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18세기의 개혁사상, 북학론 -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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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6회 작성일 16-02-0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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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북학론은 북경을 방문한 지식인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청이 조선보다 번성한 것은 생산기술이 뛰어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상품의 유통이 원활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이에 청의 우수한 기술을 도입하고 조선의 수레와 선박을 개선하여 가난을 극복하자는 북학론이 등장했다. 청에서 도입한 생산 기술이나 교통수단은 평소에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수단이지만 유사시에는 국토를 방위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조선 지식인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도 민감하여 비상시를 대비해 외국어를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자각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북경 방문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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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국 사행을 그린 그림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사람이 해외를 여행하는 코스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먼저 공식 코스로 서울에서 의주를 거쳐 청의 북경을 방문하는 ‘연행사 코스’와 서울에서 동래를 거쳐 일본의 동경을 방문하는 ‘통신사 코스’가 있었다. 이와 별도로 본인이 원하지 않지만 가장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는 ‘표류자 코스’가 있었다. 이 중에서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것은 ‘연행사 코스’였다. 연행사(燕行使)란 청의 수도인 연경 즉 북경을 방문하는 사신이라는 뜻으로, 조선 전기에 파견한 ‘조천사(朝天使)’와 구분되었다. 조천사는 명의 천자에게 조회하러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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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청나라 북경에 파견된 조선사신단 강선의 연행록 <연합뉴스 제공>



조선 정부는 총 700여 회에 걸쳐 연행사를 파견했다.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한 1637년 이후에는 매년 네 차례씩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청이 북경을 장악한 1645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씩 사신을 파견했으며, 이는 청일전쟁이 발생한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별도로 청 황실에 축하할 일이 있거나 요구 사항이 있을 때, 혹은 위문할 일이 생기면 수시로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단의 규모는 일정하지가 않았다. 정기적으로 파견된 사신단의 규모는 정사, 부사, 서장관 각 1명, 통역을 담당하는 대통관 3명, 물품을 관리하는 압물관 24명을 합하여 30명 정도였고,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을 합하면 2백 내지 3백 명 정도가 되었다.

매년 수백 명의 사신단이 북경으로 파견되었지만 조선의 지식인이 북경을 방문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자신이 관리가 되어 정사나 부사, 서장관에 임명되거나 이들의 자제로 군관의 직함을 띠고 자제군관(子弟軍官)이 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홍대용박지원은 명성이 높은 집안의 자제로 북경을 방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과 최한기에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정약용최한기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북경을 방문한 사람이나 그들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정보의 교환



조선의 지식인은 해외여행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접했다. 이들은 각자가 여행지에서 확보한 정보를 가지고 귀국하였고, 교유하는 벗들을 통해 자신이 가진 정보를 확산시켰다. 조선 후기의 학계는 한양과 경기 지역을 포괄하는 수도권과 충청, 경상, 호남, 서북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에서 학계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수도권이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가 일단 수도권에 집결된 후 주변지역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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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도권에는 학문이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몇 개의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홍대용, 박지원, 조인영, 김정희가 속한 노론계 그룹, 서명응, 이종휘, 서형수, 홍양호가 포함된 소론계 그룹, 채제공, 이맹휴, 이가환, 정약용의 남인계 그룹이 그것이다. 성대중, 성해응, 박제가, 이덕무는 노론계 그룹이지만 양반가의 서자 출신이라 중인 그룹으로서의 특징이 있었다.

이들은 그룹 내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교환했지만 인근의 거주하는 다른 그룹의 지식인과도 교유하였다. 박지원은 “귀천이 달라도 덕이 있으면 스승으로 삼을 수 있고, 나이가 같지 않아도 인(仁)을 도울 수 있으면 벗할 수 있다”고 했다. 경계를 넘어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정조의 학문 정책도 수도권 지식인의 정보 교류를 도왔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검서관이란 직제를 두어 젊고 학문이 뛰어난 관리를 집중적으로 배치시켰다. 정조는 이들에게 청에서 수입되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개혁적인 정치 이념을 마련하고 개혁 정치의 실무를 담당할 인재로 양성했다.

정조가 주도한 규장각의 교육 프로그램과 국가적 편찬사업은 수도권의 지식인에게 새로운 학문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를 개혁할 방안까지도 마련하게 하였다.




생산 기술의 개선



조선의 지식인이 목격한 청나라 도시의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반듯하게 정리된 도로에는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가 바삐 움직였고, 도로변에 벽돌로 높다랗게 지은 집은 치장이 화려했다. 일반인의 차림새나 살림살이에서 시골티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박지원은 오랫동안 서울에 살았지만 청의 변방인 책문에서 목격한 풍경은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책문은 동쪽 끝 벽지인데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였다.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치미면서 전신에 불을 끼얹은 것 같이 후끈한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박제가에게 청의 풍경은 찬탄의 대상이었다. 그는 건물 장식이 번쩍이고, 거리에는 수레가 북적이며, 음악 소리가 들리는 데다 향내까지 넘친다고 했다. 박제가로서는 조선의 문물 중에 청에 견줄 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청과 조선의 차이는 생산 기술 때문이었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청은 여진족이 일으킨 오랑캐의 나라이자 조선을 침략한 원수의 나라였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청은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그들의 문물은 이전부터 중국에 있었던 중화문명의 산물이었다. 청의 생산 기술이 조선보다 낫고, 그것이 중화의 문물이라면 조선에서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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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는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청나라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실학박물관 제공>



박지원은 중국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청의 생산 기술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자세히 기록했다. 그들의 생산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정약용은 청의 선진 기술이 모두 습득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약용은 기본 산업인 농업에 관한 기술은 물론이고 베 짜는 기술, 병기 제조법을 도입해야 하며, 궁궐과 성곽의 건축, 수레와 선박의 제조법까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지식인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식인은 국가적 차원에서 청의 생산 기술을 조직적으로 도입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박제가는 청에서 농기구와 농사 기술을 도입하여 중앙에서 시험하고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새로운 농기구는 서울의 대장간에서, 농사 기술은 서울 근처에 있는 둔전이라는 국영 농장에서 시험한 후 성과가 좋으면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이었다.

정약용은 공조 아래에 이용감(利用監)이란 관청을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용감에 수학과 중국어에 능한 관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북경에서 생산 기술을 익히고 생산 기구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관리는 수도권에서 시험 제작한 후 전국으로 보급하며, 실적이 좋은 관리는 승진의 혜택을 부여하자고 했다. 박제가는 생산 기술이 뛰어난 서양의 선교사를 조선으로 초청하여 조선의 인재들에게 그들의 기술을 직접 전수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청에서 선진적인 생산 기술을 도입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안이었다.




교통수단의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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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수출을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들 <연합뉴스 제공>



오늘날 한국은 자동차와 선박의 생산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그러나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에서 수레와 선박의 제조법을 들여오자고 했다. 당시로서는 수레와 선박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이동할 때에는 가마나 말을 이용했고, 물자를 옮길 때에는 소와 말에 등짐을 지웠다. 그리고 수레가 다닐 정도로 넓은 도로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처럼 도로가 정비되지 못하고 교통수단의 발달이 늦어지면 농산물이나 수공업 제품은 제한된 지역에만 머물게 되고, 결국은 생산성이 떨어지고 모두 가난해지는 길을 걷게 되었다. 산골 사람은 해산물을 맛보지 못하고, 서북 사람은 귤 맛을 몰랐으며, 일만 냥으로 한 가지 물품을 구매하여 비축해 두면 그 물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물품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식인은 청의 생산기술을 도입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우수한 기계를 도입하여 수공업 제품의 생산을 늘리자고 했다. 그러나 생산량이 늘어도 물품이 유통되어 판매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교통수단의 혁신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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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회의 《유암총서》와 《운곡잡저》. 그는 수레와 선박을 어떻게 사용하고 제작해야 하는지를 저술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수레는 육상 교통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수레는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나 이용할 뿐 일반인이 이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수레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고, 조선에는 산이 많아 수레가 다니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북경을 방문한 홍양호는 수레를 이용하면 사람이나 말의 힘을 크게 절약하고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수레가 다닐 수 있음을 목격했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는 수레가 조세를 운송하는 데 편리하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매년 조정에 바치는 공물을 옮기려면 100마리의 말이 필요한데 수레는 10대면 충분하므로 운송비를 줄이고 노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고통도 경감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수레를 이용하면 물자의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유통을 원활히 하여 시장을 키우고 물가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의 수레 제도를 도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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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수상 교통수단의 이동경로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박제가는 청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문제점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연합뉴스 제공>



선박은 물 위를 움직이는 교통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로가 주요 교통로였고 지방에서 납부한 공물은 대부분 선박에 싣고 수로를 따라 서울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선박은 수심이 깊은 먼 바다를 항해하지 못하고 연안 항로로만 이동했다. 박제가는 청의 상선이 조선에 와서 무역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그들의 선박제도를 익히거나, 조선 상인이 중국으로 가서 교역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청이 조선의 무역을 허락하면 조선 상인이 솜씨 좋은 기술자를 데려가 중국의 선박 제도를 관찰하여 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조선 해안에 표류하는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한 제도를 수용하자고 했다. 그는 외국의 표류선이 있으면 이용감에서 관리와 기술자를 파견하여 선박의 제도를 꼼꼼하게 조사하는 것이 중국에서 배워온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조선의 지식인이 교통수단의 혁신을 고려한 것은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인 가난 때문이었다. 가난을 구제하려면 우수한 생산기술을 도입하여 제품의 생산을 늘리고, 교통수단의 혁신을 통해 유통을 활성화하고 시장을 발달시켜야 했다. 또한 청과의 무역을 통해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품의 질과 양을 개선시켜야 했다.




국토방위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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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조선도 크게 그렸다. 서쪽에 대서양, 하란국 등 유럽과 동남아시아의 지명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중앙에 위치시키고 그 외곽을 조금씩 넓혀 가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지도에는 수많은 지명과 국가가 등장했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은 그 실체를 경험할 기회가 드물었기에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북경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몽고인과 서양 선교사, 아라사의 상인을 볼 기회가 있었고, 동경을 방문한 사람은 멀리서 네덜란드 상인을 보는 정도였다. 이들은 중국의 바깥에 새로운 세계가 존재함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중국과 함께 세계의 중심부를 이루고 그 영역도 실제보다 훨씬 넓은 것으로 이해했다.

조선의 지식인은 조선과 청의 우호 관계가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청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본거지였던 영고탑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때에는 조선에 다시 전쟁의 위기가 닥칠 것으로 예상했다. 이종휘는 청이 심양을 중시하는 정책을 쓰는 것은 그들이 본거지로 돌아갈 때를 대비하는 증거로 보았다. 그는 청이 본거지로 돌아오면 조선에 식량을 요청하거나 영토의 분할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조선과 청의 관계가 미묘하므로 청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조선의 지식인이 청에서 도입하려 했던 생산 기술이나 교통수단에는 벽돌, 목축, 수레, 선박 등이 있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도구지만 유사시에는 전쟁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벽돌은 성곽을 쌓고, 목축으로 기른 말은 전마가 되며, 수레와 선박은 전차와 전선으로 바꿀 수 있었다.

박제가는 조선이 청의 우수한 제도를 배워 그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춰야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씻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도입하려 했던 청의 제도는 모두 조선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수레는 무기가 아니지만 수레를 사용하면 군사 물자를 편리하게 수송할 수 있다. 벽돌은 무기가 아니지만 벽돌을 사용하면 만백성의 안전을 위한 성곽을 제대로 구비하게 된다. 기술자의 기술과 목축은 무기는 아니지만 삼군이 사용할 말이나 공격하고 전투하는 장비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군사 활동을 전개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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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팔달문의 옹성. 개방형의 보통 옹성과는 달리 중앙문이 있다. <연합뉴스 제공>



정약용은 이용감에서 청의 벽돌 제조법을 도입한 후 국경 지대의 성벽을 차례로 고쳐 쌓아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정조는 내외의 적을 대비한 수원 화성을 건설하면서 벽돌로 옹성을 쌓았다. 홍양호도 청의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여 청과의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다. 그는 청의 우수한 말을 도입하여 전마로 사용하고, 수레 제도를 도입하여 기병에 도움을 주는 전차를 만들며, 벽돌 제도를 도입하여 청의 예상 침입로에 있는 성곽을 보수하거나 신축하자고 했다. 이강회는 조선의 삼면이 바다이고 외부에 강국이 있는데 전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걱정이었다. 그는 해상으로 침략하는 외적을 대비하려면 전선의 정비와 보완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외국어 습득과 첩자 활용



조선이 이러한 전쟁 수단들을 제대로 갖춰다 하더라도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조선의 지식인은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비상시에는 해당국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유능한 역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할 때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는 청, 몽고, 일본의 순이었고, 이에 대비하려면 중국어, 몽고어, 일본어의 습득이 시급했다. 실제로 조선을 침략한 나라는 서양과 일본이었지만,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침략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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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어노걸대는 당시 역관들의 학습 및 역과시용으로 사역원에서 간행한 몽골어 회화책이다.



박제가는 비상시라면 역관에게 외교를 맡길 수 없으므로 사대부 지식인이 직접 중국어, 만주어, 몽고어, 일본어를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양호는 중국어와 몽고어의 습득을 강조했다. 청의 급박한 요청이 있거나 군사력이 강한 몽고에 대비하려면 평소에 외국어를 익혀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조선의 첩자를 청에 상주시키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대부의 자제는 청의 과거를 통과하여 관리로 있으면서 북경에서 중앙 정부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선 상인은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명의 회복을 기도하는 강남의 한인과 연결되는 방안을 구상했다. 박지원은 청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국제 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지식인은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자각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이를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인 북학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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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정조와 경기학인의 경학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 후기 경학사상 연구],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정조의 제왕학], [조선 후기 지식인의 대외 인식], [정조의 생각] 등이 있고, 공저로 [정조의 비밀 어찰: 정조가 그의 시대를 말하다],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국왕의 일생] 등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 및 왕실 문화에 나타나는 예악(禮樂) 국가로서의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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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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