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베르타 폰 주트너 -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1회 작성일 16-02-06 16:30

본문















14547438211255.png






이미지 목록




14547438219793



1903년(60세) 때의 모습






14547438226126







장군의 집안에서 태어나 국제 평화운동의 기수로







이미지 목록




14547438234549



1865년(22세) 때의 모습






14547438246151



주트너의 생가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퀴리 부인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이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6.9.〜1914.6.21.)이다. 주트너는 퀴리 부인이 노벨과학상을 수상한지 2년 후인 1905년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세기말 20세기 초반 유럽 평화운동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주트너는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서 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킨스키(Franz Joseph Kinsky) 백작은 장군이었다. 킨스키 집안은 30년전쟁(1618~1648) 당시부터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전형적인 무인귀족 집안이었는데, 주트너의 아버지 4형제도 모두 장군이었다. 장군의 집안에서 자란 딸이 국제 평화운동의 기수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곱 살 연하의 배우자와 비밀 결혼







14547438252377




아르투어 주트너 (조지아에서 돌아오던 무렵)



성장기 이후 가세가 기울자 주트너는 서른 살이 되던 1873년 빈의 부유한 사업가였던 주트너 남작 집안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집안의 일곱 살 연하 막내아들 아르투어 군다카르 폰 주트너(Arthur Gundaccar von Suttner, 1850~1902)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아르투어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주트너를 해고하는데, 그 대신 당시 파리에 머물던 노벨의 개인비서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하지만 노벨은 얼마 후 스웨덴 왕의 부름을 받아 귀국했고, 주트너는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 그 직후 1876년 6월 12일에 주트너와 아르투어는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자 아르투어 집안에서는 그의 유산 상속권을 박탈했다. 무일푼의 여성과 결혼한 아들을 사실상 호적에서 지운 것이다.

1876년 주트너 부부는 흑해 동쪽에 있는 조지아 왕국으로 건너가서 8년 동안 그곳에 체류한다. 이곳에서 주트너는 언어교사와 번역, 에세이와 대중소설 집필 등의 일을 했고, 원래 공학도였던 남편은 건축설계 등의 일로 생계를 꾸렸다. 1877년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주트너 부부는 빈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 전황 보도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미지 목록




14547438258577



1873년(30세) 때의 모습






14547438267207



조지아에 거주하던 집에서






반전소설 『무기를 내려놓자!』







14547438273551




<무기를 내려놓자!>표지



1885년 다시 빈으로 돌아온 주트너는 46세가 되던 1889년 반전소설 『무기를 내려놓자!』(Die Waffen nieder!)를 발표하면서 평화운동가로 변모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 자체가 조국에 대한 배반으로 여겨졌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은 오스트리아에서는 당국의 검열 통제로 출판되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독일 드레스덴의 무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무기를 내려놓자!』는 19세기 중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루된 네 차례의 전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은 여성 주인공 마르타(Martha)가 전쟁으로 인해 겪는 가족사의 비극을 회고록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고위귀족 집안 출신인 마르타는 1859년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침공했던 전쟁에서 장교로 참전한 첫 남편을 잃는다.

두 번째 남편은 1859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영유권 분쟁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ㆍ프로이센 연합군과 덴마크 사이에 벌어진 전쟁, 그리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1870년경 가족과 함께 파리에 체류하던 마르타는 결국 독불전쟁의 와중에 남편이 독일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 소설은 전쟁이 어떻게 한 여성의 삶을 잔혹하게 짓밟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아내이자 주부인 한 여성이 전쟁의 참상을 직시하고 평화의 소명에 눈뜨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톨스토이와 노벨의 격려







14547438282018




톨스토이는 주트너와 서신교환을 하며 그녀의 활동을 지지했다.



이 소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주트너 생시에 12개 국어로 번역되고 독일어권에서만 20만 부 이상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주트너는 유럽 바깥에까지 이름을 알렸고, 세계의 평화애호가들 사이에 ‘평화의 주트너’라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나중에 주트너와 서신교환을 하는 사이로 교분을 맺었던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엉클 톰스 캐빈』이 흑인해방운동에 끼친 영향에 견주었다. 또 훗날 주트너와 긴밀한 친분을 맺었던 노벨은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무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전쟁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아마존의 필치”라고 이 소설이 표방하는 평화주의에 깊이 공감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였던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는 주트너의 동의를 얻어서 이 소설을 1892년 8월~11월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Vorwärts)에 연재하였다.




국제 평화운동에 투신하다



주트너는 소설의 성공과 더불어 본격적인 평화운동에 투신한다. 1891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평화운동단체인 평화애호가협회 창립을 주도하여 창립 당시부터 1914년 서거할 때까지 의장직을 맡았다. 또 같은 해에 국제평화국(International Peace Bureau)이 주관한 로마 평화회의에서 국제평화국 부의장에 추대되었고, 이듬해에는 독일평화협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892년 베른, 1894년 앤트워프, 1897년 함부르크, 1899년 헤이그, 1904년 보스턴 세계평화회의,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와 뮌헨 평화회의 등에 참석하면서 주트너는 국제사법재판소 설치 등 국제평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4547438294739




1907년 뮌헨 세계평화회의 참석자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주트너)






반유대주의에 맞서 시민운동을 조직하다







14547438302184




1920년 오스트리아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독사회당의 반유대주의 포스터. 유대인을 상징하는 뱀이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독수리를 칭칭 감아 질식시키는 그림 아래에 “오스트리아를 구하라!”라는 선전 문구를 넣었다. 당시 빈은 반유대주의의 온상이었고, 히틀러도 빈에서 대학을 다녔다.



또한 19세기 말 반(反)유대주의가 발호하기 시작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주트너는 부군과 함께 반유대주의에 맞서는 시민운동에도 주력하였다. 1880년대에 러시아에서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가 벌어지자 이를 견디다 못한 빈곤층 유대인들이 대거 오스트리아로 흘러들어왔고, 이를 기화로 오스트리아에서는 반유대주의 선풍이 불어 닥쳤다.

이에 주트너는 1891년에 부군과 함께 “대외적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적인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라는 소신을 갖고 반유대주의 퇴치협회를 결성했다. 시 반유대주의를 주도했던 인물은 1893년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을 창당했던 정치인 뤼거(Karl Lueger, 1844~1910)였다.

그는 훗날 히틀러의 선구자라 불릴 만큼 반유대주의자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1895년 빈 시장 선거에서 뤼거가 당선되자 주트너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승리’라고 개탄했다. 주트너는 유대인 박해가 중세로의 퇴행과 다름없는 야만이며, 반유대주의에 침묵하면 결국 공범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여성운동과 양성 평등의 평화운동







14547438310560




강연을 하는 주트너



주트너는 오스트리아 여성운동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1904년 베를린 세계여성대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했고, 참가자들이 베를린 필하모니 앞에서 시위를 하는 폐막식에서도 가두연설을 했다. 그녀는 여성의 깨우침을 남성들이 싫어하는 것은 마치 “하층민의 깨우침을 상류층이 싫어하고 이성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성직자들이 일반 대중의 계몽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주트너의 평화주의는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주트너는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여성을 타고난 평화주의자라고 여기는 특권적 선민의식에는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면 평화의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없다. 전쟁 무용담과 전쟁영웅에 대한 열광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서 발견되며, 평화운동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는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사고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과 타성에 안주하는 몰이해 역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똑같이 발견된다. (…) 평화운동을 여성들 고유의 몫으로 간주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남성에 맞서 대립해서는 여성들 역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인류를 순화시키는 진보의 과제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감하고 대등한 자격으로 협력할 때만 성취될 수 있다.”




대중정서를 고려한 유연한 평화운동







14547438319029




오스트리아의 2유로 주화에 새겨진 주트너의 초상



이처럼 주트너의 평화주의는 계급과 민족, 남녀를 불문하고 일체의 배타적 차별의식을 넘어서려는 보편인간적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이념적 순수성만 추구하고 대중적 정서를 외면하는 보편주의와는 무관하다. 가령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주트너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녀가 평화의 수단으로 추구하는 평화단체나 평화회의, 국제사법재판소 등으로는 전쟁의 근절이 불가능하며, 시민들이 병역의무 자체를 거부하고 참된 사랑의 신앙을 회복할 때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병역거부가 엄중히 처벌받던 당시 오스트리아 상황에서 주트너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그런 희생을 감내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고 했다.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없으며 “전쟁 유발의 동기는 수백 가지이고 따라서 전쟁반대의 동기도 수백 가지가 될 수밖에 없다.”라며 유연한 대처를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트너는 1910년 톨스토이 서거에 즈음하여 “톨스토이는 유럽에서 가장 일관된 신념을 견지한 거의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NGO 활동의 선구자







14547438327348




테오도어 헤르츨



주트너는 오늘날 NGO 활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유럽 열강이 군국주의에 앞장섰던 당시 상황에서 주트너의 평화운동은 당연히 정부 차원의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주트너는 오스트리아 평화애호가협회나 반유대주의 퇴치운동 등에 필요한 재원을 거의 자력으로 조달해야만 했다. 가령 1899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유일한 여성으로 참여하게 된 주트너는 여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 발행하는 시온주의 잡지 <세계>(Die Welt)의 특파원 자격으로 평화회의에 관한 기사를 써서 그 원고료로 여비를 조달했다. 또한 1903년 빈에서 국제의원연맹 회의가 열릴 때는 하루에 신문 25면 분량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1892년에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따서 오스트리아 평화운동 기관지 <무기를 내려놓자!>를 창간했는데, 주트너는 평화운동에 관한 기사와 논설을 직접 집필하여 저널리스트의 직분을 평화운동 활동의 기반으로 삼았다. 외부의 특별한 도움 없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제적인 차원의 평화운동에 매진한다는 것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주트너의 활동방식은 실로 경이롭다.




노벨의 후원 - 노벨평화상 제정에 기여







이미지 목록




14547438338400



노벨과 주트너의 서신교환을 펴낸 책






14547438346420



만년의 모습



하지만 이러한 자구책만으로 평화운동의 물적 기반을 확보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를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노벨과의 만남이었다. 주트너는 1892년 베른 국제평화회의에 노벨을 초대하여 국제평화의 정착에 관해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 노벨을 오스트리아 평화애호가협회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한편, 평화운동을 위한 기금 후원자로 만들었다. 알다시피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의 가공할 무기로 악용되는 사태에 매우 곤혹스러워했고, 그런 이유에서 평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14547438352267




독일 고타에 있는 주트너의 유골함(유언에 따라 화장하였음)(Wiki.org)



주트너에 비해 현실주의자였던 노벨은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정부 차원의 평화운동이 과연 어떤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우호적인 정부들을 상대로 수용가능한 제안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 노벨에게 주트너는 단기간 내에 각국 정부의 태도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지속적인 평화운동이 더욱 절실하다는 점을 꾸준히 설득했다.

이러한 대화의 과정에서 노벨은 주트너의 평화운동에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노벨은 주트너의 요청에 따라 수시로 후원금을 지원했고, 베른 국제평화국에 거액의 기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주트너는 노벨이 막대한 유산을 일가친척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인류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적 기금으로 유증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트너는 마지막까지 노벨에게 호소하여 노벨평화상을 제정하도록 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트너는 1910년 무렵부터는 과거의 전쟁 규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량학살을 유발할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터질 거라고 경고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평화운동에 헌신했던 주트너는 1914년 6월 21일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경고한 대로 1주일 후에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고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지속 가능한 군비 축소를!







14547438360068




브뤼셀 EU 건물에 있는 주트너 기념 현판(Wiki.org)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매년 1000조 달러에 이르는 전세계 군비는 냉전시대의 군비 규모를 오히려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엄청난 군비는 인류를 하루아침에 절멸시킬 수 있는 전쟁의 직접적인 위협이다. 게다가 군비 지출로 인한 막대한 자원 낭비는 다시 지구촌 곳곳에서 절대적 빈곤을 온존시킴으로써 또 다른 갈등과 분쟁의 화근이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평화의 기틀이 되는 기본적 생존권과 인권의 확보를 위해서도 군비축소는 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절박한 과제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평화국은 지난 2005년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지속가능한 군비축소’를 세계평화를 위한 슬로건으로 제창한 바 있다. 한 세기 전에 주트너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국제평화국의 이러한 노력이 과연 얼마나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다만 우리가 역사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깨우친 것은 과거사를 망각할 때 역사적 과오는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주트너가 살던 시대에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이던 유럽 열강들을 향해 그녀는 임박한 전쟁의 위협을 경고하고 평화를 호소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고와 호소는 군국주의의 거센 물결에 파묻혔고, 인류는 역사상 전례 없는 대전쟁의 재앙을 겪었다. 주트너가 살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무장한 군사력이 세계 전역에 배치되어 있는 오늘날 우리가 주트너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 Bertha von Suttner: Die Waffen nieder!, Husum 1990.
  • Brigitte Hamann: Bertha von Suttner. Ein Leben für den Frieden, München 2002.
  • Harald Steefahn: Bertha von Suttner, Hamburg 1998.




14547438366332

임홍배 | 서울대 독문과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단 부단장.
서울대에서 괴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괴테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괴테가 탐사한 근대』(창비 2014), 『기초자료로 본 독일 통일 20년』(공저, 서울대출판부 2011), 『독일 명작의 이해』(공저, 서울대 출판부 2007) 등이 있고, 펴낸 책으로 『황석영 문학의 세계』(창비 2002), 『살아 있는 김수영』(창비 2005), 『김남주 시전집』(창비 2014), 『김남주 문학의 세계』(창비 2014) 등이 있다. 역서로 『젊은 베르터의 고뇌』(창비 2012), 『어느 사랑의 실험』(창비 2011),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민음사 1997), 『루카치 미학』(공역, 미술문화 2002), 『진리와 방법』(공역, 문학동네 2012) 등이 있다.


후원

인문한국지원사업(HK : Humanities Korea),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이 원고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와 네이버가 공동기획했습니다.


출처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발행2015.10.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