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일본 왕가 - 만세일계의 딜레마에 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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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8회 작성일 16-02-0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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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이래 입헌군주제를 표방해 온 일본의 현재 천황인 아키히토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자랑하는 오랜 황통의 살아 있는 계승자이다. 경제 강국이자 G8의 일원인 선진국 일본에서 천황은 비록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더라도 일본 헌법이 명시한 바 국가의 상징이며 일본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대다수 국민의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일본 내외에서 공격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는 일본 황실의 전범 책임 문제와 복잡하게 돌아가는 일본 황실의 후계 구도와 관련한 여성 천황 논쟁은 오늘날 일본 황실이 떠안고 있는 심각한 과제로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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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머물고 있는 도쿄의 황거. 교토에 머물던 황실은 메이지 천황부터 도쿄의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근대 천황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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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로 ‘만세일계’라는 용어가 있다. 아주 오랫동안 역성혁명 없이 하나의 황통을 이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2명의 천황이 공존하던 남북조 시대(1333~1392년)도 있었기 때문에, ‘만세일계’라는 용어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 쿠데타’, 즉 바쿠후를 없애고 천황이 친히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공공연히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889년 2월 11일 발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의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는 조문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근대 일본의 천황은 신성불가침하며 통치권을 총괄하는 절대주의적 존재가 되었다. 잘 알다시피 ‘대일본제국헌법’은 동아시아에서 처음 제정된 근대적 헌법이다. 하지만 천황이 신민에게 부여한다는 흠정헌법주의에 입각하여 발포되었던 만큼,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부터 초대 진무(神武) 천황, 그리고 진무 천황 이하 제2대 천황에서 당시의 제122대 메이지 천황으로 연면히 이어지는 황통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만세일계’라는 용어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후 ‘대일본제국헌법’은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1947년에 ‘일본국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개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만세일계’의 황통을 이어받은 천황이 신민에게 선포한 ‘성전(聖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천황의 재위 기간과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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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근대 이후의 천황은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을 거쳐 현재 아키히토 천황에 이르고 있다.

각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일본의 근현대사에 기록될 크고 작은 족적을 남겼다. 우선 메이지 천황(1852~1912년, 재위: 1867~1912년) 의 재위 기간은 메이지유신 이후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여 근대적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타이완과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제국일본’의 기초를 닦은 시기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참정권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과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을 거치면서 점차 사회주의 등과 같은 경제적 평등이 제기되기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절대주의 천황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다이쇼 천황(1879~1926년, 재위: 1912~1926년) 의 재위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이른바 ‘세계 5대 강국’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국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국가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또한 당시 세계적으로 펼쳐지던 참정권운동의 영향을 받아 보통선거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25세 이상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사회적으로도 경제 발전과 함께 샐러리맨이라는 소시민 계층이 등장하면서, 점차 국가주의가 강조되던 메이지와 달리 개인주의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조는 1917년 3월 러시아혁명에 의한 러시아 황제의 퇴위와 공산주의 사상의 확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공화제 성립 등 세계적으로 군주제의 위기가 발생하는 가운데 기존의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황실을 개방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병약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하여 황태자(나중에 쇼와 천황)가 유럽을 순방(1921년 3월~9월)하고, 이를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의미에서 메이지가 절대주의 천황제의 확립 시기라면, 다이쇼는 그렇게 확립된 절대주의 천황제가 조금씩 변용되기 시작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쇼와 천황(1901~1989년, 재위: 1926~1989년) 의 재위 기간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종결하는 1945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다이쇼 시기에 등장한 소시민 계층이 세계공황을 배경으로 국가가 추진하는 군국주의에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었던 시기이다. 이에 비해 후기는 패전과 GHQ 점령 통치를 거치면서 천황을 ‘일본 국민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포기하는 새로운 ‘일본국헌법’을 제정하는 한편, 한국전쟁이라는 경제 특수를 배경으로 경제 부흥을 일궈내며 세계 경제 2위라는 지위를 획득해 가던 시기이다. 즉 전기가 메이지유신 이래의 절대주의적 국가 체제가 몰락하는 과정이었다면, 후기는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적 국가 체제를 확립한 시기인 것이다.

현재의 천황이 즉위한 1989년 이후는 그러한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버블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장기적인 경제 불황이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도 1955년 이래 장기 집권을 유지하던 자민당 체제가 무너지고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과의 연합정권이 탄생하기도 했다. 또한 국제평화협력(PKO)이라는 명분 아래 전후 처음으로 자위대를 해외에 파병한 이래, 최근 들어서는 일본의 위기 상황이라 판단되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자위대, 즉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 천황의 재위 기간은 전후 확립된 국가 체제의 변용이 다양한 형태로 각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헤이세이의 천황, 아키히토





군국주의의 발흥과 황태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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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천황 아키히토가 1933년에 태어나면서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 황실은 국민의 관심을 천황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태자 책봉된 후 시민의 환호에 답하는 쇼와 천황, 고준 황후, 아키히토 천황의 모습(왼쪽부터).



현재의 천황 아키히토(1933년~, 재위: 1989년~, 원호 헤이세이)는 1933년 12월 23일 태어났다. 부친 쇼와 천황이 결혼한 지 10여 년 동안 딸만 4명(1명은 2살에 사망)을 낳았기 때문에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아들의 탄생은 황실만이 아니라 군주국 국민들에게도 큰 경사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도쿄부의회의 황태자 탄생 봉축기념사업 제안 등으로 이어졌다.

만주사변(1931) 이후 점차 군국주의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천황의 권위를 신격화하고 이를 통해서 천황에 직속된 군인의 권위까지 절대화하려던 정부에게 아키히토의 탄생은 전 국민의 관심을 천황가에 집중시키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는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이때 황태자는 학습원 초등과 졸업을 앞둔 12살의 6학년 학생이었다.



평민 출신과의 결혼, 그리고 밋치붐


아키히토는 1952년에 성년식을 치르고 황태자에 책봉된 이후, 이듬해 3월부터 10월까지 첫 해외 순방을 나섰다. 주요 순방국은 유럽 12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 등 서양 국가들이었는데, 각국의 환대를 받는 황태자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보도되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조약(1951)으로 일본이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황실을 평화와 민주주의 이미지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서 쇼와 천황을 대신하여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참석한 그는 아메리카화된 매너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본과 황실의 군국주의 이미지를 옅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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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발표 10일 후 아키히토 천황은 미치코를 테니스코트로 초청했다.



이렇듯 황태자의 성년식과 서양 국가 순방으로 조성된 황실의 이미지는 1958년 11월 황태자와 평민 출신의 쇼다 미치코와의 결혼식이 대대적인 ‘밋치붐’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밋치는 당시 일본인들이 미치코를 연예인 부르듯이 친숙하게 부르던 애칭이다.

그들은 1957년 8월 19일, 가루이자와에서 개최된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에서 처음 만났고 다음과 같이 아키히토는 미치코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황태자와 성심대학의 학생석의 학생과 조가 되어 2회전으로 이겨 결승에 올랐다. 상대 코트에 나타난 것은 20살의 아메리카 소년 바비 도이루 군과 일본의 미혼여성 미치코의 색다른 조였다. 순백의 테니스복을 입은 미치코는 종횡으로 뛰어다녔다. 미치코의 활약으로 황태자는 졌다. 시합이 끝나고 황태자는 미치코의 옆으로 다가가 “사진을” 이라고 말하며 카메라를 향했다. 이때의 사진이 동궁직원의 사진전에 출품되었다.
『요미우리신문』1958.11.27.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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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결혼 기념우표(1959)



이들의 러브 스토리는 자유연애가 허용되지 않는 황실의 관습을 벗어난 것이었던 만큼 ‘테니스 코트의 사랑’,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회자되며 황실에 대한 국민적 환호와 관심을 집중시켰고, 그 중심에는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평민 출신의 미치코가 있었다. ‘밋치붐’의 영향은 다방면에 걸쳐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는 NHK가 1953년 2월에 방송을 개시했는데, 당시 텔레비전은 너무 비싸서 일반인은 도저히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결혼 관련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판매량은 서서히 증가하여 1958년 말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결혼식 퍼레이드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전후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텔레비전 붐도 황태자의 결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밋치붐’이 국민적 환호와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황태자와 미치코의 자유연애, 그리고 황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이르렀던 이들의 러브 스토리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현대적이고 이상적인 가족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미치코는 황실의 적극적인 홍보와 영향력을 더해 가던 대중 미디어의 중재를 통해 중산층 어머니이자 주부의 완벽한 모델로 표상되어 갔다. 이는 천황제의 절대주의 성격이 옅어지고, 점차 ‘상징 천황제’에 기초하는 천황의 대중화 현상이 나타났음을 말해 준다.




일본 황실의 숙제





황실 중에서는 오키나와를 처음 방문한 황태자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 현의 영유권이 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류큐 왕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했던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으로 편입된 이후, 홋카이도와 함께 ‘제국 일본’의 내부 식민지로서 많은 차별을 받아 온 역사가 있다. 더군다나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전이 분명해지는 가운데, 오키나와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유일한 육지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오키나와 주민이 미군의 스파이가 될 것을 우려한 일본군의 학살이 다수 발생했다.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오키나와 반환을 계기로 또다시 천황의 전쟁 책임론이 오키나와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975년 오키나와 반환을 기념하여 개최되는 해양박람회에 쇼와 천황을 대신하여 황태자 부부가 참석했다. 이때 황태자 부부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간호병으로 징집된 오키나와의 여자 학도병들과 일본군이 집단 자살한 것을 추도하기 위해 설치된 ‘히메유리탑’에 참배하던 도중 천황의 전쟁 책임을 주장하는 오키나와 청년 2명이 화염병을 던지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 사이에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기억이 매우 상이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의 상이함은 후텐마 미군부대 이전 또는 철수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 천황의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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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천황의 장남인 나루히토는 슬하에 딸만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사회에서는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여성 천황을 용인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현재 일본은 여성 천황을 두고 논쟁이 거세다. 1989년 현재 천황인 아키히토가 즉위한 이후 가장 큰 이슈가 여성 천황 논쟁이다. 일본 신화에 근거하여 ‘만세일계’의 황통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기원전 660년 제1대 진무 천황이 즉위한 이래 제125대 현 천황까지 일관되게 부계가 황위를 계승해 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대에는 6명의 여성이 8차례 천황에 즉위했고, 에도 시대에도 2명의 여성이 천황에 즉위했지만, 이것은 모두 ‘임시’로, ‘남계’가 ‘여계’로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만세일계’의 논리를 토대로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황실전범’ 제1장 제1조는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부계의 남자가 계승한다.”, 제9조는 “천황 및 황족은 양자를 들일 수 없다.”라고 정했다. 그 결과 황위 계승은 생물학적으로 이어진 남계 남성만이 그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남계 계승은 ‘측실 제도’라는 보장 장치가 있었을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메이지 천황과 다이쇼 천황이 모두 측실의 아들이었다는 점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패전 이후 다이쇼 천황의 직계 자식만 황족 신분을 유지하고 나머지 11개의 방계 황족 가문은 모두 황적에서 이탈하여 평민이 된 상황에서 남아 탄생의 여부는 황실의 존속과도 직결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가운데 현 천황의 장남 나루히토가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아이 탄생 소식은 매우 늦었다. 2001년 마침내 8년 만에 인공 수정으로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것이 딸임이 밝혀지면서 ‘여제의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이제 첫 아이가 태어났으니 둘째, 셋째 자녀를 더 낳는다면 남아가 태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황태자 부부의 나이가 적지 않았고, 나루히토의 동생 후미히토도 딸만 둘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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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른쪽은 황실의 유일한 남계 자손인 히사히토와 그의 부모인 후미히토 부부. 왼쪽은 나루히토 황태자 부부이다. 뒷줄에는 황가의 여계 자손들이, 가운데에는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가 자리하고 있다. 2010년 12월 14일에 찍은 사진.



21세기 들어서 빈번해진 여성 천황에 대한 여론 조사와 언론 보도 등은 천황제에 대한 지지도 상승과 더불어 국민적인 관심사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고 전후 50년이 지나 가부장제적 인식이 옅어지고 양성평등 인식이 정착된 것을 배경으로 한 각종 여론 조사의 결과는 여성 천황 용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여론을 의식한 당시 고이즈미 수상은 2005년 11월 24일 여성·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를 토대로 2006년 1월, 다음달 통상국회에서 황실전범 개정 법안을 성립시키겠다고 발표함으로써 국회에서의 논란과 진통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수상의 발표 직후 차남 후미히토 부부의 세 번째 임신 소식이 발표되면서 정부 여당은 황실전범 개정안의 국회 제출을 단념했으며, 2006년 9월 6일 마침내 황통 계승이 가능한 아들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여성 천황에 관한 논의도 사라졌다.

하지만 황통 계승이 가능한 남계 남자가 태어났다고 해서 여성 천황 논쟁이 발생했던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황실전범이 개정되지 않고 있어 20~30년 후 히사히토가 결혼하면 또다시 남아 출산의 심적 부담과 국민적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성의 인권을 ‘출산’이라는 조건으로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 천황 논쟁은 21세기의 천황제에 남겨진 최대의 난제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권숙인, 「전후 천황제와 젠더-황태자비 마사코의 시련과 황실의 위기를 중심으로」, 『일본비평』 9, 2013.

· 박삼헌, 『근대일본형성기의 국가 체제-지방관회의·태정관·천황』, 소명출판, 2012.

· 박진우 편저, 『21세기 천황제와 일본』, 논형, 2006.

· 박진우, 「여성·여계천황론과 상징천황제」, 『일어일문학』 제41집, 2009.

· 스즈키 마사유키 지음, 류교열 옮김, 『근대일본의 천황제』, 이산, 1998.

· 황달기, 「황족의 결혼」, 『천황과 일본문화』,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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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헌 |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교수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고베대학(神戸大学)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교수 겸 아시아콘텐츠연구소 소장이며, 일본문화콘텐츠잡지 『Boon』, 타이완문화콘텐츠잡지 『Plum Boon』을 기획・발행하고 있다.



저서로 <근대일본형성기의 국가체제-지방관회의・태정관・천황>가 있고,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운영위원으로서 한중일 공동역사교재 편찬에 참여하여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근현대사>를 한중일 동시 출판했으며 공저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 <해방 후 한일간 상호인식과 역사교과서 편찬의 변화>, <도시는 역사다>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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