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캄보디아 왕가 - 앙코르 왕국의 후광 속에 연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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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16-02-0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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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왕가는 15세기까지 번영하며 찬란한 문명을 일궜던 앙코르 왕국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앙코르 왕국의 멸망 후 캄보디아 왕가는 수백 년 동안 베트남과 태국의 두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분열된 가운데 존속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약 100년 동안 이어진 프랑스 식민 통치 시대에는 프랑스에 협조하면서 그 위상을 유지했다. 20세기 후반부에는 프랑스, 미국, 중국, 베트남 등이 주역이 된 국제정치적 분쟁과 크메르 루주가 일으킨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했다. 오늘날에는 캄보디아의 국내 정치적 파벌들의 알력 속에서, 특히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의 견제 하에서 연명하고 있다. 캄보디아 왕가가 찬란했던 앙코르 왕국의 멸망 이래 그 위세가 점점 사그라지고 있는 가운데, 일부 학자들은 2004년 왕위를 계승한 시하모니가 캄보디아의 마지막 왕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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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앙코르와트와 바욘사원. 캄보디아 왕가의 영광은 이제 유적 속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다. ⓒ 조흥국







현재 통치 왕가의 역사



캄보디아 왕가의 중요한 특징은 그 영향력이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훈 센 총리가 국왕 및 캄보디아 왕실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 강대국들의 간섭 속에서도, 좌익과 우익 간 갈등의 곡절 속에서도 왕권을 유지하던 왕가는 현재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앙코르 왕국 시기의 찬란하고 강대했던 시기와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캄보디아 왕가가 약화된 것은 현대에 와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인도차이나 반도는 물론이고 태국과 미얀마 동부까지 지배하던 캄보디아는 15세기부터 태국과 베트남 등 주위 강대국들의 간섭과 지배를 받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 하에 놓이는 등 그 왕가의 위상이 점차 쇠락해 왔다. 특히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미국, 중국, 프랑스, 베트남 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둘러싸고 벌인 국제정치적 파워게임과 공산주의자 크메르 루주가 일으킨 ‘킬링필드’의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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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캄보디아의 국내정치적 파벌들의 알력 속에서, 특히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의 견제 하에 연명하고 있다. 캄보디아 왕가는 국왕의 권위가 온 세상을 호령하던 앙코르 왕국 시대를 동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캄보디아 왕조의 역사적 기초는 앙코르 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앙코르 왕국은 802년 톤레사프 호 서쪽의 오늘날 시엄리업 지방에 세워졌다. 앙코르 왕국의 역사는 많은 전쟁과 신전 건축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왕가의 선조들을 모시는 신전들은 신에 대한 제사 외에도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건축되었다. 앙코르 왕국의 대표적 신전인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전반 수르야바르만 2세 시대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많은 신전 건축과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고갈된 앙코르 왕국은 1431년에 태국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크메르인들은 이후 현 프놈펜 근처로 도읍을 옮겼지만, 캄보디아의 왕조들은 태국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16세기 이후 캄보디아 왕가는 태국의 속국이 되어 그 왕위 계승 과정에 태국의 간섭을 받았다. 17세기에 들어서서 베트남이 메콩 강 델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캄보디아에 대한 태국과 베트남의 경쟁 관계가 발전했다. 캄보디아를 둘러싼 태국과 베트남 사이의 알력에 더하여, 캄보디아 왕가 및 관료 사회 자체 내에서 친베트남과 친태국 간의 상호 적대적인 파벌이 형성되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당시 캄보디아는 그야말로 태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의 꼴이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탈은 18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적극적으로 행해져, 1750년대에는 원래는 캄보디아 땅이었던 메콩 강 델타가 모두 베트남의 영토가 되었다. 베트남은 1835년부터는 캄보디아를 문화적으로 베트남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캄보디아인들의 광범위한 반베트남 저항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자 1848년에 캄보디아는 다시 태국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노로돔 왕은 태국 정부의 지속적인 정치적 간섭에 지쳐 프랑스에 다가가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로써 캄보디아는 1863년 협정을 통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보호령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권은 프랑스인 고등판무관이 갖도록 했으나, 캄보디아의 왕가를 존속시키고 국왕이 캄보디아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전통적인 영향력은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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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건설자인 수르야바르만 2세 ⓒ 조흥국






현대 캄보디아의 바탕을 놓은 시하누크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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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독립 이후 국민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역할이 대두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노로돔 시하누크는 프랑스에 의해 1941년 왕위에 올랐다. 사진은 1952년 10월, 제복을 입고 있는 시하누크의 서른한 살의 모습.



국왕의 역할이 다시 대두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캄보디아의 독립 이후 국민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였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최근까지 캄보디아를 이끌었던 노로돔 시하누크(1922~2012년)였다. 1941년에 프랑스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노로돔 시하누크 왕은 전쟁 후 국가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주도 하에 독립된 캄보디아의 국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하누크 왕은 또한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여 프랑스 식민 당국에게 캄보디아에 남성 보통선거의 실시를 제안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국민들에게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혁적인 국왕으로 부각시키기를 원했다.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어 1946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선출된 총리가 국정을 운영했다. 민주당이 점차 세력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주의자인 손응옥탄이 왕실을 비판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시하누크는 1952년에 내각을 해산하고 스스로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것은 그가 의회민주주의가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외에도 자신의 주도 하에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시하누크 왕은 그해 6월 초 ‘국왕의 십자군원정’을 시작하여 유럽과 미 대륙,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캄보디아 주권에 대한 위협과 프랑스의 캄보디아에 대한 식민 통치 야욕을 비판했다. 결국 프랑스는 1953년 10월 캄보디아 정부에게 군사지휘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11월 9일 시하누크의 프놈펜 귀국은 한 마디로 개선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로부터 군사지휘권을 인수했으며, 그것은 캄보디아의 독립을 의미했다. 캄보디아 국민은 11월 9일을 오늘날도 독립기념일로 지낸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1955년 캄보디아에서는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민주당이 승리하여 손응옥탄이 집권하고 공화국이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시하누크 왕은 1955년 2월 국왕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 결과 99.8%의 국민들이 국왕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시하누크는 3월 초 갑자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고는 왕위를 자신의 부친인 수라마릿에게 이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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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치인 신분으로 정권을 다시 장악한 시하누크는 캄보디아 국기에 앙코르와트 도안을 넣으며 정통성을 과시했다.



그 후 일반 정치인 신분으로 정계에 뛰어든 시하누크는 ‘사회주의 인민회’라는 대중적인 정당을 설립했으며, 이 정당과 함께 1955년 가을에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했다. 부정 선거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시하누크가 적어도 농촌에서는 여전히 국민들이 신뢰하고 심지어 숭배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인민회를 통해 정권을 다시 장악한 시하누크는 캄보디아의 국기를 새롭게 제작하면서 앙코르와트를 그 도안에 넣었다. 그것은 자신의 통치가 앙코르 왕국 시대 캄보디아의 영광과 왕가 권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익과 좌익 간 절묘한 줄타기로 생명력을 이어간 통치자



시하누크는 당시 베트남을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전쟁의 와중에서 대외적으로 중립주의를 표방하는 등 캄보디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종종 중국에 가까이 다가가는 등 친공산주의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던 론 놀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와 민간인 우익 세력이 1970년 3월 당시 해외여행 중이던 시하누크를 실각시키고 ‘크메르공화국’을 선포했으며 친미 정책을 취하여 캄보디아를 베트남전쟁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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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시절 시하누크 부부



시하누크의 정치적 생명줄은 놀랄 만큼 질기고 길었다. 그는 1975년 수립된 급진적 사회주의 정권인 크메르 루주 세력과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78년 베트남 군대가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프놈펜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자, 이 정권과 반베트남 세력들 간 내전이 전개되었다. 그 내전의 과정에서 시하누크는 1982년 반베트남 세력들의 연합인 ‘민주캄푸치아’의 대표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베트남 군대가 물러가고 캄보디아의 내전이 종식된 후 1993년에 유엔의 감시 하에 치러진 총선을 통해 새로 수립된 캄보디아 왕국의 입헌군주로 다시 왕위에 복귀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캄보디아의 왕권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그러나 조금 더 약해진 형태로 남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캄보디아의 정치 체제는 1993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입헌군주제이다. 헌법은 국왕이 국가의 수반이고 불가침의 존재이며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국방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전쟁 선포의 권한을 지니며, 모든 정책과 결정은 국왕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근본적으로 의회에 집중되어 있고 권력의 실제적인 집행은 총리의 손에 놓여 있다.

헌법은 국왕이 군림하지만 통치할 수 없으며 단지 ‘국가의 통합과 번영’의 상징으로서만 기능할 뿐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국왕은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전쟁의 선포도 가능하며, 총리와 하원 및 상원 의장의 승인을 얻어야만 국가의 긴급 상황 시 국민동원령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왕권의 계승도 총리, 하원 의장 및 부의장, 불교의 양대 종파의 두 종정으로 구성된 왕위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21세기의 왕위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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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국장



약 10년 동안 입헌군주로서 캄보디아 왕국을 대표해 온 시하누크 왕은 2004년 10월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자신의 퇴위를 갑자기 발표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암으로 인한 건강 문제였으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훈 센 정부와의 갈등이었다. 독단적인 훈 센을 종종 비판하는 등 국정에 영향을 행사하거나 개입하려는 시하누크 왕과 훈 센 총리는 사실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한 관계 때문에 훈 센 측에서는 캄보디아 왕가를 항상 견제하여 왕족들이 정치적 활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등 캄보디아 왕가의 영향을 약화시켜 왔다.

시하누크 왕의 갑작스러운 퇴위로 왕위 계승의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시하누크에게는 1명의 이복동생과 여러 왕비에게서 태어난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복동생인 시리부드 왕자는 1990년대 전반기에 훈 센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적이 있었다. 아들인 노린드라퐁 왕자는 1970년대에 악명 높은 크메르 루주 집단에 합류한 ‘불온한’ 전력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유와니엇 왕자는 왕위에 대한 꿈을 스스로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차크라퐁 왕자는 1990년대 전반기에 국가 전복의 음모를 꾸며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음모 계획이 엉성했을 뿐만 아니라 결말도 우습게 끝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무지 가능성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1997년까지 제1총리로 정부의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었던 라나리드 왕자는 그해 7월 훈 센의 쿠데타로 총리직에서 쫓겨난 후 훈 센이 가장 견제하는 정적 중 하나가 되었다. 시하모니 왕자는 어릴 때부터 주로 외국에서 생활해 왔고, 예술에 탐닉해 있어 훈 센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왕위 계승은 1993년 헌법에 따라 왕위위원회에 의해 결정되는 사안이었지만, 그 최종결정권은 위원 중 한 명인 총리의 손에 놓여 있었다. 사실 훈 센이 상기의 왕자들 중 자신과 정치적 갈등을 겪은 시리부드나 차크라퐁 혹은 라나리드를 지지할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정치적으로 별 오점이 없던 노로돔 시하모니 왕자에게 낙점이 찍혔다. 시하모니는 시하누크와 그의 여섯 번째 왕비인 모니니엇 사이에서 1953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부모의 이름에서 첫 두 음절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시하누크가 퇴위를 결정한 것에는 시하모니가 왕위를 계승하여 그의 부왕보다 14세 연하인 모니니엇 왕대비를 보살펴 주도록 하기 위한 배려의 의도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모니니엇은 프랑스계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캄보디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인으로, 본명은 모니크 이지였다. 시하누크는 1951년에 프놈펜에서 열린 미인 선발대회에서 그녀를 처음 본 후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캄보디아 왕국의 현 국왕 시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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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왕위에 오른 시하모니. 캄보디아 전문가들은 시하모니가 캄보디아의 마지막 국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시하모니 왕(1953.5.14.~ 재위: 2004.10.29.~)은 미혼의 독신으로 살고 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는데, 1962년에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건너가 초등 및 중등 과정을 마치고 만 14세부터는 체코국립예술학교에서 음악과 무용과 공연학을 전공했다. 1971년에 프라하음악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75년 졸업 후 1976년까지 북한의 한 영화학교에서 영화 촬영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크메르 루주 시절 프놈펜의 왕궁에 갇혀 지내다가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한 후에는 프랑스로 가 1981년부터 2000년까지 프랑스에서 고전 발레를 공부하며 여러 예술학교들에서 캄보디아의 고전 무용을 가르치고 예술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예술 공부와 활동은 음악과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부왕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4년 10월 29일 시하모니 왕의 대관식 당시 그의 부왕인 시하누크는 그의 통치를 축복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9개 항아리에 담긴 성수(聖水)를 그의 머리에 부어 주었다. 한편 훈 센 정부는 퇴위하는 시하누크에게 ‘영웅적인 시하누크 대왕’의 칭호를 부여하여 그의 명예를 드높였으며, 시하모니 왕의 대관식에서 훈 센 총리는 “입헌군주제의 지속은 캄보디아 왕국의 안정의 열쇠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캄보디아의 국왕이 비록 입헌군주로서 아무런 실권이 없으며 또 총리인 자신의 강력한 견제와 통제 아래에 놓여 있으나, 캄보디아 사회에서 국왕이 국민들 특히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높고 때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한 발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물어 가는 왕가



오늘날 캄보디아의 정치와 사회에서 캄보디아 왕가는 갈수록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시하누크가 1981년에 창당한 푼신펙 당은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에 의해 조종되던 프놈펜 정권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베트남 군대가 철수한 후 1993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최다 득표를 하여 제1여당이 되었고, 당시 정당을 이끌던 라나리드 왕자가 제1총리가 되었다. 캄보디아 왕가의 엘리트를 주축으로 한 이 정당은 그러나 그 이후 점차 침체에 빠졌다.

특히 1997년 훈 센의 쿠데타로 라나리드 총리가 권력의 자리에서 축출된 후 푼신펙의 위상은 계속 추락하여, 2003년 총선까지만 하더라도 국회의 총 123의석 중 26석을 차지하더니 2008년에는 2석 그리고 2013년에는 1석도 얻지 못했다. 푼신펙의 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015년에 라나리드 왕자가 다시 그 총재직을 맡았으나 훈 센 총리가 건재하는 한 그의 정치적 술수와 강력한 견제 하에서라면 푼신펙의 전망은 어두울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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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누크의 시신이 중국에서 송환되어 2013년 2월 화장될 때, 5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국민이 줄을 서서 조문 행렬에 참가했다. 1941년부터 60년 이상 재위했던 시하누크는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왕이었다.



시하누크는 2012년 10월 15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만 90세의 생일을 2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이로써 현대 캄보디아의 왕가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무대에서도 가장 화려한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 이제는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논할 때 늘 중심에 놓여진다. 시하누크의 장례식이 끝난 후 프놈펜의 한 시민은 1950년대 시하누크의 통치 시대를 회상하면서, 캄보디아 국민을 시하누크 왕의 ‘자녀’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시하누크가 캄보디아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되어 왔는지를 시사한다.

시하모니 왕은 이제 시하누크가 자식이라고 부르던 캄보디아 국민에게 그의 부왕 대신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시하누크와 같은 카리스마가 없는 그가 과연 시하누크처럼 민심을 반영하는 목소리를 내는 캄보디아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을까? 시하모니 왕은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있으며, 자신이 나름대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인식하고 고민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8년 12월에 국왕자문위원회를 만들어 그 의장에 라나리드 왕자를 임명하는 등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하모니 왕의 측근들과 캄보디아 정치의 관찰자들은 시하모니 왕이 갈수록 왕궁에 갇힌 죄수처럼 되어 간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배후에는 국왕과 왕궁을 철저한 감시 하에 두고 있는 훈 센 총리가 있다.




캄보디아 왕가에 대한 평가



캄보디아 왕가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현 국왕인 시하모니보다는 캄보디아 현대사에서의 그 활동과 역할, 캄보디아 사회에서의 인식에 있어서도 비중이 훨씬 큰 그의 선대왕인 시하누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시하누크는 1941년 등위한 이후 2004년 퇴위할 때까지 무려 63년 동안 캄보디아의 국왕으로서, 총리로서, 당 총재로서, 그리고 다시 국왕으로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캄보디아 동향인들로부터 프랑스에 동조 내지는 협력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로부터 프랑스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미움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전쟁 시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미국 등 서방 세계로부터 불신을 받았다. 크메르 루주 시기에는 악명 높은 폴 포트를 두둔하고 크메르 루주 정권에 협력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정치적 경쟁자인 훈 센을 추켜세우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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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선왕을 기리는 행사에 참석한 현왕 시하모니와 전왕의 부인 모니니엇.



이러한 변화무쌍한 행동을 통해 그는 불사조처럼 국가의 지도자로 정치적 무대에 등장하고 캄보디아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시하누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이의 없이 인정되는 측면은 그가 캄보디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 점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동남아시아 전문가인 마이클 레이퍼 교수는 시하누크가 캄보디아의 ‘국가 단결의 원천’이었다고 평했다.

그에 비해 예술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시하모니 왕이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인물이라는 관찰이 지배적이다. 시하모니 왕은 2013년에 그해 7월에 실시된 총선이 부정 선거였다고 항의하면서 선거 결과를 거부하며 시위에 나선 야당 총재 삼랑시와 여당의 훈 센 총리를 국회개원식에 초청하여 당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정국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보는 어떤 능동적인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추측건대 훈 센의 요청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시하모니 왕은 오늘날 국가적인 의식에 참가하고 왕궁에서 방문객들을 접견하는 등 입헌군주로서 의례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캄보디아의 한 야당 의원은 시하모니 왕을 ‘꼭두각시 왕’이라고 칭하며, 국왕이 생존하기 위해 총리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고 전했다. 캄보디아의 한 공무원은 심지어 캄보디아의 진짜 국왕은 훈 센이라고 말한다.

2013년 2월 7일자 《아시아 타임즈(Asia Times)》는 캄보디아 국민이 아버지처럼 신뢰하고 존경하며 캄보디아 사회의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하던 시하누크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줌으로써 훈 센 총리가 왕가를 보다 용이하게 통제하고, 이제 훈 센이 캄보디아 국민의 존경을 홀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시하누크가 1993년에 훈 센 제2 총리에게 왕족에게 하사되는 ‘솜다잇’ 칭호를 제수했는데, 그 이후 캄보디아 사회 일각에서는 훈 센이 자신을 점차 왕족과 같은 위상에 두고 스스로 하나의 왕가를 이룩할 야망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역사학자이자 시하누크 연구가인 밀턴 오스본은 시하모니가 캄보디아의 마지막 국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왕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농촌과 도시의 장년 및 노년층 사이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캄보디아 사회에서 왕가를 없애고 군주제 전통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이웃 국가인 태국에서 군주제가 사회적 안정의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왕가의 전통이 1,200년 이상 지속되어 오면서 비록 때로는 미약하게나마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군주제가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을 훈 센도 오히려 군주제의 전통을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집권당인 캄보디아인민당의 위상 유지를 위해 계속 이용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오스카 베겔, 『인도차이나: 베트남ㆍ캄보디아ㆍ라오스』, 조흥국 역 (주류성, 1997).

· 필립 쇼트, 『폴포트 평전 – 대참사의 해부』, 이혜선 역 (실천문학사 2008).

· Milton Osborne, Sihanouk: Price of Light, Prince of Darkness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 Prince Norodom Sihanouk and Bernard Krisher, Sihanouk Reminisces: World Leaders I Have Known (Duang Kamol, 1990).




조흥국 |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서 동남아학 전공, 인도학과 중국학 부전공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체류 기간 중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서 동남아 유물 연구원으로 3년 간 활동했다.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의 대우교수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황금불탑이 빛나요 방콕>, <태국 - 불교와 국왕의 나라>,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사> 가 있으며, 공저로 <동남아시아의 최근 정치·외교에 대한 전략적 평가: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중심으로>, <아세안의 경제발전과 한·아세안 개발협력>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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