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태국 짝끄리 왕가 -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64회 작성일 16-02-06 16:27

본문















14547436472957.png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이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국왕은 9개 주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왕이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14547436486256





태국은 입헌군주국이지만 국왕의 권한이 강한 편이다.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는 태국 궁전의 모습. 현 국왕은 찌뜨랄다 궁전에 머물고 있다.






입헌군주의 나라, 절대왕권의 풍모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선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파트너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대왕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 차례 일어났는데, 국왕은 그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탁신(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될 수 있었다.




만인의 어버이에서 지존의 존재로







14547436496575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6,450만 명(2014년 기준) 중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타이족(Thai族)이다. 전통적으로 태국 국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즉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카리스마적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가르는 잣대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짝끄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으뜸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바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왕이라야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는데,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란 한마디로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 나라의 통치자가 백성을 돌보는 것을 말한다. 수코타이 시대 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 통치상을 유추할 수 있다.





14547436507901





불교 국가인 태국은 국왕이 온정적 통치를 베푸는 전통이 있다.



아유타야 왕조 시대에는 법왕의 통치에 신왕의 풍모가 더해지면서 왕은 곧 신의 아들로서 신과 동일시되는 태국의 절대왕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절대왕정의 전통은 입헌군주를 표방하는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단적인 증거가 “왕은 지존의 존재이고 누구도 왕의 지위를 침해할 수 없으며 왕을 비난하거나 고소할 수 없다.”라고 명시한 태국의 헌법이다. 태국의 현 왕조인 짝끄리 왕가는 바로 그 절대적 왕권의 전통 위에 군림하고 있다.




태국의 현 왕실 짝끄리 왕가의 발생과 업적



짝끄리 왕조 혹은 라따나꼬신 왕조(Rattanakosin, 1782년~현재)라고 불리는 태국의 현 왕조는 1782년 딱신(Phra Cao Taksin)의 보좌관이었던 짝끄리(라마 1세)가 톤부리 왕조에 이어 세운 태국의 네 번째 왕조로, 현왕인 푸미폰 대왕(라마 9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14547436516207




짝끄리 왕조의 문양



라마(Rama)라는 말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함)가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끼안(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버전에서는 ‘프라람’이라고 불렀고, 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짝끄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 혹은 ‘람’이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런 외국식 표기를 쓰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예: 푸미폰 대왕)이라고 하거나 ‘국왕’(예: 푸미폰 국왕) 또는 ‘몇 대 왕’(예: 9대 왕)이라고 부른다.

짝끄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초기(1782~1851년)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바람을 겪은 근대화 시기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정치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9세의 치세이다.

짝끄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탄탄히 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이미지 목록




14547436523940





14547436532125







태국의 라마 4세는 <왕과 나>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왕과 나>는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태국에서 상영 금지되고 있다. 실제 라마 4세와 율 브리너가 주연한 라마 4세.




짝끄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1851~1868년)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기술과 통치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리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치외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14547436539887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일컬어지는 쭐랄롱꼰 대왕. 개혁의 선도자이자 성군이었다.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일컬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1868~1910년)은 서구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의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짝끄리 개혁’이라고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꾀하여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비록 절대군주 체제하의 왕이었으나 쭐랄롱꼰 대왕은 왕의 의무, 즉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서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다져 놓은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9세(1925년~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이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엘리트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짝끄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꾀하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4547436549522





라마 7세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인정한다.



1932년의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엘리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현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짝끄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였다.




상징성과 실용성 모두 거머쥔 입헌군주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짝끄리 왕가의 노력 덕분에 태국은 내적으로는 정치 체제의 변화와 외적으로는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1)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카리스마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카리스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도 분명 대조적이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카리스마는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카리스마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짝끄리 왕가의 주요 군주





온 나라가 숭배하는 왕들






14547436562577





몽꿋 국왕



짝끄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뻗치게 된 때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어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던 때,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보았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일 보 후퇴도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써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절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14547436572948





쭐랄롱꼰 대왕



태국 국왕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을 받는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년, 재위: 1868~1910년)은 짝끄리 왕조의 5대 왕으로,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기구의 개편과 지방행정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쌓으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혁명도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 태국의 사회·정치·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위 엘리트 계층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






14547436581699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



태국의 현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현재, 재위: 1946~현재)도 법왕과 신왕의 모습을 두루 갖춘 전통적 국왕의 특징을 오롯이 계승하고 있다.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은 짝끄리 왕조의 9대 왕, 즉 라마 9세로, 공식 명칭은 프라밧솜뎃 프라뽀라민타라마하푸미폰아둔야뎃 마히뜨라티벳사라마티버디 짝끄리나리버딘 사야민트라티랏 버롬마낫버핏(타이어: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มินทร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มหิตลาธิเบศรรามาธิบดี จักรีนฤบดินทร สยามินทราธิราช บรมนาถบพิตร)이다. 1927년 12월 5일 탄생하여 1946년 만 19세에 국왕으로 등극한 이래 2015년 현재로 69년째 왕위를 지키고 있어 태국 역사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현존하는 왕들 가운데 가장 오래 집권하고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친이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유학 중일 때 태어난 푸미폰 대왕은 이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스위스에서 불어, 독어, 영어 등을 공부하였다. 1946년 친형인 마히돈 왕(라마 8세)이 즉위 12년 만에 승하하자 9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좌를 계승한 푸미폰 대왕은 섭정을 세우고 스위스로 다시 건너가 사회학과 정치학을 수학하며 국왕으로서 자질을 키운 뒤 1950년 귀국하여 대관식을 치른다.





14547436591902





푸미폰 아둔야뎃 대왕의 대관식 모습.



국왕에 즉위하자마자 푸미폰 대왕은 어버이와 같이 백성을 돌보는 탐마라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5년 10월 22일에서 11월 5일까지 불교도로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였고, 국민들의 어려움을 직접 보살피기 위해 1955년부터는 이전의 왕들이 찾지 않던 낙후된 지역을 방문하여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국왕개발계획(Royal Project)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국왕개발계획을 통하여 국가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고 또한 국왕으로서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다. 국왕개발계획은 왕실 자산과 민간 자본을 이용한 수자원 및 관개 개발, 토지 개발, 농업 개발, 연구 개발, 보건위생 개발, 교육 개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화전 경작과 아편 재배로 국제적 문제를 야기하던 고산족을 위한 특별 계획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산악 지역에서 재배 가능한 현금 작물을 권장 보급하여 고산족의 삶을 성공적으로 개선해 냄으로써 소수 종족의 삶의 개선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지속되어 낙후된 동북부 지역의 녹색 혁명을 목표로 개발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농민들을 위한 인공강우 기술을 직접 개발하여 왕 자신이 특허를 받기도 하였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푸미폰 대왕의 노력을 인정하여 1988년 막사이사이상(Magsaysay賞)을 수여하였으며, 특히 고산족의 복지를 위한 개발계획은 국제연합(UN)과 미국, 캐나다, 대만 등의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국왕개발계획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현재 푸미폰 대왕은 신왕의 면모를 갖춘 국왕으로 태국 국민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여느 입헌군주제 국왕과는 달리 상징적 왕권 행사에 안주하지 않았고, 군부 쿠데타 등으로 정국이 불안한 때마다 높은 도덕적 권위로 시국을 안정시키는 데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다. ‘푸미폰’은 나라의 힘을 뜻하고, ‘아둔야뎃’은 대적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하는데, 그 이름에 부합하듯이 푸미폰 대왕은 여느 입헌군주제 군왕의 지위를 넘어선 절대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집권 중 대왕의 칭호를 받은 국왕으로서 태국 국민들의 숭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Dhammaraja, ‘탐마’는 불법 즉 불교의 계율을 뜻하고 ‘라차’는 국왕을 뜻하는 말로 ‘불교의 계율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를 가리킴
주석 레이어창 닫기




14547436597653

이병도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를 졸업한 후 태국 국립 쏭클라대학교(Prince of Songkla University) 태국어과를 수료하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아주지역연구학과, 박사과정 국제관계학과를 각각 졸업하였다. 2008년 태국 치앙마이 라차팟대학교(Chiang Mai Rajabhat University)에서 한국학 발전에 대한 공로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 태국어통번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09.15.



주석


1


Dhammaraja, ‘탐마’는 불법 즉 불교의 계율을 뜻하고 ‘라차’는 국왕을 뜻하는 말로 ‘불교의 계율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를 가리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