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자의 역사지리인식 - 조선후기 역사지리 연구의 배경과 전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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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5회 작성일 16-02-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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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일군의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상고시기 강역과 지리를 연구대상으로 한 전문적인 연구 분야를 발전시켰다. 역사지리학은 역사지리라는 특정 연구 분야를 전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서로 학문적 교류를 가지거나,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가 학문을 전승하고 계승하였다. 또한 사실 규명과 고증을 통해 연구 방법에서의 객관성을 높였다. 특히 과거 역사 속에 등장하는 지명의 현재 지명을 고증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비추어 볼 때 역사지리학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표적인 연구 업적이자,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학문 분과라고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왜 역사지리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1) 국가 강역에 대한 부단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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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이북의 의주에서 압록강 상류의 후주 강구까지를 그린 군사지도. 폐사군 지역도 확인 가능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는 국가 강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임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외적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지리적 여건뿐만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변천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실학자들의 부국강병론이 학문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실학자들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의 지정학적인 여건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강역과 관방 시설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 실학자들은 북관지역에 대한 방비와 군현 복설을 주장하였으며, 산성 축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숙종대 조·청 국경회담 이후에는 북방지역의 역사적 연혁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북방지역에 대한 관방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점에서 조선 정부도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방상의 필요에 의해 작성된 이러한 지도는 국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2)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지리지 수용



조선 후기에는 역사지리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지리서가 중국으로부터 수용되었다. 당시 역사지리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대체로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에서의 역사적 행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의 삼국의 지리 변화에 중점을 두었던 국내 자료의 한계에서 벗어나, 중국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것은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의 재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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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 조선 전기 학자들은 삼국지 등의 중국 정사를 통해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하였다. <출처: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사기』, 『한서』, 『삼국지』 등 중국 정사와 『대명일통지』와 『요동지』를 통해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의 행방을 추정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요동 지역에서의 역사적 행방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요동지역을 조선의 옛 땅으로 비정한 『요사』나, 요동 일대를 고구려의 옛 강역으로 비정한 『대명일통지』의 기사를 재발견하였다. 그러나 청으로부터 『청일통지』, 『성경통지』 등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요동 지역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보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3) 고증적 학문의 수용과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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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삼국사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는 학문연구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관련된 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고증적인 연구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역사지리학에서도 고증적인 연구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근의 『동국사략』, 관부 편찬의 『동국통감』에서 편찬자의 의도를 보여주는 부분은 주로 사론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역사지리를 연구하면서 방법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고증하고 검증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로 인해 역사지리 분야에서는 역사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기반이 있었기에 후일 대청주의(大淸主義) 인식에 기반을 둔 『성경지』나 『만주원류고』의 역사지리 비정에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4) 지식과 정보량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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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 <출처: 실학 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는 각 분야별로 다양한 백과전서류가 편찬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역사과 지리에 대한 내용이 풍부해졌다. 실학자들은 백과전서의 편찬을 통해 문물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선의 특성을 밝히려고 하였다. 중국의 유서류가 도입되어 있었으나 실학자들은 우리의 문화를 계열별로 분류하여 설명하려는 백과전서를 집필하였다. 이는 이 시기 실학의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초기 백과전서인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부터 18세기 관부에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 그리고 19세기 말에 편찬된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유원의 『임하필기』, 윤정기의 『동환록』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내용에서 다양한 백과전서가 편찬되었다. 이들 백과전서류에서는 백과적 지식을 형태별 분류하여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 속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이러한 백과전서류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의 정보량과 정확성이 확대되어 나갔다.



5) 공리적 사고의 확산



사회개혁을 위한 공리적 사고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에서는 사회개혁을 위한 경세론1)이 확대되어 나왔다. 실학자들은 사회개혁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회제도를 연구하고 문제점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현실 파악이 선행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지리서에서도 경관을 문학적으로 자랑하기보다 각 지역의 군사와 관방시설을 수록하는 등 공리적 측면이 크게 강조되었다. 한편 선각적인 실학자들이 개혁방안을 마련하면서 각 지역의 토지와 공물, 경제적 산물, 도로와 장시 등 경제와 관련된 내용에 관심이 증대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사회경제에 대한 점증하는 개혁의식도 역사지리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실학자들의 역사지리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1) 16세기 역사지리학의 등장



한국에서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은 16세기 중반의 한백겸(1552~1615)이라고 할 수 있다. 16~17세기에 한백겸의 연구를 계승하거나 발전시킨 인물로 오운(1540~1617), 홍여하(1620~1674), 유형원(1622~1673), 정극후(1577~1658), 허목(1595~1682), 남구만(1629~1711), 이세구(1646~1700), 이이명(1658~1722), 홍만종(1643~1725)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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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된 허목의 초상화



한백겸은 최초의 역사지리 전문 저작인 『동국지리지』에서 조선 전기의 삼조선-사군-삼한-삼국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서로 달리 발전하였다는 ‘남자남북자북(南自南北自北)’의 이원적인 발전체계를 제시하였다. 특히 삼한의 위치 문제에서 최치원의 마한-고구려설이나 권근의 변한-고구려설을 비판하면서 북방의 고구려와는 별개로 남방에 삼한이 있었으며, 그 경계를 한강 일대로 보았다. 삼한과 후대 국가에 대해서는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설을 제시하였다. 북방과 요동지역은 중국의 정사 자료를 활용하여 내용을 보강하였다. 그는 강역과 관방에 대한 역사와 지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역사지리학의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운은 『동사찬요』의 초기본에서 조선 전기 『동국통감』의 역사지리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한백겸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면서 삼한설의 내용을 듣고서는 오히려 남쪽과 북쪽이 별개의 세계를 구성하여 발전하였다는 주장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점은 『동국통감제강』과 『휘찬여사』를 편찬한 영남 남인 출신의 홍여하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17세기 사략형 사서나 강목체 사서를 편찬한 선구적 인물이며 유교적 포폄사관과 정통관에 입각한 역사서를 편찬하였지만 역사지리적 측면에서는 한백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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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때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된 동국통감. <연합뉴스 제공>



유형원은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사회개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실학의 개조라는 평가를 받는 유형원은 당대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면서 전국지인 『동국여지지』를 편찬하였다. 유형원은 이를 바탕으로 사회개혁서인 『반계수록』를 완성하였다. 『동국여지지』는 현실을 파악하는 자료인 셈이었다. 『동국여지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리지였으나, 역사적 연원을 중시하였던 그는 연혁조에 지역의 역사지리적 내용을 크게 보충하였다. 특히 북방의 고구려와 남방의 백제에 관련된 내용이 자세하였다. 유형원은 한백겸의 삼한설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나라 상고사가 남북이 따로 이원적으로 발전하였음을 인식하였다.

한백겸 이후 역사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상호 계승되는 측면이 있었다. 유형원의 연구 성과도 『여지지』라는 이름으로 18세기 실학자인 안정복의 『동사강목』 「지리고」나 신경준의 『강계고』·『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 계승되었다.



2) 18세기 역사지리학의 만개



18세기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학자는 매우 다양하다. 임상덕(1683~1719), 이익(1681~1763), 유광익(1713~1780), 이돈중(18세기 초), 신경준(1712~1781), 안정복(1712~1791), 윤동규(1712~1791), 이만운(1723~1797), 홍양호(1724~1803), 위백규(1727~1798), 이종휘(1731~1797), 이덕무( 1741~1793), 유득공(1749~1807), 이긍익(1736~1806),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1805) 등이 주목된다. 이들은 대부분 후대에 실학자로 평가되는 인물들이었다.

18세기에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 통로가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비주류 세력이 관직에 진출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특정한 전문 분야를 일생 동안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 집단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하였으며, 특히 이익, 신경준, 안정복 등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지리 연구는 연구 내용이나 방법이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정교하였다. 강재항(1689~1756)의 『동사평증(東史評證)』에서 보이듯이 18세기 주자학의 심화와 함께 등장하여 도덕적 평가를 주로 진행하였던 사론(史論) 형식의 역사학 분야에서도 역사지리 연구의 영향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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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천하도가 담겨진 목판본 지도첩. 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경준은 한백겸과 유형원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지리학의 토대 위에 역사지리 연구를 심화시키면서 당시까지의 연구를 총정리하였으며, 그의 연구는 『강계고』에 집약되었다. 그의 역사지리 연구는 영조대 만들어진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은 유형원의 글을 보면서 역사지리 연구를 심화시켰으며, 『동사강목』 「지리고」를 집필할 때 유형원의 글에서 시사 받은 바가 크다. 안정복의 역사지리 연구는 내용상 당대에 나온 역사서 가운데 정확성과 정밀성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다. 안정복의 연구는 『동국문헌비고』를 계승하여 이만운이 편찬하였던 『증정문헌비고』 「여지고」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종휘의 생각은 당시 학자들과 비교해 특별하였다. 이종휘는 상고기 영역을 일반적인 학계 동향에 비해 파격적으로 넓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군을 본기로 설정함으로써 우리 상고사의 기원을 더욱 확장시켰다. 고유한 우리 문화와 신교(神敎)에 대한 이종휘의 생각은 개화기 지식인과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8세기 학자들은 압록강 북쪽에까지 우리나라 상고기 소국가들이 활동하였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요사』나 『금사』와 같은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북학파 계열의 인물들은 중국으로의 연행 경험으로 인해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대사의 중심 무대를 요동이나 영고탑 일원으로 비정하였다. 18세기의 역사지리 연구자들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의 흐름을 명확히 인지하여 상고기 서술은 대부분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영역을 아예 요동 일원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역사지리적 인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지도류에서도 기자나 한사군의 일부를 압록강 이북에 비정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는 국내의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서학의 지리서들이 들어오면서 관심 영역과 연구 대상이 국외까지 확대되었다. 이돈중의 『동문광고』, 위백규의 『환영지』, 서명응의 『위사』 등에서 보듯이 요동을 포함하여 서역제국, 일본, 대만, 류큐(琉球), 북아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 대상을 넓혔다.



3) 19세기 역사지리학의 재편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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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를 축소한 것으로 보이는 목판본 조선전도. 그 내용은 폐사군, 낭림산, 백두산, 정계비문, 함경도, 묘향산, 금강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전반을 이끌어 나간 학자들은 성해응(1760~1839), 정약용(1762~1836), 한치윤(1765~1814), 한진서(19세기 초), 홍석주(1774~1842), 홍경모(1774~1851), 이원익(1792~1854)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연구 가운데 실학자의 연구로 주목되는 인물은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의 탁월성은 이전 시기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이전 시기 연구와는 달리 상고사의 중심 무대를 한반도 이내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이는 조선 강토의 범위와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반해 성해응을 비롯하여 홍경모나 이원익과 같은 이들이 18세기의 안정복이나 이만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고증적으로 보완해 나가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었다. 성해응과 홍경모 등은 비록 전문 저술 형태는 아니었으나 역사지리에 대한 많은 논설을 제시하였다. 북방 지역에 대한 행정적 관심은 폐사군복구론(廢四郡復舊論)으로, 요동지역과 두만강 북쪽 지역에 대한 아쉬움은 요동수복론(遼東收復論)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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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에 유배온 뒤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四宜齋). 이곳은 다산학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연합뉴스 제공>



다산과 다산 제자로 이어지는 다산학단(茶山學團)의 역사지리인식은 이들과는 달리 우리의 역사적 정통과 민족적 순수성의 발견에 주목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단군, 기자, 사군의 중심 위치를 한반도에 비정하였다. 그리고 예맥과 발해를 우리 역사에 수용하기를 주저하였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선 확보가 역사상이나 국방상에 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다산학단의 역사지리 연구는 전통시대 학문의 고증적인 연구 수준에서 나온 것이지만 전문적 연구, 실증과 고증의 활용, 학문적 독립성과 객관성의 추구 등은 학문의 독립성 확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내용면에서 보인 강토에 대한 관심, 주체적 자국의식, 한강 이남에 대한 지역의식 등은 근대 역사학 분야에서도 역시 중시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는 비록 근대적인 서구의 역사지리학과는 달랐다고 하나,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학문적,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연구 성과로 정학연(丁學淵)의 『유산필기(酉山筆記)』, 이강회(李綱會)의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著)』, 이청(李晴)의 『정관편(井觀編)』, 윤정기(尹廷琦)의 『동환록(東寰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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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 <실학박물관 제공>



한편 자료들을 별다른 사료비판 없이 인용하였던 이전의 연구와는 달리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그 신빙성을 고증하려는 연구 경향이 증대되었다. 『요사』, 『성경지』, 『대청일통지』 등의 자료는 『사기』, 『한서』 등 정사 자료와 비교하여 이들 자료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그에 근간하고 있었던 이전 시기의 연구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극복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신경준의 연구였다. 이 시기 역사지리학은 신경준의 연구성과를 고증적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역사지리학자들은 실학의 훈도를 받은 마지막 세대들이라고 할 수있다. 이들 가운데 전통적인 역사지리 연구 경향을 계승하였던 학자로 김정호(1800?~?), 박주종(1813~1887), 윤정기(1814~1879) 등을 들 수 있다.

김정호는 전국지로 편찬된 지리서인 『대동지지』에서 18세기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까지 수렴하고 있다. 박주종은 사찬 백과사전인 『동국통지』에서 이익과 이종휘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도회(都會)와 같은 문화권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윤정기는 역사지리 백과사전인 『동환록(東寰錄)』에서 정약용의 지리고증을 조술하면서 이전의 연구성과를 사전식으로 편집하고 있다. 이는 실학파 지식인들의 사상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조선 후기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실학자들은 자신의 사회개혁과 부국강병의식을 역사지리 연구에 투영하면서 대체로 조선 전기 관부 학자들에 비해 국가의 계승과 수도의 변천, 종족의 행방과 지명의 변동, 지역의 산물과 관방시설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영역관에 있어서도 조선 전기에 비해 북쪽으로 올려보거나 요동 쪽으로 비정하였다. 실학자들은 확장된 강역의식을 통해 과거의 우리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실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러한 역사연구와 지리고증은 양반 사대부들의 잡기로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자료의 수집이나 해석이 풍부해지고, 고증적인 연구 방법을 도입하면서 엄밀한 사료 비판이 이루어져 실학자들은 이전과 다른 연구 결과를 산출하였다. 조선 후기의 역사지리학은 이러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연구 성과를 통해 17~19세기 조선에서 하나의 전문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고문헌

  • 박인호,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이회문화사, 1996.
  • 박인호, 『한국사학사대요』, 이회문화사, 1996.
  • 박인호, 「조선시기 역사지리학의 추이와 특성」, 『조선사연구』 7, 조선사연구회, 1998.
  • 박인호, 『조선 후기 역사가와 역사지리인식』, 이회문화사, 2003.
경세론(經世論)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대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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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 금오공과대학교 교수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라는 제하에 문헌비고 여지고의 편찬 과정과 수록 내용을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금오공과대학교 교양교직과정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사와 사학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학사대요』,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조선시기 역사가와 역사지리인식』, 『제천관련 고문헌 해제집』, 『제천지역사연구』, 『칠곡 귀암 이원정 종가』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0.15.



주석


1경세론(經世論)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대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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