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조선시대 세금과 대동법 - 조선시대 조세제도 변화의 내적 논리와 그 귀결로서의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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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7회 작성일 16-02-0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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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운영의 본질,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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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제어필 『균공애민 절용축력』 균공과 절용은 조선왕조 재정운영의 대원칙이었다. <고궁박물관 소장>



국가의 종류는 다양하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것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어떤 국가이든 두 가지 기능만은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둘 중 하나라도 빠뜨리면 국가로서 기능할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세금과 형벌이다. 조선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서도 확인된다. 자신이 지은 수많은 책들 중에서, 스스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은 것은 세 권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가 그것이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고을을 실제로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지침서이다. 『경세유표』와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와 성격을 달리한다. 두 책은 특정한 주제에 대한 논리 정연한 이론서이다. 『경세유표』는 세금 문제를, 『흠흠신서』는 형벌 운영 문제를 정리한 책이다. 정약용 역시 국가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범주가 바로 세금과 형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가지 중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세금이다.




공법(貢法), 조선 건국의 약속



고려시대에 농부 A는 농사지어서 나온 소출의 일부를 정부에 세금으로 납부하거나, 아니면 관리(官吏) B에게 직접 납부했다. 정부가 농부 A가 내는 세금을 받아서 B에게 지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곡물 운송에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A가 인근에 있는 B에게 직접 납부함으로써 운송에 따른 노력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당시 조건에서는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이 세금제도에서 농부 A는 세금을 중앙정부나 B 어느 한쪽에만 냈고, 어느 한쪽에만 내는 한 A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때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는 땅을 공전(公田), B에게 세금을 내는 땅을 사전(私田)이라고 불렀다. 공전과 사전은 그 소유권이 아니라, 세금의 귀속에 따라 구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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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체계가 발전하기 전에는 세금 납부 방식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연합뉴스 제공>



고려 말, 신흥사대부들이 500년 가까이 지속된 왕조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세금제도의 문란과 붕괴 때문이었다. 지배층은 그들의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여, 세금제도 운영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식이었다. 지배층은 이미 공전이나 사전으로 지정된 땅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만약 그 땅이 사전이라면 기존의 B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C의 자격으로 세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D, E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농민 A 입장에서는 세금을 바쳐야 할 대상이 여러 명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 A는 농사를 지어도 자기 몫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고려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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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죽음 이후 무너져 가는 고려를 보고 신흥사대부는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출처: By CC David Stanley @Wikimedia Commons (CC BY)>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은 세금제도와 그 운영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알았다. 이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신생 왕조 조선도 전 왕조의 전철을 밟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가 1444년(세종 26) 성립까지 30년 가까이 걸린 공법(貢法)이다.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조선은 건국(1392)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금제도 개혁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법은 고려 말 젊은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생각한 이상 국가를 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도였다. 다시 말하면, 이 공법이야말로 조선이 건국하면서 백성들에게 지킨 약속이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17세기 중반에 성립된 대동법은 200년 전 공법의 재해석이자 시대 변화에 맞춘 재정립이었다.




조(租)․용(庸)․조(調)



조선의 조세제도는 조․용․조로 운영되었다. 그 각각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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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조. 조선 시대에 조세제도로서 운영되었다.



(庸)이 성인 남자의 노동력(Services)을 징수하는 것이라면 (租)와 (調) 즉, 전조와 공물은 물품을 징수한다. 다만 거두는 물품은 크게 달랐다. 전조는 쌀과 콩을 거두었고, 공물은 쌀과 콩 이외 각종 지역 특산물을 거두었다. 세종 26년에 성립된 공법은 전조에 대한 개혁입법이고, 후일 성립되는 대동법은 <공물+요역>에 대한 개혁입법이다. 공물에 요역이 따라붙는 이유는 사실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별 고을이 공물을 확보하고 중앙에 납부하는 과정에서는 자연히 요역이 동원되었다. 전통사회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문제는 오늘날보다 훨씬 큰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세금을 화폐, 즉 돈으로 낸다. 이것은 우리가 장을 볼 때 필요한 물품을 얻는 대신 돈을 지불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금은 정부가 다리를 놓고, 군대를 유지하고, 도로를 닦고, 외교를 하는 데 쓰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금으로 다리, 무기, 도로, 외교를 사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장바구니에 담기는 쌀이나 고기는 아니지만, 공동체 일원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옛날에는 국가가 화폐로 세금을 거두지 않고,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롭게 세금을 걷었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답변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돈으로 물품을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돈만 가지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사전에 그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언제나 만들 수 있고(제조),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운반할 수 있으며(운반), 필요한 사람이 집어들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보관(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살 수 있는 것은, 현대사회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에 대해서 생산, 운반, 저장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아무리 길게 보아도 채 100년이 못된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것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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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현대사회는 달리, 그렇지 못한 과거에는 자연화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뉴스 제공>



국가와 중앙정부의 등장은 현대 화폐경제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이 그렇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노동력과 물자, 오늘날로 말하면 예산이 필요했다. 그 예산은 오늘날과 다른 조건에서 마련되어야 했다. 조․용․조는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탄생한 제도이다. 시장이 발달하지 못하고, 화폐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조건에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 방법이 바로 조․용․조였다. 간단히 말하면, 전조와 공물은 그것이 생산되는 시기에, 생산되는 장소에서, 생산자에게 직접 요구하여 거두어졌다.




조세제도의 변질



조선은 건국 초에 조․용․조 중에서 전조를 중심으로 전체 조세제도를 구성했다. 그 이유는 전조가 가장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물의 수취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쌀과 콩만으로 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인 15세기만 해도, 시장이 발달하지 않아서 시장을 통해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기 어려웠다. 시장에서 구할 수 없다면, 그것이 생산되는 곳에서 생산되는 시점에 그 고을 사람들에게 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공물이다. 때문에 조선 초에 마련된 조세제도는 전조를 중심으로 했지만, 보조적으로 공물을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든다면 조선정부는 필요한 재원의 90%는 전조로, 10%는 공물로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의 조세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두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하나는 정부 총수입에서 전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공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전조와 공물은 위 표에서 보듯이 원칙적으로 받는 측과 내는 측이 서로 다르게 상정되었다. 전조는 왕이 거두고 백성이 낸다고 상정되었다. 조선에서 왕과 백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아니라 어버이와 자식 관계로 상정되었다. 기본적으로 그 관계는 자애로운 것이어야 했다. 때문에 전조는 가능하면 가볍게 거두는 것을 지향했다.

양반들은 이러한 전조의 이념을 이용했다. 물론 양반이라 하여 모두 지주인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에서 지주의 다수는 양반들이었다. 지주인 양반들은 전조의 이념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았다. 이들은 정부를 상대로 전조의 기본이념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전조 부담을 낮추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전조 수입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줄어들었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전조 수입이 조선 초에 비해서 절반 이하, 1/3, 혹은 1/4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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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타작도>. 조선시대 지주인 양반과 소작농으로 보이는 농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부 수입 대부분이 전조인데, 전조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줄자 조선 정부는 부족한 액수만큼 공물에서 충당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풍선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했다.

전조는 경작지에서 쌀과 콩으로 거두었다. 부과대상도 비교적 분명하고, 대부분 쌀과 콩에 한정되는 수취 물품의 종류도 단순할 뿐만 아니라, 지역별 품질 차이도 크지 않았고, 장기간 보관도 어렵지 않았다. 사실은 이런 점들 때문에 조선정부도 건국 초에 전조를 중심으로 세금제도를 구성했었다. 이에 반해서 공물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공물은 법적으로 고을에 부과되었다.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그 고을의 누가 그 공물을 얼마큼 납부할 것인지에 대한 법 규정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이 처음에 이런 규정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은, 공물 종류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조선정부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공물별 세밀한 수취규정이 필요 없도록 세금제도를 마련했던 것이다. 정부 수입 대부분을 전조로 거두고, 공물 수취의 비중은 낮추었던 것이 그것이다. 이 상태에서 공물 수취 규정의 미비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예를 든다면 어쩌다 사는 300원짜리 볼펜을 500원으로 올린다고 해도 일반소비자들은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점심에 사먹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가격이 5,000원에서 10,000원으로 올랐다거나, 집값이 2억에서 4억으로 올랐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초 공물 운영제도는 대단히 허술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부 총수입에서 그 비중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중이 점차 높아지자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었다. 공물을 최종적으로 누가 부담할 것인가가 규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없는 백성들이 부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정확히 얼마의 공물을 거둘 것인가에 대한 규정도 마련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변화는 지역 특산물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거나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스럽다. 10년, 20년이면 모르겠지만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특정한 특산물이 특정한 지방에서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일단 법으로 정해진 공물 납부 품목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상업도 발전했다. 때문에 16세기경이 되면, 각 고을에서 공물을 바치는 방식도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고을 안에서 쌀을 거두어서 그것으로 고을이 바쳐야 하는 물품을 사서 바치는 방식이었다. 정부 각 부서가 이전처럼 특정 고을에서 납부하는 물품을 받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고을이 직접 준비한 물품이 아니었다. 상인들이 그 과정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치명적인 부정과 부패가 발생했다. 방납(防納)이 그것이다.




사주인과 방납



공물의 법 규정은 각 고을에 부과된 물품들을 수령 책임 하에 중앙관서에 현물(現物)로 직접 납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규정을 지키기는 점차 어려워졌다. 지역 특산물도 장기적으로는 바뀌었고, 고을에서 중앙정부에 납부하기까지 걸리는 여러 날 동안 그것을 저장, 운반하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그 사이에 상업도 발전하여 더 많은 종류의 물품들을 시장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각 고을은 자체적으로 쌀을 모아서, 그것으로 자기 고을에 부과된 공물을 구입해서 정부에 납부했다. 이 과정에서 이를 대행하는 브로커, 즉 공물 납부 대리인이 생겨났다. 사주인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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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미역과 같이 각 지역마다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품목들은 공물로 상납되었다. <연합뉴스 제공>



중앙관서들은 고을이 물품을 직접 납부하려 할 경우 공납 물품의 품질에 트집을 잡아서 수납을 거부했다. 이것이 방납이다. 공물의 납부 조건이 현물로 규정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에 중앙관서들은 특정 사주인을 통해 조달되는 물품만을 수납했다. 자연히 각 고을은 그 사주인에게 자신들이 납부해야 할 공물 값에 해당하는 쌀을 내야했다. 여기서 부패가 발생했다. 사주인이 고을에 요구하는 액수가 납부할 공물의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그래도 고을들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널리 회자되던 말이 있었다. “공물은 꼬치에 꿰어서 가고, 인정(人情)은 지게에 지고 간다.”는 속담이 그것이다. 인정이란 사주인에게 내야만 했던 공물 납부 대행에 따른 수수료이다. 사주인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물론 그들이 그 이득을 홀로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이러한 브로커 자격을 얻으려면 권력자들과 유착해야 했다.

대동법 성립 이전에 공물을 받는 측과 내야하는 측 사이에는 정보의 심각한 비대칭성이 존재했다. 어떤 품질 수준의 물품을, 총수량 얼마로 받는다는 규정이 명확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받는 측에서 정하는 기준은 객관적이지 않아서 투명하지 않았고, 받아들이는 수량 또한 자의적이었다. 대동법은 납부자인 백성과 수취자인 정부 사이의 정보의 비대칭성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수취수단을 단순화하고, 납부량을 고정했다.




사대동의 확대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대동’이 점차 확산되었다. 사대동은 ‘대동법’과 단어가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로 다른 의미를 가졌다. 그렇다고 두 단어가 전혀 무관하지도 않았다. 사대동과 대동법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대동은 사회적 ‘관행’이었고, 대동법은 말 그대로 ‘법’이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대동은 대동법과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우선 사대동은 개별 고을 차원에서만 진행되었다. 나중에 대동법처럼 어떤 곳이든 결당(結當) 동일한 액수를 거두었던 것이 아니다. 때문에 고을마다 사대동의 1결당 수취액이 달랐다. 결(結)은 토지 면적 단위의 명칭이다. 둘째는 ‘사대동’은 ‘대동법’보다 수취액이 훨씬 높았다. 오래 지속된 방납에 따른 공물가 상승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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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수 많은 공물 종류를 쌀로 바꾸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연합뉴스 제공>



임진왜란 중에 ‘사대동’ 관행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대되었다. 조선정부는 많은 쌀이 필요했다. 군량미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때 정부는 공물 대신 쌀을 거두었다. 각 고을 입장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현상이 나타났다. 고을 내 모든 사람들이 쌀을 내었던 것이다. 전쟁 중이었기에 한 고을 내에서 힘 있는 사람은 안 내고 힘없는 사람은 내는 그런 상황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대동’이란 모두 함께 낸다는 뜻이었다. 후일에 나오는 대동법의 ‘대동’은 이러한 사대동의 기존 관행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원익과 경기선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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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원익.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공물 개혁 정책을 펼쳤다.



조선의 왕들은 즉위 후, 일시적으로 백성에 대해 온정적 정책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하들도 새 왕 즉위 직후에 비교적 개혁적인 건의를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때에는 임진왜란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고 어느 때보다 민생이 어려웠다. 광해군은 백성의 부담을 일회적으로 경감시키는 조치를 취하려 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원익(1547~1634)은 전국적인 공물 개혁 입법을 시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군량미 확보를 총괄했던 인물이었기에 공물 운영 상황 및 그와 관련된 논의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곧 바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 경기에서만 실시할 수 있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경기도에서 시행되었던 선혜법(宣惠法)이 그것이다. 왕이 은혜를 베풀어주는 차원에서 시행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경기선혜법은 나중에 효종 때 성립된 호서대동법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결당 수취액 16두(斗) 중에서 14두를 중앙정부에 내고 각 고을에는 2두씩만을 배정했다. 두(斗)는 ‘말’의 한자어이다. 당연히, 선혜법 이후에도 경기 각 고을에서 백성들에 대한 추가 수취가 계속되었다. 각 고을의 자체 운영을 위해서도 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호서대동법과 다른 것은, 수많은 진상품 종류가 선혜법 대상 품목 밖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기선혜법 실시된 이후에도 그것과 무관하게 계속해서 중앙에 바쳐야 하는 물품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경기선혜법은 대동법 성립을 종착점으로 하는 공물변통의 큰 흐름에서 의미가 컸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대동법이 성립할 때까지 계속해서 지속되는 도(道) 규모의 공물개혁 입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익과 삼도대동법



인조반정(1623) 직후 조정은 충청ㆍ전라ㆍ강원도에서 ‘삼도대동법’을 추진했다. 경상도는 왜관(倭館)에 물자를 제공해야 했기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삼도대동법 역시 이원익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원익에게 삼도대동법은 좌절된 광해군 즉위년 전국적 공물변통 추진의 재시도였다. 이원익은 조익(1579~1655)을 발탁했고, 삼도대동법 초안이 그의 손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그 초안의 내용은 많은 점에서 경기선혜법의 연장선에 있었다.

광해군 즉위년의 전국적인 공물변통 시도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경기선혜법이 가진 문제점은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공물은 운반 문제가 중요한데, 경기는 서울과 가까워서 그 문제가 감춰졌다. 이렇게 감춰졌던 문제가 삼도대동법을 통해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런 문제점을 바탕으로 조익은 법의 내용을 수정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대동법 반대세력 때문에 실시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삼도대동법은 상당한 의미를 지녔다. 강원도에서의 대동법 성립이라는 결실을 낳았고, 후일의 대동법을 위한 완비된 수정 입법안을 만들어 내었다. 효종 때 실시된 호서대동법은 1624년(인조 2) 조익이 만든 그 수정안에 근거하여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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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은 국가와 개인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연합뉴스 제공>






병자호란 이후의 대동법 논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후, 조선은 나라로부터 커다란 재정적 압력을 받았다. 청은 조선에 여러 번 대규모 병력 파병과 막대한 식량을 요구하였다. 1644년(인조 22)에 청이 나라를 무너뜨린 후에도 청나라로 인한 조선의 재정 부담은 줄지 않았다. 매해 여러 번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고, 이들 접대에 대단히 많은 경비가 들었다. 이 모든 부담이 온전히 백성에게 돌아갔다. 조선 조정은 백성에 대한 지속적 부담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고, 재정 상황에 대해서도 재정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공물변통 논의로 조정 안과 밖에서 제기되었다.

당시 조정과 재야에서는 공물변통의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했지만, 구체적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안(貢案) 개정론’과 ‘대동법 실시론’이 그것이다. 전자는 조선의 전통적인 공납문제 대처 방식이었다. 지나치게 높은 공물가를 삭감하고, 그렇게 거둔 공물가를 정부와 왕실이 절약해서 쓰자는 내용이었다. 제도는 놔두고 운영을 잘 하자는 말이었다. 반면, 후자는 백성에게 거두는 결당 수취액을 사전에 고정하고, 공물 수취 중간과정을 합리화하자는 것이었다. 전자가 기존 체계 안에서 관리들의 자발성을 강조한 안이라면, 후자는 공물 수취와 지출에 관한 새로운 강제 규범을 만들자는 안이었다. 처음에는 공안개정론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인조 말에는 대동법의 지지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대동법 지지자들의 확대를 입법으로 연결한 사람이 김육(1580~1658)이다.




김육과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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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은 공납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히 대동법을 주장하였다.



김육효종이 즉위(1649)하자 대동법 실시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조정에서 사림세력을 대표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집(1574~1656), 김상헌(1570~1652)과 정치적으로 충돌하였다. 하지만 결국 김육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1651년(효종 2)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충청도에서의 대동법 실시는 이후 대동법의 전국적 확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처음부터 대동법 실시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많은 조정 관료들이 대동법의 취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폭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청도 대동법은 대동법이 충분히 실현가능한 것임을 증명함으로써,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다. 그 결과 1658년(효종 9) 전라도 해읍(海邑), 1666년(현종 7) 전라도 산군(山郡)과 함경도,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 순으로 대동법 혹은 지역 실정에 맞는 공물변통이 이루어졌다.




정약용과 유형원의 대동법 인식



정약용은 대동법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대체로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 제도로 생각했다. 정약용 역시 그랬는데, 그는 정전제의 현실적 구현이 바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체 경작지의 1/10을 공전(公田)으로 만들어 그 소출을 국가 재정에 충당하고자 하였다. 세금을 사람이 아닌 토지에서 거두고, 세금의 총액을 전체 소출의 1/10로 제한하려 했던 것이다.

대동법에 대해서 예민하게 관찰했던 사람은 유형원(1622~1673)이다. 자기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반계수록』 집필에 착수한 해는 조정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직후였다. 말하자면 그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는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그가 살았던 전라도에까지 차차 그 실시 범위가 확대되어 가던 때와 일치한다. 『반계수록』에는 유형원이 대동법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유형원은 호서대동법의 몇 가지 미진한 점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 비판이 대동법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동법이 천명했던 원칙이 현실에서 좀 더 철저하게 집행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대동법은 이전까지 오래 누적된 조세 운영의 수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개혁이었다. 때문에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세웠던 모든 원칙이 남김없이 관철되기는 어려웠다. 반면에 유형원은 재야(在野)의 자유로운 조건에서 조세개혁을 주장했었다. 이런 조건을 고려하면 당국자와 재야인사의 약간의 의견 차이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유형원이 대동법에 대체적으로 동의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것은 김육을 비롯한 대동법을 논의했던 조정 인사들과 의견 교환 없이 독립적으로 도출된 것이었다. 조선시대 관료 및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원칙으로, 당시 조선의 조세 상황을 본 결과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정철 |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조세개혁인 대동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온전히 개인의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 우리 각자의 사적 삶이 사회제도에 의해서 어떻게 얼마나 영향 받는지를 살피는 것에 관심이 있다. 현재는 임진왜란 이전 선조 대를 공부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드높은 이상을 가졌던 젊은 사림들이 현실 정치와 만났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저서로는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비평사, 2013]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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