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자의 국경인식 - 조선후기 국경 충돌과 영토에 대한 관심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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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8회 작성일 16-02-0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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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전쟁을 통한 정복과 백성의 복속이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국경은 유동성이 컸으며, 이에 따라 국경 개념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였다. 고려와 조선사회에 들어와 왕조국가가 성립되면서 관할하는 지방 군현의 개념은 있었다 하더라도 사상적 교류와 이념적 동질성 확보가 중요하였기 때문에 국경에 대한 연구가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근대적인 사유체계가 확립되던 조선 후기에 조·청, 조·일 간 국경 충돌이 발생하자 실학자들은 적극적으로 국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현재 국경뿐만 아니라 과거 영토의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청, 조·일 간 국경을 둘러싼 충돌





1) 조·청 간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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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의 초상화. 여진족을 대부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 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583년 누르하치(1559~1626)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만주’라고 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는 옛 여진 제국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금(金)[후대에 12세기의 '금'과 구분하여 '후금'이라고 부름]이라고 짓고, 자신은 최고 지도자인 (汗)이 되었다. 1636년 후계자 홍타이지는 나라 이름을 ‘다이칭(大淸)’으로 바꾸었다. 1644년 베이징을 차지한 만주족은 퇴각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동과 그 이동 지역에 봉금지대를 설정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이 봉금지대에는 한족의 출입이 제한되면서 소수의 만주족만이 살고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강도회맹을 맺으면서 조선인도 봉금지대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화전으로 파종하고 가을에 들어가 수확하거나 간혹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범월하였다. 홍타이지는 조선인의 출입을 막아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인조 이후 봉금지대에 범월한 조선인들을 처벌하였다.

1685년(숙종 11) 인삼을 캐던 범월 조선인들이 장백산을 답사하던 청 관리를 조총으로 상해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어서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중국인이 범월 조선인에 의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1712년(숙종 38) 2월에 청나라는 모호해진 양국간 경계의 조사를 제안하였다. 이에는 요동간도 일원뿐만 아니라 장백산 즉 백두산까지 영역을 확대하려는 강희제의 영토 확장 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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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청나라는 오라총관 목극등을, 조선은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을 각각 회담 대표로 파견하였다. 목극등은 백두산의 정상에 오르고, 정상부의 천지 동남쪽 4km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는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조선과 청의 경계선을 표시한 것이다. 이 비문에는 변경을 답사한 결과,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된다. 그러므로 물길이 나뉘는 이곳에 돌로 새겨 기록으로 삼는다”고 적고 있다. 이 회담으로 조선과 청과의 공식적인 경계선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회담 당시 두만강수원에 대해 조선과 청의 주장이 엇갈렸으나 명확히 처리하지는 않았다. 이미 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넓은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중원에서의 지배력이 견고하게 자리 잡혀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명확한 국경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비에서 양국 대표가 국경으로 합의하였던 토문을 바라보는 후일의 시선은 서로 달랐다. 중국은 토문이 두만강의 상류를 뜻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우리 측에서는 토문을 두만강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송화강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토문을 두만강으로 간주하면서 오히려 이를 통해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비판하는 견해는 주로 당시 비주류였던 남인계에서 나왔다.

또한 토문을 두만강과는 별도의 송화강으로 간주함으로써 두만강 이북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일부 집권 노론세력이나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사이에서 주장되었다. 그런데 당시 명확하지 않던 국경 문제는 차츰 조선에게 불리하게 작동하였다.

러시아 세력의 동진에 따라 1860년 북경조약으로 청은 러시아에 연해주할양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러시아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기존의 봉금정책을 포기하고 19세기 중엽에는 한족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였다. 1880년대에는 청이 본격적으로 간도 개척에 나서면서 대부분의 만주 지역이 한족에게 개방되었다. 한편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에서는 각종 재해가 이어지자 조선인들이 두만강 북쪽 지역에 들어가 농경을 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정착 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이 지역으로 조선인 이주자가 급증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두만강 대안의 개간지를 간도라고 불렀다.

같은 지역을 두고 청과 조선이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도하자 양국인들의 충돌이 다수 발생하였다. 이에 1882년 초 청나라는 간도지역으로의 조선인 월경을 금지시켜 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으며, 간도에 있던 조선인들의 쇄환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국의 요청에 따라 조선인들을 쇄환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현지 조선인들은 목극등이 세운 정계비문에 입각하여 토문강과 송화강 이남의 간도는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1883년 조선에서는 서북경략사 어윤중을 파견하여 정계비의 내용과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였으며, 어윤중은 정계비에서 말한 토문강을 중국이 두만강으로 잘못 알고 있으며,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지역은 조선 영토라고 보고하였다.

1885년 청나라가 조선인들을 간도에서 강제로 추방하면서 본격적인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에 1885년 11월 국경문제를 다룰 감계회담이 열렸다. 조선 측에서는 감계사로 안변부사 이중하를 파견하였다. 당시 회담에서 조선 정부는 정계비에 근거하여 토문은 송화강임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중국 정부는 두만강 국경 획정을 고집하였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열린 1887년과 1888년 회담에서도 청은 두만강으로 국경을 획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회담이 실패로 끝난 이후 중국은 간도 이민정책과 조선인에 대한 귀화정책을 통해 간도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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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여지도』는 1885~1886년간 김광훈(金光薰), 신선욱(申先郁)이 연해주 일대를 정탐하여 작성한 지도이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조선도 이 지역에 대해 여전히 주목하고 있었으며, 1872년에 작성된 『강북일기』와 1880년대 작성된 『아국여지도』와 같은 압록강과 연해주 정찰보고서가 왕실 도서관이었던 장서각에 남아 있다. 1897년 서상무를 압록강 북쪽지역의 서변계관리사로 임명하였으며, 1900년에는 평북관찰사 이도재가 서간도 지역을 평안도에 배속시키고 이주민을 보호하였다. 대한제국에서는 1902년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하여 조세를 징수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영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였다.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이 지역의 국경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1905년 불법적인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차지한 일본은 1909년 만주에서 철도부설 등 이권을 차지하는 대신 간도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양보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두만강으로 획정되고 간도지역을 둘러싼 조선과 청의 다툼은 일단락되었다.



2) 독도와 울릉도를 둘러싼 조·일간 충돌



신라 지증왕 13년(512) 울릉도독도 일대로 구성되었던 우산국신라에 병합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의 울진현조에는 “우산, 무릉은 본래 두 섬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고려사』의 태조 13년(930) 기사에서는 “우릉도에서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으며, 사신에게 벼슬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울릉도를 고려의 영토로 확보하고 있었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 해중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무릉은 울릉도, 우산은 독도를 각각 가리킨다. 우산은 신라시대 이래 울릉도의 이름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울릉도를 울릉, 또는 무릉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독도를 우산이라고 지칭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연안의 섬에 도적이 출몰할 것을 염려하여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울릉도에서도 주민들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울릉도는 연안 어업을 하는 어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전진 항구였으므로 완전히 주민의 거주를 금지시키기는 어려웠으며,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계속 이용하고 있었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땅으로 간주하였다. 1667년 일본의 『은주시청합기1)』에서 울릉도와 송도(독도)는 고려에 속한 영토이며, 일본의 서북 국경은 은기도를 한계로 한다고 적고 있다.

숙종 19년(1693) 여름 울릉도와 자산도(독도) 부근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안용복은 일본 어선에 납치되어 일본에 갔다가 송환되었다. 숙종 22년(1696) 다시 울릉도에 갔다가 일본 어선을 쫓아 일본에까지 따라갔다.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백기주 태수와 대마도주와 담판하면서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일본 막부도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두 섬이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1696년 1월 <죽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1699년 일본 막부의 최고 책임자인 관백도 대마도주를 통해 이를 확인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은 은기도가 자신들 영역의 한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서한을 보내왔던 것이다. 한편 안용복 사건 이후 조선 조정에서도 울릉도와 독도 양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조선은 두 섬의 산물이나 형세를 알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수토관을 파견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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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에서의 울릉도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1881년 울릉도에 이규원을 검찰사로 파견하였다. 이규원은 현지를 답사한 끝에 개척이 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1882년에는 울릉도 개척령을 반포하면서 본토의 사람들을 모집하여 이주시켰다. 이에 따라 울릉도는 주민들이 공식적으로 거주하게 되었으며, 독도는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되었다. 반면에 1870~1900년대까지 일본의 독도에 대한 인식은 미약하였으며 오히려 두 섬을 한국의 영토로 생각하였다. 일본의 내무성은 1877년 관련 문서를 첨부하여 당시 최고 기관인 태정관에 품의한 결과 태정관은 다케시마(울릉도) 외 일도(독도)는 일본과 관련이 없다는 지령문을 내려보내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와 독도는 1900년 10월 25일 고종 황제의 칙령에 의해 중앙에서 군수가 파견되기 시작한 울릉군의 한 부속 도서로 정식 편입되었다. 이 칙령은 관보에 게재되어 전 세계에 공포되었다. 근대 국제법상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의 근거로 내세우는 1905년의 시마네현 편입 고시보다 5년이나 앞선 것이다.




실학자들은 국경을 어떻게 보았는가





1) 북계 지역에 대한 인식과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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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실학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 실학자 가운데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일군의 학자들은 우리나라 상고사의 중심 지역으로 북방지역과 요동지역을 재발견하고자 하였다. 초기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백겸은 역사지리서인 『동국지리지』에서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의 상고기 국가의 행방에 주목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한사군의 일부가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여 상고기 한민족의 활동 영역을 요동에까지 확대하여 이해하였다. 허목의 『동사』, 이돈중의 『동문광고』는 야인이 차지하였던 지역의 종족까지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허목은 숙신과 말갈을 동국의 역사 속에 서술하였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말갈이나 여진계의 동향을 기술하여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요동은 결국 회복해야 할 곳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요동, 사군, 북관, 양강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역사적으로는 두만강 북쪽 지역에 옛 발해가 있었으며, 고려 때 윤관이 점령하였던 땅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익, 홍양호 등의 실학자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일원에서의 군사적 대비책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 후기의 정약용, 이규경, 19세기 중엽 실학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최성환의 『고문비략』에까지 이어진다. 최성환은 4군 복구를 주장하면서 압록강은 천연의 요새인데 4군을 비워두면 내지를 잘라서 적에게 주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에는 북관지역의 연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실학자들은 두만강 북쪽 지역을 옛 고토로 간주하였다. 홍양호나 신경준 등은 두만강 북쪽 지역의 경우 옛 조선의 영토이며, 흥왕의 땅임을 강조하였다. 이익, 이중환 등은 윤관이 비를 공험진곁에 있던 선춘령 아래에 세웠다는 주장에 주목하여,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정계비 수립 이후 국내에서는 비문에 기술한 토문을 두고 해석이 갈리기 시작하였다. 토문강과 두만강에 대해 『요동지』나 『용비어천가』 등 자료에서는 서로 다른 것으로 적고 있었다. 그러나 정계 당시 조·청 양국 국경 회담의 당국자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문을 두만강의 발원처라고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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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 백두산 부분. 1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관방지도로서, 백두산 정계 이후 북방 지역과 옛 강역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숙종대 조·청 국경 회담에 대한 비판은 요동과 고토회복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실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윤관이 점령하였던 선춘령을 두만강 북쪽 700리로 간주하면서 두만강 북쪽 지역을 옛 고토로 간주하였다. 이익, 안정복 등은 토문강이 두만강과 같다는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선춘령 일대를 국경으로 해야 하는데 국경회담을 잘못하여 오히려 두만강 북쪽의 땅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다시 영조대 신경준, 홍양호 등으로 이어졌다. 그들도 정계비에서 동쪽의 경계를 토문으로 확정하면서 동북쪽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당시 국경 정계에 참여하였던 조선 측 관리들이 무사안일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조선 초의 『요동지』나 『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주목하여 오히려 토문을 두만강과는 별개의 송화강이나 분계강으로 인식하는 주장들이 나타났다. 정동유는 토문강이 국경이었던 점을 인정하되 정계 시 토문의 상류를 연결하는 지점을 잘못 지정함으로써 수백 리를 잃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서쪽으로는 요동, 동쪽으로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간도로 나아가는 분계강을 옛 양국의 경계로 상정하고, 요동과 분계강 이남지역의 회복을 소망하고 있다. 토문강을 송화강으로 보거나 별도의 분계강으로 보거나 간에 이러한 생각은 조·청의 국경이 두만강보다 북쪽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러한 주장은 숙종 말부터 세력을 얻기 시작하여 간도로의 유․이민 증가와 맞물리면서 크게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 시기 북방 지역의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북방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서적이 나왔다. 유득공의 『발해고』와 『사군지』, 홍양호의 『북새기략』,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 정원용의 『북략의의』, 정윤용의 『북로기략』, 김노규의 『북여요선』 등이 편찬되었다. 이 시기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은 백두산 혹은 압록강, 두만강 양강 피아를 구분하는 지도가 편찬된 데서도 알 수 있다.

근대 초기에도 만주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재편집하여 『대한강역고』를 만들었던 장지연은 이 책에서 정약용의 주장을 재편집하여 국경을 명확히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만주를 우리 옛 땅을 보고 특히 백두산정계비를 통해 간도지역을 상실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실지 회복을 주장하였다.



2)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인식과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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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팔도총도(八道總圖). 팔도총도의 오른쪽을 보면 우산도(于山島, 지금의 독도)와 울릉도(鬱陵島)가 현재의 지도와는 달리 위치가 바뀌어 있다.



조선 전기 관부에서 만든 전국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우산도와 울릉도를 구분하였던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 이전 시기에 편찬된 지리서의 기록을 수용하였으나, 일설로 ‘우산=울릉 1도설’을 추가해 두었다. 숙종대 안용복 사건에서 비롯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은 실학자들로 하여금 도서지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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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우산도(于山島, 독도)와 울릉도에 대해 언급했다.



이익은 『성호사설』 「천지문」의 <울릉도>조에서 울릉도의 역사를 적고 일본과의 분쟁을 소개하고 있다. 이익은 여기서 명칭을 막론하고 울릉도는 우리나라에 속하며 그 부근의 섬도 울릉도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 안용복에 대해 미천한 군졸로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고 토지를 회복하였는데도,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린 것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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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전서의 강계고에서 신경준은 송도와 울릉도가 별개의 섬이며, 모두 우산국에 속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경준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1756년에 편찬한 『강계고』 <울릉도>조에서 울릉도의 위치와 연혁, 산물 등을 소개하였다. 특히 울릉도의 과거 연혁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에서 이 섬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일설로 전하였던 우산=울릉 1도설을 재수록하였던 유형원의 『여지지』 기록을 소개하면서 다시 2도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다른 한 섬은 송도 즉 독도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별도로 <안용복사>조를 두어 안용복의 활동 상황에 대해 적고 있다. 특히 안용복의 말을 빌리어 일본이 말하는 송도는 우산도이고, 이것은 우리의 땅에 속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신경준은 지금까지 다시는 울릉도를 일본 땅이라고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모두 안용복의 공이라고 적고 있다. 게다가 신경준은 <부산(釜山)>조에서 일본의 대마도도 옛 신라에 속한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신경준은 1770년(영조 46)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의 편찬도 담당하였는데 그는 『강계고』 <울릉도>와 <안용복사>의 내용을 울진현의 울릉도에 대부분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맹휴(1713~1751) 등이 편찬한 『춘관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맹휴는 『춘관지』 <울릉도쟁계>조에서 이익과 신경준의 기술을 종합하여 울릉도 기사와 안용복 사건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맹휴의 『춘관지』 기사는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과 성해응(1760~1839)의 <울릉도지>와 <제안용복전후>에도 전재되어 있다.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의 울릉도 관련 기사는 1808년 서영보·심상규 등에 의해 편찬된 『만기요람』에도 전재되어 있다.

조선 후기 이익, 신경준, 이맹휴, 이긍익, 성해응 등 실학자들은 숙종대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적 현안으로 등장하였던 안용복 사건에 주목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간의 분쟁을 기록으로 남기었다. 특히 안용복 덕분에 일본이 다시 울릉도를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적고 있다. 실학자들이 영토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숙종대 안용복 사건에 주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각에서 후일 울릉도 개척령 반포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규정한 고종의 칙령이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유교 사상과 중화주의가 지배하면서 사상적 보편주의가 널리 퍼져있어 상대적으로 국경의 개념이 미약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과거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면서 차츰 과거의 강역 변화와 지리적 범주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조·청, 조·일간의 국경 충돌은 현재의 국경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국경문제가 이슈가 된 것은 근대적인 민족·국가 개념의 형성과 일정하게 관련이 된다. 이렇게 국경을 연구하고 경계를 확정하려고 한 것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서 미약하지만 근대적인 민족과 국경의 개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 배우성, 『조선 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 조광, 「실학과 개화기의 영토문제 연구」, 『영토문제연구』 1, 고려대, 1983; 『조선 후기 사회의 이해』, 경인문화사, 2010.
  • 조광, 「조선 후기의 변경의식」, 『백산학보』 16, 1974; 『조선 후기 사회의 이해』, 경인문화사, 2010.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은주시청합기』의 내용 중 이 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해석차이가 있어,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은주(오키시마)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낮 하루 밤을 가면 독도가 있고, 여기에서 하루 거리에 울릉도가 있다. 이 두 섬은 무인도 인데, 이 두 섬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에서 오키시마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 즉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은주(오키시마)로 한계를 삼는다.(然則 日本之乾地 以 此州 爲限矣)"

즉, 이 자료는 '일본의 서북 경계는 오키시마까지 이고, 조선에 가까운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의 국경밖에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 측은 마지막 문구의 번역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하고 있다.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두 개의 섬(독도, 울릉도)로 한계를 삼는다." 이는 문맥을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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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 금오공과대학교 교수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라는 제하에 문헌비고 여지고의 편찬 과정과 수록 내용을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금오공과대학교 교양교직과정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사와 사학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학사대요』,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조선시기 역사가와 역사지리인식』, 『제천관련 고문헌 해제집』, 『제천지역사연구』, 『칠곡 귀암 이원정 종가』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0.06.



주석


1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은주시청합기』의 내용 중 이 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해석차이가 있어,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은주(오키시마)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낮 하루 밤을 가면 독도가 있고, 여기에서 하루 거리에 울릉도가 있다. 이 두 섬은 무인도 인데, 이 두 섬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에서 오키시마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 즉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은주(오키시마)로 한계를 삼는다.(然則 日本之乾地 以 此州 爲限矣)"

즉, 이 자료는 '일본의 서북 경계는 오키시마까지 이고, 조선에 가까운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의 국경밖에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 측은 마지막 문구의 번역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하고 있다.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두 개의 섬(독도, 울릉도)로 한계를 삼는다." 이는 문맥을 무시한 잘못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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