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칼리파 왕가 - 수니-시아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바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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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9회 작성일 16-02-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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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Khalifa) 가문은 바레인을 지배하고 있는 왕가이다. 칼리파 왕가는 18세기 말부터 ‘하킴’이란 칭호를 사용하다가 197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아미르’로 바꾸었으며, 2002년에는 다시 ‘말리크’로 바꾸었다. 칼리파 왕가는 형식상 입헌군주제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상원 의원과 내각 장관을 임명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군주제에 가깝다. 특히 왕가의 혈족들이 총리, 제1부총리, 일반부총리 등을 비롯한 내각 장관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바레인의 공식 종교는 이슬람이며, 칼리파 왕가는 수니파에 속한다. 하지만 바레인의 무슬림 인구 가운데 약 70%는 시아파가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바레인은 소수에 속하는 수니파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를 다스리고 있는 형국이며, 이로 인해 종교 및 정치적 갈등이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칼리파 왕가에 대한 평가도 수니파냐 시아파냐에 따라 나누어진다. 특히 지난 2011년 2월 바레인에서는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을 휩쓴 아랍의 봄 영향으로 시아파 주도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그 영향으로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이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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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 왕가는 수니파에 속하지만, 바레인 국민의 70퍼센트는 시아파이다.






장자 왕위계승 제도가 정착된 걸프 지역 유일의 왕정 국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는 칼리파 왕가는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장자의 왕위 계승은 일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등 인근 걸프 아랍 왕정 국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2005년 파흐드 국왕의 서거로 압둘라 국왕이 등극한 이후 최대 파벌인 수다이리파 형제와 비(非)수다이리파 형제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쿠웨이트 역시 차기 왕위를 선정할 때마다 자비르 가계와 살림 가계가 경쟁을 벌인다. 오만의 경우 1970년 술탄 카부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으며, 카타르 역시 1995년 하마드 빈 칼리파는 부친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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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보호령 시기 왕위에 오른 이사 빈 알리



바레인의 칼리파 왕가 역시 정복왕 아흐마드가 1783년 바레인을 건국한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장자 왕위계승의 원칙이 없었다. 그로 인해 왕위를 둘러싼 후계자 간의 내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흐마드 빈 무함마드가 사망한 1796년부터 약 70여 년간 그의 아들과 손자 세대는 바레인의 공동 통치자로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고, 결국 가족 간에 정치적 암투가 벌어지는 혼란기를 겪어야만 했다.

바레인은 1861년 영국과 ‘영구평화 우호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은 바레인이 왕위를 놓고 극심한 내분을 겪게 되자 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 일환으로 당시 21살의 청년이었던 이사 빈 알리(재위 1869~1932년)를 왕위에 앉혔다.

1869년 이사 빈 알리가 왕위에 오른 후부터 1999년 현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4회 연속 장자 왕위계승의 원칙이 지켜졌고, 그 덕분에 차기 왕위 선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2002년 제정된 개정 헌법은 국왕이 생전에 별도로 장자 외에 다른 아들을 계승자로 지명하지 않는 한 왕위는 장자에게 대대로 계승된다는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칼리파 왕가의 성립과 역사



바레인은 1783년 무렵 아흐마드 빈 무함마드 빈 칼리파(1783~1796 재위)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는 바레인의 건국자로서 흔히 ‘정복왕 아흐마드’라고도 불린다. 그가 속한 칼리파 가문은 원래 아라비아 반도 중앙에 위치한 나즈드 지역에서 이주한 우툽 부족의 일원이다. 우툽 부족은 사우드 가문을 포함한 거대한 부족 연맹체인 아나이자 부족연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말 우툽 부족은 극심한 기근을 피해 아라비아 반도 중앙에서 동부 해안 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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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의 국기와 국장




18세기 이후 우툽 부족에 속한 칼리파 가문은 카타르 반도 서부해안 지역인 주바라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카타르를 기반으로 점차 바레인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바레인은 1602년부터 150년 동안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오만으로 지배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1783년 카타르에서 기반을 다진 정복왕 아흐마드 빈 무함마드는 바레인을 침공하여 오만의 총독 나스르 알 마드쿠르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칼리파 가문은 오늘날까지 바레인의 통치 왕가로 군림하고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바레인의 칼리파 왕가는 왕위 계승 원칙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로 인해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1869년 즉위한 이사 빈 알리는 장자가 부친의 왕권을 계승한다는 장자 상속 제도를 정착시킴으로써 왕가 내부의 다툼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1868년, 1880년, 1892년 잇따라 영국과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바레인의 통치자는 영국을 제외한 어떤 국가에게도 자신의 영토를 양도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 정부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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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은 1932년 석유를 발견한 이후 급격히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근대화를 이끈 인물은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이다.



그 대가로 영국은 바레인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칼리파 가문의 통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의 보호령 기간(1861~1971년) 동안 바레인은 외교권을 영국에게 양도하는 대신 이란,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고 칼리파 가문의 통치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Khalifa, 1932~1942년 재위)가 통치했던 1930년대부터 바레인은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즉위했던 해인 1932년에 바레인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다. 또한 1932년에 전화가 처음 도입되었고, 1936년에는 최초의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1937년에는 최초의 영화관이, 그리고 1940년에는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문을 열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영국은 중동과 아시아 지역을 식민 통치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1968년 영국은 1971년까지 걸프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당시 바레인의 통치자였던 이사 빈 살만(재위 1961~1999년)은 1971년 8월 14일 바레인의 독립을 선언했다.




F1 자동차 경주대회를 둘러싼 왕가와 시아 반정부 세력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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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모터스포츠 중심지인 바레인은 2004년 F1 경기 유치에 성공했다. Faris Algosaibi/flickr



바레인의 칼리파 왕가는 1869년 이사 빈 알리가 왕위에 오른 후부터 장자 왕위계승제가 정착됨으로써 왕족 간의 내부 결속은 비교적 안정된 편이다. 하지만 왕가에 대한 위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칼리파 왕가가 속한 소수의 수니파가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시아파를 다스리고 있다는 점은, 권력 배분과 인구 구조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어 왕가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최대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왕가와 시아파 중심의 반정부 세력 사이에 갈등이 커져 갔으며, 최근에는 F1 자동차 경주대회를 둘러싸고 양 세력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중동의 모터스포츠 중심지 바레인은 2004년 아랍 국가 가운데서 최초로 꿈의 자동차 경주대회라고 불리는 포뮬러원(F1) 대회를 개최한 이래 드래그 경주, GT 경주, 포뮬러 3 경주, 호주 V8 슈퍼카 경주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2011년 2월 이후 시아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가들은 F1 자동차 경주대회 개최를 적극 반대하며 나서고 있다. 2011년 당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치안 불안 문제로 바레인 그랑프리 대회가 취소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2012년 그랑프리 대회는 바레인 정부가 취한 삼엄한 경계 하에 개최가 강행되었으나, 반정부 시위대는 대회 개최를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014년 1월에는 바레인 인권센터와 바레인 인권청년협회 등과 같은 인권단체가 국제자동차연맹(FIA) 회장인 장 토드에게 자동차 경주대회가 바레인 인권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조사가 끝날 때까지 대회 개최를 연기해줄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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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경주대회에 반대하는 시위자들



이들이 F1 경주대회 개최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 대회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라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는 칼리파 왕가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아파 시위자들은 현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가 1990년대부터 시작된 반정부 운동으로 실추된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고 국민들의 관심사를 스포츠로 돌리기 위해 F1 경기대회를 유치하는 정책을 구상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반정부 시위대에게 있어서 F1 경기 개최는 바레인의 어두운 현실을 감추려는 계략에 불과한 것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따라서 개최 무산을 통해 현 사태의 심각성을 바깥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바레인의 주요 군주





이사 빈 살만과 수니파‧시아파 갈등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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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빈 살만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Isa Bin Salman Al-Khalifa, 재위 1961~1999년)는 1971년 영국과 보호령 조약을 종식시킴으로써 바레인 독립의 아버지가 되었다. 1933년 6월 4일 선왕 살만 빈 하마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57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971년 8월 14일 독립을 선언한 후 그는 자신의 호칭을 ‘통치자’라는 의미의 ‘하킴’에서 ‘토후’를 뜻하는 ‘아미르’로 바꾸었다. 이사 빈 살만은 취임 후 국정 운영을 이원화하여 자신은 군주로서 외교 부문을 담당했고, 자신의 동생인 칼리파 빈 살만 알 칼리파를 총리로 임명한 후 그에게 내치와 경제 운영을 맡겼다.

이사 빈 살만은 1971년부터 적극적인 친미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과거 바레인이 영국과 보호령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가의 주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1971년부터 과거 영국이 사용했던 육군 및 해군 기지 사용권을 미국에게 양도하였다. 현재까지도 바레인은 미해군 중부사령부와 5함대 기지가 위치해 있는 미국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1991년 바레인은 미국과 공동 군사훈련 실시 및 미국의 바레인 항만시설 이용을 골자로 하는 방위협력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립과 함께 이사 빈 살만은 의욕적으로 의회 민주주의 도입을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1972년 6월 20일 제헌의회 선거에 관한 왕령을 발표했고, 같은 해 12월 1일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3년에는 헌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사 빈 살만은 1974년부터 의회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의회 해산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막을 내렸다. 문제의 발단은 1970년대 초에 좌파 노동자들이 파업을 주도하고 사회 불안을 조장하자, 이에 대한 조치로 이사 빈 살만이 1974년에 국가보안법을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의회는 국왕의 국가보안법 제안을 강하게 거부했고, 이에 맞서 이사 빈 살만은 1975년 8월 26일 의회를 해산시키고 국가보안법 도입을 강행했다.

이때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이사 빈 살만은 국회의원 선거를 단 한번도 실시하지 않고 오직 국가보안법에만 의존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에 대해 바레인의 야권 세력은 헌법 회복, 의회선거 복원,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칼리파 왕가가 주도하고 있는 정부에 맞서기 시작했다. 바레인의 반정부 시위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가 주도하게 됨으로써 외면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적 갈등으로 표면화되어 갔다.

이사 빈 살만의 재위 기간 동안 시아파 주도의 반정부 시위는 1994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바레인에서는 1994년 12월~2001년 2월 14일 기간 동안 시아파를 중심으로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이 합세하여 벌인 반정부 운동을 흔히 ‘인티파다’라고 부른다. 1990년대 인티파다 기간 동안에 약 4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마드 빈 이사와 수니파‧시아파 갈등의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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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국왕 하마드 빈 이사



1990년대 불거진 정치적 갈등은 이사 빈 살람의 아들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Khalifa)가 즉위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워지는 듯했다. 하마드 빈 이사는 부친이자 선왕인 이사 빈 살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1999년 3월 6일 왕위에 올랐다. 1950년 태생으로 1964년 14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968년 영국 햄프셔 올더숏 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73년 미국 캔자스 주에 위치한 포트 레번워스 육군 대학을 졸업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지난 2002년 그는 바레인 군주의 호칭을 ‘토후’를 의미하는 ‘아미르’에서 ‘왕’을 뜻하는 ‘말리크’로 바꾸었다.

왕위에 즉위한 직후 하마드 빈 이사는 1990년대 고조된 시아파 반정부 운동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정치범 전원을 석방하고, 외국으로 망명을 떠난 반정부 인사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1974년 강제로 도입된 국가보안법을 폐지했다. 2002년에는 개정 헌법을 발표하여 바레인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고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는 양원제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2002년 10월 24일에는 1973년 이래 29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이후 바레인은 2006년, 2010년, 2014년 연속 매 4년마다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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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반정부 시위 모습



그러나 이 같은 하마드 빈 이사의 정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시아파를 중심으로 한 야권 세력은 칼리파 왕가가 내무부, 법무부, 재무부 등 주요 내각 장관직을 독차지하고 있어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아파 시민은 주택 보급, 취업의 기회, 권력 배분 등에서 차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바레인의 최대 반정부 야권 정치 세력은 2001년 결성된 시아파 성향의 정치 단체인 ‘알 위파크 민족 이슬람협회’이다. 위파크는 40명 정원의 선출직 하원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2006년 총선에서 18명을 출마시켜 17석을 확보했고, 2010년 총선에서는 18명을 출마시켜 전원을 당선시키는 저력을 과시했다.

지난 2011년 2월 바레인에서는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을 휩쓴 아랍의 봄 영향으로 시아파 주도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다시 발생하여 하마드 빈 이사 국왕은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시아파 시민들은 2월 14일부터 ‘경제적 어려움 해결’, ‘정치적 자유 허용’, ‘실업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수주일 동안 수도 마나마의 중심지를 장악하자, 하마드 빈 이사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에 시위 진압을 위한 군 파병을 요청했다. 3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걸프협력기구(GCC)의 공동군인 반도방패군의 이름으로 각각 1,000명과 5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 다음날인 3월 15일 하마드 빈 이사 국왕은 바레인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11년 2~5월 기간 동안 시위대와 정부군 간의 충돌은 바레인 사회에 씻을 수 없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바레인 정부가 지원하는 독립조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2011년 2월 14일부터 4월 15일까지 35명이 사망했으며, 그 가운데 19명은 경찰 병력에 의해 직접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위 기간 동안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인권 운동가, 의사, 블로거, 정치인들을 포함하며 1,600명에 달했다. 구속된 시민들은 고문 또는 여러 형태의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5월 31일 하마드 빈 이사 국왕은 현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민 대화를 제안했으며, 6월 1일에는 비상사태가 종료되었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2015년 현재까지도 소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정부는 시위 주모자를 구속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양 진영 간의 갈등은 언제 다시 타오를지 모르는 불씨로 남아 있다.




바레인 국가 소개




• 건국: 1783년

• 독립: 1971년

• 공식국명: 바레인 왕국(Kingdom of Bahrain)

• 국왕: 하마드 빈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Hamad bin Isa bin Salman Al Khalifa, 1999년 즉위)

• 왕세자: 살만 빈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Salman bin Hamad bin Isa Al Khalifa, 1999년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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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 지도 ⓒ김정명



바레인은 아라비아 반도의 걸프만(灣) 중남부 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약 134만 명(2014년 기준)의 섬나라로서 입헌군주정을 유지하고 있다. 바레인의 영토는 780㎢로 세계 187위의 작은 나라다. 정식 국명은 ‘바레인 왕국’이며 수도는 마나마이다. 바레인은 아랍어로 ‘두 개의 바다’를 의미하며, 총 33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아랍어다. 1970년대 석유 붐 이후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증가하여,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약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은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바레인의 공식 종교는 이슬람이며, 무슬림 인구 가운데 시아파가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바레인은 석유 산업이 전체 수출의 60% 이상, 재정 수입의 80% 이상, 국내총생산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석유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석유 매장량은 1억 2,460만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메이저급 산유국과 다르게 소량에 불과해 향후 20년 안에 석유 생산이 중단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배경에서 바레인은 다른 걸프 지역 산유국에 비해 일찍부터 석유 이후 시대를 대비한 경제 다각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바레인 정부는 1975년부터 역외 금융회사에 면허를 부여함으로써 자국을 중동의 역외 금융 허브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특히 2007년에 개장한 바레인금융센터(BIFC)에는 수백 개의 국제 금융회사들이 입주해 있다. 현재 금융 부문은 바레인 국내총생산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석유 부문과 더불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또한 2006년 8월에는 걸프협력기구(GCC)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개방적인 경제 정책을 취하고 있다.

현재 바레인의 의회는 2002년 제정된 개정 헌법에 따라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상원격인 슈라 위원회와 국민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슈라 위원회와 하원은 각각 40명으로 구성된다. 바레인에서 입법권은 국왕, 슈라 위원회, 하원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국왕이 상원에 해당하는 슈라 위원회 소속 의원에 대한 임면권을 갖고 있고, 입법 권한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바레인의 의회의 독립성은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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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대학교(Muhammad V University)에서 이슬람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중동전문 비즈니스 사이트인 메나르(www.menar.co.k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현대 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쿠웨이트의 형성과 발전>, <카타르의 형성과 발전>, <오만의 형성과 발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과 발전>, <바레인의 형성과 발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랍인의 역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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