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네팔의 샤 왕가 - 히말라야의 평민으로 돌아간 세계 최후의 힌두 왕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61회 작성일 16-02-06 16:28

본문















14547436841369.png


‘눈(雪, Hima)의 거처(居處, Alaya)’라는 의미를 지닌 히말라야는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여행객과 순례자의 발걸음을 네팔로 향하게 만드는 원천이자 네팔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네팔 역사가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그에 따른 정치 체제의 격변으로 점철돼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18세기 중엽 전국 통일을 이룩한 샤 왕조는 239년 동안 14명의 왕을 배출하며 네팔 사회문화 전반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비록 지난 2008년 제헌의회의 왕정 폐지 결정으로 영욕의 역사를 마감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14547436856123





‘눈의 거처’라는 의미의 히말라야를 품고 있는 세계적인 관광지 네팔. 네팔의 왕정은 2001년의 비극적인 왕가 존속살해 사건으로 인해 영욕의 세월을 마감하게 된다. Jean-Marie Hullot/flickr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 국가 네팔







14547436861411





아시아의 두 대국 중국과 인도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위치한 네팔은 한반도 면적의 약 63%에 해당하는 147,181㎢ 국토에 2,780만 명(2013년 기준)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아담한 소국이다. 하지만 국토의 80% 이상이 고도 100~8,800m에 이르는 산들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지리적, 기후적 특성이 나타난다. 북쪽 지역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짐과 동시에 우기가 있는 아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네팔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예찬하는 일부 사람들은 히말라야 산맥의 수백 개 계곡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체 인구는 약 80% 정도를 차지하는 아리안족을 비롯해 몽골족, 티베트족 등 100여 개 이상의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을 어군별로 분류하면 크게 인도-아리안 어족과 티베트-버마 어족의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종교적으로는 인도와 중국의 영향으로 힌두교와 불교가 각각 인구의 87%와 8%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두 종교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데 두 종교의 신상이 한 사원 안에 모셔져 있다거나 각종 행사에 두 종교의 사제와 신도들이 함께 참석하는 일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외에 이슬람교가 4%를 차지하고 있으며, 네팔 곳곳에서 아랍어로 쓰인 표지판을 비롯해 아랍식 풍습 및 건축 양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네팔 근현대 역사를 이끈 샤 왕조의 성립에서 몰락까지



가장 최근까지 네팔 왕가의 명맥을 유지했던 샤 왕조의 흥망성쇠는 네팔 근현대사 그 자체이자 한 편의 완결된 대하드라마다. 국왕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절대왕정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영국을 등에 업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100여 년 가까이 권좌에서 물러났던 때도 있다. 1950년대 초 왕정복고 후 변화된 정세에 적응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를 보였으나 2001년 궁중에서 발생한 사상 초유의 존속 살해 사건을 계기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결국 2008년 5월 민주공화정을 채택하고 국명을 네팔 왕국에서 네팔 연방 민주 공화국으로 바꾸었고, 한때 힌두교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지구상의 마지막 힌두 왕조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14547436872990





네팔 왕가 역사의 중심인 나라얀히티 궁전 모습



1768년 ‘정복왕’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프리트비 나라얀 샤(1723~1775년, 재위: 1768~1775년)는 사분오열이었던 소왕국들을 제압하고 네팔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 통일을 이루는데, 이것이 ‘샤 왕조’의 시작이다. 이후 샤와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 인도 영토인 카슈미르와 시킴, 그리고 이웃 산악 국가인 부탄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이 히말라야 계곡 일대를 넘보기 시작한 1800년대 초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1846년 9월 14일 네팔 내 친영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를 계기로 권력의 뒷자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14547436880325





샤 왕조의 문양



일명 ‘코트 대학살’로 불리는 당시 쿠데타는 왕실 경호원 출신의 정 바하두르 라나 장군이 왕실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주요 인사들을 군대를 동원해 학살한 사건이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정치적 지지와 내정불간섭 보장을 받는 대신 네팔 군인들을 영국군 지원 병력으로 공급할 것을 약속하고 스스로 종신 수상 자리에 오른다. 이후 100년간 라나와 그 후손들은 수상 자리를 포함한 온갖 요직들을 독점하고, 영국에 적극 협조하는 방식을 취하며 체제 및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는 1947년을 기점으로 샤 왕조의 부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네팔에는 두 개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샤 왕조의 복귀를 지지하는 세력과 인도로 망명하여 라나 일가의 독재에 저항하던 네팔의회당 주도의 민족주의운동 세력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라나 일가를 지지하는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했고, 마침내 1951년 2월 18일 라나 일가와 네팔의회당이 각각 절반씩을 차지한 정부를 구성하고, 샤 왕조의 9대손 트리부반(1906~1955년, 재위: 1951~1955년)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동의하였다. 이로써 100여 년 간 명맥이 끊겼던 네팔 왕정이 복고된 것이다.

하지만 부활한 샤 왕조의 면모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과거에는 국민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왕실에 대한 최대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다면, 1950년대 이후 왕실과 국민들의 관계는 점차 실망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 원인으로는 조속한 왕권 강화를 원했던 왕실의 성급함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100여 년 간 통치권 밖에 머물렀던 왕실이 정통성 회복과 왕권 강화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국민의 동의를 무시한 과도한 정치적 행보를 보인 것이다.





14547436889573




1950년대 왕정이 복고된 후 왕위에 오른 샤 왕조의 9대손 트리부반. 샤 왕조는 영국을 등에 업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100여 년 가까이 권좌에서 물러나 있었다.



한 예로 1959년 네팔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일반 선거를 통해 국왕과 민선 정부가 권력을 공유하는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지만, 마헨드라(1920~1972, 재위: 1955~1972) 당시 국왕은 비효율성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의원들을 체포하고, ‘민주주의는 네팔에 어울리지 않는 외래 사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직접 통치를 선언하였다. 이어 정당을 없애고 최고의결기관인 ‘판차야트’ 체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국왕이 수상과 내각을 직접 구성하고 판차야트 구성원 35명 중 16명을 직접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아울러 판차야트의 소집 및 폐회 권한이 국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왕이 네팔의 유일한 정당이 되는 체제였다.

1972년 마헨드라 사망 후 왕위를 계승한 비렌드라(1945~2001, 재위: 1972~2001)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과 국민들의 관계는 외적으로 더욱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네팔 왕실이 급변하던 당시 정세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이기도 했다. 일례로 인도-네팔 무역협정 시효가 만료된 1989년 3월을 기점으로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었는데, 인도가 국경 지역에서의 경제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요리용 등유를 비롯한 생필품 수급이 전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네팔의회당과 좌파연합 세력은 정당 활동의 자유, 부정부패 척결,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 규모의 가두시위와 파업을 주도하자 결국 1990년 4월 8일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한 비렌드라 국왕은 판차야트 체제의 해체, 복수정당제와 양원제에 기반하는 의회민주주의 도입, 인권보장, 언론의 자유, 유럽식 입헌군주제의 공식화를 인정하였다. 같은 해 11월, 이 모든 내용이 명시된 네팔 신헌법(Constitution of the Kingdom of Nepal, 1990)이 공포되면서 민주국가를 향한 네팔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왕궁에서 발생한 사상초유의 총격 사건과 몰락



그러나 신헌법 공포 이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해 가던 네팔 왕실은 2001년 왕궁에서 발생한 사상초유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사건의 전말을 네팔 국내외 주요언론 보도를 토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2001년 6월 1일 저녁, 만취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궁정 만찬 석상에서 총기를 난사해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랴 왕비를 비롯한 친인척 8명이 즉사하고 6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3일 후 뇌사로 사망하였다.

영국의 명문 이튼 고등학교와 미국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왕세자가 무차별 총격을 가한 이유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두고 어머니와 벌인 말다툼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디펜드라 왕세자는 네팔 유력 야당 지도자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했는데, 어머니인 아이슈와랴 왕비는 신부측 집안이 ‘유력 가문 출신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는 것이다.





14547436904416





2001년, 디펜드라 왕세자가 국왕과 아이슈와랴 왕비를 비롯한 친인척 8명을 총기로 살해하고 자신은 권총 자살 함으로써 샤 왕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앞줄 왼쪽이 비렌드라 국왕, 우측이 아이슈와랴 왕비, 뒷줄 가운데가 디펜드라 왕세자이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네팔 국민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평소 거만한 행동과 언사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던 디펜드라 왕세자의 친삼촌이자 비렌드라 전 국왕의 친동생인 갸넨드라(1947~현재, 재위: 2001~2008)가 국왕에 즉위했다는 정부의 발표였다.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에 대해 갸넨드라 국왕은 공포 정치로 맞섰다. 2005년 2월 향후 3년간 국왕이 직접 관장하는 내각을 구성하겠다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부 주요기관에 왕실 군대를 배치하였다. 아울러 언론의 사전 검열을 의무화하고 국왕 직속의 정치인 부정부패 감시기구를 신설하였다. 2006년 1월에는 네팔의회당을 비롯한 7개 야당연합(SPA: Seven Party Alliance)이 계획 중이던 반왕정 집회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범야권 지도자 107명을 구금 및 가택 연금 조치하는 한편 카트만두 시내 전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무장 병력을 배치하였다.

‘정국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시행된 이러한 조치들은 역대 최대 규모의 시위와 유혈 사태를 불러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사, 변호사, 언론인, 국영기업 직원들까지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으며, 더 이상 국왕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2006년 4월 24일, 갸넨드라 국왕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야당연합의 만장일치로 B.P. 코이랄라 전 수상이 과도정부 신임 총리에 취임하였다. 곧이어 과도정부 내각은 국왕의 군대 통수권 박탈, 면책 및 면세특권 박탈, 22개 국왕 임명대사 소환, 판사 및 육군원수에 대한 인사권 박탈, 왕위계승자 임명권 박탈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 선언을 채택하였다.





14547436916423





힌두 왕국의 마지막 왕인 갸넨드라. 국민들의 반감에 공포 정치로 맞서던 그는 평민의 신분으로서 왕궁을 떠나게 된다.



국왕제 존폐 여부의 첫 윤곽은 2007년 1월 15일 공포된 과도정부 임시헌법(Interim Constitution of Nepal 2007)에서 드러났다. 이 임시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입법 절차와 국가의 수입 및 지출에 관한 규정 등에서 국왕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2008년 4월 10일 치러진 선거를 통해 구성된 새 의회는 서둘러 제헌의회 회의를 개최했고, 5월 28일 국왕제 폐지와 네팔연방민주공화국 탄생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어 정부는 나라얀히티 왕궁을 포함한 파탄, 박타푸르 등 총 6곳의 궁궐과 12만 평 규모의 왕실 소유 토지에 대한 국유화 결정을 내렸다. 이와 함께 정부 부처 곳곳에 의무적으로 걸어야 했던 국왕과 왕비의 초상화 및 찬양 문구들이 철거되었고, 국가 의례에서도 왕정을 의미하는 모든 언급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갸넨드라 국왕 일가는 평민이 되어 왕궁을 떠나야만 했고, 지구상의 마지막 힌두 왕조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왕정이 복고될 가능성도 남아 있어



비록 민주적 선거를 통한 연방공화국으로의 전환은 성공했으나 안정된 정치 체제를 향해 네팔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요원한 듯하다. 정당들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그에 따른 혼란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네팔 국민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 체제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네팔 왕가의 숨통이 완전히 끊겼다고 단언하기는 조심스러운 감이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왕정 시절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왕정을 그리워하는 상당수의 국민과 명목뿐일지라도 왕정 체제를 복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2013년 4위로 원내에 진출한 라슈트리야 프라자탄트라 당은 독립 국가로서의 정체성 유지와 국민 통합을 위해 왕정복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활발한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만약 새로 도입된 민주공화정 체제에서 실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면 네팔 왕가가 부활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네팔의 주요 군주





프리트비 나라얀 샤






14547436927101





프리트비 나라얀(1723~1775년, 재위: 1768~1775년)은 네팔 국민들 사이에서 ‘근대 네팔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수십 개의 군소왕국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지역 토착 문화들을 융합시켜, 오늘날 네팔의 모습을 갖추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가 이룩한 전국 통일은 네팔이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식민 지배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결정적 공헌으로 평가된다. 즉 수많은 토후국으로 분산돼 영국의 식민지로 급속하게 편입된 인도와 달리 네팔은 단일 국가의 모습을 갖춰 영국의 침략에 분연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네팔 국민들은 식민지 경험이 없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가 정부 운영과 외교 정책 등에 적용한 쇄국주의도 높이 평가된다. 그는 국가 안보 및 무역과 관련해 “만약 외국인 무역업자의 출입이 허용되면 네팔 국민들을 가난하게 할 것”이며 “영국과 친하게 지내되 선교사와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의 국수주의적 국가 운영 방식은 네팔이 수 세기 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되며 ‘은둔의 국가’라고 불리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비렌드라 비르 비크람 샤 데브






14547436934140






1945년 12월 28일 출생한 비렌드라 국왕(1945~2001년, 재위: 1972~2001년)은 네팔 역대 왕들 중 정규 교육 및 서구식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인도 다르질링에 있는 가톨릭 학교에서 8년간 수학한 후, 1959~1964년 사이 영국의 명문 이튼 고등학교에서 유학했다. 이어 1967~1968년 기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미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지도 아래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그는 역대 왕들 중 가장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친 인물로 평가된다. 일례로 1975년 거행된 그의 즉위식에는(그는 1972년 왕위를 계승했지만 힌두 점성술사와의 논의 끝에 즉위식을 3년 뒤로 미루었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를 비롯한 전 세계 60개국의 정치 지도자 및 저명인사들이 참석했으며, 그가 개인적으로 초대한 인물들 중에는 이튼 시절의 기숙사 사감들과 15명의 동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1980~1990년대 격렬하게 진행된 네팔 민주화 과정에서 국민들과 첨예하게 반목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민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왕이기도 했다. 헬리콥터 조정을 취미로 했던 그는 왕정 업무에서 잠시 벗어날 때면 오지 산간 마을과 농촌 지역을 찾아가 현지 주민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관료들에게 해결책 마련을 지시하곤 했다. 집권 기간 동안 비교적 안정된 국정 운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그의 노력에 감응한 농촌과 산간 지역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힌두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유적지와 축제들을 적극 장려하여 네팔이 세계적 불교 관광지로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 John Whelpton, 『A History of Nep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 Tessa Feller, 『Nepal - Culture Smart!: the essential guide to customs & culture』, Kuperard, 2008

· 유재현,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그린비, 2009

· 네팔 정부 홈페이지, http://www.nepal.gov.np/





14547436934782

신민하 |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를 졸업하고 인도 국립 자와할랄 네루대학교에서 인도 경제단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도학회 간사와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인도언어문명전공 강사로 활동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물로는 [1991년 경제개혁 이후 인도 기업집단 연구: 인도산업연합회(Confederation of Indian Industry)를 중심으로]와 [1991년 경제개혁 이후 인도 경제단체와 인도의 발전전략 연구]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09.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