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제인 애덤스 - 국경과 계급의 편견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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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16-02-0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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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애덤스(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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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후보로 가장 많이 지명된 인물



제인 애덤스는 1931년 미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사회복지관의 효시 격인 헐하우스(Hull House)를 세운 사회운동가이자 반전평화운동가로서의 명성이 이미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기에, 그녀의 수상은 당연할 뿐 아니라 오히려 뒤늦은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애덤스는 1916년부터 1931년까지 91차례 중복 추천되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노벨상 후보로 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애덤스는 1860년 미국 일리노이주 세다빌에서 아홉 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제분소와 제재소를 거느린 부유한 사업가이자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의원을 지낸 정치가였다. 4세에 앓은 척추결핵으로 등이 약간 굽었던 애덤스는 외모 콤플렉스가 깊고, 다른 아이들만큼 달리기를 잘 하지도 못해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한 수줍은 소녀였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기꺼이 즐겼던 일 중 하나는 가족들과 일요 예배를 마친 뒤 선물 바구니를 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선 자선활동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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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혹은 1926년의 제인 애덤스



부친은 딸들의 고등교육을 지지하고 지원했지만, 먼 곳으로 보내려 하지는 않았다. 애덤스는 동부의 명문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부친의 뜻에 따라 집에서 가까운 록포드 여자 대학에 진학했다. 이 대학은 종교적 지향성이 강해, 졸업생 중 꽤 많은 이들이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애덤스의 동기 중 한 명인 벙커(Annie Ellers Bunker)는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명성황후의 주치의가 되었고, 정신여고를 세우기도 했다. 애덤스는 학교의 종교적 지향성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나름의 사회적 소명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첫 세대 여성이었던 애덤스와 그의 동료들은 엘리트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애덤스는 돋보이는 존재였다. 대학시절에는 학생 대표로 활동하며 다방면으로 지도자적 자질을 발휘했고, 학생과 교사들의 존경과 기대를 모았다. 훗날 헐하우스를 함께 세운 스타(Ellen Gates Starr)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던 애덤스는 록포드를 졸업한 뒤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중, 허리 지병으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수술을 거쳐 허리를 곧게 세울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기력도 회복했다. 집에 머물러 있던 애덤스에게 가족들은 결혼을 하든가 독신녀로 남아 가족을 돌봐줄 것을 요구했다. 애덤스가 아팠을 때 다른 가족들이 그녀를 돌봤던 것처럼 애덤스도 자주 아팠던 모친과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형제를 돌보고, 결혼한 형제 자매의 아이들도 돌봐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애덤스는 자신에 대한 가족의 그런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이 구체적으로 보였던 것도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고등교육이 증대되기는 했지만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나 직장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던 시대였다. 훗날 자서전에서 애덤스는 25세 당시의 심정을 매튜 아널드의 시 ‘자존 Self-Dependence’의 일부를 통해 이렇게 표현했다. “내 자신도 역겹고, 묻는 일도 넌덜머리가 난다. / 내가 누구이고 무얼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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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하우스의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1935년.






북미 최초의 사회복지관 헐하우스



그러던 중 런던 여행에서 본 사회복지관 토인비홀에서 영감을 얻은 애덤스는 대학시절 선배였던 스타와 함께 시카고 변두리에 찰스 헐의 주택을 임대하여 ‘헐하우스’라는 복지관을 세웠다(이름의 대가로 4년 동안 무상임대를 할 수 있었다). 애덤스가 아버지의 사망으로 상속받은 5만불(21세기 초의 가치로 환산하면 미화 약 120만불, 원화 약 12억원)을 종자돈으로 내놓고, 스타도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낡은 집을 개조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오래지 않아 헐하우스는 정기적인 기부자를 꽤 확보할 수 있었고, 이와 함께 활동 영역도 넓혀 갔다. 부유한 여성들의 재정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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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의 소박했던 침실. <출처 (cc) ptwo at Flickr.com>



헐하우스는 부자들의 오래된 자선활동 전통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이전까지 자선가들은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푼다는 의식이 강했다. 실제로는 자선가도 자선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정립하고, 자선단체를 통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 얻는 것도 많았지만, 자신들이 빈민층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고 배운다는 의식을 갖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애덤스를 비롯한 사회복지관 활동가들은 도시의 가난한 이웃들과 평등하고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과 목표가 있었다. 애덤스는 자서전에서 “계급들이 상호 의존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헐하우스를 세웠다”고 했다. 노동자에게 기업가가 필요하고, 기업가에게 노동자가 필요한 것처럼 다양한 계급들이 서로 의존하며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실제로 사회복지관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활동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여성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도 했다. 애덤스는 사회복지관이 도시 차원에서도 필요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절실”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의 요구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진솔하게 기술했다. 활동가들과 지역주민이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했던 애덤스는, 도시 빈곤에 대한 집담회가 있을 때면 조사대상이 되었던 이웃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참여하도록 했다. 빈민들을 섣부르게 일반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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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하우스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아이들



이렇게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가는 태도가 다르다 보니, 기존의 자선 활동과는 목표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활동가들은 교육과 문화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열악한 주거와 노동 환경의 개선도 추구하게 되었다. 상하수도 시설과 교육기관 건설을 위해, 또 전염병을 예방하고 보건위생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시 정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아동노동을 제한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법률안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미국은 혁신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고, 그 중심에 헐하우스가 있었다. 헐하우스를 모델로 삼아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 사회복지관이 생겨나, 1910년이 되면 4백여 개에 이르게 된다. 애덤스는 “내가 전국에서 사회복지관 운동의 대모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이 때가 1893년, 그녀의 나이 33세였다.




이민자들의 삶에서 발견한 비전



애덤스는 헐하우스의 활동경험을 토대로 평화론을 정립하고 평화운동을 조직했다. 애덤스의 평화론은 저서『평화에 대한 새로운 이상(Newer Ideals of Peace)』(1907)과『평화와 빵(Peace and Bread in Time of War)』(1922)에 정리되어 있다. 그녀는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공공의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삶의 여정을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애덤스는 국제사회에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민주적이어야 하고, 사회에서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화와 민주와 정의는 서로가 꼭 필요한 관계에 있다는 의미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민주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면 평화가 굳건히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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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하우스가 어린 소녀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활동 시간



애덤스는 정부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녀가 경계했던 것은 ‘군사주의적’ 정부였다. 군사주의적 정부는 국방과 규제에 주로 관심을 두는 정부이며, 그런 정부 아래서 사회관계는 서열 위주의 억압적 관계가 되기 쉽다. 이와 반대에 있는 민주정부는 구성원들의 생활과 복지에 관심을 두는 정부이다. 애덤스는 미국 정부가 ‘군사주의’에서 벗어나 주된 관심을 국민의 생활에 두는 ‘민주적’ 기구로 발전할 것을 기대했다.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은 고위관료와 지식인들이 전쟁과 외교의 기술을 발휘하는 일에 주력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애덤스가 또한 경계했던 것은 다른 나라 혹은 외국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적대시하는 편협한 국가주의였다. 이는 부족주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인 것이며, 유치하고 위험한 정서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모든 애국심을 폄하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가족애가 애국심과 모순된 것이 아니듯, 애국심도 국제주의와 반드시 상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상업과 산업의 발전에 따라 점점 더 삶의 조건이 국제화되기 때문에 국제주의적 정서를 발전시킬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보았다.

애덤스는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노동자의 삶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이는 헐하우스에서 이웃의 가난한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얻은 결론이었다. 이민 노동자들의 마을은 더러운 주거환경과 부족한 물자 속에서 욕설과 싸움만 난무할 것 같지만, 실제 일상을 들여다보면 서로 돕고 보살피는 인정이 넘치는 곳이기도 했다. 이들은 출신 국가가 달라도 함께 이웃으로 지내며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애덤스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들이 편협한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적 국제주의로 나아가야 할 역사적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바람직한 모델을 다양한 국적의 이민 노동자들이 모여 살며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고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 나갔던 가난한 동네에서 찾았다. 또한 전쟁이 나면 징병되어 최전선에 서게 되는 것도 가난한 계층이기 십상이었고, 생필품 부족으로 가장 큰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는 것도 이들이었기에,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평화는 특히 절박하다고 호소했다.

애덤스가 평화운동을 시작한 것은 일찍이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때부터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합병했다. 그러나 애덤스는 이를 제국주의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녀의 평화운동은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 행보가 더욱 빨라졌다. 애덤스는 미국 내 여러 여성단체들을 모아 1915년 1월 여성평화당(Woman’s Peace Party)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당시 수도 워싱턴 디씨에서 열린 여성평화당 집회에 3천명이 넘는 여성이 참여했다. 1915년 4월 28일에서 5월 1일 사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여성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Women)에 애덤스는 미국 여성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다. 그녀는 대표단을 선정할 때 특히 노동자 출신과 이민 노동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참여하도록 했다. 명망가나 학자보다, 가난한 노동자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평화에 대해서도 절실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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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4월 28일 여성국제평화회의를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미국 여성 대표단



유럽과 북미에서 온 1,150명의 여성 대표들은 헤이그에 모여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안서를 작성했다. 교전국들에게 포기하지 않는 지속적 회담을 통해 어떻게든 합의를 이끌어내라고 요구했고, 중립국들에게는 계속 중립을 지키면서 협상을 주재하는 역할을 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를 위해 회의에서는 대표단을 선정해 각국의 국정 책임자들에게 결의내용을 전달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애덤스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수상이나 외교장관 등을 만나 전쟁의 중단을 호소했다.

그러나 애덤스의 노력은 결정적으로 자국에서 외면 받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7년에 참전을 선포했다. 이에 반대했던 애덤스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과격한 빨갱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줌마, 아무 데나 나서는 여자답지 못한 여자라는 등 비난은 맹렬했다. ‘미국혁명의 딸들(Daughters of American Revolution)’이라는 여성단체는 애덤스의 행실이 반국가적이라며 회원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애덤스는 19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각국의 여성 대표들과 함께 ‘여성국제평화자유연맹(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을 조직했고,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구는 지금도 보스턴에 본부를 두고 활동 중이다(wilp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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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제인 애덤스



애덤스가 주도한 여성국제기구들의 평화를 위한 결의안들은 이후 윌슨의 14개 조항에 영향을 미쳤고,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 세계 평화를 기치로 창설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애덤스가 주도한 이 당시 여성평화운동의 평화에 대한 비전은 그보다 더 광범하고 깊이 있는 변화를 지향했다. 여성국제평화자유연맹은 국제기구가 평화와 사회정의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제기구는 각국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무기를 감축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세계적 차원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생필품을 분배할 수 있는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의 자원을 투자의 명목으로 약탈하지 못하도록 하며, 어느 나라에서도 아동노동을 착취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보장하고 양성평등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일상에서 사회정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발전해 나갈 때 평화가 영구히 정착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국경과 계급의 벽을 낮추는 곳에 평화가 있다



애덤스의 비석에는 “헐하우스와 여성국제평화자유연맹의 제인 애덤스(Jane Addams of Hull House and 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라는, 그녀가 직접 작성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애덤스는 노벨평화상으로 받은 상금을 모두 여성국제평화자유연맹에 기부했다. 헐하우스의 창립자만이 아니라 여성평화운동가로도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애덤스의 사상과 활동은 20세기 전환기 미국 역사의 산물이기도 했다. 대규모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가난한 이들이 미국 대도시로 몰려왔다. 미국 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자산가 집안의 젊은이 중 일부가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고, 자신의 재산과 삶을 노동자들과 나누며 그들의 생활 개선에 힘썼다. 그런 흐름의 선두에 섰던 애덤스는 자기 세대의 활동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발전을 이루려면 편협한 국가주의와 유치한 군사주의를 벗어나, 국경과 계급의 편견에 매이지 않는 국제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런 비전은 수십 년간 복지관 활동을 통해 쌓아온 지역 복지기반과 주민들 간의 상호 신뢰가 폭력과 전쟁 앞에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지켜보면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애덤스는 스스로에 대해 “원래 개인적 성향이나 철학 때문에 중도에 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느새 보니 가장 왼쪽에 서 있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그녀가 세계평화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 차원의 편가르기에 휘둘리지 않고, 전쟁은 ‘불법’이며, 어떻게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승전국들이 독일을 징벌한다며 비현실적으로 큰 배상금을 부과했을 때도, 애덤스는 이에 반대했다. 독일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어 다시 전쟁준비를 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녀의 비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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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인 | 서울대 서양사학과 강사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19세기 말 워싱턴디씨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 『서양 여성들, 근대를 달리다』(공저, 푸른역사, 2011), 『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 인식』(공저, 동북아역사재단, 2011), 『영화로 생각하기』(공저,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여성의 삶과 문화』(공저, 한국방송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고무 따라 역사여행』 (너머학교, 2012)등이 있다. 대표 번역서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아름다운 외출: 페미니즘 그 상상과 실천의 역사』(삼천리, 2011), 『유럽의 자본주의』(용의숲, 2009), 『히스토리』(공역, 북하우스, 2009) 등이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미국 역사교육의 쟁점과 전망: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교육을 중심으로」(『역사비평』, 110, 2015), 「지난 10년 미국여성사 연구동향 – 하나의 시각」(『여성과역사』, 21, 2014) 등이 있다.


후원

인문한국지원사업(HK : Humanities Korea),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이 원고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와 네이버가 공동기획했습니다.


출처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발행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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