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해로 사행 - 명청교체기 해로사행과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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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2회 작성일 16-02-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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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고조선 이래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중국의 역대 왕조와 일정한 외교 관계를 맺고 서로 간에 사신을 왕래하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변 여러 민족과 조공-책봉이라는 독특한 외교 체제를 유지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역대 국왕들도 중국에 대해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사신들의 행차를 사행이라고 하며, 사신들의 행로를 사행로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를 공로라고 불렀는데, 조공하는 통행로를 뜻하였다. 공로는 대개 중국에서 미리 지정해 주었는데, 이는 해적이나 오랑캐가 사행을 가장하여 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중국 관원들이 사신들의 접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공로는 육로로 정하기도 하고, 해로로 정하기도 하였다. 해로를 통해 사신으로 가는 행차를 ‘해로 사행(海路使行)’ 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의 해로 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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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에 사용되었던 화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교역을 하거나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시대부터였다.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춘추시대의 나라가 고조선과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고,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서로 대립하고 있던 나라에 사절을 보내 외교적 절충을 벌이기도 하였다. 연나라, 제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고조선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서기 32년(대무신왕 15)과 124년(태조왕 72)에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사행은 당연히 요동 지역을 경유하는 육로 사행이었다.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년)부터 남북조시대의 남조동진에 조공하기 시작하여 6세기의 (梁) 나라에 이르기까지 남조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였다. 백제는 한 때 북조북위통교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고구려의 저지로 실패하였으므로 해로를 통해 남조 국가들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후에 수나라, 당나라와 교류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해로로 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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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청해진 유적. 청해진(현재의 진도)은 한때 무역거점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신라는 내물왕 때인 377년과 382년에 고구려 사신의 도움을 받아 북조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으나 이후 중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140여 년이 지난 521년(법흥왕 8)에 해로를 통해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 624년에는 진평왕이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조 이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와의 조공 외교를 지속하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해로를 통한 왕래였다. 신라의 당나라 외교와 무역의 거점은 오랫동안 당항성(경기도 남양)이었으나, 통일신라 말기 한때는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진도)이 그 거점이 되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중국 오대 시대였던 933년 후당에, 939년 후진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았고, 그 후에는 송나라와 정례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때는 거란이 요동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고려는 사신을 해로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여 중국 남부지방과도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무역을 하게 되었고, 중국의 외교관이나 아라비아 상인들도 벽란도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거란족의 침략을 받고 금나라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북송남송과의 외교는 거의 단절되었고, 상인들의 무역로만 유지되었다.

1368년에 중국에서 명이 건국되고 원이 몽고로 도주하자 공민왕은 1370년에 명과 통교하여 책봉을 받았고, 우왕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때 명의 수도는 남경에 있었으므로 고려의 사신들은 육로로 가기도 하고 해로로 가기도 하였다. 1384년(우왕 10)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정몽주는 남경으로 갈 때는 육로로 갔다가 올 때는 해로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우왕 말년에 친원파가 득세하자 한 때 명나라 대신 몽고 지역으로 물러난 북원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가,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잡자 다시 육로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조선시대의 해로 사행



조선왕조는 1392년의 역성혁명으로 건국하자 곧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요청하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이성계의 국왕 책봉을 허가하지는 않았으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해주었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정례적인 조공도 허용하였다. 결국 태종 때인 1401년에 명의 혜제(惠帝: 建文帝)로부터 조선 국왕의 책봉 고명금인(金印)을 받았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즉위 초에 명나라에 요청하여 책봉을 받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1621년까지의 공로는 대체로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양과 광녕, 산하이관을 지나 북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를 육로 사행이라고 한다.

1621년 3월에 후금누르하치심양요양을 탈취하고 요동 반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을 육로로 왕래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조선 사신들이 선박을 이용해 바닷길로 오게 하였는데, 이를 해로 사행이라고 하였다. 이 해로 사행은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15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1637년 1월에 청나라와 정축맹약(丁丑盟約)을 맺은 후에는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청나라의 심양에만 사신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해로 사행도 중지되었다. 그리고 1644년 3월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후에는 조선 전기와 같은 육로 사행이 재개되었다. 다만 요양을 경유하던 사행이 심양을 경유하면서 공로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을 뿐이다.

1621년부터 1636년까지 15년간 유지되었던 해로 사행 길은 처음에는 평안도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요동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여순구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등주까지 항해한 후에 육로로 제남을 경유하여 북경까지 왕래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1629년부터는 등주를 경유하지 않고 여순구에서 영원위(현재의 흥성시)까지 항해 한 후 육로로 산하이관을 지나 북경으로 가도록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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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의 마지막 해로 사행로(동지사 김육의 사행) <Ⓒ촬영 이영춘>



17세기까지 조선에서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고 요동반도 해안을 돌아가는 항로에도 익숙하지 않아 초기에는 여러 차례 선박이 침몰하여 사신들이 익사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사고를 겪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의 관료들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매우 꺼려하여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5~6년 지나면서부터는 선원들이 해로의 지형이나 풍향에 숙달하게 되어 사고는 많지 않았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대명 사대 외교를 중시하였고,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왜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의리가 강하였다. 그래서 요동 지역이 후금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온갖 난관을 겪으면서도 해로 사행을 통해 명나라와의 외교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해로 사행로





가. 1621년 ~ 1628년



1621년(광해군 13년) 이후에 신설된 조선의 해로 사행로는 평안도 선천의 선사포에서 승선하여 요동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여순까지 갔다가 장산반도를 따라 남진하여 등주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해로의 거리는 약 3,760리였고, 소요되는 기간은 바람과 조류에 따라 다르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경우에는 10일쯤 소요되었다. 해로의 주요 경유지는 조선의 가도( 60리), 거우도(140리) 및 중국의 녹도(500리), 석성도(600리), 장산도(300리), 광록도(200리), 삼산도(280리), 평도(200리), 황성도(1,000리), 타기도(200리), 묘도(200리) 및 등주(80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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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 수성 - 조선 사신들의 선박 정박지 <Ⓒ촬영 이영춘>



등주에서부터 북경까지는 육로로 가게 되는데, 그 거리는 약 1,900리가 되었고, 소요 기간은 약 20여 일이 되었다. 주요 경유지는 황현(60리), 황산역(60리), 주교역(60리), 내주(60리), 회부역(70리), 창읍현(80리), 유현(80리), 창락현(50리), 청주(70리), 금령현(70리), 장산현(70리), 추평현(30리), 장구현(60리), 용산역(40리), 제남(70리), 제하현(50리), 우성현(70리), 평원현(70리), 덕주(90리), 경주(60리), 부성현(50리), 부장역(40리), 헌현(40리), 하간부(70리), 임구현(70리), 웅현(70리), 신성현(70리), 탁주(60리), 양향현(70리), 대정점(50리), 북경(40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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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 봉래각 <Ⓒ촬영 이영춘>



따라서 해로와 육로를 합친 노정의 총 거리는 5,660리로서 요동을 경유하는 육로 1,979리에 비해 거의 3배나 멀었다. 소요기간은 항해가 매우 순조로울 경우에 북경까지 약 30일이 소요되었으나, 가도와 등주 및 제남 등지에서 체류하는 날짜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50일 이상 소요되었다. 1623년에 책봉주청사로 갔던 이경전이민성 일행은 5월 19일 선사포를 출발하여 7월 27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약 70일을 경과하였다.

1628년(인조 6)부터는 조선 사신들의 항해 출발과 도착 지점이 선사포에서부터 평안도 증산현(현재의 강서군 증산면)의 석다산으로 옮겨졌다. 선사포에 비하여 국내의 육로 길이 5∽6일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항해의 기점을 당초 평양의 대동강으로 정했다가 해안이 얕다는 이유로 석다산으로 확정되었다.



나. 1629년 ~ 1636년



1629년에 산하이관 지역 총사령관이었던 원숭환의 주장에 따라 등주를 경유하는 조선 사신들의 공로(貢路)가 영원위(현재의 흥성시)를 경유하도록 변경되었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은 종전의 항로와 같이 평도까지 갔다가 여기서 여순구(40리), 철산취(40리), 양도(80리), 쌍도(40리), 남신구(5백 리), 북신구(1백 70리), 각화도(1천 리), 영원위(10리)까지 행해하였다. 영원위에서부터는 육로로 산하이관을 지나 북경까지 가게 되었다. 육로의 경유지는 조장(15리), 동관역(50리), 사하(36리), 전둔위(50리), 고령역(50리), 산하이관(50리), 심하(60리), 무녕현(40리), 영평부(70리), 사하역(70리), 풍윤현(1백 리), 옥전현(80리), 계주(80리), 삼하현(70리), 통주(70리), 북경(40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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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흥성시 영원위의 성문 <Ⓒ촬영 이영춘>



이 변경된 항로의 거리는 4,160리로써 종전 등주까지의 항로 3,760리에 비하여 400리가 더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육로는 영원위에서부터 북경까지가 931리였으므로 등주에서 북경까지의 거리 1,900리보다는 약 1천 리가 짧은 거리였다. 해로와 육로를 합치면 모두 5,091리로서 역시 등주를 경유하는 5,660리보다 약 600리가 절약되는 거리였다.

그러나 요동반도의 서남부 돌출부인 철산취에는 암초가 많고 풍파와 조류가 심하여 침몰 사고가 잦았으므로 조선의 사신들은 이 길을 대단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누차 중국 정부에 종전의 해로로 갈 것을 요청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이 항로는 1636년까지 해로 사행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의 육로와 해로 사행로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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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행로






해로 사행의 조난 사고



1620년(광해군 12) 7월에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죽었고, 그 뒤를 이은 광종 태창제도 즉위 2개월 만인 그해 9월에 죽어 희종 천계제가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2해 연달아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 그리고 동지사를 보내게 되었다. 1620년 겨울에는 이렇게 많은 사신이 요동을 경유하는 육로로 중국에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다음해 3월에 후금의 요동 공략으로 길이 막히어 해로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1621년 4월에 진위사 박이서서장관 강욱 및 진향사 유간과 서장관 정응두 일행이 함께 해로로 귀국하던 중에 풍랑으로 파선하여 침몰하였다. 박이서와 강욱은 행방도 없이 사라져 익사 처리되었고, 유간과 정응두는 시신을 수습하여 호송하였다. 조선 사행의 역사에서 최악의 해난 참변이었다.

그해 6월에는 사은사 최응허 일행과 명나라 황제의 등극을 알리러 왔던 조사 유홍훈, 양도인이 해로로 돌아가는 길에 여순에서 태풍을 만나 선박 9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났다. 다행히 사신들과 조선 선원들은 구조되었으나, 중국 선원 수십 명이 익사하고 많은 물품을 유실하였다. 1626년(인조 4) 4월에는 성절사의 제 3선이 침몰하여 역관과 선원들이 익사하였고, 그해 5월에는 동지사 일행의 역관이었던 김성립 등의 배가 표류하였다가 중국 선박에 의해 구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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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이덕형의 명나라 사행을 담은 항해조천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27년 12월에는 성절 겸 동지사로 가던 서장관 윤창립의 배가 파선하여 그를 포함 79명이 익사하였다. 1630년 2월에도 동지사 일행의 귀환 길에 선박이 파선하여 정사 윤안국 등이 익사하였다. 1635년 5월에도 동지사 일행의 원역(員役)들이 탄 선박이 태풍에 표류하다가 요동 해안에서 침몰하여 후금의 군사들이 그들을 구조하였다. 아래 표는 해로 사행의 조난사고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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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해로 사행의 조난사고



이렇게 해로 사행의 조난이 잦아지자 조선의 관료들은 사신 파견을 극도로 기피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 사신 가는 것을 마치 죽을 곳에 가는 것처럼 여기고, 죽기를 무릅쓰고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궁중에 뇌물을 써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윤겸이나 이현영처럼 명을 받고도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인사를 담당한 이조당상관들도 고충이 적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적당한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하더라도 병이나 늙은 어버이 봉양을 핑계로 사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전에 죄과가 있었거나 경력에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이후에 과거 정권에서 권세를 부렸던 북인계 관료들이나 폐모론(廢母論)에 동조하여 지탄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사신으로 임명하였던 것은 누구나 꺼리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과거의 허물을 씻을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광해군 때 형조판서를 지냈던 이경전이었다. 그는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아들이었고, 광해군 때 고관을 지냈으므로 처벌이 예상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그와 친하였던 반정 원훈, 김류와 문장가 신흠, 이정구 등이 그를 인조의 책봉 주청사 정사(正使)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해 5월에 선사포를 출발하여 1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책봉 칙서를 받아 다음해 4월에 돌아왔다. 이 공로로 그는 예전의 허물을 씻고 공신에 준하는 대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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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사행길에 풍랑을 만나 포류하는 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밖에도 1625년(인조 3)에 성절사 겸 동지사로로 파견되었던 장자호와 사은사로 갔던 박정현 및 1626년에 사은사로 파견되었던 윤휘 등이 모두 이러한 케이스에 해당하였다. 어떻든 이들은 조난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일정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영춘 | 한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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