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자의 역사인식과 역사학 - 조선후기 역사학의 발전과 학문적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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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7회 작성일 16-02-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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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역사학 방면에서의 발전은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의 변화와 이에 기초한 연구방법론의 개발에 기인한 바가 크다. 주자학이 시대의 지배 사상으로 있으면서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실학자들은 개혁적 문제의식과 역사관을 가지고 현실 문제를 보았다. 이러한 현실인식과 문제의식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주자학자들을 구별하는 지점이다. 실학자들의 진보적인 역사인식과 이에 바탕을 둔 조선 후기의 역사학은 조선 전기의 교훈과 정치 중심의 역사학, 조선 중기의 성리학적 의리와 명분의 역사학과는 구별된다.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은 어떠하였는가





1)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개혁적 문제의식



조선 후기 실학자들 가운데 제도의 개선에 관심이 있었던 일군의 실학자들은 개혁안의 역사적인 연원(淵源)을 과거의 서책에서 취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 한국의 역대 제도의 연혁을 고찰하거나 전고(典故)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들은 과거의 이상적 시대를 모범으로 취하여 현실의 사회개혁안에 투영시킴으로서 경세제민의 이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경세치용의 개혁안은 유형원의 『반계수록』, 유수원의 『우서』,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 사회개혁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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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에 등장한 『반계수록』 편찬 내용 <실학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북학파의 선구자였던 홍대용




한편 홍대용(1731~1783) 이후 연행을 통해 중국의 발전을 목격하였던 박지원(1737~1805),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8~1807), 박제가(1750~1805) 등은 발전된 중국과 비교하여 낙후한 조선 현실을 반성하면서 이용후생의 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이들 북학파 인물들은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나라의 발전과 당시 청나라에 유입된 서양 문명에 자극받아 수레, 선박, 벽돌 등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 기술의 도입과 대외 무역의 육성을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북학파의 경제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개혁론은 기존의 제도와 문명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실학자들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고전을 인용하거나 과거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들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개혁하는 근거를 과거에서 찾을 뿐이다. 실학자들의 최종적 목표는 현실의 개혁과 새로운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있었다.



2) 역사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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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선생을 모시고 있는 첨성사.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실학자들은 사관(史觀) 면에서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익은 역사의 성공과 실패는 처한 바의 ‘형세(形勢)’에 따라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역사는 도덕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움직여 나간다고 생각하였다. 이익은 형세와 인간 행위가 통일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역사가 움직여 나간다고 보았다. 역사의 운영 원리로 이전 시기의 지배적인 관념인 도덕과는 다른 ‘형세’라는 개념을 발견하였다.

정약용은 이익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에서의 진보를 역설하였다. 그는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기예는 발전한다는 기술문화 발전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역사 형성의 요소로 지리적 요인이나 환경적 원인을 중시하였다. 실학자들 사이에서 역사는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생각이 차츰 확대되었으며, 최한기(1803~1877)는 운화(運化)1)라는 개념을 통해 문명개화2)를 역사의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동양의 전통사회에서는 역사에서의 발전관이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는 일정한 순환을 이루며 전개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따라서 실학자들이 역사에서 발전과 진보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의식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학자들이 정치적 교훈과 도덕적 선악에 따라 역사를 평가하기보다 역사에 작동하는 다른 운영 원리를 인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존화적 화이관의 탈피



조선 후기에는 세계지리 지식이 확대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존화적 화이관에서 벗어나 문화를 기준으로 한 화이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중화이적(夷狄) 판별하는 기준으로 혈연적 측면보다 문화적 우열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만이(蠻夷)로 간주되었던 요, 금, 원나라와 소중화를 자임하였던 우리나라의 위상도 재평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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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의 내용 일부. 중국 고대의 지리서로서 중화적 세계관이 담겨 있다.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세계지리 인식은 중화적 세계관이 반영된 『산해경』이나 『수경』에 바탕을 둔 각종 지리지에 의해 형성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정통관과 화이사상에 입각하여 세계를 이해하였다. 이는 중세기적 천문관의 기본이 되었던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천원지방설 속에서는 세상의 중심은 하나뿐이었으며, 그것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서양에 대한 사정을 각종 번역서와 지리서를 통해 알게 되자 차츰 중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조선 문명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과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컸던 실학자들은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차츰 존조선적(尊朝鮮的) 역사인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실학의 개조인 유형원만 하더라도 대명의리 의식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어 명나라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의 존명적 화이관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만 하더라도 명에 대한 부채의식과 중화적 존명의식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학자 가운데 화이관의 변화가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18세기 전반의 이익이었다. 이익은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천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개체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서학의 천문서를 읽었던 이익은 지리적으로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세계의 일부분임을 인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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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천하도가 수록된 필사본의 종합 지도첩 팔도 고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세기 후반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북학파 학자들은 대명의리론3)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주자학적 화이론과는 달리 문화적 화이론을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중화와 오랑캐가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서 유교의 척도로 보면 상호간의 존비관계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땅이 둥글며 스스로 돌기 때문에 지리적인 화이 구별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홍대용은 북학자 가운데 기존의 종족적, 지리적 화이관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었다. 홍대용은 연행을 통해 청 문물의 번영을 목도하고서 차츰 소중화적 세계관을 청산하게 되었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북벌론 등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청 조정과 문물을 분리한 다음 오히려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전반 정약용은 화이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종족이나 지리가 아니라 문화를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이러한 문화관을 통해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논리를 발전시키고 있다.

실학의 각 유파에서는 차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존주적(尊周的) 화이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가 되면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종족적 지리적 차별의식을 극복하고 조선 문명의 독자성을 자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지닌 고유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나타났다. 다만 조선 문명에 대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종족적 화이인식의 구도 자체를 뛰어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4) 민족 중심의 세계관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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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상. 실학자들은 단군을 통해서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성립하여 새로운 국제질서 속의 세계를 보려고 하였다.



실학자들은 민족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마련하여 대등한 국제적 질서를 상정하기 시작하였다. 실학자들은 민족 시조로서의 단군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서술의 첫 머리에 기술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민족의 활동과 역사를 중국과는 분리된 독립된 세계로 설정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위치와 지형이 주목되고 단군과 기자가 민족의식과 자존의식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중국과 조선이 조공 혹은 책봉 등에서 정치적인 상하관계는 존재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과거 역사에서의 수평적이고 대등한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상하관계를 부정하고 대등한 국제질서 속에서 세계를 보려고 하였다. 이익(李瀷)이 중국이라는 것은 큰 땅 가운데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것도 이러한 대등한 국제질서를 상정한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을 역사서로 정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종휘, 박지원, 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이종휘(1731~1797)는 민족 역사의 시작을 단군으로 설정하고 단군을 중국의 복희신농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단군과 이에 신속한 부여, 옥저, 비류 등을 우리 고대사의 주류로 간주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가 가운데 단군에 역사적 의미를 가장 적극적으로 부여하였다. 박지원은 기자를 중국과 대립되는 세력으로 간주하였다. 박지원은 기자가 처음에는 요서에 도읍을 두었다가 연나라에 밀려 차츰 동방으로 나왔으며, 요동을 거쳐 대동강변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이에 더 나아가 우리 상고기 역사에서 명멸하는 많은 부족들의 민족적 순수성의 발견과 조선 민족의 개별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단군으로부터 이어지는 민족의 순수성과 개별성에 대한 강화된 인식은 후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자주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실학자들의 역사학 연구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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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상. 주자(주희)가 집대성한 사상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었다. <출처: By CC Gisling @Wikimedia Commons (CC BY)>



조선 후기 사회는 역동적인 변화과정에 놓여 있었지만 집권층은 여전히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명분론, 중화 중심의 화이론, 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일부 선각적인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상적 각성에서 농촌에서의 생산력 확대에서 출발하여 해외의 선진적인 기술 도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강하고 근대화된 국가로의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사회정책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였으나 현실에서는 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로 학문적인 분야에서 사회개혁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문제에 대한 주목은 자연히 과거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관심과 연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역사학 분야에서는 전통의 재발견을 통한 전문적인 역사 연구 및 정리가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기에 가장 큰 고증적 연구 성과를 보여준 역사지리 분야는 고도의 학문적 수련과 자료 수집이 이루어져야 하는 학문 분과이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와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을 경학으로부터 분리하여 전문화된 학문 분과로 발전시켰다.

이 시기 실학자들은 역사연구에서 객관성과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비록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전의 역사 논평을 그대로 재인용하거나 이념적 측면에서의 논평이 역사 연구의 주된 부분을 이루었다면 실학자들은 관련 사료를 종합하여 판단하거나 관련된 형세와 지리적 여건 등을 비교하여 결론을 내리는 등 학문적으로는 진일보한 방법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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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전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줄여 만든 전국지도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국대지도. 우리나라 전체를 약 42만분의 1로 축소하였으며 북부지방 국토 윤곽을 실제와 가깝게 그려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인식에서는 존화적 화이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한국사의 발전을 인식하고 조선 초기의 기자가 정통성을 지닌 유일한 군주라고 생각하였던 기자정통론에서 벗어나 단군을 최초의 정통성을 가진 군주로 인식하였다. 또한 남북이 각기 별개로 발전하였다는 남북이원발전론과 함께 기자를 계승한 삼한 혹은 마한을 역사의 정통으로 본 삼한정통론이 제시되는 등 한국사의 다양한 전개과정을 발견하였다. 유교 문명의 전래자이자 교화를 베푼 군주로 간주되었던 기자를 존숭하던 데서, 차츰 민족의 계통적 발전을 중시하며 이에 상응하여 단군과 발해에 주목하였다.

역사의 변수에 대한 이해에서는 정통론이 여전히 중요한 기준으로 있었지만 지리, 풍토, 문화 등의 여러 다른 요소들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지리만 하더라도 실학자들의 개혁적 역사인식이 반영되면서 『동국여지지』를 비롯한 전국지와 각 지역에서 작성된 읍지에서는 실학파의 개혁론이 수렴되어 편찬되었다. 이는 실학자들이 역사 발전에서의 다원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라 하겠다. 현실 지리 세계에서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았던 데서 벗어나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인지하면서 다양한 지도가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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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8도의 지세와 토산물 등을 상세하게 그린 조선시대 전국 지도 해좌전도(海左全圖).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서울 시가지의 모습을 주요 건축물과 시설을 비롯하여 명소, 동, 산줄기 등을 표현한 서울시가도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실학자들은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역사 서술 체재에서는 다양한 형태를 시행하였다. 거대한 장서가와 수집가의 출현으로 중국과 국내 자료들을 확보하게 되면서 역사 연구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자료에 대한 고증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역사 연구에서 자료 면에서는 조선 중기에는 『요사』나 『금사』,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서 간행된 고증적 저술까지 이용하면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전기에 비해 시기적으로는 단군조선에서부터 고구려와 발해, 지역적으로는 북관지역을 포함하여 요동 일대까지 확대된 강역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역사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실학자들은 관부에서 지원을 받았던 조선 전기와는 달리 오직 자신이 일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이다. 조선 전기 관학자들은 주로 관부의 지원 속에서 관찬으로 역사서를 편찬하였다면, 실학자들은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별다른 관부의 지원도 없이 개인의 학문적 관심과 개성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였다. 실학자들의 학술운동은 조선 전기 관부에서 진행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 개인이 일생을 두고 연구하는 개인적인 저술활동으로 전개됨을 의미하고 있다.


실학자들의 역사 저술에는 시대적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각성에 따라 경세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조선 문명에 대한 자각으로 역사 저술에는 한국의 독자적인 문화와 그 전통을 재발견하려는 의식이 고조되었다. 역사연구의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는 고증적이고 합리적인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근대 역사학의 학문적 정신적 토대는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역사인식과 역사학에서 구축되었다.


참고문헌

  • 박인호, 『한국사학사대요』, 이회문화사, 1996; 3판, 2001.
  • 박인호, 『조선 후기 역사가와 역사지리인식』, 이회문화사, 2003.
  • 배우성, 『조선과 중화 - 조선이 꿈꾸고 상상한 세계와 문명』, 돌베개, 2014.
  • 정창렬, 「실학의 역사관 - 이익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다산의 정치경제 사상』, 창작과비평사, 1990.
  • 정창렬, 「실학의 세계관과 역사인식」, 『한국실학사상연구』 1, 연세대국학연구원편, 혜안, 2006.
  • 조광, 「조선 후기의 역사인식」, 『한국사학사의 연구』, 을유문화사, 1985.
  • 조성을, 「조선 후기 역사학의 발달」, 『한국사 인식과 역사이론』, 지식산업사, 1997.
운화(運化)


최한기가 내 놓은 철학적 개념으로 순환성과 변화성을 총괄하여 지칭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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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개화(文明開化)


조선 문명(文明)의 개화(開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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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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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 금오공과대학교 교수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라는 제하에 문헌비고 여지고의 편찬 과정과 수록 내용을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금오공과대학교 교양교직과정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사와 사학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학사대요』,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조선시기 역사가와 역사지리인식』, 『제천관련 고문헌 해제집』, 『제천지역사연구』, 『칠곡 귀암 이원정 종가』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0.20.



주석


1운화(運化)


최한기가 내 놓은 철학적 개념으로 순환성과 변화성을 총괄하여 지칭한 말
2문명개화(文明開化)


조선 문명(文明)의 개화(開化)
3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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