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노벨평화상: 기록과 역대수상자 - 노벨평화상 수상에 얽힌 다양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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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4회 작성일 16-02-0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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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노벨평화상 1901-2015



1901-2015년까지 시상횟수 : 총 96회

1, 2차세계대전 기간을 포함해 19년은 선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4-1916, 1918, 1923-24, 1928, 1932, 1939-43, 1948, 1955-56, 1966-67, 1972) 그리고, 1925년과 1962년에는 수상자는 선정되었으나, 시상이 1년 연기되었다.

총 96회의 전체 수상자 수 :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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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현재까지, 개인은 103명, 단체는 26개가 수상. 단, 국제적십자위원회가 3번 수상 (1917년,1944년,1963년), UNHCR이 2번 수상 (1954년,1981년), 따라서 실제 단체의 개수는 23개.

수상자가 1명(개)인 경우 vs 여러 명(개)인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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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의 평균 연령: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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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별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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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의 대륙별 분포. 역대 수상자 전체를 보면 서유럽과 북미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21세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아시아,아프리카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남성중심성과 더불어 백인/서구중심성은 노벨평화상 비판에 빠지지 않던 단골 메뉴다. 1901-2015년 사이 전체 수상자 중 서유럽과 북미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약 65%에 달한다.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도 미국(21명), 프랑스(9명), 영국(7명) 순이다. 특히 초기 50년간 북미와 서유럽이 아닌 곳에서 수상자가 배출된 경우는 단 한 번뿐이었다(1936년 아르헨티나의 C. 라마스). 아프리카인이 최초로 선정된 것은 1960년, 아시아인은 1974년에 와서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 인권의 시기에 이르러 남성중심성과 더불어 개선되기 시작한다. 특히 2000년대(2001-2015)에 와서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수상 비율이 73%, 미국과 유럽은 26.6%로 완전히 역전되었다.




‘최초의’ 수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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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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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수상자



1901년부터 2015년까지 총 103명의 수상자 중 여성수상자는 16명으로 전체의 15.5%에 불과하다. 특히 처음 75년간 여성수상자는 단 3명으로, 그마저 모두 유럽과 미국 출신이었다. (이는 노벨위원회 구성과도 관련된다. 약 50년간 노벨위원회는 단 1명의 여성위원도 갖지 못했다. 현재는 총 5명 중 3명이 여성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인권의 시기를 거쳐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대(2001-2015)만 따졌을 때 여성 비율은 40% (총 15명 중 6명)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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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란이 많았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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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평화협상 중 레득토(오른쪽)와 키신저(왼쪽)



1973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리더 레 득 토의 수상 결정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노벨평화상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경우로 꼽힌다. 두 사람은 같은 해 파리에서 이루어진 베트남 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공로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두 전쟁 당사자 간의 다분히 정치적인 협상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사람들은 nobel 평화상이 아니라, 전쟁상 또는 ‘ig-noble’ 평화상이라고 조롱했다.

뿐만 아니라 레 득 토는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수상자로 지명된 최초의 아시아인이자,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이를 거부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키신저는 수상을 허락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 이후 노벨평화상을 반납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했다. 이 사건으로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위원직을 사임했다.




받았어야 했으나 받지 못한 사람들: 간디와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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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간디(왼쪽)과 러시아의 톨스토이(오른쪽)은, 의외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평화인물들이다. ⓒ Unknown / http://lj.rossia.org/users/john_petrov/849786.html




당연히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인도의 간디와 러시아의 톨스토이다. 간디는 무려 5번이나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도 끝내 받지 못했다.(1937-39, 1947-48년) 노벨평화상은 물론,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했던 톨스토이는 평화상도,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특히 ‘평화와 비폭력의 아이콘’인 간디가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상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수상이 유력시됐던 1948년에도 간디가 상을 받지 못한 것은 발표 몇 달 전 그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적합한 후보자가 없다”며 수상자 없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1961년 스웨덴 출신이자 노벨재단 이사장 아들이었던 D. 함마르셸드에게는 사후수상이 허락된 바 있다. 또 위원회가 사후수상 불가를 정식으로 공식화한 것도 간디 사후 거의 30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간디의 수상실패를 그의 갑작스런 죽음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간디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었다. 후자는 비폭력 원칙에도 불구하고 간디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더 큰 폭력과 유혈을 야기했다는 점 (특히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과 관련해), 그가 지나친 인도 민족주의자라는 점 등을 근거로 간디의 수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노벨위원들의 그런 견해가 노르웨이와 영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 당시의 백인우월주의나 서구중심주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간디의 사례는 ‘노벨평화상의 가장 큰 실수’, 또는 ‘노벨평화상의 수치’로 불린다.




이런 사람들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히틀러, 스탈린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1939년 스웨덴 국회의원에 의해, 스탈린은 2차대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45년과 1948년 두 차례나 후보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한국의 전두환도 추천된 바 있다.

그 외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한 유명인으로는 윈스턴 처칠(대신 처칠은 2차대전 회고록으로 헤밍웨이를 제치고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아르헨티나의 후안 & 에바 페론, 세계 평화학의 아버지 요한 갈퉁 등이 있다.




노벨평화상 역대 수상자 (190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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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www.nobelprize.org

· www,nobelpeaceprize.org

· Ǿ. Stenersen, I. Libæk, A. Sveen, 『The Nobel Peace Prize : One Hundred Years for Peace』 (Oslo: Cappelen, 2001)

· G. Lundestad, <The Nobel Peace Prize 1901-2000>, Nobelprize.org. Nobel Media AB 2014. Web. 21 Aug 2015.

· C. Toffolo, R. Vandenbroucke, R. P. Alford, N. J. Young, <Nobel Peace Prize> in J. Nigel ed.,「The Oxford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Peace」, vol. 1, USA: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 B. L. Mitchell-Green, <Peace Prizes> in L. Kurts ed.,「Encyclopedia of Violence, Peace & Conflict」Oxford: Elsevier, 2008



이미지출처


· J.로트블랫, ⓒ The Norwegian Nobel Institute

· 랠프 번치, wikimedia ⓒ U.S. Information Agency.

· 사토 에이사쿠, wikimedia ⓒNijs, Jac. de / Anefo

· UNHCR, wikimedia ⓒUNHCRflag.svg: *UN_refugee.jpg: UNHCR / UNHCRflag.svg: *UN_refugee.jpg: UNHCR / uploaded by: Montgomery (talk) 16:26, 14 July 2011 (UTC)

· 아웅 산 수 치, wikimedia ⓒClaude TRUONG-NGOC

· 류사오보, flickr ⓒBlatant World

· 베티 윌리암스, wikimedia ⓒhttp://www.centersofcompassion.org

· 메이리드 코리건, wikimedia ⓒMairead_Corrigan_Gaza.jpg: Free Gaza movement / derivative work: Materialscientist

· 마더 테레사, wikimedia ⓒEvert Odekerken

· 리고베르타 멘추, wikimedia ⓒSurizar, cropped by Jen

· 조디 윌리엄스, wikimedia ⓒJustin Hoch photographing for Hudson Union Society

· 시린 에바디, wikimedia ⓒPersianDutchNetwork

· 왕가리 마타이, wikimedia ⓒFredrick Onyango

· 레이마 그보위 wikimedia ⓒJon Styer/Eastern Mennonite University

· 타와쿨 카르만, wikimedia ⓒHarrywad

· 말랄라 우사프자이, wikimedia ⓒRussell Watkins/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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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석사를,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대화주의 사상가 M. 바흐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및 탈사회주의권 문화연구, 탈경계 연구, 평화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오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공저, 아카넷, 2013), 『재난과 평화: 폐허를 딛고 평화를 묻다』(공저, 아카넷, 2015), 『 동아시아-동북아-신동북아』 (공저, 도서출판네오, 2015),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21세기 폭력의 패러다임과 폭력/비폭력의 경계"(『평화학연구』 16권 1호, 2015), “형제국가들의 역사전쟁: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기원” (『역사비평』 112, 2015), 등이 있다.


후원

인문한국지원사업(HK : Humanities Korea),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이 원고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와 네이버가 공동기획했습니다.


출처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발행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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