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연행노정 - 동아시아의 문화로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16-02-06 16:33

본문















14547440033877.png


연행은 전통시대 세계인식의 유일한 창이었고, 연행노정(燕行路程)은 통신사노정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중심축이자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으로 불리는 길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하여 서세동점1)의 흐름을 인식하였고, 중국여행을 통한 선진문물의 체험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자각과 실학적 면모를 형성하는 기회로 작용하였으며, 이는 곧 조선 후기 정신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여행, 연행







14547440047062





연행의 최종 목적지 연경(베이징)에 있는 자금성.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연행은 사신들에게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출처: BY Asadal @Wikimedia Commons (CC BY-SA)>



전통시대 사행은 국가의 사명을 띤 고도의 정치‧외교적 행위였지만,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갇혀 있던 지식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선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사행을 통한 중국관광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견문과 지적 호기심의 열망을 표출할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였다.

사행단의 인적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바로 자제군관(子弟軍官)이다. 이들은 정사부사, 서장관의 자제나 지인 중에서 견문의 목적으로 참여시켜 삼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정식 관리가 아니었기에 사행단의 일정과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과 유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17세기부터 18세기 후반 사이에 김창업, 서명응,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김정희 등 많은 지식인들이 연행사 또는 자제군관으로 참여했다.

연행록에는 한중외교사는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인식, 전쟁, 무역, 경제, 문화교류, 선진문물의 체험, 인적교류 등 여행을 통하여 체험한 소회들이 자유롭게 기록되어 있다. 사행은 한·중 교류사의 가장 직접적인 창구이자 성과이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의 정황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대한 기록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김경선은 『연원직지』에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노가재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1712), 담헌 홍대용의 『담헌연기』(1766)를 ‘연행록의 삼가(三家)’로 파악하였다. 이들 연행록은 연행에 참여하는 이들이 반드시 미리 읽거나 베껴서 휴대하는 필수 여행물품이기도 하였다.




조선이 마음대로 바꾸지 못했던 길, 연행노정



연행노정은 크게 국내 지역과 중국 지역으로 구분한다. 연행노정은 조선정부나 사신들이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특히 중국 내 이동경로는 반드시 중국의 황제가 정한, 이른바 진공로(進貢路)를 따라야 했다.





14547440062160





함경도 역참이 그려진 지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연행의 전체 노정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1천 50리이고, 의주에서 북경(이하 베이징)까지 약 2천 61리, 도합 3천 1백 11리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되돌아오는 여정까지 합하면 6천 리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사행단의 왕복 소요기간은 베이징까지 40여일, 베이징에서의 체류기간 40~60일, 귀국길 30여 일을 더하면, 4~6개월 이상이 걸리는 일정이었다. 현지 정세나 외교현안의 처리 정도에 따라 전체 일정이 1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땅을 처음 밟는 사행은 행역삼고(行役三苦)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즉 ‘새벽엔 안개, 낮엔 먼지, 저녁엔 바람’이라는 세 가지 괴로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여행에 나선 조선의 선비들에겐 견문을 넓히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연행의 시작과 끝, 한양



연행의 시작과 끝은 한양(서울)이었다. 국내지역 연행노정은 중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했던 관계로 서북지역을 관통하는 의주대로가 특별한 노정의 변동 없이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임무를 마친 사신들의 귀국경로 역시 의주대로를 이용하였으며, 사신들은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에게 복명함으로써 사행임무를 종결하게 된다.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 따르면 당시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41개의 역참이 운영되었으며, 양국 사신들을 위한 휴식처와 숙박소로서 모두 25개의 관(館)이 설치되어 있었다.





14547440075766





파주 마산리 박명원 · 화평옹주 합장묘역. 박지원은 팔촌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사절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촬영 신춘호>



현재 실제 답사가 불가능한 북한지역을 제외하고 남한지역에서 연행노정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서울-고양-파주-동파-판문점까지 약 60km 구간이다. 연행의 출발지인 한양과 고양, 파주, 임진강, 민통선 일대까지 옛길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중국지역 연행노정의 확정과 두 번의 열하노정



중국으로 향하는 노정은 중국의 정치·외교적 상황에 따라 수차례 변동이 있었다. 중국지역 연행노정이 확정된 것은 1679년(숙종 5) 무렵이다. 이때 확정된 이동경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압록강 → 진강성 → 탕참 → 책문 → 봉황성 → 진동보 → 통원보 → 연산관 → 첨수참 → 요양 → 십리보 → 성경 → 변성 → 거류하 → 백기보 → 이도정 → 소흑산 → 광녕 → 여양역 → 석산참 → 소릉하 → 행산역 → 연산역 → 영원위 → 조장역 → 동관역 → 사하역 → 전둔위 → 고령역 → 산하이관 → 심하역 → 무령현 → 영평부 → 칠가령 → 풍윤현 → 옥전현 → 계주 → 삼하현 → 통주 → 베이징2)

연행사절이 베이징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서 황제를 만난 일이 두 번 있었다. 바로 연암 박지원이 다녀왔던 1780년(정조 4)의 건륭제 70세 축하사절과 박제가의 1790년(정조 14)의 건륭제 80세 축하사절이다. 보통 연행은 베이징이 최종 도착지였는데, 건륭제의 70세, 80세 축하사절은 베이징을 거쳐 열하(지금의 청더(承德))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경험한 두 번의 열하노정은 600년 사행 역사에서 독특한 경험이자 18세기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인식과 사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기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연행록으로 꼽히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는 열하노정의 결과물이다.




동팔참, 조선의 산천과 닮아


연행의 초절 구간







14547440086018





연행의 삼절. 의주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세 마디 구간



연행노정은 의주에서 베이징까지 약 3,111여 리로 왕복 6,000리가 넘는 거리이다. 십삼산(十三山)이 중간쯤에 속한다. 옛사람들은 의주에서 베이징까지의 구간을 크게 세 마디(節)로 구분하여 인식하였다. 이를 연행의 삼절(三節)이라고 한다. 동팔참(東八站) 지역인 압록강-심양 구간이 초절로 9박 10일 일정에 해당한다. 심양에서 산하이관 구간을 중절이라 하는데 요동벌판을 지나는 11일 일정이며, 산하이관 내에서 베이징까지의 종절 구간은 9일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연행노정 초절구간은 원대의 동북지역 역참 제도였던 동팔참이 기본을 이루었다.





14547440095066




압록강 도강후 두 번째 노숙처인 탕산성 총수참은 북한 서흥 총수산과 흡사하여 사신들로부터 고국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던 공간이었다. 산 아래로 탕하가 흐르고, 오른쪽 옥수수 밭 일대가 사행단의 노숙처로 추정되는 곳이다. <Ⓒ촬영 신춘호>



동팔참이란 ‘요양 동쪽의 여덟 참’이란 의미로, 사행기록마다 동팔참의 위치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동북지역에 대한 지리개념은 크게 동팔참의 틀 속에서 인식되고 있었다. 동팔참은 연행노정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청은 그들의 조상이 이곳에서 세력을 결집하고 떨쳐 일어난 발상지로 여겨 압록강에서 책문까지 약 150여 리를 사람이 살지 않는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행단은 압록강 도강이후 국경의 관문인 책문에 이르기까지 구련성과 탕산성 일대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이미지 목록



1
14547440106530




2
14547440116560



변문진에 남아 있는 고택 앞으로 연행길이 지나간다. 뒷산은 고려산. <Ⓒ촬영 신춘호>





청석령 정상에 있던 관제묘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며, 사진 우측(서쪽)의 급경사가 험준했던 청석령의 지세를 말해준다. <Ⓒ신춘호 @청석령 관제묘 터>




회령령과 청석령의 고개는 지금도 옛길의 흔적이 가장 온전히 남아 있어 옛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남다른 감흥을 갖게 하는 곳이다. 봉림대군(후일 효종)이 청석령을 지날 때 읊었던 음우호풍가(陰雨胡風歌)는 이후 청석령을 넘나드는 사행들의 마음에 청에 대한 비분감(悲憤感)을 심어주곤 하였다.

구련성에서 심양에 이르는 초절구간은 연행노정의 여느 구간보다 조선의 산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지리적 특징이 있다. 높은 산과 고개, 하천이며 기암괴석도 조선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홍경모는 「총수산기」에서 “동팔참의 산천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강역은 다르지만 기맥이 상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봉황산과 조선의 명산을 비교했고, 청석령, 요동 일대를 지나면서 북방 고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사의 강역이 펼쳐진 공간이었기에 북방 고토의식의 가장 강렬하게 피력되던 공간이다. 또한 사행이 임무를 마치고 요동에 들어서면 조선의 산천과 너무나 닮아 있는 이곳을 지나며 고국을 향하는 심리적 안정을 얻기도 했다.




가장 지루하고 힘들었던 연행노정의 중절구간



연행노정의 중절은 연행노정에서 가장 지루하고 힘든 구간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이도정-반랍문-소흑산 구간은 봄이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을 이루었던 곳이다. 여름철이면 장맛비에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넘쳐 사행단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행노정에서 가장 고생스럽고 힘겨운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4547440129336





의무려산 관음각과 요서평야. 담헌 홍대용은 의무려산을 유람하고 <의산문답>을 저술하기도 했다. <Ⓒ촬영 신춘호>



중절구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광녕성 서쪽에 있는 북진묘의무려산이다. 이곳은 사행의 유람처로 이정구·김창업·조문명·홍대용 등이 찾았다. 1776년 연행길에 의무려산을 찾은 홍대용은 고국에 돌아와 철학서인 『의산문답』을 지었다. 홍대용은 이 글을 통해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화이관을 해체하는 자각(自覺)에 이르렀고, 이후 그의 철학적 사상이 정립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연행노정의 종절 구간은 명의 몰락을 목도한 현장이기도 했다. 심양에서 볼모생활 중이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송산, 행산 전투에 청 황제를 따라 종군했다. 연암은 이곳을 지날 때 당시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면서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리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라고 묘사하기도 했다.3) 지금도 산하이관 외곽의 연도(沿道)4)에는 연대(煙臺)와 성곽이 더러 남아있어 치열했던 명·청 전쟁의 현장임을 상기하게 한다.





14547440139110





영원성 조대락(좌) - 조대수(우) 패루 <Ⓒ촬영 신춘호>



1626년 대명전쟁에서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의 결사항전 의지와 홍이포(紅夷砲)의 위력 앞에 부상을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영원성의 조씨패루는 기묘하고 웅장한 위용 때문에 연행길의 훌륭하고 장대한 광경, 또는 보기 드문 기이한 광경으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행은 조씨패루를 통하여 명의 멸망과 쇠퇴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산하이관 너머 중화의 세계로 들어서다


연행의 종절 구간







14547440154785





산하이관 1관문. 산하이관 동라성의 관문으로 옹성구조이며 관문의 성벽에 ‘山海關’이 걸려있다. <Ⓒ촬영 신춘호>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에 입각해서 만리장성을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경계로 삼아왔다. 박지원은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르고, 산하이관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며 산하이관의 규모와 위용을 평가했다. 명‧청 교체기 막바지에 청군에 종군한 소현세자는 명장 오삼계에 의해 산하이관이 열리고 청군이 무혈입성하는 현장에 동행함으로써 조선이 그토록 의지하던 명(明)의 몰락을 직접 목도하기도 하였다.





14547440167637





이제묘 청풍대 터에서 바라본 난하. <Ⓒ촬영 신춘호>



연행의 종절 구간에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공간이 있었다. 대표적인 공간이 이제묘(夷齊廟)이다. 이제묘는 정절의 상징인 백이숙제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난하(灤河)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죽국(孤竹國)의 옛 자리였다는 수양산 인근에 이제묘 터가 남아 있다.





14547440180570





조선사신의 숙소였던 회동관(옥하남관) 자리(현 베이징시공안국) <Ⓒ촬영 신춘호>



통주는 강남에서 이어진 대운하의 북쪽 종착지로 통주성 외곽을 흐르는 노하(潞河)와 운집한 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연행길의 장관(壯觀)으로 묘사되곤 했다. 북경성으로 향하는 사행단은 조양문(朝陽門)에 못 미처 있는 동악묘에서 휴식한 후, 사행단의 공식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으로 향하였다.




연행의 목적지, 연경



연행의 목적지인 연경에서 사신들의 동선은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공식 사행업무 수행 공간, 둘째 서양 과학기술 수용 공간, 셋째 학술문화교류 공간, 넷째 베이징유람 공간이다.





이미지 목록



1
14547440190394




2
14547440201635



청나라 당시의 베이징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출처: e뮤지엄 - 공공누리>





자금성 오문(위)와 태화전(아래). 사행단은 베이징체류기간 황제를 배알하기위해 오문의 서쪽벽 아래에서 기다리거나 태화전의 조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촬영 신춘호>




첫째, 공식 사행업무 수행 공간의 중심은 사신의 숙소인 회동관이다. 회동관은 베이징에 체류하는 동안 조선의 외교대표부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 공간이었다. 사행은 외교문서의 전달 및 답신 수령을 위해 예부와 긴밀하게 협조해야 했고, 황제가 자금성 밖을 나가거나 들어올 때 오문(午門) 서편에 나아가 황제를 영접하거나 전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행이 베이징의 관소에 머무르는 동안 청의 상인들과 교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행을 통한 무역활동은 매우 중요했다.





14547440211799





남천주당과 이마두상 <Ⓒ촬영 신춘호>



둘째, 서양 과학기술 수용 공간이다. 조선 후기 연행사신과 지식인들이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주요 통로는 천주당, 관상대, 그리고 서양서적,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조선의 소현세자는 1644년 청 입관 후 자금성 문연각에서 아담 샬과 천주당을 오가면서 서양의 문물을 인식하였다. 홍수주, 이기지, 홍대용, 박지원 등은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선교사들과 서양의 과학에 대해 토론하고 서양 과학기술의 실체를 목도했다.

셋째, 학술문화교류 공간이다. 조선 사행이 베이징 체류기간 동안 자주 들렀던 곳은 당대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 유리창(琉璃廠) 거리 일대였다. 유리창은 융복사와 더불어 장시가 발달하였는데, 18세기 건륭 시기의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과 맞물려 더욱 번창하였고, 조선의 사신들과 지식인들은 반드시 들려야 하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유리창 인근의 건정호동(현 甘井胡同) 에서 중국의 지식인 엄성(嚴誠)ㆍ육비(陸飛)ㆍ반정균(潘庭筠)과 멀리 타국에서 지기(知己)의 우정을 나누어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박지원은 유리창 동쪽의 양매사가 육일루에서 황포 유세기(俞世基) 등과 교류하였다. 박제가 역시 사고전서 편찬 책임자인 기효람(紀曉嵐), 관음사에 기거하는 양주팔괴 나빙(羅聘)과 교류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 사고전서의 편찬이 마무리되고 유리창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면서, 법원사(민충사), 송균암, 관음사, 보국사 등이 조선 문인들과 청조 문인들의 대표적인 교유공간이 되었다.





14547440225596





유리창 고서점에 진열된 고서 <Ⓒ촬영 신춘호>



넷째, 베이징 유람 공간이다. 베이징 내 유람장소로 대표적인 곳은 국자감, 공묘와 같은 유학의 산실이었다. 국자감과 공묘 방문은 이제묘 참배와 같이 유학자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황실원림인 원명원, 서산의 호수와 정원, 연경팔경, 역대제왕묘, 불교사찰과 도교의 사원인 도관을 두루 유람하였다. 특히 융복사(隆福寺)의 묘회(廟會)는 화려하고 장대했다는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이밖에도 호랑이와 코끼리를 사육하던 호권(虎圈), 상방(象房) 등 조선에서 보기 어려운 희귀한 경험을 하였다.

연행은 외부와 단절되었던 전통시대에 외국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으며, 연행노정은 동서의 문화와 인적물적 교류가 빈번하게 진행되었던 소통(疏通)의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연행노정은 단순한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 역사와 문화가 스며있는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전통시대 한중교류사의 면모를 온전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600여 년간 끊임없이 교류했던 동아시아의 문화로드, ‘연행노정’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유한다는 말로, 외세와 열강이 밀려드는 것을 말함.
주석 레이어창 닫기


압록강(鴨綠江) → 진강성(鎭江城) → 탕참(湯站) → 책문(柵門) → 봉황성(鳳凰城)→ 진동보(鎭東堡) → 통원보(通遠堡) → 연산관(連山關) → 첨수참(甛水站) → 요양(遼陽) → 십리보(十里堡) → 성경(盛京) → 변성(邊城) → 거류하(巨流河) → 백기보(白旗堡) → 이도정(二道井) → 소흑산(小黑山) → 광녕(廣寧) → 여양역(閭陽驛) → 석산참(石山站:十三山) → 소릉하(小凌河) → 행산역(杏山驛) → 연산역(連山驛) → 영원위(寧遠衛) → 조장역(曹庄驛) → 동관역(東關驛) → 사하역(沙河驛) → 전둔위(前屯衛) → 고령역(高嶺驛) → 산하이관(山海關) → 심하역(深河驛) → 무령현(撫寧縣) → 영평부(永平府) → 칠가령(七家嶺) → 풍윤현(豊潤縣) → 옥전현(玉田縣) → 계주(薊州) → 삼하현(三河縣) → 통주(通州) → 베이징(북경 北京)
주석 레이어창 닫기


박지원 저, 이가원역, 『열하일기』, 민족문화추진회, 1977. pp.204~205
주석 레이어창 닫기
연도(沿道)


연달아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신춘호 | 문화콘텐츠학 박사 · 카메듀서 ·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연행노정, 통신사노정, 표해노정 등 한·중·일에 남겨진 우리 역사지리공간의 원형을 연구하고, 영상기록(사진·동영상·GPS)하고 있다.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OUN, 2010년)을 촬영/공동연출 하였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1.03.



주석


1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유한다는 말로, 외세와 열강이 밀려드는 것을 말함.
2


압록강(鴨綠江) → 진강성(鎭江城) → 탕참(湯站) → 책문(柵門) → 봉황성(鳳凰城)→ 진동보(鎭東堡) → 통원보(通遠堡) → 연산관(連山關) → 첨수참(甛水站) → 요양(遼陽) → 십리보(十里堡) → 성경(盛京) → 변성(邊城) → 거류하(巨流河) → 백기보(白旗堡) → 이도정(二道井) → 소흑산(小黑山) → 광녕(廣寧) → 여양역(閭陽驛) → 석산참(石山站:十三山) → 소릉하(小凌河) → 행산역(杏山驛) → 연산역(連山驛) → 영원위(寧遠衛) → 조장역(曹庄驛) → 동관역(東關驛) → 사하역(沙河驛) → 전둔위(前屯衛) → 고령역(高嶺驛) → 산하이관(山海關) → 심하역(深河驛) → 무령현(撫寧縣) → 영평부(永平府) → 칠가령(七家嶺) → 풍윤현(豊潤縣) → 옥전현(玉田縣) → 계주(薊州) → 삼하현(三河縣) → 통주(通州) → 베이징(북경 北京)

3


박지원 저, 이가원역, 『열하일기』, 민족문화추진회, 1977. pp.204~205

4연도(沿道)


연달아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