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해상사고의 역사 - 역사에 남은 세계의 해상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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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16-02-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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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날, 3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는 아마 우리 기억 속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전세계를 울렸습니다. 아직까지 사고의 원인도, 구조가 효율적이지 못했던 이유도, 무엇 하나 명확치 않은 채 차가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 사건의 진상이 언젠가 꼭 명확히 규명되길 바랍니다.

인류가 배를 만들어 강과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한 뒤부터 해상사고는 인간 사회와 늘 함께했습니다. 역사를 바꾼 사고도 있고, 그저 안타까운 사고도 있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사고도 있습니다. 역사에 남은 해상사고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잉글랜드 역사를 바꿔놓은 하얀 배(White 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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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배’의 침몰 장면을 그린 그림



‘자유 헌장’을 선포한 중세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국왕 헨리 1세에게는 왕비 소생의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헨리는 승승장구하는 왕이었죠. 형제들과 치열한 권력다툼 끝에 왕좌를 차지한 뒤, 아버지 윌리엄 1세가 큰형 로버트에게 물려준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노르망디를 정벌한 헨리 1세는 ‘하얀 배’라는 이름의 멋진 배를 한 척 선물받아 아들 윌리엄에게 하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윌리엄과 노르만 왕조의 비극의 시작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윌리엄은 선원들과 함께 와인을 잔뜩 마셨다고 합니다. 하얀 배를 왕실에 선물한 장본인이기도 한 선장은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렸죠. “먼저 출발한 왕보다 더 빨리 잉글랜드에 도착하라고”요. 기분 좋게 취한 선장과 선원들은 배에 대한 자부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잉글랜드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배의 좌현이 암초에 걸리고 맙니다.

윌리엄은 작은 구명보트로 옮겨 타고 침몰하는 배를 탈출했지만, 함께 타고 있던 이복 여동생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사고해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사고해역에서 허우적대던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윌리엄이 타고 있던 보트에 올라타려 했다고 합니다. 결국 윌리엄은 사람들과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아 죽고 말았습니다. 1120년 11월의 일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헨리 1세는 할 수 없이 윌리엄의 누나이자 유일하게 남은 법적인 딸 마틸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12세기는 여왕을 용납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나 봅니다. 1135년 헨리 1세 사후 영국은 격랑에 휩싸였고, 헨리 1세의 조카이자 마틸다의 외사촌인 스티븐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하지만 정통성 없는 왕위가 오래가기 어렵죠. 귀족들을 포섭하느라 왕권도 약화될 대로 약화됐고, 백성들의 스티븐에 대한 지지도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들을 낳은 마틸다는 아들이 성장하면서 계속 세력을 키워갔고요. 스티븐이 통치했던 19년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끝내 굴복한 스티븐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를 국정에 참여시켰고, 헨리는 스티븐이 죽은 1154년 헨리 2세로 즉위합니다. 19년 만에 노르만 왕조의 대통이 다시 이어지게 된 셈입니다.




대항해시대, 수장된 배들과 노예들



항해술의 발전에 힘입어 지중해를 넘어 대양으로 나온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주를 식민지로 만들며 신항로를 개척하고 다녔습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입니다. 식민지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식민지와 본국을 잇는 무역선과 노예선이 늘어날수록 해상사고도 많아졌습니다. 이 시기, 유럽인들뿐 아니라 배에 실려 세계 전역으로 끌려다니던 노예들도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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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스덴 호의 이야기를 다룬 책 <출처: amazon.com>



1738년 1월 1일,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항해한 네덜란드 국적의 노예선 ‘뢰스덴 호’는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마로니 강 하구에서 항해를 하던 중 폭풍을 만나 좌초됐습니다. 부족한 구명정을 노예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웠던 선장은 노예들을 갑판 아래 가두고 못질을 해버리라고 선원들에게 지시했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실은 배가 천천히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은 구명정 두 대에 나눠 타고 탈출했습니다. 노예 664명을 수장시킨 이 사건은 대서양 노예무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포르투갈 노예선 ‘상호세 호’의 잔해가 발견돼 주목을 끌었습니다. 노예선의 잔해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400여명을 태운 이 노예선은 1794년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브라질로 항하던 중 희망봉을 돌다가 침몰해, 노예들의 절반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선장과 선원들이 노예를 살리려고 애썼습니다. 노예들은 ‘비싸게 팔 수 있는 귀중한 화물’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거센 파도 탓에 구조에 동원된 바지선이 배로 접근하지 못해, 결국 노예 212명은 사망하고 맙니다. 당시 사고 기록에는 노예들이 ‘사람’으로 표기돼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 노예선의 잔해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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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로이드 거래소 한복판의 ‘루틴 벨’



대항해시대에 침몰한 배들은 보물사냥꾼들이 찾아 헤매는 노다지이기도 합니다. 당시 배들은 금과 귀금속을 잔뜩 싣고 다녔거든요. 1799년 네덜란드 북쪽 웨스트 프리지아 제도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한 ‘루틴 호’가 대표적입니다. 이 배는 당시 가치로 120만 파운드어치의 금덩어리와 금화를 싣고 있었다고 하네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억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배에 타고 있던 240여명 중 단 한 명을 빼고 모두 숨졌습니다.

영국 보험회사 로이드는 이 금 전체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했는데, 결국 선체 인양에도 실패하고 금을 건져내지도 못해 손가락만 빨게 됐다고 해요. 로이드 거래소 한복판에는 이 사고를 기억하기 위한 ‘루틴 벨’이 있습니다. 바다에 나간 배가 실종되면 종을 울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네덜란드 북쪽 바다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잠자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마 이 시대에 좌초한 배들 중 한국에 가장 유명한 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스페르베르 호’가 아닐까요? 1653년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스페르베르 호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 부근에서 난파하게 됩니다. 이 배의 선원이던 헨드릭 하멜이 13년간 조선에 억류돼 생활하며 기록한 책이 바로 <하멜 표류기>입니다.




선박사고의 전설로 남은 타이타닉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 배(the unsinkable)’라는 별명이 붙었던 배. 최초이자 최후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바닷속에 가라앉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 ‘타이타닉 호’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12년 4월10일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발해 미국 뉴욕으로 향하려던 이 배는 겨우 나흘만인 14일 밤 빙산과 충돌했고, 2시간40분 뒤인 15일 새벽 침몰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은 배가 두 동강나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얼어 죽는 장면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당시 승선 명부가 정확하지 않아서 통계에 혼선이 있기는 하지만 탑승자 2224명 중 1514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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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항하는 모습



왜 이렇게 사망한 사람이 많았던 걸까요?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은 구명보트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타이타닉 호에는 승객의 절반 정도인 약 10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구명정 밖에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타이타닉 호가 탑승 정원인 3339명을 꽉 채웠더라면 구명정이 태울 수 있는 인원은 승객 전체의 1/3밖에 안 됐을 거예요. 더구나 처음에는 많은 구명정들이 정원을 꽉 채우지도 않은 채 바다에 내려졌다고 합니다.

승무원들은 조난사고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습니다. 하필 근처에는 구조를 도울 만한 선박도 없었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지 1시간30분 만에야 구조신호를 받은 배가 도착했습니다. 사고 현장 바닷물의 온도는 영하 2도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이 15~30분만에 심장마비로 숨졌습니다.

슬픈 사실은 타이타닉 호의 선실 등급에 따라 사망률이 크게 차이가 났다는 거에요. 1등실 승객 325명 중 202명(62%)이 살아남은 반면, 3등실 승객 706명 중에는 528명(75%)이 사망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먼저 구조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3등실 아이의 생존률(34%)과 1등실 남성의 생존률(33%)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갑판 위에 머물렀던 1등실 승객들이 비교적 쉽게 빠져나온 반면 갑판 아래의 3등실로는 사고 직후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배에서 나가는 길도 찾기 어려워 생존률이 낮았다고 합니다.




전범국의 피란선 빌헬름 구스틀로프



1930년대 나치 독일은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함부르크에서 대형 여객선을 건조했고, 스위스 나치지도자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이름을 따서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배는 체제선전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독일노동전선 노동자들에게 크루즈 여행 같은 여가를 제공하는 용도로 쓰였지요.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배는 병원선으로 용도가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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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촬영된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출처: commons.wikimedia.org>



1945년 1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패퇴하면서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당시 해군 사령관 칼 되니츠는 공격에 노출된 민간인과 부상병 등 200만명을 독일 서쪽으로 옮기는 해상 피난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발트해에 있던 구스틀로프호도 이 작전에 동원됐죠.

승선 정원이 2000명에 불과했던 이 배에 탑승한 사람은 공식 기록상에만 6050명.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승선 기록을 남기지 않고 배에 탔기 때문에, 이 배 안에는 최대 1만582명이 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피란민들을 태운 배는 어뢰정 1척의 호위를 받으며 현재 폴란드의 도시인 그디니아를 떠나 독일 북부의 항구 키엘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발트해를 향해하던 이 배는 곧 소련 잠수함 S-13호에 발각되고 맙니다.

소련 잠수함의 어뢰 세 발을 맞은 구스틀로프호는 1시간10분 만에 침몰했습니다. 한겨울, 북극에 가까운 발트해의 당시 수온은 최저 영하 16도. 바다 위에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현장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어뢰의 공격으로 폭사한 사람도 있고, 공격을 피한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얼어 죽었습니다.

이 침몰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9343명. 인명피해 규모로 따지면 최악의 해상사고지만, 전쟁 상황이었던 데다가 이 배에는 군인들도 1000여 명이 타고 있었던지라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전범국입니다.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독일을 피해자로 호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바람에, 구스틀로프호 폭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독일 사회에서 금기였다고 합니다.

독일의 대표작가 귄터 그라스는 2002년 <게 걸음으로 가다>라는 소설에서 구스틀로프호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나치의 잘못은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없던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겠지요.




난민선의 무덤이 된 지중해



2015년 4월19일 한밤중. 리비아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향하던 난민선이 전복됐습니다. 배에 탔던 난민들은 승선 정원을 훌쩍 넘긴 850명에 달했지만 구출된 사람은 28명뿐. 사고선은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낙후된 상태였습니다. 이 사고는 지중해에서 발생한 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사고로 기록됐습니다. 불과 닷새 전에도 지중해에서는 난민선이 침몰해 400명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2015년 들어 지중해 난민선 침몰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2000명에 이릅니다. 2014년에도 한 해 동안 지중해에서 사망한 난민은 3072명이었습니다.

지중해가 난민의 무덤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쟁과 빈곤을 피해 고향을 떠난 난민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그만큼 정치 상황이 극히 불안한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겠죠.

아프리카 대륙 출신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모여드는 곳은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축출 후 질서가 사라진 리비아입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각국에서 리비아로 오기 위해 육로를 통해 여러 차례 국경을 넘고, 리비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 ‘죽음의 항해’를 하다가 더러 목숨을 잃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내전과 가난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2015년 1월부터 7월 사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난민들은 22만4000명이나 됩니다. 유럽행 배를 타려고 리비아의 항구에 대기중인 사람이 최대 10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으로 넘어간다고 행복할까요? 돈을 받고 난민들을 밀항선에 태워주는 밀항업자들의 상당수는 인신매매꾼입니다. 난민들에게 유럽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고 속인 뒤 인신매매 조직에 팔아 넘기기도 합니다. 유럽의회 조사에 따르면 유럽에는 100만명의 ‘노예’가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지중해를 건너온 난민들입니다. 4월 난민선 참사 후 유럽연합은 참사 방지대책을 논의해 왔지만 난민 수용에 난색을 표하는 국가들 때문에 진척은 없습니다.




남지원 | 경향신문 기자


발행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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