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규장각이 모은 외국 서적 -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실용적으로 활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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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8회 작성일 16-02-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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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에 세워진 규장각 주합루. 규장각은 외국서적도 들여왔는데, 이 책들을 보관하던 ‘개유와’와 ‘열고관’ 건물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주합루 서남방향 숲이 그 자리이다.



1776년에 세워진 규장각은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정조는 이곳에 조선 정부와 왕실에 전해져 오던 책을 모으고 또 새로운 자료를 구입해 비치했다. 세손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었던 정조가 책에 대해 쏟는 관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즉위 후, 『내각방서록(內閣訪書錄)』이란 책을 만들어 중국에서 구해올 책의 목록을 만들 정도였다. 규장각에는 책의 국적으로 본다면 조선에서 간행한 조선본, 중국·일본 등에서 간행한 외래본이 있었고, 편찬과 간행 시기로 본다면 15·6세기의 오래된 책과 근래에 나온 책이 뒤섞여 있었다. 이리하여 규장각은 거대한 지식의 집성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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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을 세운 후, 중국에서 구입하고자 했던 도서의 목록집 <내각방서록>. 총 3,485종의 도서를 분류하였다.



규장각에서는 이 책들을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宙合樓) 근처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수장했다. 조선 책과 외국 책의 수장처는 달랐는데, 조선에서 간행한 도서는 서고(西庫)에, 중국·일본에서 온 도서는 ‘개유와’와 ‘열고관’에 보관하고 관리했다. 이 건물들은 20세기 전반에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주합루에서 보면 서남 방향의 맞은편 자락에 있는 숲이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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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에 그려진 열고관과 개유와의 위치. 주합루 서남방향에 있었다. 앞의 2층 건물이 열고관이고, 그 옆에 약간 길게 늘어져 있는 건물이 개유와이다.





열고관과 개유와의 사진. 이 건물들은 현재 사라지고 나무로 덮여있다.




이곳에 소장된 책들의 규모는 대단했다. 특히 외국본 도서들이 그러했다. 모든 것을[皆] 보유하고 있다[有]는 개유와(皆有窩), 옛날의 지혜[古]를 열어 살핀다[閱]는 열고관(閱古觀)이란 건물 이름 그대로, 조선 사람들은 이곳에서 이전 시기 조선에서는 구해볼 수 없었던 지식과 정보를 광범위하게 접할 수 있었다. 정조대 규장각에서 보유하고 있던 외국 책은 1781년에 편찬한 『규장총목(奎章總目)』에 따르면 약 600여종 3만여 권이었다. 이 책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전통적 분류법에 따라 도서를 나누었고, 도서마다 편찬자와 편찬시기, 그리고 주요 내용을 간략히 제시하였다. 1805년(순조 5)에는 그간 구입했던 책을 더하여 증보했는데, 90종이 더 늘었다.




유리창, 중국의 도서와 문물을 구입하던 공간



규장각 설립을 전후한 시기, 중국에서의 새로운 책 구입은 유행을 이루었다. 중국의 도서를 구입하던 주요 시장은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었다. 사신을 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을 구해 오라는 정부의 과제에 맞추어 책을 구입하고, 또 개인적인 관심과 필요에 따라 새로운 서적을 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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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에 그려진 유리창의 풍경.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유리창은 북경의 정양문(正陽門) 밖 남쪽 성 아래에 있는 지역으로, 여러 빛깔의 유리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 지대였다. 공장 밖에는 점포가 늘어서고 서점이 몰려 있어 재화와 보물이 넘치고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통상 유리창이라 불렀다. 서점으로서 규모가 큰 곳은 문수당(文粹堂), 오류거(五柳居), 선월루(先月樓) 등이었다. 책이 많이 모이는 만큼, 뛰어난 문인들도 이곳을 즐겨 찾았고 또 오래 머물기도 했다. 유리창 조금 떨어진 성안에는 천주교 교회당이 있어 이국의 풍광 역시 강렬했다.

조선에서 북경으로 갔던 사람들에게 유리창은 이국(異國)의 낯설고도 풍요로운 풍물과 기운을 접하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들려 책을 사고, 조선에 없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으며, 중국의 문인 학자들을 만나 교류했다. 홍대용이나 이덕무가 청대의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을 만나 교분을 나눈 것도 이곳이었다. 이곳의 골동품과 서화 등 진귀한 물품 또한 조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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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전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➊ 서산 : 연경 서북쪽에 있는 청 황실의 정원으로 오늘날의 이화원

➋ 천주당 : 조선 사신들이 방문하여 벽화를 구경한 가톨릭 성당

➌ 유리창 : 조선 사신들이 서적과 골동품, 서양 물품을 구입한 상점가

➍ 영대빙희 : 강세황이 사신으로 가서 보고 그린 청 황제의 빙판 놀이

➎ 태화전 : 자금성의 정전으로 청 황제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

➏ 정양문 : 연경의 남문. 그 동쪽에 조선 사신이 머물던 회동관이 있다

➐ 조양문 : 조선 사신들이 연경에 도착해서 들어갔던 문



이곳에서 파는 책들은 출판 문화가 발달했던 강남(江南)에서 배로 실어온 것이 많았다. 1778년(정조 2), 서장관을 따라 중국으로 갔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의 연행 기록은 이런 사실을 생생히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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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중국에서 구했던 <절강서목>





박제가와 함께 천주관(天主館-교회당)에 구경을 나갔는데, 주인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중략)유리창에 가서 전 날 보지 못했던 책방 서너 곳을 들렀다. 도씨(陶氏)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매우 훌륭했는데 가게 이름은 오류거였다. 도씨는 말하기를, “책을 실은 배가 강남에서 올라 와 통주(通州) 장가만(張家灣)에 도착했는데, 내일이면 그 책을 이곳으로 수송하여 올 것이고 책은 모두 4천여 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책의 목록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거기에는 내가 평생 동안 구하려 하던 책뿐만 아니라 천하의 기이한 책들이 매우 많았다. 나는 비로소 절강(浙江)이 서적의 본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온 뒤 먼저 최근에 발간된 『절강서목(浙江書目)』을 구했었는데, 이 도씨 서목에는 『절강서목』에 없는 것도 있었다.

-『청장관전서』 권67, 입연기(入燕記) 하(下), 정조 2년 5월 25일

이덕무가 구했던 『절강서목』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책의 첫 면에 정조의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가 매우 귀하게 여겼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덕무는 유리창에서 『경해經解』, 『역사繹史』와 같은 책을 구입하고 또 『절강서목』에 빠진 책의 목록을 별도로 적어오기도 했다.

유리창은 새로운 문화 경험지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을 구하는 한편으로 문방사우, 골동품 등도 즐겨 구매했다. 그런데 골동품 중에는 위조된 작품들도 꽤 나돌았고, 진위를 가리지 못해 속는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박지원은 연행 중에, 『박고도(博古圖)』, 『서청고감(西淸古鑑)』 등 고기물(古器物)을 소개하고 있는 책을 구해 옛 그릇의 모양을 충분히 익힌 뒤 골동품을 구하게 되면 속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중국인의 조언을 듣기도 했다.




하늘·땅·사람에 관한 온갖 지식을 망라한 『고금도서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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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 18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의 백과사전이다.



정조가 중국에서 구입한 대표적인 자료는 『고금도서집성』이다. 이 책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편찬이 시작되어 1723년 옹정제(雍正帝) 때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18세기 초반까지 중국에 알려져 있던 자연과 사회, 인간에 관한 지식이 집대성되어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저술은 물론이고 서양에서 들어온 과학기술 서적도 포괄했는데, 모두 6 분야의 주제를 5,020책 10,000권 분량에 실었다. 목록(目錄)이 40권이나 된다. 규모가 규모인 만치 이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중국 정부에서는 구리 활자로 모두 66부만 인쇄하여 관계자들에게 배포했다. 『고금도서집성』은 태생적으로 쉽게 구해 볼 수 없는 귀한 책이었다. 엄청난 물력이 소요되고 많은 학자가 동원되는 이 거대 규모의 출판 사업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다양한 내용의 책과 지식을 하나로 모은 데서 오는 문화적 파급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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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의 주제와 권수



조선에서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해온 때는 1777년(정조 1)이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은(李溵), 서호수(徐浩修) 등이 정조의 명령에 따라 구해온 것이다. 구입가는 은(銀) 2천 1백 50냥. 은과 상평통보의 당시 교환 비율이 대체로 1 : 4였고 상평통보 1냥의 현재 가치는 대략 5만원이니, 책값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유득공의 숙부로 사행에 참가했던 유금(柳琴)이 한림원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힘들게 구했다. 본래 서호수 등이 목표로 했던 것은 『사고전서(四庫全書)』였다. 『고금도서집성』보다 규모가 더 큰 이 책은 건륭제 즉위 초부터 편찬이 진행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사실을 알고 사행길에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사고전서』는 아직 작업이 마무리 되지 못하였기에 구할 수가 없었다. 아마 편찬이 끝났다 할지라도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국 정부에서는 원본을 포함하여 모두 8부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구입한 『고금도서집성』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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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집성분편제차목록>. 『고금도서집성』의 색인집이다



조선에서는 『고금도서집성』을 들여온 뒤 개유와(皆有窩)에 별도의 서가를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이어 1780년(정조 4)에는 이덕무 등 규장각 검서관(檢書官)들을 시켜 원하는 내용의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색인집을 만들었다. 『도서집성분편제차목록(圖書集成分編第次目錄)』이 그 책이다. 『고금도서집성』의 분량이 너무 방대했으므로 색인집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 『고금도서집성』은 502개의 함에 담겨, 열고관의 4개의 서장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도서집성분편제차목록(圖書集成分編第次目錄)』에서는 책함 번호와 함에 보관된 책의 주제를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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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본,중국 책의 차이. 조선 책은 크기가 크며, 무겁고 질긴 종이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책은 조선 책에 비해 크기가 작고 가볍게 만들어져 대량 판매되었다. 또한 조선 책이 주로 다섯 번 꿰메는 방식인데 중국책과 일본책은 네 번 꿰매는 방식이고, 일본은 4개의 구멍이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는 반면, 중국책은 가운데의 두 구멍이 좁게 몰리는 특징이 있다.



표지 장정도 중국식에서 조선식으로 바꾸었다. 중국에서는 책을 만들 때 네 번 꿰매는 방식을 쓰지만[四針眼] 조선에서는 이와 달리 다섯 번을 꿰매는[五針眼]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글씨를 잘 쓰는 상의원(尙衣院) 주부(主簿) 조윤형(趙允亨)을 시켜 표지마다 책의 제목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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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의 첫머리에는, ‘朝鮮國(조선국)’, ‘萬機之暇(만기지가)’, ‘極(극)’, ‘弘齋(홍재)’를 새긴 장서인이 찍혀있다.



정조가 이 책을 중시한 것은 각 책마다 찍은 장서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모든 책의 첫 머리에 ‘朝鮮國(조선국)’, ‘萬機之暇(만기지가)’, ‘極(극)’, ‘弘齋(홍재)’를 새긴 장서인을 찍었다. 홍재는 정조의 호이고, 만기지가는 바쁜 업무 중의 여가, 극은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로, 정조는 이들 인장을 즐겨 사용했다. 조선국이란 장서인을 찍어 보관한 도서는 규장각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고금도서집성』의 지식을 활용하여 거중기를 만들다



거질의 『고금도서집성』의 지식 가운데 일부는 시의 적절하게 이용되었다. 1792년에 수원 화성(華城)을 축조할 때 이 책에 실린 기중기법을 이용하여 거중기를 만든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화성을 빠른 시간 안에 비용을 덜 들이고 효율적으로 만들려고 고심했던 정조는 정약용으로 하여금 이 책에 실려 있는 지식을 활용, 축성에 필요한 기계를 만들도록 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거중기였다. (거중기는 기중기, 기중가 등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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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도설>에 실린 「기중지법(起重之法)」 8도(왼쪽)와 11도(오른쪽)



거중기 제작법은 『고금도서집성』의 4,999책과 5,000책에 실린 『기기도설』에 실려 있었다. 『기기도설』은 16세기 유럽에서 고안된 ‘기묘한 기계’들의 제작법 및 작동 원리를 다룬 책으로, 예수회 선교사 요한 슈렉(중국명 鄧玉函)과 왕징(王徵)이 함께 저술한 『원서기기도설록최(遠西奇器圖說錄最)』 권3의 도설 부분과 왕징의 『신제제기도설(新製諸器圖說)』에서 ‘연노도설(連弩圖說)’을 뺀 나머지 부분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수록된 그림들은 대개 유럽의 기계기술자 라멜리(Agostino Ramelli), 종카(Vittorio Zonca), 베송(Jacues Besson)의 책에 실린 것을 중국풍으로 모사했다. 『기기도설』은 그 자체로 독립된 책이었지만, 조선에서는 『고금도서집성』의 일부로서 이용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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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집>에 실린 기중기 설계도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는 『기기도설(奇器圖說)』에 수록된 「기중지법(起重之法)」의 11개 도설 중에서 제8도와 11도를 참고·응용하여 작성되었다. 정약용은 네 개의 움직도르래와 네 개의 고정도르래가 결합된 복합도르래 양측에 한 쌍의 축바퀴(녹로)가 덧붙여진 형태로 이 기구를 설계했다. 비록 정확한 계산은 아니지만, 정약용은 이러한 구조의 거중기를 사용하면 “40근의 힘으로 2만 5천 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참고한 『고금도서집성』본 『기기도설』에 『원서기기도설록최』의 역학 이론 부분이 빠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리의 정확한 이해보다는 실제 효용을 더욱 중시하는 정약용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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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기중기 설계도



『기기도설』의 원본, 정약용의 설계도, 실제로 제작되어 사용된 기계의 설계도를 비교해보면, 서로 비슷하면서도 상당한 변용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성 건설이 끝난 뒤 정조는 정약용이 설계한 기중기 덕분에 4만 냥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평가, 그의 공을 크게 치켜 올렸다.



1792년 겨울에 수원(水原)에 성을 쌓게 되었다. 주상이 이르기를, “1789년(정조 13) 주교(舟橋)를 만들 때 정약용이 그 제작법을 만들어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그를 불러 성 만드는 법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해라.” 하였다. (중략) 주상이 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 인중법(引重法)·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내가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써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주상이 일렀다.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다행히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권16, 自撰墓誌銘

정약용은 조선에서 중국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 수입하는 한편으로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구인 이용감(利用監)을 만들어 물질 생활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아마도 『기기도설』을 활용하여 기중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감각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우고 많은 책들을 수집한 것은 새로운 변화를 만들기 위한 지적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중국에서의 새로운 책들이 고루한 식견을 깨고 좁은 세계를 벗어나는 사고를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많은 서적을 구입한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정조는 그 스스로 구입한 책들을 부지런히 읽었고 신하들도 많이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규장각은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고를 세계로 넓혀가는 중요한 창구가 되었으며, 조선에서 학술과 문예를 일으키는 중심지가 되었다. 물론 규장각이 품었던 지식 세계가 조선의 획기적인 변화로 직접 귀결되지는 못했다. 19세기 조선 현실에서 외래한 새로운 생각과 문물은 천천히 뿌리 내리며 조선의 문화 속으로 용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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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서적목록>.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에 소장되어 있었던 39,817권의 도서들의 서명과 권수를 정리한 목록이다.



세계와 소통하며 변화를 꿈꾸었던 후손들은 늘 정조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새로운 시대의 지식을 담은 책을 구입하고 읽었다. 개화 문물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고종대의 집옥재(集玉齋) 도서는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집옥재는 경복궁에서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던 곳인데, 여기에는 한역된 서양 최신 과학책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본 도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고종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으로 인해 화학·역학·전자기학·병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양 근대 과학 지식이 모인 것이다.

규장각은 조선 사람들이 외국의 문화와 지식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며 성장했던 과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늘 날 이곳에 서면, 현재의 현실과 닥쳐올 미래를 치열하게 탐구했던 옛 노력을 따뜻하게 떠올리게 된다.



<전시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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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훈
연세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17세기 北人系 南人學者의 政治思想」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들이 추구했던 보편 가치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양상을 정치사상사, 법사상사의 측면에서 해명하는 것을 주 과제로 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조선후기 정치사상연구』(2004), 『경민편-형벌과 교화의 이중주로 보는 조선사회』(2012), 『조선의 소학 –주석과 번역-』(2014)를 지었고, 『주서백선』(공역, 2000), 『朱子封事』(공역, 2012), 『선각』(2013)을 번역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
세계는 바깥에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안에도 있다. 세계는 눈에 보이는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과거에도 있었다. 규장각 특별전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는 우리 안에 있는 오래 전의 세계에 관한 전시이다. 규장각이 전통 문화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세계 지식의 집성지라는 관점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중국본 도서에 집중했다. 전통 유학과 근대 과학, 지리서와 백과사전, 수학과 역법,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규장각 특별전을 통해 그간 잊혀져 있었던 ‘우리 안의 세계’를 다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발행20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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