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이슬람 정치운동의 역사 - 무슬림 형제단에서 아랍의 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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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16-02-0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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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평화상은 튀니지의 '국민4자기구'가 수상했습니다.1) 예상 밖의 깜짝 수상이었다는 평이 많았는데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내전 위기까지 몰렸던 튀니지가 국민4자기구의 노력으로 헌법 시스템에 기반한 정부를 구축하고 성별과 종교, 정치신념에 관계없이 모두의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2011년 중동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은 내전과 쿠데타로 이어져 대부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튀니지만은 독재정권을 끌어내리고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가며 민주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튀니지의 성공적인 민주화 혁명으로 주목 받게 된 이슬람 정치운동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무함마드와 꾸란(Quran)의 탄생




이슬람 정치운동의 역사는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부터 시작합니다. 이슬람 발생지인 아라비아 반도 등 지금의 중동 지역은 이슬람교가 창시되기 전 무법과 무지의 시대(자힐리야)였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율법에 따라 이슬람 국가를 세우면서 이전의 혼란과 무질서가 정리됩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최초의 종교지도자이자 정치지도자였던 것이죠.2) 이슬람교는 알라를 믿는 종교이자, 알라의 말씀대로 살다 간 무함마드의 삶을 따르려는 종교입니다. 무함마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무함마드는 57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무함마드는 열 살 남짓 소년 시절 삼촌을 따라 무역상인의 길에 나섰습니다. 낙타몰이꾼으로 시작한 무함마드는 거래를 중개하며 성실함과 지혜로운 모습으로 주변 상인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한 가정까지 갖게 된 무함마드는 이웃의 삶을 돌아보며 명상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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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서체인 ‘술루스체(Thuluth)’로 쓴 무함마드 <출처: (cc) Morgan Phoenix at wikipedia>



610년 9월, 40살이 된 무함마드는 알누르산의 히라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첫번째 계시를 받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나타나 전한 첫번째 말씀은 "읽어라!"였습니다. 문맹이었던 무함마드는 당황했지만, 계시가 계속되자 운명을 받아들이고 알라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시는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23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이슬람 경전 '꾸란'은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를 후대 칼리파(이슬람 지도자)들이 문자로 기록해 정리한 것입니다. 총 114장, 6236절로 정리된 꾸란은 집대성 된 뒤 단 한 줄도 더해지거나 빠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꾸란의 모든 문장은 알라의 계시라고 믿기 때문에 함부로 수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꾸란은 '암송'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고 그때마다 꾸란을 읽고 암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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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박물관에 전시된 ‘꾸란’ <출처: (cc) LordHarris at wikipedia>






이슬람 국가의 탄생




무함마드가 전한 알라의 말씀은 당시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을 뒤집고 비판했습니다. 돈이 곧 권력이라는 생각, 전투력이 떨어지는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생각,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는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함마드는 알라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알라는 '신(god)'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신을 믿고 우상을 숭배하던 사회에 처음으로 유일신 종교를 만든 것이죠. 무함마드의 주장은 지배계급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가난한 서민과 노예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무함마드를 회유하려다 실패한 메카의 권력자들은 무함마드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무함마드는 가족, 추종자들과 함께 622년 9월 4일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합니다.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의 말씀에 따른 첫 공동체를 세웁니다. 무슬림은 이 공동체를 첫 이슬람국가로 보고, 622년을 이슬람의 원년이라 부릅니다.

메디나에 안정적인 이슬람국가를 세운 무함마드는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메카의 지배세력과 8년에 걸친 전투를 치른 끝에 630년 메카로 돌아왔습니다. 무함마드의 이슬람국가는 전투력에서도 앞선 데다 '알라의 공동체'로서 결속력도 강했습니다. 반면 우상을 숭배하고 권력다툼이 심한데다 내부의 반발이 끊이지 않았던 메카는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무혈입성'이었습니다. 무함마드가 메카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함마드를 지도자로 추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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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가 지지자들과 함께 메카로 입성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Found in Bazil's Hamla-i Haydari, Kashmir, 1808>



무함마드는 성직자라는 계급을 따로 만들지 않아 '사람 위의 사람'이 없도록 했습니다. 소득의 2.5%를 기부하도록 했지만 꼭 사원(종교기관)에 내지 않아도 되고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그 역시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여성을 노예로 삼아 재산처럼 상속하거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갓 태어난 여아를 죽이는 것도 금했습니다.3)

무함마드는 632년 6월 생의 마지막 순례와 기도를 마치고 메디나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뒤 3명의 칼리파,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 이븐 알 카탑, 우스만 이븐 아판, 알리 이븐 아비 탈립 등이 뒤이어 이슬람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무슬림은 무함마드 이전의 혼란과 무질서를 정리하고 유일신의 말씀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 이 시대를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로 생각합니다. 이슬람 국가가 처음으로 세워진 622년부터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진 1258년까지 이슬람 국가는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전성기 때 이슬람 국가의 영토는 북아프리카 세네갈부터 아시아 필리핀 지역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슬람 최초의 정치·사회운동,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이슬람 국가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과 몽골침략을 거치며 쇄약해지고 멸망했습니다. 몽골과 뒤이어 지배한 오스만제국도 이슬람의 정체성을 존중해주는 듯 했지만 더 이상 무함마드가 세웠던 아랍이 중심이 되는 이슬람 국가는 아니었죠. 이슬람 국가는 여러 공동체로 분열됐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번갈아가며 중동 지역을 식민지화했습니다. 여기에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슬람 국가는 서구 열강에 이용됐고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1928년 이집트에서 구성된 이슬람 최초의 정치·사회운동 단체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이자 이맘(이슬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었던 하산 알반나(1906~1949년)가 지인들과 함께 만든 이 단체는 '이슬람 원리에 따라 살자'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슬람 국가가 멸망하고 서구 열강에 이용되는 것은 무슬림이 이슬람의 율법대로 살지 않고 서구화·세속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었죠. 영국의 식민지로 수탈당하며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고 꾸란대로 평등하게 살자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습니다. 특히 서민과 노동자 계층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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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형제단을 세운 하산 알반나



힘이 커지면 위험도 커지는 법이죠. 1940년대 무슬림 형제단이 단원만 50만명에 이르는 전국 최대의 조직으로 성장하자 이슬람 왕정은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의 해체를 발표했고 단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투옥과 추방, 처형을 거치며 무슬림 형제단도 과격해졌습니다.

1948년 무슬림 형제단 조직원이 마흐무드 알누크라시 파샤 총리를 암살했습니다. 죽음은 다시 죽음을 불렀습니다. 1949년 무슬림 형제단을 만든 알반나가 살해당합니다. 정부가 암살에 가입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결속력은 커져갔습니다.

1952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잠시 무슬림 형제단과 협력했지만, 통치 방향을 두고 대립했습니다. 1954년 무슬림 형제단이 나세르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시도가 드러나면서 무슬림 형제단은 더욱 더 탄압을 받게 됩니다.

주류에선 밀려났지만 무슬림 형제단은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꾸준히 힘을 다졌습니다. 그 결과 1984년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2005년에는 전체 의석의 20%에 해당하는 88석을 확보하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야권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호스니 무바라크 독재정권이 무너졌고, 무슬림 형제단은 그해 4월 '자유정의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했습니다. 합법 정당이 된 무슬림 형제단은 총선에서 498석 중 235석을 확보하며 1당이 됐고, 2012년에는 대선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이슬람 최초의 정치·사회조직에서 집권당으로까지 성장한 무슬림 형제단은 2013년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탄압의 대상이 됐습니다. 현 정부는 전 독재자 무바라크의 혐의를 벗겨주고, 무슬림 형제단원들은 테러단체로 규정해 잡아들였습니다.

이집트 법원은 2014년 무슬림 형제단이 낳은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4) 100명이 넘는 단원들이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무슬림 형제단도 이슬람 율법에 따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평화세력과 무력으로라도 정권을 되찾자는 과격 세력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무슬림 형제단의 고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서,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PLO)와 하마스




팔레스타인의 정치운동사를 알려면 먼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민족이라는 비난과 함께 핍박을 받으며 2000년 동안 유럽 각지를 유랑하며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슬람교, 기독교의 성지이자 유대인의 성지이기도 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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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전쟁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이기기 위해 유대인에게 손을 뻗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쟁에서 영국을 돕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창설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입니다.

그런데 영국은 그보다 2년 전 아랍인들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영국을 도와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과 아랍 지역에 이슬람 독립 국가를 세우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죠. 이것이 1915년 후세인-맥마흔 선언(Hussein-McMahon Correspondence)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유대인들과 맺은 협정 사이에 또 다른 비밀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나눠서 통치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다스리기로 했습니다. 1919년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아랍을 배신했습니다. 미국은 유대인 편을 들었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 민족이 분리해서 국가를 세우는 안을 통과 시켰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정확히 둘로 갈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농사를 할 수 있는 대부분 땅은 유대인 차지가 됐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들이 살던 아랍의 영토에 이스라엘을 건국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맞선 PLO(파타)와 하마스는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의 분노를 담아 만들어졌습니다. 정치적 협상, 대화, 애원, 국제사회에 호소 등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자 팔레스타인들은 무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아랍연맹은 1964년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정식 기구로 인정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끈 PLO는 군사조직을 키웠고 1972년 뮌헨에서 올림픽에 참가하러 온 이스라엘 대표단 11명을 암살했습니다. 국제사회에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의 힘을 알린 큰 사건이었죠.

PLO는 1988년 11월 모든 테러를 중단하겠다며 팔레스타인 설립을 선포했습니다. 전쟁 대신 평화를 택하겠다는 팔레스타인의 움직임은 평화 무드를 조성했습니다. 1993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Oslo Accord)을 맺었습니다. 서로가 존재를 인정하고 국경선을 지키기로 한 '평화의 약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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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



오슬로 협정이 맺어지기까진 '인티파다'라고 불린 민중봉기가 있었습니다. 1987년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이스라엘인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었습니다. 분노 시위는 7년동안이나 이어졌고, 100만명 넘는 팔레스타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전세계에 팔레스타인의 참혹상을 알린 계기가 됐습니다.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을 압박할 수 없도록 만든 사건이기도 했죠.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2000년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무장병력을 이끌고 무슬림 성지이자 유대교 성지인 알아크샤 성지를 예고 없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에서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계속되자 보다 과격한 무장조직도 등장했습니다. 1차 인티파다를 계기로 만들어진 '하마스'는 1988년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유일한 길은 무력투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분노에 억눌린 팔레스타인들은 무기력해진 PLO보다 하마스에 힘을 실어줬고 그 결과 2006년 총선에서 파타를 세력을 누르고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하마스를 위험한 테러조직으로 본 미국의 도움으로 파타 출신 마흐무드 압바스가 하마스의 자치정부를 해산하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세계 속에서 존재감을 넓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유엔에서 '비회원국 옵서버 국가' 지위를 얻었고 2015년 1월에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도 가입해 2014년 7~8월 발생한 이스라엘의 가자공습을 전쟁범죄로 고발했습니다.5)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란은 1979년 이슬람 국가로 재탄생했습니다. 혁명 이전 이란을 다스리던 팔레비 왕조는 석유사업을 독점하고 지나친 친서방정책을 펴며 국민들을 탄압했습니다. 왕정의 부패와 폭압정치가 심해지고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1978년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왕정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이 흐름을 이슬람 지도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했습니다. 1978년 12월 11일 이란 인구의 10%가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국민 수를 대비해 가장 많은 인원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사례라고 합니다. 결국 국왕 일가는 도망가듯 국경을 넘었고, 호메이니는 1979년 3월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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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이란 시민들. 1979년.



이란은 현재 시아파의 맹주로 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미국과 핵협상을 타결하면서 경제 제재도 곧 풀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왕조가 다스리다 서구화·세속화됐던 나라가 이슬람 율법에 따라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난 이란의 역사는 많은 무슬림들에게 가장 혁명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됐습니다.




정말 실패일까, 아랍의 봄




노벨상위원회가 노벨평화상을 튀니지의 국민4자기구에 준 것은 여전히 전쟁과 독재로 고통받고 있는 중동의 시민들을 응원하기 위한 뜻도 있습니다. 2010년 12월 튀지니에서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청년 모하마드 부아지지가 경찰과 대립하다 분신하면서 튀지니에선 거대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억압을 참고 견디며 살던 튀니지인들의 분노는 비슷한 상황에 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알제리, 이집트, 요르단, 예멘,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이라크, 바레인, 쿠웨이트, 모로코, 레바논 등 민주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거대한 물결은 튀니지의 국화인 재스민을 인용해 '재스민 혁명' 또는 '아랍의 봄'으로 불렸습니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아랍의 봄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 들었고 더 큰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은 힘없는 민중을 폭압했고 2015년 11월 현재까지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선 독재정권이 물러났지만 다시 다른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죠. 예멘은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분쟁과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과 사우디가 이끄는 아랍연합군까지 가세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튀니지만이 유일하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민들이 중심이 돼 헌법체제를 수립하면서 근래 가장 성공한 이슬람 정치운동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러나 아랍의 봄에서 확인된 많은 무슬림들의 열망은 잠재되어 있을 뿐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선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테고, 그 소망들은 씨앗이 돼 언제든 어떻게든 다시 새로운 싹으로 피어나지 않을까요. 다시 올 아랍의 봄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서정민 지음,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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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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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교 | 경향신문 기자


발행2015.11.05.



주석


1


http://www.nobelprize.org

2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서정민 지음, 시공사

3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청아출판사

4


http://www.independent.co.uk

5


http://www.icc-cpi.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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