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싸니 왕가 - 월드컵을 유치한 세계 최고 부국 카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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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16-02-0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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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민총생산이 구매력(PPP) 기준으로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쉽게 유럽의 작은 국가들을 떠올리겠지만 의외로 1위 국가는 아랍의 카타르라는 나라이다. 카타르는 천연가스 매장량이 러시아, 이란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데 이런 가스 판매 수익을 바탕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앞서 말한 국민총생산이 1인당 96,903달러에 달한다. 이런 국가를 다스리고 있는 왕가가 19세기에 생성되었고 상인계층 출신이라는 점은 꽤 흥미롭다. 바로 싸니(Thani) 가문이 그 주인공이다.

싸니 가문은 19세기 후반 바레인 출신의 칼리파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카타르의 새로운 통치 왕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왕가로 국제 무대에 떠오르는 동시에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하여 항공, 미디어, 스포츠, 금융, 관광 등의 서비스 산업에 위로부터의 투자와 다각화를 이끌고 있다. 카타르 국왕은 아랍어로 ‘아미르(Amir)’, 영어로는 ‘에미르(Emir)’로 표기된다.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행정부를 관할한다. 또한 모든 법령의 비준 및 공포권을 갖고 있으며,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정부 각료 및 자문기관인 슈라 위원회의 위원을 임명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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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는 유럽을 제치고 가장 부유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 부유한 나라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은 상인 계급 출신의 싸니 왕가이다. Jimmy Baikovicius/flickr






카타르 싸니 왕가의 현안, 왕위 계승 문제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왕가라면, 어떤 일이든 일사천리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아랍 국가의 고질적인 특성인 왕위 계승 문제는 카타르도 예외는 아니다. 카타르의 싸니 왕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오만, 쿠웨이트 등 인근 아랍 왕정 국가와 마찬가지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이 정착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왕위는 대부분 가장 능력 있거나 힘이 센 자에 의해 계승되다 보니 싸니 왕가는 역사적으로 가족 간에 왕위 다툼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테면, 20세기 초 왕위에 오른 압둘라 빈 자심은 12명의 남자 형제 중 넷째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올라 다른 형제들로부터 위협적인 왕권의 도전을 받았다. 1960년 아흐마드 빈 알리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사촌 형제인 칼리파 빈 하마드와 왕권 다툼이 벌어졌고, 그 결과 칼리파 빈 하마드는 1972년 궁정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했다. 한편 칼리파 빈 하마드는 1995년 자신의 아들인 하마드 빈 칼리파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폐위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같은 왕위 다툼을 완화하기 위해 1996년 당시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은 왕위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된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장자 계승의 원칙이 마련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마드 빈 칼리파는 1996년에 셋째 아들인 자심 빈 하마드를 왕세자로 책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3년 자심 빈 하마드는 갑자기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포기했고, 이에 따라 넷째 아들인 타밈 빈 하마드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2013년 부친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타밈 빈 하마드는 이듬해인 2014년 11월 11일 자신의 이복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함으로써 또 다시 장자 왕위 계승의 원칙을 마련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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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는 왕위 다툼을 완화하기 위해 장자 계승 원칙을 마련하였으나, 그 이후 하마드의 넷째 아들인 타밈 빈 하마드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원칙은 무색해졌다.






싸니 왕가의 성립과 역사



카타르의 싸니 왕가는 19세기 중반 활약했던 무함마드 빈 싸니(재위 1868~1878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카타르는 원래 18세기 중반부터 바레인의 왕가인 칼리파 가문이 서부 해안 지역인 주바라에 정착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도하와 알 와크라 지역에 살고 있었던 카타르 주민들은 바레인의 칼리파 가문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867년 바레인의 칼리파 왕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여 카타르를 공격했다. 당시 인도와 걸프로 이어지는 인도양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던 영국은 사태 안정화를 위해 바레인과 카타르의 분쟁에 개입하여 양자 간의 평화협상을 주도했다.

1867년 영국이 주선한 바레인-카타르 평화협상은 근대 카타르 국가 형성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카타르 주민들은 자신들의 협상 대표자로 존경받는 기업가로서 오랫동안 도하에 거주해 왔던 무함마드 빈 싸니를 내세웠다. 1868년 9월 12일 영국은 무함마드 빈 싸니와 협정을 체결하고, 그를 바레인으로부터 독립한 카타르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 협정을 계기로 무함마드 빈 싸니는 카타르의 통치자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세기 말 오스만 군대를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후 통치권을 확립한 싸니 가문은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영국과 보호령 조약을 체결했다. 1916년 11월 3일 압둘라 빈 자심은 인도 주재 영국 정부 대표와 영국-카타르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카타르는 1916년부터 1971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보호령 기간 동안 카타르는 영국 정부의 동의 없이 어떤 강대국과도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영국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카타르를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다.

1930년대부터 카타르는 석유 경제 시대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1935년 압둘라 빈 자심이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와 석유개발 협정을 체결한 이후 1938년 10월 두칸 지역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되었고, 1940년에는 최초의 석유 채굴이 시작되었다. 이후 알리 빈 압둘라 알 싸니 통치 시기인 1949년에 카타르는 본격적으로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석유 수출로 축적된 부를 토대로 싸니 왕가는 1950년대부터 학교, 병원 등의 근대 인프라를 건설해 나갔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영국은 중동과 아시아 지역을 식민 통치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1968년 영국 정부는 1971년까지 수에즈 동쪽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걸프 지역 국가와의 보호령 조약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카타르의 통치자였던 아흐마드 빈 알리는 독립을 대비하여 1970년 4월 2일 임시헌법을 제정하고, 1970년 5월 28일 내각위원회를 구성했다. 1971년 9월 3일 카타르는 영국-카타르 협정을 종결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문화와 예술을 지원하는 싸니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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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재단의 회장을 맡고 있는 모자 빈트 나세르. 전왕인 하마드 빈 칼리파의 두 번째 부인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카타르 재단의 사업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타르를 중동의 교육 허브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도시(Education City) 프로젝트다.



인상적인 것은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석유·가스로 축적된 부를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사용하는 것이 꾸준히 이어졌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하고 익숙한 예는 아마도 1996년에 개국한 아랍 위성 TV 채널인 ‘알자지라’일 것이다. 이 방송 채널은 전임 국왕인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이 개국한 것으로, 검열을 거치지 않는 이 방송사가 카타르 정부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국왕은 매년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자신감 있는 왕가의 행보는 국가가 운영하는 카타르 재단을 통해서 문화교육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카타르 재단의 회장은 전임 카타르 국왕인 하마드 빈 칼리파의 두 번째 부인이자 현 국왕인 타밈 빈 하마드의 친모인 모자 빈트 나세르 알 미스네드가 1995년부터 맡고 있다.

그녀가 회장으로 재직 중인 카타르 재단의 자금 규모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타르의 교육과 문화 관련 예산 대부분을 집행하고 있다. 카타르 재단이 건설한 교육도시의 경우 14㎢의 부지에 버지니아 커먼웰스 예술대학교, 웨일 코넬 대학교, 텍사스 A&M 대학교, 카네기멜론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학과, 노스웨스턴 대학교 등 세계 유명 대학을 유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카타르 재단은 랜드‧카타르 정책연구소, 카타르 과학‧기술 파크, 알자지라 어린이 채널 등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카타르 재단은 스페인의 명문 축구 클럽인 FC 바르셀로나와 2억 3,500만 달러 규모의 후원 계약을 체결하여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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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타르 왕실은 카타르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세계의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로서 현 국왕 타밈 빈 하마드의 친동생이다.



이외에 최근 카타르의 왕족 여성인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 알 싸니가 세계 예술계의 큰손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는 카타르박물관청장으로서 부를 충분히 축적한 카타르를 이제 중동의 문화와 예술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카타르는 2008년 이슬람예술박물관, 2010년 아랍현대미술관(AMMA)을 잇달아 개관한 바 있으며, 향후 세계적인 박물관과 미술관을 약 20개로 늘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는 프랜시스 베이컨,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제프리 쿤스 등의 고가 미술품을 사들였다. 특히 2007년에는 로스코의 <화이트센터>를 7,284만 달러에 사들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2012년에는 세잔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을 2억 5천만 달러에 사들여 역대 미술품 판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그녀가 관장하는 카타르박물관청의 연간 예산은 약 10억 달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야사 빈트 하마드가 이렇게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전임 국왕인 하마드 빈 칼리파의 딸이자 현 국왕인 타밈 빈 하마드의 친동생이기 때문이다.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는 1983년생으로 미국 듀크 대학교에서 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전임 카타르 국왕이자 현 국왕인 타밈 빈 하마드의 부친인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재위 1995~2013년)는 세계 최고 부자 왕족 가운데 한 명이다. <포브스>의 발표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하마드 빈 칼리파의 개인 자산은 24억 달러로 세계 왕족 가운데 여덟 번째로 부자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난 2013년 하마드 빈 칼리파는 이오니아 해에 있는 그리스령 무인도 6개를 1,100만 달러에 구입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이 섬에 가족용 휴양지를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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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개관한 아랍현대미술관.






카타르의 주요 군주



우리에겐 멀게만 느껴지는 카타르의 현재 모습을 조금 더 생생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20세기 이후 왕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절대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랍 국가에서 왕의 행보는 곧 국가의 사회문화적인 특성이 좌우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것이라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쿠데타로 등극했다 폐위된 칼리파 빈 하마드


칼리파 빈 하마드(Khalifa bin Hamad Al Thani, 1972~1995 재위)는 1972년 궁정 쿠데타로 사촌 형제인 아흐마드 빈 알리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전임 국왕인 아흐마드 빈 알리가 통치했던 1960~1970년대 카타르는 오일 붐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아흐마드 빈 알리는 국가 근대화 추진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석유 판매 수입의 약 1/4을 독식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왕세제이자 부통치자였던 칼리파 빈 하마드는 금융, 석유, 법률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1971년 카타르가 독립을 맞이하자 카타르 지도층과 국민 사이에서는 아흐마드 빈 알리가 신생 독립국가를 이끌어갈 군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그 결과 1972년 2월 싸니 왕가 일원들은 문중회의를 통해 아흐마드 빈 알리가 해외로 여행한 틈을 이용하여 폐위시키고 칼리파 빈 하마드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칼리파 빈 하마드가 재위했던 23년 동안 카타르는 석유와 가스 산업 개발을 통해 정부 세입이 크게 증가했다. 카타르는 1985년 1월 미국 오하이오 스탠다드 오일사와, 그리고 1986년 2월 미국 아모코와 석유 공동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1991년 1월에는 프랑스 국영 석유사인 엘프 아키텐과 석유 공동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1991년에는 세계 최대 단일 가스전인 노스돔필드에서 천연가스 생산이 처음 시작되었다.

칼리파 빈 하마드는 1980년대 중반부터 국정 일부를 왕세자이자 국방부 장관인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국정 운영 전반을 맡기면서 명목상으로만 국왕 행세를 했다. 결국 그는 국왕으로 오를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잃는 실수를 범했다. 1995년 6월 27일 칼리파 빈 하마드가 스위스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그의 아들인 하마드 빈 칼리파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왕위에서 폐위된 후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04년에 카타르로 귀국했다.



세계 최고 부국을 만든 하마드 빈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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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드 빈 칼리파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Hamad bin Khalifa Al Thani, 재위 1995~2013년)는 1952년 도하에서 태어났으며, 1971년 영국의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그는 군에 입대하여 카타르군 사령관까지 오르게 되었고, 1993년부터 부친을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1995년 그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인 칼리파 빈 하마드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하마드 빈 칼리파가 재위했던 18년 동안 카타르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기록하여, 2012년 구매력(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이 96,903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되었다. 하마드 빈 칼리파는 국왕 즉위 직후부터 국가 근대화 및 개방화 작업에 착수했고, 이와 더불어 카타르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브랜드 육성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1996년에 아랍 위성 TV 채널인 알자지라를 설립했다.

개국 직후부터 알자지라 방송은 다른 아랍 뉴스 프로그램과 다르게 아무런 검열을 거치지 않은 시사 문제들을 다루었다. 특히 그동안 아랍 사회에서 터부시되었던 성, 일부다처제, 정부의 부패, 여성 인권, 원리주의 등을 다루기도 했다. 알자지라는 한마디로 ‘성역 없는’ 비판으로 국내외 정치 문제를 다루었고, 여기에는 카타르 정부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은 매년 이 방송국에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지원 덕분에 알자지라는 중동에서 가장 유력한 언론 매체로 급성장했다.

또한 하마드 빈 칼리파는 국가 브랜드 육성 차원에서 스포츠 산업 육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카타르는 매년 커머셜뱅크 카타르 마스터즈 골프 대회, 카타르 엑슨모빌 남자 테니스 대회, 소니·에릭슨 여자 테니스 대회, 모토지피(Moto GP) 모터사이클 대회, 카타르 투어 사이클 대회 등 수준 높은 국제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과 각종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고 있다. 특히 2006년 12월에는 제15회 도하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중동의 스포츠 중심지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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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카타르는 스포츠 중심지라는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도하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루었고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10년 12월 2일 카타르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월드컵 유치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여름이면 40도까지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더위를 가장 큰 장애 요소로 지적했다. 이에 대해 카타르는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면 냉방 시설을 갖춘 경기장 12곳을 짓겠다.”라는 공약을 제시하여 세계 축구 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월드컵 경기가 끝난 후 경기장 시설 일부를 해체하여 스포츠 인프라가 취약한 국가들에게 기증하겠다고 공약함으로써 제3세계의 표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마드 빈 칼리파는 풍부한 자금력과 국제적 명성을 바탕으로 중동 외교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수단 다르푸르 문제 및 예멘 정부와 후티 반군 간의 갈등을 중재함으로써 아랍 정치권에서 위상을 높였다. 2011년 ‘아랍의 봄’ 발생 이후 하마드 빈 칼리파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 합세하여 리비아의 독재자 무암마르 가다피를 축출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시리아에서는 아시드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반군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2011년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이 붕괴하자 하마드 빈 칼리파는 이슬람 정치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무슬림형제단 대신 군부 세력을 지지하고 나서자 이를 둘러싸고 사우디아라비아 및 아랍에미리트와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2013년 6월 25일 하마드 빈 칼리파는 TV 연설을 통해 갑자기 왕위를 자신의 아들인 타밈 빈 하마드 알 싸니에게 양위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그는 61세로 권력을 양위하기에는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사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젊은이가 나라를 다스를 때가 되었다.”라고만 짤막하게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사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그가 수년간 신장병을 심하게 앓아왔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양위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추측 보도를 했다.



최연소 국왕에 오른 타밈 빈 하마드 알 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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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국왕 타밈 빈 하마드



타밈 빈 하마드 알 싸니(Tamim bin Hamad Al Thani, 2013년~현재)는 2013년 6월 25일 부친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로써 카타르는 1972년과 1995년 두 차례 연속 쿠데타로 얼룩진 불미스러운 역사를 종식시키고 평화스러운 왕위 계승을 실현했다. 2013년 왕위 계승 당시 타밈 빈 하마드는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세계 최연소 국왕이었다.

타밈 빈 하마드는 1980년 6월 3일 도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 하마드 빈 칼리파가 3명의 아내에게서 난 자식 가운데 넷째 아들이며, 둘째 부인인 모자 빈트 나세르 알 미스네드 왕비의 자식 가운데서는 둘째 아들이다. 1996년부터 친형인 자심 빈 하마드가 왕세자를 역임했으나, 돌연 그가 왕세자 자리를 포기하면서 2003년에 타밈 빈 하마드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타밈 빈 하마드는 영국의 명문 사립 남자학교인 셔번스쿨을 졸업한 후 부친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1998년 사관학교 졸업 후 카타르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2009년에 카타르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국왕으로 등극한 후에는 카타르군 사령관직을 겸하고 있다.

국왕 즉위 전에 타밈 빈 하마드는 부친의 정책에 따라 스포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2006년 제15회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서 2020년 올림픽 유치 위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2005년에 설립한 카타르 스포츠 인베스트먼트는 프랑스 프로축구 명문구단인 파리 생제르망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타르는?




• 건국: 1878년

• 독립: 1971년

• 공식국명: 카타르국(State of Qatar)

• 국왕: 타밈 빈 하마드 알 싸니(Tamim bin Hamad Al Thani, 2013년 즉위)

• 왕세제: 압둘라 빈 하마드 알 싸니(Abdullah bin Hamad Al Thani, 2014년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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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지도 ⓒ김정명



카타르는 아라비아 반도 동부 해안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약 215만 명(2014년 기준)의 반도 국가로서 절대군주정을 유지하고 있다. 카타르의 영토는 11,437㎢로 세계 164위의 작은 나라다. 정식 국명은 ‘카타르국’이며 수도는 도하다.

국민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아랍어다. 1970년대 석유 붐 이후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증가하여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약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은 인도, 필리핀, 파키스탄 등 아시아 출신이다. 카타르의 공식 종교는 이슬람이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기원한 와하비즘 교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카타르의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고 자유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 영구헌법을 제정하여 삼권 분립의 원칙을 천명했으나, 실제적으로는 국왕이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까지 장악하고 있는 절대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2003년 헌법에 따르면 카타르는 국회에 해당하는 자문위원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자문위원의 임기는 4년으로 총 45명으로 구성되는데, 그 가운데 15명은 국왕이 임명하고 나머지 30명은 직접‧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자문위원회가 통과시킨 법안은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얻어야만 입법화될 수 있기 때문에 서구식 의회에 비해 그 권한이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2005년에 최초의 자문위원회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2014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선거가 치러지지 않은 상태이다.

카타르는 석유․가스 산업이 전체 수출의 85%, 재정 수입의 70%, 국내총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에너지 자원에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석유의 경우 매장량은 약 254억 배럴로 소량에 불과하여 2023년 무렵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천연가스 매장량은 러시아, 이란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다. 카타르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910조 5천억 입방피트로 세계 매장량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란 해역과 접해 있는 노스돔필드는 단일 가스전으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카타르는 인구수가 적은데 반해 막대한 가스 판매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어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카타르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구매력 기준으로 96,903달러에 달하여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카타르투자청은 2013년 기준으로 2,560억 달러의 자산을 지닌 세계 9위의 국부펀드 운영기관으로서, 최근 런던의 헤롯 백화점, 파리의 쁘렝땅 백화점, 자동차 제조사 포르셰,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 바클레이스 은행 등의 지분을 인수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카타르는 가스로 축적한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항공, 미디어, 스포츠, 금융, 관광 등 서비스 산업에 투자하여 산업 구조의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1993년에 설립된 국영 항공사인 카타르 항공은 세계적인 항공 평가기관인 스카이트랙스로부터 세계에서 단 6개뿐인 ‘5성급 항공사’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1996년에 설립된 범아랍 위성 TV 채널 알자지라는 글로벌 언론 매체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2022년 FIFA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지로 선정되어 세계 스포츠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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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대학교(Muhammad V University)에서 이슬람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중동전문 비즈니스 사이트인 메나르(www.menar.co.k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현대 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쿠웨이트의 형성과 발전>, <카타르의 형성과 발전>, <오만의 형성과 발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과 발전>, <바레인의 형성과 발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랍인의 역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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