페락 주의 술탄으로 복귀한 그는 2009년 페락 의회의 해산을 막기 위해 왕실 파워를 발휘하면서 헌법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특별히 하키에 관심이 많아 ‘말레이시아 하키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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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과 교수
글쓴이 송승원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를 졸업하였고, 동 대학 국제지역대학원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 석사를, 미국 오하이오 대학교(Ohio University)에서 인도네시아 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서강대학교 HK 조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이사(2014~현재)로 활동 중이며, «The Historical Construction of Southeast Asian Studies: Korea and Beyond» (ISEAS, 2013. 공저), «동남아시아의 박물관: 국가표상과 기억의 문화정치»(이매진, 2011. 공저) 등의 저서 및 <인도네시아의 지방자치와 북 말루꾸의 끄라똔 정치>(국제지역연구, 2015), <Being Korean in Buton? The Cia-Cia’s Adoption of the Korean Alphabet and Identity Politics in Decentralized Indonesia>(Kemanusiaan, 2013) 등 다수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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