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사바흐 왕가 - 의회제도를 발전시킨 왕정 국가 쿠웨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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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9회 작성일 16-02-0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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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는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이름이지만 쿠웨이트를 지배하고 있는 사바흐(Sabah) 왕가는 무척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사바흐 가문은 국왕의 자리뿐만 아니라 행정부의 요직인 총리와 주요 장관직을 독점하고 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인근 걸프 아랍 왕정 국가에 비해 의회제도가 비교적 발전되어 있으며, 내각 장관에 대한 질의권과 해임권을 가지고 있어 제한적이지만 왕가를 견제하는 기능도 어느 정도 하고 있다. 물론 내각의 핵심 장관직은 왕실 혈족이 독식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국회의원은 될 수 없다. 왕가의 권한이 강하지만 서구식 입헌군주제 요소가 부분적으로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쿠웨이트는 형식적으로 입헌군주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국왕의 권한은 막강하다. 국왕의 아랍어 명칭은 ‘아미르’이며, 영어로는 ‘에미르’로 표기된다.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며 행정부를 총괄하고 군(軍) 최고지휘권을 행사한다. 또한 국왕은 왕세자(또는 왕세제)와 총리를 임명하며, 총리의 추천을 받아 장관도 임명할 수 있다. 아울러 국왕은 국회 해산권, 법률안 제안권, 법률안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다. 과거에는 왕세자(또는 왕세제)가 총리직을 겸직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2003년 이후부터 왕세자(또는 왕세제)와 총리직이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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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는 중동 국가 중 입헌군주제가 비교적 발달한 나라이다. 사진은 쿠웨이트 의회의 모습.






쿠웨이트 왕가의 특징과 현안





왕위 계승 자격


1962년 헌법에는 쿠웨이트 국왕에 오를 수 있는 자격 요건에 대해 제7대 통치자였던 무바라크 알 사바흐(재위 1896~1915년)의 직계 후손으로 한정하였다. 무바라크 알 사바흐의 아들 중 왕위에 오른 인물은 장남인 자비르 2세와 차남인 살림 알 무바라크 등 2명이 있다. 이후 전통적으로 쿠웨이트의 왕위는 무바라크 알 사바흐의 후손 중 자비르 2세를 필두로 하는 ‘자비르 가계’와 살림 알 무바라크를 필두로 하는 ‘살림 가계’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자비르 가계는 서구 문명에 대해 비교적 유연하고 세속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반면, 살림 가계는 종교나 문화에서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록 자비르 가계와 살림 가계가 왕위를 독점하다시피 장악하고 있긴 하지만, 기타 사바흐 가계들도 요직에 오를 수 있다. 실례로 2011년 이후 2014년 현재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있는 자비르 알 무바라크 알 하마드 알 사바흐는 기타 군소 가계 출신이다. 사바흐 가문에 속한 일부 왕족은 고위직을 기타 군소 가계에 보다 많이 할당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비르 가계와 살림 가계에 의해 양분되어 있는 현 지배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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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등극 후 9일 만에 사임한 사아드 알 살림 알 사바흐



제7대 통치자 무바라크 알 사바흐 이후 쿠웨이트의 사바흐 왕가는 자비르 가계와 살림 가계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을 비교적 잘 지켜왔기 때문에 왕위를 둘러싼 갈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06년 왕위 계승 과정에서는 적지 않은 내홍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의 발단은 2006년 1월 15일 제13대 통치자 자비르 알 아흐마드 알 사바흐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자비르 가계 출신이었으므로 차기 왕위는 살림 가계 출신인 왕세제 사아드 알 살림 알 사바흐가 차지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아드 알 살림은 선왕의 장례식에 휠체어를 타고 등장할 정도로 건강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당시 사바흐 왕가 문중은 물론 일부 국회의원까지도 그가 국왕으로 취임하여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사아드 알 살림은 국왕 등극 후 9일 만에 사퇴하고 말았다. 사퇴 다음 날 쿠웨이트 의회는 사아드 알 살림의 국왕직 사퇴를 공식 결정했고, 당시 총리였던 ‘자비르 가계’ 출신의 사바흐 알 사바흐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할 것을 의결했다.

이로써 2006년 왕위 계승은 자비르 가계가 연속해서 이어나가게 되었다. 더구나 신임 국왕에 오른 사바흐 알 사바흐(2006년~현재)는 전통적인 관례를 깨고 2006년에 차기 왕위 후보 1순위인 왕세제로 같은 자비르 가계 출신인 나와프 알 사바흐를 임명했다. 또한 국정 운영의 실무 책임자인 총리 역시 자비르 가계 출신으로서 조카인 나세르 알 사바흐(2006~2011년 총리 역임)를 임명했다. 사바흐 알 사바흐 국왕의 이 같은 조치는 오랫동안 쿠웨이트 왕가가 불문율처럼 지켜온 자비르 가계와 살림 가계 간의 세력 균형을 무너트리는 것으로 향후 쿠웨이트 정국에 큰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사바흐 왕가의 성립과 역사



오늘날 쿠웨이트는 1756년 흔히 사바흐 1세로 알려진 사바흐 빈 자비르에 의해 건설되었다. 현재 쿠웨이트를 통치하고 있는 왕가의 명칭인 ‘사바흐’ 역시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사바흐 가문은 원래 아라비아 반도 중앙에 위치한 나즈드 지역에서 이주한 우툽 부족의 일원이다. 우툽 부족은 사우드 가문을 포함한 거대한 부족연맹체인 아나이자 부족연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말 우툽 부족은 극심한 기근을 피해 아라비아 반도 중앙에서 동부 해안 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우툽 부족은 카타르와 바스라 등을 떠돌다가 18세기 중반에 드디어 오늘날의 쿠웨이트 지역에 정착했다. 1756년 우툽 부족은 사바흐 빈 자비르를 쿠웨이트의 아미르(군주)로 선출했다. 이를 계기로 사바흐 가문은 쿠웨이트의 왕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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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대왕



19세기 말 오스만제국과 영국은 쿠웨이트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일환으로 1871년 오스만제국은 당시 쿠웨이트의 국왕이었던 압둘라 2세를 지방 총독에 해당하는 카임마캄에 앉힘으로써 쿠웨이트를 이라크 바스라 주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압둘라 2세는 오스만제국의 해군함대에게 쿠웨이트 항구를 제공해 주었다.

1896년 근대 쿠웨이트의 기초를 다진 무바라크 알 사바흐가 국왕에 오른 후 쿠웨이트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먼저 그는 1899년 영국과 영국-쿠웨이트 조약을 체결하여 오랫동안 종주국 역할을 해 왔던 오스만제국을 축출하고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 조약에서 무바라크 알 사바흐는 향후 영국 정부의 승인 없이 외국의 대표자를 받아들이거나 영토를 매도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쿠웨이트와 사바흐 왕가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하는 약속을 했다. 이 조약을 계기로 쿠웨이트는 1961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대신 오스만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쿠웨이트 국가 형성의 초석을 마련했다.

1930년대에는 쿠웨이트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시기이다. 1933년 영국의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와 미국의 걸프 오일사가 합작 투자한 쿠웨이트 오일사가 설립되었다. 1938년 쿠웨이트에 방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쿠웨이트는 본격적으로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0년대부터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쿠웨이트는 보건 및 교육 부문에서 근대적인 기반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1961년 6월 19일 제11대 통치자였던 압둘라 알 살림 알 사바흐는 영국-쿠웨이트 보호조약을 폐기하고 쿠웨이트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국왕 사바흐 알 사바흐의 재산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2010년 기준으로 쿠웨이트의 현 국왕인 사바흐 알 사바흐의 개인 자산은 3억 5천만 달러로 세계 왕족 가운데 13번째로 부자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 걸프 국가들의 국왕들은 일반적으로 토지 소유, 사업체 운영, 펀드 조성 등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데 반해 쿠웨이트 국왕은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바흐 알 사바흐는 취임 이후 자신의 연봉을 800만 디나르(약 2,500만 달러)에서 5,000만 디나르(약 1억 8,800만 달러)로 인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쿠웨이트의 주요 군주와 왕족



영국의 보호령 아래 있었던 걸프 아랍 국가들은 20세기 중반 이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헌법을 제정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쿠웨이트가 특이했던 점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의회제도를 다른 국가에 비해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이다. 친서방정책의 강한 기류는 독립의 아버지 압둘라 알 살림 알 사바흐로부터 현 국왕인 사바흐 알 사바흐로 이어지고 있다.



의회제도를 정착시킨 독립의 아버지, 압둘라 알 살림 알 사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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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독립 군주, 압둘라 알 살림 알 사바흐



제11대 통치자였던 압둘라 알 살림 알 사바흐(Abdullah Al-Salim Al-Sabah, 재위 1950~1965년)는 영국과의 보호령 조약을 종식시키고 독립 후 첫 군주가 되었다. 또한 입헌군주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여 현대 쿠웨이트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50년 왕위에 오른 직후 쿠웨이트는 본격적인 석유 수출이 이뤄지면서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막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52년에 쿠웨이트 최초의 은행이 설립되었고 항만, 고등학교, 병원, 담수 처리 플랜트 등 근대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쿠웨이트는 세계적 수준의 복지국가로 거듭났다.

압둘라 알 살림은 1961년 6월 19일 과거 영국과 맺었던 보호령 조약을 폐기하고 쿠웨이트를 독립시켰다. 독립 직후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의회제도 수용에서도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의 정치적 리더십과 혜안 덕분에 쿠웨이트는 아랍 국가 중 비교적 일찍 성공적으로 의회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다. 그는 1961년 쿠웨이트 헌법 도입을 주도했고, 1963년에는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제도를 정착시켰다.



사담 후세인의 침공과 자비르 알 아흐마드 알 사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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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르 알 아흐마드 알 사바흐



흔히 자비르 3세라고 부르는 제13대 통치자 자비르 알 아흐마드 알 사바흐(Jabir Al-Ahmad Al-Sabah, 재위 1977~2006년)는 독립 이후 쿠웨이트의 세 번째 국왕이 되었다. 그는 제10대 통치자로서 ‘자비르 가계’에 속한 아흐마드 알 자비르 알 사바흐의 셋째 아들로 1926년에 출생했다. 그는 재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 1966년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1977년에 국왕으로 즉위했다.

자비르 알 아흐마드의 재임 기간 동안 중동 지역은 커다란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그로 인해 쿠웨이트는 이란, 이라크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심각한 안보 위협에 시달렸다.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성공하자 자비르 알 아흐마드는 이란의 혁명 사상이 쿠웨이트로 확산될 것을 염려했다. 때마침 이란과 이라크는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전쟁을 벌였고, 이때 자비르 알 아흐마드는 미국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이라크를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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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당시 쿠웨이트의 파괴된 정유소 상공을 날고 있는 미공군 전투기.



1990년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외교적 마찰을 겪기 시작했다. 이란-이라크전 기간(1980~1988년) 동안 이라크는 전비 마련을 위해 주변 아랍 국가로부터 막대한 외채를 빌렸다. 당시 쿠웨이트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에 약 650억 달러 규모의 외채를 빌려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이라크는 아랍 형제국에게 외채 탕감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외채 탕감을 약속했으나 쿠웨이트는 이를 거부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라크는 아랍 산유국에게 석유 생산 감축을 통해 유가를 올릴 것을 제안했으나, 쿠웨이트는 이 요구마저 묵살하고 오히려 석유 생산을 40% 증산했다.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국경 지대에 위치한 루마일라 유전에서 은밀히 석유를 굴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이 주도한 이라크 군대는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이후 약 7개월 동안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비르 알 아흐마드 국왕을 비롯한 쿠웨이트 왕가 일원과 정부 주요 인사는 사담 후세인을 피해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한 뒤 그곳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이 주도한 34개국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본부를 설치하고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군사 작전을 펼쳐 1991년 2월 28일 사태를 종결시켰다.

1990년 이라크의 침공은 쿠웨이트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이라크 군대는 퇴각 직전 쿠웨이트의 유정 600개에 불을 질렀고, 1,100만 배럴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석유가 걸프해로 유출되어 심각한 환경 재앙을 초래했다. 쿠웨이트는 유정의 화재를 진압하고 석유 생산을 재개하는 데 꼬박 2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또한 쿠웨이트는 다국적군의 군사 작전을 위해 170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했다.



조심스러운 개혁주의자 사바흐 알 사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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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국왕 사바흐 알 사바흐



현 국왕인 사바흐 알 사바흐(Sabah Al-Sabah, 2006년~현재)는 쿠웨이트의 제15대 통치자이자 독립 후 다섯 번째 군주로 사바흐 4세라고도 불린다. 현재 그는 쿠웨이트군 사령관직도 겸하고 있다. 사바흐 알 사바흐 국왕은 자비르 가계에 속하며, 제10대 통치자 아흐마드 알 자비르 알 사바흐의 넷째 아들로 1929년 6월 16일에 출생했다.

사바흐 알 사바흐 국왕은 1963년부터 2003년까지 약 40년 동안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당시 그는 세계 최장수 외무장관 중 한 명이었다. 2003년 7월 총리에 임명되었고, 2006년 1월 29일 국왕으로 공식 취임했다.

사바흐 알 사바흐 국왕은 친서방적인 외교정책과 조심스러운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2005년 5월 쿠웨이트 의회는 여성의 투표권과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5년 6월 사바흐 알 사바흐 국왕은 맛수마 알 무바라크를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임명하여 쿠웨이트 최초의 여성 장관을 탄생시켰다. 2009년 5월에는 쿠웨이트 역사상 최초로 4명의 여성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9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여성이 남편의 동의 없이도 독자적으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국가 소개




• 건국: 1756년

• 독립: 1961년

• 공식국명: 쿠웨이트국(國)(State of Kuwait)

• 국왕: 사바흐 알 사바흐(Sabah Al-Sabah, 2006년 즉위)

• 왕세제: 나와프 알 사바흐(Nawaf Al-Sabah, 2006년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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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의 지도 ⓒ김정명



쿠웨이트는 아라비아 반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약 400만 명(2014년 기준)의 국가로서 입헌군주정을 유지하고 있다. 쿠웨이트의 영토는 17,818㎢로 우리나라 경상북도와 크기가 비슷하며, 대부분은 황량한 사막 지대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아랍어다. 1970년대 석유 붐 이후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증가하여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은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출신이다.

쿠웨이트는 1756년 무렵 건국되었고, 1899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61년에 독립했다. 1930년대까지 쿠웨이트는 다른 걸프 아랍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방목과 진주 채취가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 처음 원유가 발견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산업이 본격화되면서 쿠웨이트는 고도성장과 함께 급작스러운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현재 쿠웨이트의 석유 매장량은 약 1,040억 배럴로 세계 전체 매장량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약 700억 배럴은 세계 최대 유전 가운데 하나인 부르간 유전에 집중되어 있다. 석유는 쿠웨이트 수출의 약 95%, 재정 수입의 약 90%, 국내총생산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쿠웨이트는 1963년 첫 선거가 치러진 이후 현재까지 의회제도가 잘 유지되고 있다. 왕권으로부터 독립성이 취약하고 서구에 비해 의회의 권한이 제한되어 있지만, 걸프 아랍 왕정 국가 중에서는 가장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쿠웨이트에서는 총리를 비롯하여 행정부의 주요 장관직을 왕가인 사바흐 가문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의회는 내각 장관에 대한 질의권과 해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왕가와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 현재 쿠웨이트의 국회는 6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며, 이 가운데 50명은 투표로 선출하는 임기 4년의 선출직 국회의원이고, 나머지 15명은 내각 장관이 겸직하는 당연직 국회의원이다. 여성에게는 2005년부터 투표권이 허용되었고, 2009년에는 쿠웨이트 최초로 여성 국회의원이 4명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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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대학교(Muhammad V University)에서 이슬람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중동전문 비즈니스 사이트인 메나르(www.menar.co.k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현대 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쿠웨이트의 형성과 발전>, <카타르의 형성과 발전>, <오만의 형성과 발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과 발전>, <바레인의 형성과 발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랍인의 역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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