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아랍에미리트(UAE)의 왕가들 - 7개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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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3회 작성일 16-02-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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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는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으스 알 카이마, 아즈만, 움무 알 쿠와인, 푸자이라 등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방국가다.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연방을 구성하는 각 토후국은 세습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개 토후국을 다스리고 있는 왕가는 모두 6개다. 나흐얀 가문은 아부다비를, 마크툼 왕가는 두바이를, 카심 왕가는 샤르자와 라으스 알 카이마를, 누아임 왕가는 아즈만을, 무알라 왕가는 움무 알 쿠와인을, 샤르크 왕가는 푸자이라를 각각 통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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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는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으스 알 카이마, 아즈만, 옴무 알 쿠와인, 푸자이라, 이상 7개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다. 사진은 영토와 경제규모가 가장 큰 아부다비와 두바이. Michael Rehfeldt/flickr




각 토후국의 통치자는 아랍어로 ‘아미르(Amir)’라고 불리며, 영어로는 흔히 ‘에미르(Emir)’로 표기된다. 그리고 각 토후국 통치자가 다스리는 영토는 아랍어로 ‘이마라트(Imarat)’라고 불리며, 영어로는 ‘에미리트(Emirate)’로 표기된다. 외교, 안보, 국방, 교육, 환율, 국적 및 이민 관련 업무는 연방정부가 담당하지만, 각 토후국은 경제개발 및 예산집행에 있어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총리, 부총리, 각 부처 장관 등 집행부의 주요 공직은 7개 토후국별로 골고루 배분되어 있지만, 가장 큰 경제 규모와 인구를 지닌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왕족이 대통령, 총리, 부총리, 국방부 장관, 재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별 왕가의 특징과 현안





나흐얀 왕가(아부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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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초석을 다진 자이드 빈 칼리파.



나흐얀(Nahyan) 왕가는 오늘날 아랍에미리트 연방국 중 영토와 경제 규모에서 가장 큰 아부다비의 통치 가문이다. 나흐얀 가문은 원래 사막 지역인 리와에 정착했던 바니야스 부족의 일원이었다. 1761년 디얍 빈 이사 알 나흐얀(재위 1761~1793년)이 바니야스 부족 일부를 데리고 아부다비 섬으로 이주하면서 나흐얀 왕가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 아랍에미리트 지역에서는 카와심 부족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820년 영국에 의해 본거지인 라으스 알 카이마가 함락되고 대규모 함대가 궤멸되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이를 계기로 나흐얀 가문은 바니야스 부족의 힘을 규합하고 아랍에미리트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흔히 ‘자이드 대왕’이라고 불리는 자이드 빈 칼리파(재위 1855~1909년)의 통치 기간에 나흐얀 가문은 아랍에미리트의 유력 가문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아부다비는 진주 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무역이 발전하면서 수입이 증대되었다.

1905년 자이드 빈 칼리파는 아랍에미리트 지역의 각 토후국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그 회의로 나흐얀 가문은 지역 리더로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1971년 아랍에미리트 연방 결성의 효시가 되었다. 1909년 자이드 빈 칼리파의 사망 직후 약 20년 동안 나흐얀 가문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자이드 빈 칼리파에게는 모두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에 의한 왕위 계승이 정착되지 않은 관계로 형제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1922년 술탄 빈 자이드(재위 1922~1926년)는 형제인 함단 빈 자이드(재위 1912~1922년)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1926년 또 다른 형제인 사크르 빈 자이드(재위 1926~1928년)에게 살해되었다.

1928년 샤크부트 빈 술탄(재위 1928~1966년)이 왕위에 등극한 후 아부다비는 한동안 정치적으로 안정기를 맞았다. 그가 재위했던 38년 동안 아부다비는 석유의 발견과 함께 급속한 변혁의 시기를 맞이했으며, 1939년 영국과 석유 채굴권 계약을 체결했다. 1958년에 아부다비에서 처음 석유가 발견되었고 1962년에는 첫 석유 수출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샤크부트 빈 술탄은 개인적으로 매우 완고하고 보수적인 성품을 가진 인물로서 근대화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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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 연방 결성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자이드 빈 술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근대적 인프라 건설에 투자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오일 머니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해치는 것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더구나 그는 보호령 종주국인 영국이 제시한 석유 및 경제개발 계획에도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나흐얀 왕족 일원과 영국은 샤크부트 빈 술탄이 아부다비의 근대화를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1966년 8월 6일 그의 동생인 자이드 빈 술탄(재위 1966~2004년)이 나흐얀 왕족의 지지와 영국의 후원하에 왕위에 등극했다. 1971년 자이드 빈 술탄은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등 7개 토후국을 규합하여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결성한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그는 아랍에미리트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04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의 사망 후부터 현재까지 그의 아들인 칼리파 빈 자이드가 아부다비의 통치자를 계승하고 연방 대통령직을 겸직하고 있다.



마크툼 왕가(두바이)


마크툼(Maktoum) 왕가는 오늘날 아랍에미리트 연방국 중 영토와 경제 규모에서 두 번째로 큰 두바이의 통치 가문이다. 원래 마크툼 왕가는 아부다비의 나흐얀 왕가와 마찬가지로 바니야스 부족에 속했다. 1833년 무렵, 마크툼 빈 바티 빈 수하일(재위 1833~1852년)이 약 800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아부다비에서 두바이로 이주했고, 이를 계기로 마크툼 가문이 두바이의 통치 왕가가 되었다.

19세기 말 마크툼 빈 후슈르(재위 1894~1906년) 통치 시절 두바이는 걸프 지역의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하며 걸프 지역 상인들에게 관세 면제와 같은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때마침 1887년 카와심 부족이 지배했던 페르시아 영토 내 린가 항이 페르시아로 귀속되었다. 페르시아가 린가 항에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자 그곳에 거주했던 상인들은 대거 두바이로 이주하였다. 마크툼 빈 후슈르의 적극적인 무역장려 정책 덕분에 두바이는 페르시아, 인도 등에서 온 외국 상인들의 주요 거점으로 성장했다.

역사적으로 마크툼 왕가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분열이 거의 없었다. 유일무이한 왕위 계승 갈등은 1929년 사이드 빈 마크툼(재위 1912~1958년)이 삼촌인 마니 빈 라시드에 의해 폐위된 사건이다. 하지만 사흘 뒤에 그는 다시 복위하여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지켰다. 사이드 빈 마크툼의 아내이자 현 국왕인 무함마드 빈 라시드의 할머니인 훗사 빈트 무르는 매우 정력적인 여성 사업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녀는 대토지를 소유하고 직접 무역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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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라시드 빈 사이드.



라시드 빈 사이드(재위 1958~1990년)는 두바이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두바이를 중동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공항, 은행, 항만 등 근대 인프라를 건설했다. 1971년 아랍에미리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그는 아부다비의 통치자 자이드 빈 술탄과 함께 연방국 건설을 주도했고 부통령 겸 총리로 취임했다.

1990년 라시드 빈 사이드의 사망 후, 그의 장남인 마크툼 빈 라시드(재위 1990~2006년)가 두바이의 통치자를 계승한 후 연방 총리를 역임했다. 2006년 마크툼 빈 라시드가 호주 방문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라시드 빈 사이드의 셋째 아들인 무함마드 빈 라시드(재위 2006~현재)가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했다. 현재 두바이의 통치자를 역임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라시드는 인공섬 건설,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 칼리파 건설 등을 통해 두바이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었다.



카심 왕가(샤르자, 라으스 알 카이마)


카심 왕가는 현재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개 토후국 가운데 샤르자와 라으스 알 카이마를 통치하고 있다. 카심 왕가는 18세기부터 아랍에미리트 해안 지역을 통치해 왔던 카와심(Qawasim) 부족에서 유래되었다. 아랍어로 카와심은 카심의 복수형으로, 집단을 지칭할 때는 ‘카와심’으로 부르고 개인의 성씨로 사용될 때는 ‘카심’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오늘날 샤르자와 라으스 알 카이마의 왕족 이름에는 카심의 형용사형인 ‘알 카시미’가 성씨로 끝에 따라 붙는다.

카와심 부족은 18세기 중반 라으스 알 카이마와 샤르자를 근거지로 삼고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제외한 아랍에미리트의 거의 모든 해안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은 인도로 가는 안전한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걸프 해안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카와심 부족의 통치자 술탄 빈 사크르(재위 1803~1866년)는 영국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상선을 자주 공격하곤 했는데, 이에 영국은 1819년 12월 군함 3척과 3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1820년 초 카와심 부족의 본거지인 라으스 알 카이마는 함락되었고 그들이 자랑했던 대규모 함대도 거의 대부분 파손되었다.

술탄 빈 사크르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커다란 손실을 입었지만, 여전히 강하고 능력 있는 군주로서 주변 토후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866년 그가 사망하자 아즈만, 푸자이라, 칼바 등 주변 토후국이 독립을 꾀하면서 카와심 부족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술탄 빈 사크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카와심 부족의 본거지인 샤르자와 라으스 알 카이마가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1866년 술탄 빈 사크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었던 칼리드 빈 술탄, 살림 빈 술탄, 이브라힘 빈 술탄 등 세 형제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들은 샤르자를 통치하다가 폐위되면 라으스 알 카이마로 도망가서 군주가 되거나, 반대로 라으스 알 카이마를 통치하다가 폐위되면 샤르자로 도망가서 군주가 되었다. 이들은 새롭게 왕위에 오를 때마다 경쟁관계인 다른 형제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고, 그 결과 샤르자와 라으스 알 카이마는 점점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1년 라으스 알 카이마의 통치자였던 술탄 빈 살림(재위 1921~1948년)은 샤르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과 동시에 그는 영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해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 토후국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라으스 알 카이마는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 1927년 술탄 빈 살림은 사촌과 다툼을 벌였고 결국 그를 추방시켰다. 하지만 1948년 그는 조카인 사크르 빈 무함마드(재위 1948~2010년)에 의해 폐위되었다.

1971년 12월 2일 아랍에미리트 연방국이 결성되었을 때 라으스 알 카이마는 연방으로 참여하기를 주저했다. 당시 통치자였던 사크르 빈 무함마드는 라으스 알 카이마가 인구나 경제적으로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연방에 가입할 경우 종속적인 지위로 전락할 것을 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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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후국 중 라으스 알 카이마는 경제적 토대가 취약하여 연방 가입을 망설였다. Bob McCaffrey/flickr



그 무렵 이란은 영국이 걸프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기회를 틈타 샤르자가 관할해 왔던 아부무사 섬과 라스 알 카이마가 관할해 왔던 툰부 섬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크르 빈 무함마드는 라으스 알 카이마가 독자적으로 독립국가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결국 1972년 2월 10일 아랍에미리트의 일곱 번째 연방 회원국으로 뒤늦게 정식 가입했다. 현재 라으스 알 카이마 통치자는 사우드 빈 사크르(재위 2010년~현재)로서, 그는 선왕인 사크르 빈 무함마드의 넷째 아들이다. 사우드 빈 사크르는 2003년에 왕세자로 책봉된 후 2010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샤르자 역시 라으스 알 카이마와 분리 독립한 후에도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1951년 술탄 빈 사크르가 런던에서 수술 후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무함마드 빈 사크르가 스스로 왕위를 선포했다. 하지만 카심 왕가의 문중회의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술탄 빈 사크르의 아들인 사크르 빈 술탄(1차 재위 1951~1965년, 2차 재위 1972년)이 왕위에 올랐다. 사크르 빈 술탄은 아랍연맹과 경제 관계를 강화하여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시도했다. 그의 이 같은 외교 정책은 영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결국 영국의 압력으로 국왕 자리를 사임하고 이집트로 망명을 떠났다.

1971년 샤르자는 신생 독립국인 아랍에미리트 연방에 가입했다. 하지만 아랍에미리트 연방 가입 후에도 샤르자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혼란이 거듭되었다. 1972년 칼리드 빈 무함마드(재위 1965~1972년)는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사촌 형제인 사크르 빈 술탄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비롯한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다른 토후국은 그의 유혈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사크르 빈 술탄은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1972년 현재 샤르자 통치자인 술탄 빈 무함마드(재위 1972년~현재)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암살당한 칼리드 빈 무함마드의 형제이며, 높은 학식으로 국민들의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 왕위를 둘러싼 형제와의 다툼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987년 그의 형제인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를 차지했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비롯한 아랍에미리트 연방 토후국은 샤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연방최고위원회를 소집하여 두 형제간의 다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 술탄 빈 무함마드는 국왕으로 복귀했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는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990년 술탄 빈 무함마드는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를 왕세제에서 해임했다.



누아임 왕가(아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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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임의 현재 통치자인 후마이드 빈 라시드 알 누아이미.



누아임(Nuaim) 가문은 아즈만의 통치 왕가이다. 아즈만은 면적이 260㎢에 불과한 아랍에미리트 연방국 가운데 가장 작은 토후국이다. 또한 석유나 가스 자원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연방 정부에 의존하고 있다.

누아임 가문은 1810년경 알 부 샴스 부족으로부터 해안 정착 지대를 빼앗으면서 아즈만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라시드 빈 후마이드(재위 1928~1981년) 재위 시절인 1971년 아즈만은 아랍에미리트 연방에 가입했다.

현재 통치자는 후마이드 빈 라시드 알 누아이미(재위 1981년~현재)로서 1981년 부친인 라시드 빈 후마이드의 사망 후 왕위를 계승했다.

 



무알라 왕가(움무 알 쿠와인)


무알라(Mualla) 가문은 움무 알 쿠와인의 통치 왕가이다. 움무 알 쿠와인은 면적이 750㎢에 불과한 작은 토후국으로, 석유나 가스 자원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연방 정부에 의존하고 있다.

1820년 영국이 카와심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랍에미리트 해안을 점령한 후부터 무알라 가문은 움무 알 쿠와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동안 무알라 가문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없이 비교적 평온한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1922년 라시드 빈 아흐마드(재위 1904~1922년)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약 7년 동안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2명의 통치자가 살해당했다. 1929년 아흐마드 빈 라시드(재위 1929~1981년)가 등극한 이후 왕권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의 사망 후 왕위는 아들인 라시드 빈 아흐마드(재위 1981~2009년)를 거쳐 손자인 사우드 빈 라시드(재위 2009년~현재)에게 계승되었다.



샤르크 왕가(푸자이라)


샤르크(Sharq) 가문은 푸자이라의 통치 왕가다. 역사적으로 푸자이라는 오만의 무스카트의 지배를 받다가, 1850년부터 샤르자의 통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1901년 하마드 빈 압둘라는 샤르자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으나 영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푸자이라가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것은 무함마드 빈 하마드의 통치 시기였던 1951년이었다. 현재 통치자는 하마드 빈 무함마드(재위 1974년~현재)로서 1974년 부친 무함마드 빈 하마드가 사망한 후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랍에미리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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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1971년 이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지역에는 단일 왕조가 지배하는 통일 독립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걸프 해안 지역은 16세기 이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같은 유럽 열강들이 동서 무역로 확보를 위해 각축전을 벌였던 곳이었고, 이곳의 여러 토후들은 서로 공존과 갈등을 반복하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18세기 이후 아랍에미리트 지역에서 확실하게 세력 기반을 다진 부족은 바니야스와 카와심 두 부족이었다. 오늘날 아부다비의 왕가인 나흐얀 가문과 두바이의 왕가인 마크툼 왕가는 바니야스 부족 출신이며, 라으스 알 카이마와 샤르자의 왕가인 카심 가문은 카와심 부족 출신이다.

바니야스 부족은 20여 개 씨족으로 구성된 일종의 부족 연맹체로서 16세기부터 아부다비 사막 남쪽에 위치한 리와에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바니야스 부족의 중심 세력은 나흐얀 가문이었다. 1761년 무렵 나흐얀 가문은 해안 도시인 아부다비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1833년에는 같은 바니야스 부족 출신인 마크툼 가문이 두바이에 정착하여 독립 토후국을 건설했다. 초창기에 나흐얀 가문은 두바이에서 마크툼 가문이 독립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19세기 중반부터는 독립을 인정하며 동맹관계를 구축했다.

한편 카와심 부족은 18세기 중반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제외한 아랍에미리트의 거의 모든 해안 지역을 다스리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라으스 알 카이마와 샤르자의 항구를 중심으로 아라비아 연안과 페르시아 연안을 넘어 인도양까지 활동 범위를 확장시켜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군림했다. 19세기 초 카와심 부족은 60척이 넘는 대형 선박과 약 2만 명에 달하는 선원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초 카와심 부족은 영국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로 가는 해상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걸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카와심 부족은 걸프 지역 세력 확장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19세기 초 약 20여 년 동안 카와심 부족과 영국은 걸프 해상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겪게 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은 자신에게 저항했던 카와심 부족을 ‘해적’이라고 칭했으며, 아랍에미리트 해안 일대를 ‘해적해안’이라고 이름 붙였다. 카와심 부족을 궤멸시키기 위해 영국은 1805년, 1809년, 1811년 연속으로 라으스 알 카이마에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1819년 12월에 벌어진 전쟁에서 영국은 군함 3척과 3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고, 그 결과 1820년 초 카와심 부족의 본거지인 라으스 알 카이마는 함락되었고 그들이 자랑했던 대규모 함대도 거의 대부분 파손되었다.

영국은 카와심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걸프 해안 지역에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세력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1820년부터 카와심 부족을 비롯하여 아부다비, 두바이, 아즈만, 움무 알 쿠와인 등 아랍에미리트 지역의 각 토후들은 영국에게 항복하고 개별적으로 일반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이 협정으로 걸프 해안의 각 토후는 영국에 대한 노략질을 중단하기로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영국은 각 토후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한편 1853년 영국은 각 토후국에게 영구해상휴전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협정은 각 토후국에게 서로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할 것을 명문화했다. 영국은 협정에 참여한 토후국들을 ‘휴전협정국가’라고 통칭하기 시작했으며, 이 명칭은 1971년 아랍에미리트가 독립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1892년 아부다비를 필두로 한 휴전협정국가들은 영국과 배타적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971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 협정에서 각 토후국은 영국의 동의 없이는 어떤 국가에게도 영토를 양도하지 않고, 영국 이외의 어떤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외교권을 영국에게 양도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휴전협정국가에 참여한 각 토후국에게 외세로부터의 보호를 약속했다.

19세기 말과 20세 초반 아랍에미리트의 경제는 주로 어업과 진주 채취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불어닥친 세계적인 공황의 여파로 진주에 대한 수요가 급감하고, 특히 일본이 진주 양식에 성공하면서 진주 수출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인도는 걸프 지역으로부터 수입하는 진주에 대해 막중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랍에미리트의 진주 채취 산업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1939년 아부다비의 통치자였던 샤크부트 빈 술탄이 영국과 석유 채굴권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아랍에미리트 지역에서 석유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석유 개발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1958년에 아부다비에서 최초로 석유가 발견되었다. 아부다비는 1962년에 석유를 처음 수출하기 시작했고, 두바이도 1969년 석유를 첫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석유 수출로 풍부해진 재정 수입을 바탕으로 학교, 주택, 병원, 도로 등과 같은 대규모 근대 인프라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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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의 유전. 진주 채취에 의존하던 아랍에미리트는 아부다비와 두바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Guilhem Vellut/flickr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영국은 중동과 아시아 지역을 식민통치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결국 1968년에 영국은 1971년까지 걸프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당시 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보호령으로 지배를 받아온 카타르, 바레인,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으스 알 카이마, 아즈만, 움무 알 쿠와인, 푸자이라 등 9개 토후국으로 구성된 거대 연방국가 건설을 위한 협상이 3년 동안 진행되었다. 하지만 각 토후국이 연방 내에서의 지위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 협상은 난항에 부딪혔다. 그 결과 바레인은 1971년 8월 단독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카타르 역시 1971년 9월에 독립을 선언했다.

이 무렵 아부다비의 통치자였던 자이드 빈 술탄은 신속하게 나머지 6개 토후국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바이의 통치자였던 라시드 빈 사이드와 함께 연방국가 설립을 주도해 나갔다. 그 결과 1971년 12월 2일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즈만, 움무 알 쿠와인, 푸자이라 등 6개 토후국이 참여하는 아랍에미리트 연방국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라으스 알 카이마는 1972년 2월 10일 일곱 번째 연방 회원국으로 뒤늦게 정식 가입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주요 군주





건국의 아버지,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아부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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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1975년)



자이드 빈 술탄(1966~2004년 아부다비 통치자, 1971~2004년 연방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통치자로서 197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결성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1971년 7개 토후국 군주로 구성된 연방최고위원회에서 아랍에미리트 연방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1976년, 1981년, 1986년, 1991년 연속으로 매 5년마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11월 2일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자이드 빈 술탄은 33년 동안 대통령을 역임하며 신생 독립국 아랍에미리트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자이드 빈 술탄은 1918년 술탄 빈 자이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이드 대왕’이라고 불리는 19세기 말 위대한 군주 자이드 빈 칼리파의 손자이기도 하다. 1966년 자이드 빈 술탄은 형인 샤크부트 빈 술탄1)을 궁정 쿠데타로 폐위시키고 아부다비의 통치자가 되었다.

1971년 독립과 함께 아랍에미리트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자이드 빈 술탄은 7개 토후국의 의견 차이를 조율하며 국가 통합과 결속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중동 국가로는 드물게 언론과 종교의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외국인 주민을 위해 과감하게 기독교 교회나 힌두교 사원을 건립하는 것도 허용했다. 하지만 서구식 의회제도 도입에는 소극적이었다.



현 대통령,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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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국을 방문한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윈저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필립공과 함께한 모습이다.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Khalifa bin Zayed Al Nahyan)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아부다비의 통치자이자 아랍에미리트 연방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다. 그는 연방방위군 사령관직도 겸직하고 있다. 칼리파 빈 자이드는 선왕 자이드 빈 술탄의 첫째 아들로 1948년 아부다비의 오아시스 마을인 알 아인에서 태어났으며, 영국의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004년 11월 2일 부친인 자이드 빈 술탄이 사망하자 칼리파 빈 자이드는 당일 아부다비의 통치자로 등극했고, 다음 날인 11월 3일 각 토후국 통치자가 모인 연방최고위원회에 의해 제2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1971년 독립 이래 2014년 현재까지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은 나흐얀 왕가에서 독점하는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두바이를 중동 물류 허브로 만든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마크툼 (두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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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마크툼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마크툼(1958~1990 두바이 통치자, 1979~1990 연방 부총리)은 작은 어촌에 불과한 두바이를 세계적인 물류 중심지로 만든 두바이 근대화의 아버지다. 그는 1958년부터 1990년까지 32년 동안 두바이를 통치했으며, 아부다비의 통치자 자이드 빈 술탄과 함께 1971년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랍에미리트 독립 후 라시드 빈 사이드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연방 총리직을 겸임했다.

어린 시절 두바이에 정식 학교가 세워지지 않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사업 감각과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바이의 통치자로 즉위한 직후부터 그는 두바이를 중동의 무역 허브로 만들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가졌다. 1966년에 두바이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지만 그 생산량이 50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지자, 그는 아예 석유가 없다고 가정하고 두바이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두바이는 영원히 상업도시로 남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석유를 팔아서 번 오일 머니를 물류 산업에 집중 투자하였고, 그 결과 1972년에 라시드 항이, 그리고 1979년에 제벨 알리 항이 각각 완공되었다. 특히 제벨 알리 항은 현재 세계 최대의 인공 항구이자 중동 최대의 항구로서 두바이가 중동의 물류 허브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슬하에 마크툼 빈 라시드, 함단 빈 라시드,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아흐마드 빈 라시드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첫째 아들인 마크툼 빈 라시드가 1990년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2006년에 사망했고, 이후 셋째 아들인 무함마드 빈 라시드가 현재까지 두바이 통치자 및 총리직을 계승하고 있다.



혁신과 창조의 리더십, 무함마드 빈 라시드 (두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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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폴란드를 방문한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 마크툼. 오른쪽은 폴란드 전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이다.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 마크툼(Muhammad bin Rashid Al Maktoum)은 2006년부터 현재까지 두바이의 통치자이자 아랍에미리트 연방 총리로 재임 중이다. 또한 아랍에미리트의 국방부 장관도 겸직하고 있다. 그는 선친인 라시드 빈 사이드의 4명의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로 1949년에 출생했다.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이탈리아에서 잠시 비행기 조종사 훈련도 받았다. 1971년 아랍에미리트 독립 직후 그는 23살의 나이로 연방 국방부 장관직을 맡아 현재까지 겸직하고 있다. 선친인 라시드 빈 사이드가 사망한 후 첫째 형인 마크툼 빈 라시드(재위 1990~2006년)가 두바이 통치자 및 연방 총리직을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2006년 호주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무함마드 빈 라시드는 사망한 형으로부터 두바이 통치자 및 연방국 총리직을 계승했다.

선친 라시드 빈 사이드로부터 창조와 변혁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무함마드 빈 라시드는 부친과 형의 재위 시절부터 두바이의 경제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두바이를 세계적인 관광, 무역, MICE 산업의 중심지로 도약시키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상천외한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성공시켰다. 그는 두바이의 통치자이기 전에 두바이 주식회사의 CEO라는 직함이 더 어울릴 정도로 뛰어난 사업 감각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1985년 에미레이트 항공 설립을 주도하여 세계적인 항공사로 성장시켰으며, 최근에는 플라이두바이라는 저가 항공사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두바이 인터넷 시티, 두바이 헬스케어 시티, 두바이 미디어 시티 등과 같은 자유무역 지대를 설립함으로써 지식기반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유일의 7성급 호텔인 부르즈 알 아랍 호텔과 828m 높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 알 칼리파, 바다를 메워 만든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 건설 프젝트를 추진함으로써 두바이를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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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급 호텔로 유명한 부르즈 알 아랍 호텔. Brandon/flickr



무함마드 빈 라시드가 두바이라는 국가 주식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은 두바이 월드와 두바이 홀딩이다. 두바이 월드는 2006년 무함마드 빈 라시드가 설립한 글로벌 지주회사로서 세계적인 항만 운영사인 DP 월드, 인공섬 프로젝트 주관사인 나킬, 투자전문회사인 이스티스마르 월드 등을 소유하고 있다. 두바이 홀딩 역시 무함마드 빈 라시드가 2004년에 설립한 지주회사로 산하 기관인 주메이라 그룹, TECOM 인베스트먼트, 두바이 프로퍼티스 그룹, 에미레이트 인터내셔날 텔레콤뮤니케이션 등을 통해 관광, 호텔, 부동산, 텔레콤, IT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국가 소개




• 건국 및 독립: 1971년

• 공식국명: 아랍에미리트 연방국(United Arab Emirates)

• 대통령: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아부다비 통치자, 2004년 취임)

• 총리: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 마크툼(두바이 통치자, 2006년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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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 국기와 국장




아랍에미리트는 아라비아 반도 동부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약 930만 명(2013년 기준)의 연방국가다. 1892년부터 영국의 보호령 치하에 있다가 1971년에 독립한 신생 국가이기도 하다. 영토 면적은 83,600㎢로 세계 114위다. 수도는 아부다비이며, 최대 도시는 두바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아랍어다. 1970년대 석유붐 이후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증가하여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약 8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부분은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출신이다. 아랍에미리트의 공식 종교는 이슬람이지만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편이어서 기독교 교회, 힌두교 사원, 불교 사원 등의 설립도 허용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은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으스 알 카이마, 아즈만, 움무 알 쿠와인, 푸자이라 등 7개 토후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정치 및 경제적으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토후국은 아부다비와 두바이다. 나머지 5개 토후국은 흔히 ‘북부토후국’으로 통칭되는데, 샤르자와 라으스 알 카이마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1971년 독립 직후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했지만 서구식 공화제와는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은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연방을 구성하는 7명의 세습 군주로 구성된 연방최고위원회에 의해 선출되기 때문이다. 연방최고위원회는 아랍에미리트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입법권과 행정권 모두를 지니고 있으며, 법령을 비준하고 국가정책을 입안한다. 7명의 군주는 연방최고위원회를 통해 매 5년마다 대통령과 부통령 겸 총리를 선출한다. 1971년 독립 시기부터 2014년 현재까지 관례적으로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통치 가문인 나흐얀 왕가에서, 그리고 부통령 겸 총리는 두바이의 통치 가문인 마크툼 왕가에서 차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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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 지도 ⓒ김정명



아랍에미리트에는 의회에 해당하는 연방국민위원회가 있지만 법안 심의, 국정 논의, 탄원 등과 관련된 문제만 다룰 뿐 실질적인 입법 권한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국정자문위원회의 성격이 더 강하다. 연방국민위원회의 의석은 총 40석이며, 이 가운데 20석은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지만 나머지 20석은 각 토후국 통치자에 의해 임명된다.

아랍에미리트는 원유 매장량이 978억 배럴로 세계 6위 그리고 천연가스 매장량이 227조 입방피트로 세계 7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원부국이다. 이로 인해 아랍에미리트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석유‧가스 부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2011년 기준으로 석유‧가스 부문은 아랍에미리트 국내총생산의 약 31.3%, 그리고 수출의 33.6%를 차지했다. 그러나 아랍에미리트의 막대한 에너지 자원 보유량은 토후국별로 편차가 매우 심한 편이다. 원유의 경우 아랍에미리트 전체 매장량 가운데 아부다비에 94%가 집중 매장되어 있고, 두바이의 경우 5% 남짓 매장되어 있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 연방국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쌍두마차다. 이 가운데 ‘중동의 싱가포르’라고 불리는 두바이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1인당 국민총생산이 4만 달러가 넘는 유일한 중동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두바이가 이 같이 눈부신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일찍이 탈석유화 시대를 대비한 산업 다각화를 공격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두바이는 경제 다각화를 위해 가장 먼저 자국을 중동의 물류 중심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1979년에 완공한 제벨 알리 항은 당시 세계 최대의 인공 항구였다. 1985년에 설립한 에미레이트 항공은 국제노선 기준으로 세계 4대 항공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두바이 국제공항은 2012년 기준 국제노선 승객수가 5,760만 명이 넘어서면서 이용객 수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공항이 되었다. 한편 두바이는 이같은 물류 환경을 배경으로 IT, 교육, 미디어 등 산업 전반에 걸쳐 특화된 자유무역지대를 26개 이상 건설하고, 외국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세금 면제, 이윤 송금 100% 인정, 외국인 소유권 100% 인정 등 각종 혜택을 파격적으로 부여했다. 그 외에 세계 유일의 7성급 호텔인 부르즈 알 아랍 호텔, 828m 높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 알 칼리파,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 등을 건설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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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의 페라리 월드 경기장.



라이벌 토후국인 아부다비도 최근 경제 다변화를 위해 두바이를 벤치마킹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일환으로 아부다비는 사디야트 섬에 구겐하임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자이드 국립 박물관 등 문화 및 예술 관련 시설을 건립하고 있고, 야스 섬에는 야스 마리나 서킷 F1 경기장과 페라리 월드 경기장을 건설했다. 그 외에 장기적으로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2020년까지 원전 4기를 건설할 계획이며, 20조 원을 투자하여 세계 첫 탄소배출 제로 도시인 마스다르 시티 건설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Shakhbut bin Sultan Al Nahyan, 재위 1928~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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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대학교(Muhammad V University)에서 이슬람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중동전문 비즈니스 사이트인 메나르(www.menar.co.k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현대 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쿠웨이트의 형성과 발전>, <카타르의 형성과 발전>, <오만의 형성과 발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과 발전>, <바레인의 형성과 발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랍인의 역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1.0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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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hbut bin Sultan Al Nahyan, 재위 1928~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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