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요르단 하심 왕가 -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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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4회 작성일 16-02-0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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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은 하심(Hashim)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아랍 왕정국가다. 하심 가문은 7세기 무렵 이슬람을 창시했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속한 가계로서,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무함마드의 43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하심 가문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홍해 연안의 서부 지역인 히자즈에서 통치가문의 역할을 해 왔다.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히자즈 지역을 정복했지만 하심 가문에게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자 하심 가문은 영국의 지원 하에 히자즈 왕국(1916~1925년), 이라크 왕국(1921~1958년), 요르단 왕국(1921~현재) 등을 차례로 건국했다. 이 가운데 요르단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심 왕국이다.

과거에 요르단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동편을 가리킨다. 1921년 요르단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란 국명으로 영국의 보호령 하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46년 5월 25일 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국명을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었다. 그 후 1949년 4월 요르단은 다시 오늘날의 국명인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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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 모스크와 그리스 정교회. 요르단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교차로에 있다.




요르단은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은 행정 및 입법 부문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요르단 국왕은 국가원수인 동시에 최고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총리, 내각 장관, 도지사 등 행정부 주요 요직에 대한 임면권을 갖고 있으며 국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요르단은 기독교도, 유대교도, 무슬림이 성지라고 부르는 지역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요르단은 중요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아랍 국가 중 이집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나라이기도 하다.




하심 왕가의 특징과 현안





왕위 계승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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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1세의 장남이었지만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었던 압둘라 2세는 군 경력을 쌓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부친이 사망하기 불과 2주 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젊은 날 군장교 복무 시절 사진



1946년 독립 이후 요르단은 총 네 명의 왕이 통치했고 세 차례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 형식상 요르단의 하심 왕가는 부친이 사망한 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유지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1년 건국자이자 1대 국왕인 압둘라 1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탈랄 빈 압둘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탈랄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유로 즉위 1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인 후세인 1세가 1952년에 왕위에 올랐다.

후세인 1세는 1952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요르단을 통치했고, 1965년에 자신의 동생인 하산 빈 알 탈랄을 왕세제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후세인 1세는 사망하기 2주일 전인 1999년 1월 25일에 34년 동안 왕세제를 역임해 왔던 하산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의 큰 아들인 압둘라 2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부친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된 지 2주 후인 1999년 2월 7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압둘라 2세의 왕위 등극은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만큼 매우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후세인 1세의 맏아들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이 이미 왕세제로 책봉되어 있던 터였다. 더구나 압둘라 2세의 모친은 영국인 출신으로 후세인 1세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1971년에 이혼한 상태였다. 후세인 1세는 말년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누르 왕비를 총애했고, 따라서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 그녀의 큰아들이었던 함자 빈 알 후세인이 차기 왕위에 오를 것이 유력했다.

1999년 후계자 선정 문제를 놓고 후세인 1세는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죽기 전에 후계자를 동생 하산 빈 알 탈랄 대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택하고 싶어 했다. 당시 그는 누르 왕비의 청원에 따라 그녀의 아들 함자를 후계자로서 신중히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 함자의 나이는 18살에 불과하여 왕위를 이어받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37살이었던 장자인 압둘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대신 함자를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압둘라 2세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이복동생 함자를 1999년 2월 7일 왕세제로 책봉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28일 압둘라 2세는 전격적으로 함자를 왕세제로부터 해임했다. 당시 그는 함자에게 서한을 보내 “상징적인 직위 때문에 너는 행동의 자유를 구속받아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네가 충분히 자격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무도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해임의 사유를 밝혔다. 그는 함자의 해임 이후 약 5년 동안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었다가 2009년 2월 당시 15살이었던 장남 후세인 빈 압둘라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계 최고 미녀 왕비 라니아 알 압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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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퍼스트레이디에 선정된 라니아 알 압둘라. 라니아 왕비는 아동학대 근절과 복지 향상에 힘쓰고 있다. 유엔아동기금은 라니아 왕비를 아동 대변자로 임명하기도 했다.




라니아 알 압둘라는 현 요르단 국왕인 압둘라 2세의 아내로서 2011년 <하퍼스앤퀸> 잡지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퍼스트레이디에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라니아 왕비는 1970년 쿠웨이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부모는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그녀는 쿠웨이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집트 카이로에 소재한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시티은행과 애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학력과 경력이 말해 주듯이 라니아 왕비는 보수적인 아랍 지역에서 변화하는 신세대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 아랍 왕정국가에서는 왕비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도 적극적이다. 라니아 왕비는 히잡을 쓰지 않으며, 현대식 서구 의상을 입는 스타일리스트로 정평이 나 있다. 그녀는 2008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무슬림 여성은 히잡을 쓸 수는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라니아 왕비는 교육, 보건, 공동체 활성화, 청소년, 문명간 대화, 미소금융(Micro-Finance)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선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가 사회 활동을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1995년에 요르단강 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이 재단은 1998년에 아동 안전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아동 학대 근절과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2007년 유엔아동기금은 라니아 왕비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를 아동 대변자로 임명했으며, 2009년 UN 산하의 소녀교육계획은 그녀를 명예세계회장에 임명하기도 했다.

현재 라니아 왕비는 압둘라 국왕의 유일한 아내이다. 과거 요르단 국왕은 여러 차례 결혼을 하며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지만 라니아 왕비는 이 같은 전통을 근절시켰다. 그녀는 압둘라 국왕과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맏아들인 후세인 빈 압둘라는 2009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유튜브와 SNS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4년 8월 기준으로 그녀의 트위터 계정에 등록한 팔로어 숫자는 무려 300만 명을 넘어섰다.




요르단의 역사



요르단은 하심 가문이 다스리는 왕정국가로서 1921년에 건국된 신생 국가다. 원래 하심 가문은 이슬람의 창시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서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히자즈 지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존경받아왔다. 16세기 이후 히자즈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영역에 편입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하심 가문에게 히자즈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유지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하심 가문은 영국과 손잡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항거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이 다스렸던 방대한 아랍 영토를 분할했고, 그 일부를 하심 가문에게 자치권 형식으로 떼어줌으로써 오늘날의 요르단 왕국이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은 독일과 손잡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랍인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1915년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이었던 영국의 헨리 맥마흔은 당시 하심 가문의 지도자로서 히자즈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1854~1931년)에게 서한을 보내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여 ‘아랍봉기’를 일으키면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방대한 아랍 독립 왕국의 설립을 제안했다. 1916년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스만 제국에 대해 항전을 일으켰다. 이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영국군 장교 토마스 로렌스는 샤리프 후세인을 추종하는 아랍 군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여 오스만 제국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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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오스만 제국에 항전을 일으킨 샤리프 후세인과 이를 소재로 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하심 가문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에서 오간 약속에 따라 히자즈 지역과 대(大)시리아 지역(오늘날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포함)을 아우르는 거대 아랍 독립 왕국 건설의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하심 가문의 희망은 영국의 이율배반적인 외교정책에 의해 난항에 부딪혔다. 왜냐하면 영국은 1916년 5월 16일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이 패망할 경우 영국은 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을 그리고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분할 점령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한 하심 가문은 아랍 왕국 건설작업을 서둘렀다.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는 1916년에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히자즈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 빈 알 후세인은 시리아로 진격하여 1920년에 시리아 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시리아에 대해 자신의 위임통치령임을 주장하면서 결국 하심 가문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했다. 1920년 7월 24일 파이살 빈 알 후세인은 마이살룬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하고 시리아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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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왕자는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 점령안에 대응해 시리아 왕국을 건설했지만 프랑스에 패하고 추방된다. 그 후 이라크에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의 둘째 아들인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은 동생 파이살 빈 알 후세인이 패한 직후인 1920년 11월, 프랑스와 대적하기 위해 군대를 몰고 시리아로 향했다.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영국은 해결을 위해 중재에 나섰다. 영국은 압둘라 빈 알 후세인에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각각 프랑스와 유대인에게 양보하라고 권고했다. 그 대신에 영국은 1921년 3월 카이로 회담에서 트란스요르단은 압둘라 빈 알 후세인에게, 그리고 이라크는 파이살 빈 알 후세인에게 각각 통치권을 위임할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1921년을 기점으로 하심 가문은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가 통치하는 히자즈 왕국(1916~1925년), 그의 둘째 아들인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이 다스리는 요르단 왕국(1921~현재), 그리고 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 빈 알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 왕국(1921~1958년) 등 3개의 왕국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 가운데 요르단만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심 가문의 통치 왕국이다. 히자즈 왕국은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사우드 왕가와 다투다가 1925년에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당하면서 사우디 왕국에 병합되었다. 한편 이라크 왕국은 1958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카이로 회담 직후인 1921년 4월 11일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은 요르단 왕국의 통치자임을 선포했다. 당시 그가 통치했던 왕국의 공식 명칭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었고, 그의 공식 호칭은 ‘토후’란 뜻을 지닌 ‘에미르’였다. 원래 트란스요르단은 이곳을 지배했던 영국이 붙인 행정구역상의 명칭이었다. 당시 영국은 자신이 위임통치하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요르단 강을 중심으로 서편과 동편으로 구분했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동편을 가리킨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유대인과 하심 가문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편은 미래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위한 땅으로 남겨두고 대신 압둘라 1세에게 동편을 내어주고 그곳에 대한 자치 통치권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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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이율배반적인 외교의 결과, 중동지역의 모든 갈등이 요르단에 집약되었다. 그 시기를 헤쳐 나가고자 했던 압둘라 1세는 팔레스타인 암살자에 의해 파란만장한 생을 마친다. 1949년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과 회담 중인 압둘라 1세.



1921년부터 1946년까지 요르단은 영국의 보호령 체제하에 있었다. 요르단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분할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급조된 나라였기 때문에 초창기 시절 국가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주변국도 요르단의 존재를 반기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세력 기반을 다지고 있던 시오니스트 단체는 장차 설립될 유대 독립국가가 요르단 강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영토로 갖길 원했기 때문에 압둘라 1세가 트란스요르단을 지배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한편 히자즈 지역에서 하심 왕가를 무너트린 사우디 왕국은 트란스요르단 지역으로의 세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압둘라 1세는 트란스요르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의 군사적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트란스요르단은 비록 영국의 보호령 하에 있었지만 많은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1923년 5월 13일 영국은 트란스요르단을 자치정부로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후 점차적으로 재정, 군사, 외교 분야에서의 간섭을 줄이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22일 런던조약에 따라 영국의 트란스요르단에 대한 위임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리고 사흘 후인 5월 25일 요르단은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독립과 함께 압둘라 1세의 호칭 역시 토후를 뜻하는 ‘에미르’에서 국왕을 의미하는 ‘말리크’로 바뀌었다. 1949년 4월 요르단은 ‘하심 요르단 왕국’으로 국명을 다시 바꾸었다.




요르단의 주요 군주





건국과 독립의 아버지 압둘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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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1세



압둘라 빈 알 후세인(Abdullah bin al-Hussein, 재위 1921~1951년)은 요르단의 건국과 독립의 아버지이다. 1921년에 영국의 보호령 체제하에 요르단의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1946년에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흔히 압둘라 1세라고 불리며, 독립 직후 헌법을 제정하여 요르단을 입헌군주국으로 만들었다.

압둘라 1세는 1882년 히자즈 지역의 통치자인 후세인 빈 알리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부터 1916년까지 메카 지역 대표로서 오스만 제국 의회에 참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영국과의 동맹을 꾀하기 시작했다. 1915년 그는 부친을 설득하여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과 서신을 주고받도록 했다. 그 결과 하심 가문은 영국으로부터 대(對) 오스만 제국 항전에 참여할 경우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아랍의 봉기(1916~1918년) 기간 동안 압둘라 1세는 영국의 첩보 장교인 토마스 로렌스와 함께 아랍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맹활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자 압둘라 1세는 요르단,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을 아우르는 대(大) 시리아 하심 왕국 건설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시리아를 프랑스에게 위임통치령으로 나눠주고, 팔레스타인은 미래의 유대 독립국을 위한 땅으로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영국의 관할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강 건너편에 위치한 불모지에 가까운 땅을 할양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압둘라 1세는 1921년부터 1946년까지 영국의 보호령 체제하에서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의 통치자를 역임하다가 1946년 5월 25일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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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1세는 영국의 지원 아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왼쪽부터) 토마스 로렌스, 압둘라 1세, 공군중장 조프리 샐먼드, 팔레스타인 고등 판무관 윈덤 디즈.
이들은 1920년 예루살렘에서 모여 시리아 지역의 장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독립 이후에도 압둘라 1세는 대(大) 시리아 하심 왕국 건설의 꿈을 접지 못했다. 때마침 발생한 제1차 중동전쟁은 그에게 있어서 꿈의 실현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군대 철수를 결정하자 이스라엘이 곧바로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압둘라 1세는 이를 기회로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과 합세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르단만큼은 아랍 연합군 가운데 가장 큰 전공을 세웠으며, 요르단 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영토를 늘리는 데 성공했다.

요르단 강 동안과 서안을 모두 차지하게 되자 압둘라 1세는 1949년 4월 요르단의 국명을 하심 요르단 왕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50년 4월 요르단 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 점령지를 공식적으로 요르단 영토로 합병했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살고 있었던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출신자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해 주변 아랍국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조치는 압둘라 1세 스스로가 대(大) 시리아 하심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표출되었다. 요르단 전체 인구에서 팔레스타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원주민에 해당하는 요르단 강 동안 지역 인구보다 훨씬 많아지는 인구역전 현상이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출신자들은 압둘라 1세가 자신들을 요르단의 국민으로 동화시키려 하자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영토의 일부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그들은 압둘라 1세의 동화정책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이며, 따라서 영토의 찬탈자가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압둘라 1세의 암살로 이어지는 비극을 낳았다. 1951년 7월 20일 압둘라 1세는 예루살렘의 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쏜 권총에 의해 숨지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세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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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1세



후세인 빈 알 탈랄(Hussein bin al-Talal, 재위 1952~1999년)은 47년 동안 재위하며 신생 독립국 요르단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그는 1967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동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1970년에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 내전을 치르는 등 수많은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1994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정치적 긴장을 완화시켰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적극적인 경제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흔히 후세인 1세로 불리고 있으며, 오늘날 위대한 중동평화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후세인 1세는 건국자 압둘라 1세의 손자로서 1935년 11월 14일 암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2대 국왕을 역임한 탈랄 빈 압둘라이다. 그는 요르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가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951년 7월 20일, 그의 조부인 압둘라 1세가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출신 반정부주의자가 쏜 총에 의해 암살당했을 시, 당시 15살이었던 후세인도 암살 현장에서 총탄을 맞았으나 다행히도 유니폼에 착용한 메달 덕분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 그가 착용한 메달은 조부인 압둘라 1세가 준 것으로 전해진다.

압둘라 1세의 사망 직후 부친인 탈랄이 국왕에 즉위했고, 후세인 1세는 1951년 9월 9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당시 탈랄 국왕은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1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1952년 8월 11일 후세인 1세는 뜻하지 않게 16살의 어린 나이에 요르단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당시 그는 직접 통치를 하기에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섭정위원회가 한동안 구성되었다. 1953년 18살 성년이 된 후세인 1세는 5월 2일 정식으로 요르단 국왕으로 취임했다.

후세인 1세가 통치 기간 중 맞이한 가장 큰 정치적 위기는 1967년에 발생한 ‘6일 전쟁’이었다. 당시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아랍연합군에 불참할 경우 주변 아랍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국내에서도 반정부 감정이 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참전을 결정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아랍연합군의 참패로 끝났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이집트는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요르단은 요르단 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을 상실하게 되었다.

1967년 전쟁에서의 참패로 후세인 1세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전쟁 직후 요르단 강 서안으로부터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으로 몰려들었다. 요르단은 이미 1948년에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수용한 바 있는데, 1967년 또 한 차례 대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자 인구가 요르단 원주민을 훨씬 압도하게 되자 국가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출신자들은 요르단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일부 지역을 통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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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스라엘 간의 ‘6일 전쟁’ 결과 요르단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유입하게 된다. 인구 구성비가 변하면서 이는 큰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된다.



요르단 내에서 세력을 키운 일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국가 내 국가’를 건설하며 후세인 1세의 권위를 위협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1970년 9월 후세인 1세 암살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결국 요르단의 통치권을 놓고 후세인 1세를 추종하는 요르단군과 야세르 아라파트를 추종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일명 ‘검은 9월’로 알려진 요르단 내전은 1970년 9월에 시작되어 1971년 7월까지 지속되었고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후세인 1세는 간신히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내전에서 패배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부와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전사는 레바논으로 이주했다.

후세인 1세의 또 다른 정치 위기는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찾아왔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비롯한 걸프 아랍 국가들은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군에 참여하여 이라크 격퇴에 나섰다. 하지만 후세인 1세 국왕은 이와 반대로 이라크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 무렵 요르단 정치권은 범아랍 민족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이 여론을 주도하며 반미주의를 외치고 있었고, 이들은 후세인 1세로 하여금 이라크를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후세인 1세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할 경우 자칫 반정부 시위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결국 친(親)이라크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친이라크 정책은 걸프전쟁을 주도한 미국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걸프 아랍 국가와의 관계를 크게 손상시켰다. 이로 인해 요르단은 정치적으로 아랍 국가 내에서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후세인 1세는 친이라크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에 적극 임하기 시작했다. 결국 후세인 1세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94년 10월 26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역사적인 이스라엘-요르단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요르단은 아랍 국가로서는 이집트 다음으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로 요르단은 한동안 아랍 국가로부터 소외되었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미국은 평화조약 체결의 대가로 요르단에 매년 수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요르단 자유무역지대 상품에 대해 무관세 수출을 허용하는 등 각종 특혜를 부여했다.

후세인 1세는 말년에 암으로 고생했다. 그는 57살이었던 1992년에 비뇨기 계통 기관에 암이 발견되어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63살이었던 1998년 7월에는 림프샘에 암이 발생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 후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체류하며 암 치료를 받다가 요르단으로 귀국하여 1999년 1월 25일에 오랫동안 왕세제를 역임해 왔던 동생 하산 빈 알 탈랄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의 큰 아들인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로부터 2주 후인 2월 7일 후세인 1세는 46년간의 파란만장한 통치를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사 왕으로 불리는 현 국왕 압둘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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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2세



압둘라 빈 알 후세인(Abdullah bin al-Hussein, 재위 1999년~현재)은 현재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는 국왕으로서, 부친 후세인 1세 국왕이 사망한 1999년 2월 7일 왕위에 올랐다. 흔히 압둘라 2세라고 불리는 그는 이슬람의 창시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43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국왕 취임 후 압둘라 2세는 이스라엘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재확인하고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나섰다. 또한 그는 국내 지지 기반 확보를 위해 경제개혁 작업도 착수했다. 그는 젊은 시절 오랫동안 군 생활을 경험했으며, 즉위 이후 이스라엘군과 함께 중동 최고의 정예군으로 손꼽히던 요르단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서방 언론은 그를 ‘전사 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압둘라 2세는 1962년 후세인 1세의 맏아들로 암만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후세인 1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무나 알 후세인이다. 그녀는 원래 본명이 앙트와네트 아브릴 가디너로 영국인이었다. 그녀의 부친이었던 토니 아브릴 가디너는 요르단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영국군 대령으로서 요르단 군사 고문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1961년 후세인 1세와 결혼한 후 압둘라 2세를 포함하여 총 2남 2녀를 두었으나 1971년에 이혼했다.

압둘라 2세는 후세인 1세의 맏아들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1965년 후세인 1세는 당시 요르단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동생인 하산 빈 알 탈랄을 왕세제로 임명했다. 더구나 압둘라 2세는 영국인 모친을 둔 혼혈인으로서 정통성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그의 모친은 이미 부친과 이혼을 한 상태였다. 부친인 후세인 1세는 이혼 후 두 차례나 결혼을 했는데, 특히 마지막 네 번째 부인인 누르 왕비를 총애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 다음에는 누르 왕비의 맏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함자 빈 알 후세인이 차기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98년 후세인 1세가 림프 암에 걸린 후 후계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죽음을 직감한 후세인 1세는 왕위를 왕세제였던 동생 하산 빈 알 탈랄 대신 자신의 아들에게 넘기고자 했다. 그는 총애하는 누르 왕비의 장자인 함자를 고려해 봤으나 당시 나이가 18살에 불과하여 왕위에 오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1999년 1월 25일 하산 빈 알 탈랄을 왕세제 자리에서 전격 해임하고 당시 37살이었던 가장 큰 아들인 압둘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압둘라 2세는 부친이 사망하기 불과 2주 전에 차기 왕위 후계자로 결정되었고, 이는 압둘라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젊은 시절 압둘라 2세는 일찌감치 차기 왕위를 포기하고 대신 군 경력을 쌓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차곡차곡 다져갔다. 영국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80년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81년 영국 육군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86년 요르단 육군 91기갑여단에서 기갑중대장을 지냈고, 이후 요르단 공군 대전차부대로 옮겨 코브라 공격헬기 조종 자격을 취득했다. 1993년부터는 특수부대로 소속을 옮겨 1996년 특전사령관에 올랐다. 1999년 왕세자로 지명되기 직전 그의 계급은 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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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2세는 요르단의 관광산업을 적극 육성했다. ‘트랜스포머 2’와 ‘인디아나 존스 3’ 촬영지로 이용된 페트라 유적(좌, 우상단), ‘마션’의 촬영지로 이용된 와디룸(우하단) 등 요르단의 독특한 관광명소는 세계인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Oliver Clarke/flickr




즉위 직후 압둘라 2세는 요르단의 경제 개방화와 자유화를 적극 추진했다. 요르단은 인근 아랍 국가와 다르게 석유나 가스와 같은 천연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압둘라 2세는 요르단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정보통신과 관광산업 부문을 적극 육성했다. 그 일환으로 압둘라 2세는 요르단 통신 시장 민영화를 추진하고 요르단 교육 과정에 정보통신 분야를 도입함은 물론 인터넷 요금을 낮추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요르단은 중동 국가 중 정보통신 분야가 가장 앞선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아카바, 마안, 마프라크, 이르비드, 사해(Dead Sea), 아즐룬 등 6개 지역을 관광, 재생에너지, 과학기술연구, 엔터테인먼트, 물류 및 교통 등을 위한 특별경제구역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압둘라 2세는 요르단 특전사령관 출신답게 역동적인 전사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스카이다이빙, 자동차 랠리, 스킨스쿠버, 축구 등을 취미로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5년 2월 3일 이라크와 시리아를 무대로 세력을 확장 중인 극단 이슬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포로로 잡힌 요르단 전투기 조종사 알 카사스베 중위를 화형에 처하는 동영상을 공개하여 요르단 국민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압둘라 2세는 알 카사스베 중위 피살 소식이 전해진 후 ‘가차없는 전쟁’을 선포하고 요르단 군대를 동원하여 ‘이슬람국가(IS)’에 대한 공격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요르단 국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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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국기와 국장





• 건국: 1921년

• 독립: 1946년

• 공식국명: 요르단 하심 왕국(Hashimite Kingdom of Jordan)

• 국왕: 압둘라 빈 알 후세인(1999년 즉위)

• 왕세제: 후세인 빈 압둘라(2009년 책봉)

요르단은 요르단 강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670만 명(2014년 기준)의 입헌군주제 왕정 국가다. 요르단의 영토는 89,342㎢로 세계 112위의 작은 나라다. 정식 국명은 요르단 하심 왕국이며 수도는 암만이다.

요르단은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은 행정 및 입법 부문에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한다. 요르단 국왕은 국가원수인 동시에 최고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총리, 내각 장관, 도지사 등 행정부 주요 요직에 대한 임면권을 갖고 있다. 아울러 국왕은 총리 해임권, 하원 해산권, 조기총선 명령권 등을 행사함으로써 절대군주에 가까운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있다.

요르단 의회는 양원제를 따르고 있다. 하원 의원은 민주적인 선거 절차에 따라 150명이 선출되지만, 상원 의원 60명은 국왕이 직접 임명한다. 상원과 하원은 모두 임기 4년으로 되어 있다. 요르단은 하원 의석 150석 가운데 베두인족, 기독교인, 체르케스인 등 소수 종파나 민족을 위한 의석을 21개, 그리고 여성을 위한 의석 15개를 할당해 놓고 있다. 요르단은 정당 정치 제도를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따라 주로 지역이나 부족을 대표하는 개별 정치인들이 선거에 당선되면 이해관계나 성향에 따라 정치연합을 형성하여 하원의 역학구도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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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아카바항구. 이집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잇는 중동 지역의 물류 중심지이다.



요르단은 비산유국으로 석유 및 가스와 같은 화석연료 자원이 부족하고 산업 기반이 취약하지만, 걸프 지역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경제개방을 통해 서비스 산업을 육성하고 외부 자금을 유치하는 경제발전 전략을 취하고 있다. 특히 요르단 남부의 아카바 항은 이집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잇는 중동 지역의 물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요르단은 친서방 국가로서 경제 개방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요르단은 2004년 4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으며, 2001년에는 중동 국가 최초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역내 아랍 국가와의 교역 증대를 위해 2005년 1월 범아랍자유무역지대에 가입했다. 범아랍자유무역지대는 요르단을 비롯한 18개 아랍 국가가 가입해 있으며, 회원국에서 생산된 물품을 무관세로 교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더불어 요르단은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과실송금 전면 허용, 국내 비거주자의 외화계좌 개설 및 송금 허용 등 각종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 2013년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자유지수에 따르면, 요르단은 한국(34위)보다 한 단계 높은 33위에 랭크되었으며, 중동 국가 가운데서는 바레인(12위), 카타르(27위), UAE(28위)에 이어 네 번째로 자유로운 기업 경영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기준으로 요르단의 산업별 국내총생산 기여도 가운데 서비스업이 65.1%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특히 관광 부문은 국내총생산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요르단은 사해-홍해 휴양지, 기독교 성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대도시 페트라 등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즐비하다. 아울러 요르단은 우수한 관광 인프라, 우수한 의료진과 의료기관, 저렴한 의료수가, 정치사회적 안정 등을 경쟁력으로 내세워 중동의 의료관광 허브로 도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요르단은 외국인 환자 18만 명을 유치하여 7억 5,000만 달러의 의료관광 수입을 기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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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대학교(Muhammad V University)에서 이슬람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중동전문 비즈니스 사이트인 메나르(www.menar.co.k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현대 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쿠웨이트의 형성과 발전>, <카타르의 형성과 발전>, <오만의 형성과 발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과 발전>, <바레인의 형성과 발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랍인의 역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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