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스와질란드 왕가 - 아프리카 유일의 절대군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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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1회 작성일 16-02-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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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질란드는 군주제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틴쿤들라’라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이를 통해 국왕은 민의를 반영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회에 행사한다. 더욱이 스와질란드는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대부분의 식민지배가 그러하듯 식민 본국의 통치 방식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 스스로의 자치권을 획득해내기도 했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스와질란드는 그들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보존해가며 새로운 군주국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강하다. 그러나 본래의 명분과는 달리 현재 음스와티 3세에 이르러서는 전통 정치제제의 대의명분은 점차 사라지고 강력한 절대군주제가 시행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자주 발생하는 내전이나 쿠데타 등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스와질란드 국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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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질란드는 국토가 넓지 않으나 열대우림부터 사바나까지 지역마다 기후가 다양하다. M/flickr



스와질란드의 정식 명칭은 스와질란드 왕국이다. 17,365㎢의 면적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국가 중 한곳이다. 이곳의 북동쪽은 모잠비크 국경과 맞닿아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여 있다. 인구는 2014년 현재 대략 110만 명 정도이며 1인당 GDP는 6,367달러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면적이 작음에도 지역별 기후가 달라 서부 지역의 경우 여름에는 20℃, 겨울에는 15℃ 정도의 기온에 강수량은 2,000mm의 좋은 자연환경인 반면, 동부 지역은 여름 기온이 약 40℃에 약 500mm의 제한된 강수량을 갖고 있다. 국민들 대부분은 기독교와 아프리카 토착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를 받다가 영국으로부터 1968년 독립했다. 국민은 스와지인이라는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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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질란드는 축제의 나라로도 유명한데, 매년 8~9월에 열리는 잉크왈라 축제와 12월에서 1월에 개최되는 움흘랑가 축제가 그것이다. 특히 움흘랑가 축제, 즉 ‘갈대 축제’가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스와질란드의 모든 처녀들이 갈대를 들고 축제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이 처녀들이 갈대를 꺾어 국왕에게 바친 후 춤을 추면 국왕은 이들 중 마음에 드는 여성 한 명을 골라 왕비로 간택한다. 스와질란드는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현재 음스와티 3세 국왕은 매년 이 갈대축제에서 왕비를 간택해 현재는 15명의 왕비를 두고 있다.




독특한 정치체제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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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질란드 국기



스와질란드는 아프리카에서 절대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나라이다. 그런데 이 절대군주제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틴쿤들라(Tinkhundla)’라는 군주제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군주 민주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스템은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총 95명의 의원(상원 30명, 하원 65명) 중 30명은 국왕에 의해 임명되고, 65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이 독특한 정치체제를 바탕으로 국왕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정에 반영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와질란드 왕가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절대군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스와지 왕국은 들라미니(Dlamini) 집단의 수장이었던 소부자 1세 국왕이 루봄보 산을 가로질러 주변 민족들을 정복했을 때인 19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이 왕국이 독특한 이유는 이중의 군주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제는 왕족인 응코시 들라미니와 평민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모두 70개가 넘는 씨족들은 4개의 주요 집단으로 나뉘는데, 가장 상위 그룹에 왕의 혈통인 응코시 들라미니가 속한다. 왕은 응코시 들라미니를 정복한 최초 수장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일을 수행하며 스와지 국민들을 위해 토지를 맡아두고 그것의 사용을 할당하며 신성한 의례를 관정한다. 또한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역사적으로 스와지 왕의 권위는 황태후와 두 명의 전통 제도인 리쿼쿼(내부 혹은 친족회의)와 리반들라(국가의회)에 의해 균형이 유지된다. 리쿼쿼는 현대의 내각과 같은 역할로 비공식적으로 회의를 하며, 그 구성원들의 일부는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준다. 이들은 일 년에 한 차례 모임을 가질 뿐이지만, 모든 중요한 법과 결정들을 이 자리에서 수행하며 새롭게 개정하기도 한다. 즉 이러한 기구 없이 스와지 왕은 어떠한 법도 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왕과 조언자의 관계는 두 가지 격언, 즉 ‘왕은 국민에 의한 왕이다’, ‘왕은 그의 조언자와 더불어 나라를 통치한다’로 표현되기도 한다.

지역 포럼을 통해 그들의 추장 및 왕과 함께 토론에 참가하는 평민들을 ‘틴쿤들라’라고 부른다. 국민들은 리쿼쿼와 리반들라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 이들 중 다른 의견을 낸다고 해서 체포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리반들라의 주요 목적은 대부분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의견일치에 도달하기 위함이며, 일단 결정이 되면 리쿼쿼나 왕 모두 그 결정을 기각할 수 없다.

앵글로-보어 전쟁의 결과로 스와지 왕국이 1903년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 동안 보어인들의 팽창주의를 살피기 위한 노력으로, 영국은 왕국을 소부자 2세 국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였고 그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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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자 2세는 민족운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953년 5월 15일, 엘리자베스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 워털루역에 도착한 소부자2세(가운데)와 콘스탄티누 왕자(오른쪽).



1960년대 초반 스와질란드는 정치적 혼돈과 더불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소부자 2세는 ‘임보코드보 민족운동(INM)’을 창설했으며 1964년에 치러진 입법 선거에서는 INM이 압승을 거두고 스와질란드 지배당이 되었다. 1968년에 스와질란드는 군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영국의 식민국가에서 독립국가로의 성공적인 이행을 이루었다.

1968년 독립 이후 소부자 2세는 민족 독립국가의 탄생과 정착을 위해 다른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한 민주주의는 아프리카에는 생경한 것이었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집단들을 불법화하기 위해 원내 다수를 활용하여 일당 국가임을 선언하고 종신 대통령으로 스스로 취임했다.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는 과격한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는 오히려 상반된 것처럼 비쳐졌지만 사실은 후기-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교묘한 책략에 대항해 그들의 독립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쥐고 있는 권력을 정당화한 것이다.

1972년에 INM은 국민 선거에서 다시 한 번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소부자가 헌법과 의회를 폐지하고 모든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급진적 정치 행보를 보이자 소부자에 반대하는 파도 상당수 생겨났다. 그는 또 식민주의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모든 정치 정당과 노동당의 활동을 금지했으나 국무총리가 이끄는 내각 제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1978년에 최초로 선거가 개최되었으며, 이를 위해 국왕이 지정한 선거위원회가 신설되고, 국왕에 의해 발족된 틴쿤들라하에 선거가 치러졌다.

궁극적으로 소부자 국왕의 통치 기간은 근대에 스와질란드를 통치했던 왕들 중 가장 길었으며, 그가 통치하는 동안 스와질란드는 큰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으며, 정치적으로 절대적 군주로서의 태도를 견지했다. 이러한 발전은, 그러나 왕이 절대군주로서 진두지휘하며 정치적, 경제적 리더십을 보여준 결과라기보다는 이웃국가인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1)의 그림자 안에서 일어난 것에 불과했으며, 경제의 대부분은 남아프리카에서 카지노를 하기 위해 스와질란드를 방문한 관광객들에 상당 부분 의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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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이라는 긴 재위기간을 뒤로 하고 1982년 소부자 2세가 서거한 후 왕위는 혼란을 거쳐 아들인 음스와티 3세로 이양되었다. 현재 국왕인 음스와티 3세.



1982년 소부자가 서거하자 왕실에서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 다툼이 있었으며, 왕위 다툼은 소부자의 아들인 마코세티브 왕자가 음스와티 3세로 즉위할 때까지 이어졌다.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노력으로 음스와티 3세 국왕은 소부자의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전통왕실자문단을 해산시켰다. 그는 또한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수많은 정부 관리들을 숙청했다.

스와질란드는 비록 가끔씩 내분이 일어나 음스와티 국왕의 행정부에 위협을 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음스와티 3세의 통치하에 번영이 지속되고 있다. 스와질란드 국민은 정부로부터 더 큰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3년에 음스와티 국왕은 총선거를 실시하였고, 1996년에 스와질란드의 새로운 헌법을 창설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스와질란드는 절대군주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로서 토착 정치 시스템, 문화, 전통적 요소들이 현대 문물에 잠식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강하다. 군주(제)는 사회가 존재하는 데 있어 중심이다. 국민들 역시 그들의 문화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스와지 문화가 외국 문화에 영향을 받는 순간부터 그들은 저항의 수단으로 문화와 전통을 사용했다. 이러한 ‘문화적 민족주의’는 소부자 2세 국왕이 통치하는 동안에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소부자 국왕은 스와지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유럽인들에 동화되지 않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왕권, 즉 왕의 존재 자체가 ‘스와지인다움’의 핵심으로서, 국가는 그것 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스와지인들의 강한 믿음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스와지 민족은 왕을 중심으로 한다. 왕은 군대를 통솔하며 사법권자이고, 부를 분배하며 마술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그것이며, 바로 이것이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와질란드 왕가의 평가



소부자 2세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영국의 헌법을 버리고, 1973년에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의 아들 음스와티 3세는 1986년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2005년에 새로운 헌법을 반포했다. 그것은 국왕이 국무총리와 정부 내각과 사법부의 구성원들을 임명하는 절대 권력을 부여한 것이었다.

전통 방식의 통치체제를 생각해보면, 스와지 국왕은 정치적 역할이나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매년 치러지는 인크왈라 축제를 통해서 군주는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와 초자연적 존재들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더욱이 그가 가지고 있던 작은 힘은 다수의 금기와 규율 등으로 인해 제한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전통적 시스템이 현대화되면서 왕은 이런 모든 금기와 제한들을 무시하고, 다른 아프리카 민족주의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제약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전의 군주들이 야당의 활동을 금지시켰다면, 음스와티 3세는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소부자 2세가 새로운 민족 독립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해 의도했던 것이 음스와티 국왕 시대에 이르러 변질되며 권력이 남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문제점들로 우선 정당의 선거 참여가 금지되었으며, 예비 선거후보자들은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의 공약을 알 수가 없다. 또한 왕이 총리를 비롯한 일부 정부 요직자들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데다 총리는 왕과 성이 같은 들라미니를 가진 사람들만 선발한다는 점이다.

현 음스와티 3세 국왕의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2002년에 왕의 제트 전용기 구입으로 2,500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스와질란드는 23만여 명의 국민이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였다. 전용기의 가격은 가난한 국가 부채의 약 5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에 국민들이 격분하자, 들라미니 국무총리가 전용기는 국왕이 해외 투자나 국제 원조를 위해 외국에 긴급하게 나갈 일을 대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에 대해 최근 스와질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음스와티 3세 국왕에 대한 인식이 점차 좋지 않게 변화하고 있다. 때로는 종종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릇된 행위와 퇴보하는 정치사회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지도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스와질란드의 주요 군주





절대권력을 가진 전통과 독립의 수호자 소부자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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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자 2세



소부자 2세(Sobhuza Ⅱ, 1899~1982년)는 1899년에 응와네 5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태어난 지 5개월도 안 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 당시 갓난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할머니인 음들루니가 섭정을 하다가, 22살이 되던 1921년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8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즉위한 왕으로 남았으며, 직접 통치한 기간은 61년(1921~1982년)이다.

그는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냈으며, 독립 이후 영국 정부는 소부자 2세를 스와질란드의 국왕으로 인정했다. 통치 초기에 소부자 국왕은 1907년 영국 정부가 실시했던 토지 분할과 토지 박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던 차,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으로 가 당시 왕이었던 조지 5세를 만나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1929년에는 다시 영국의 추밀원에 토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해외 사법권의 조건에 따라 거절당하고 만다. 식민통치 기간 동안 소부자의 역할은 대부분 의식과 관련된 것이었으나, 여전히 스와지 국민에게는 전통의 수장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초반 소부자는 스와질란드가 독립을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영국 정부는 스와질란드에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게 하는 포스트-콜로니얼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소부자에게 강요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는 임보코드보 민족운동(Imbokodvo National Movement)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1967년에 독립 직전 선거에서 전석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소부자는 스와질란드가 직접 통치권을 가지게 된 1967년에 스와질란드 왕으로서 영국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후 1968년 9월 6일에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뒤이어 소부자는 왕국이 직면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각 부족들의 관습들 중 장점들을 혼합했다.

1973년 4월 12일, 왕은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시켰으며 이후 절대 통치자로 권력을 행사했다. 1978년에는 틴쿤들라로 알려진 40개의 지방의회에서 선택한 80명의 선거인단을 포함하는 부족의 통치 방식으로 회귀를 의미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표했다. 이와 발맞추어 스와질란드의 경제는 소부자의 리더십 하에 번성하게 되었다. 스와질란드는 천연자원이 풍부하였으며, 비(非)스와지인에게 귀속된 상당 부분의 토지와 광물자원의 이용권을 가져오기도 했다.

소부자 2세는 왕국의 결정권자로서 군주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되찾고 실제로 강화시킨 인물이다. 1980년대 초반 소부자 2세 국왕은 식민지 시대의 경계선에 의해 분할 및 분리되었던 모든 스와지 국민들을 재결합하고자 노력했다.



폭군으로 변해가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절대군주자, 음스와티 3세 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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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스와티 3세



음스와티 3세(Mswati Ⅲ, 1968년~현재)는 선왕 소부자 2세의 아들로 스와질란드가 독립하던 1968년에 태어나 18살이 되던 1986년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현재 그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절대군주로 불리고 있다. 존재하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다른 입헌군주국의 국왕들과 달리 국무총리를 비롯해 정부의 주요 관리를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 문제들을 결정함에 있어 틴쿤들라 체제 안에서 행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자문위원회와 국무총리 등으로부터 특별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그는 선왕 소부자 2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해산시켰던 의회를 복구시켰으며, 국민을 위한 의회의 활동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스와질란드의 가장 큰 사회문제로 꼽히는 에이즈를 해결하기 위해 음스와티 3세는 1971년 소부자 2세가 재위하던 때에 마지막으로 행해졌던 순결의식을 2001년에 다시 거행함으로써 일말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순결의식이 결정되면 스와질란드의 모든 처녀들은 5년 동안 성관계를 할 수 없다. 음스와티는 2001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18살 이하 모든 소녀들의 성관계를 금지하도록 선포하였다. 그러나 시행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그의 약혼자(열세 번째 부인)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이 선언을 폐지하고 말았다. 이를 보면 음스와티가 에이즈를 사회문제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일부다처제의 스와질란드 사회에서 개인의 필요성 정도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은 현재 15명의 부인과 25명의 자녀들을 두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약혼자가 임신한 이후에 결혼식 거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는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낳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음스와티의 통치는 정부와 정치 개혁에 있어 일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스와질란드 법과 관습에 따르면 왕은 사실상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다. 국무총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스와티는 최고 행정 권한을 쥐고 있으며 이러한 절대군주의 모습은 국민통합민주운동(PUDEMO) 국민통합민주운동(People's United Democratic Movement, PUDEMO)2) 같은 정당의 비판을 받고 있다. 즉 음스와티가 행한 여러 개혁들은 스와질란드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전통 질서를 더욱 더 강화시키고 영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음스와티 3세 국왕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지난 수년간 호화로운 생활과 여러 가지 부정부패 등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이는 스와질란드 발전의 저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음스와티의 통치는 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다. 그의 정권은 노골적으로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과도한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부당한 이유로 체포하여 구금시키고, 집과 재산을 부당하게 압수하기도 한다. 말에 대한 자유, 의회활동이 제한되어 있으며 사회운동가와 기자들을 억압하고 있다. 사법부는 음스와티의 이런 행동과 권력남용을 처벌할 법률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아프리칸스(Afrikaans)어로 ‘분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1948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공을 통치했던 국민당의 정책이다. 이는 각각의 인종 특성에 따라 인종들이 분리 및 발전되어야 한다는 인종차별법이다. 이 법은 당시 남아공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던 백인이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흑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로 인해 백인의 타 인종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과 폭력, 고문 등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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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통합민주운동(People's United Democratic Movement, PUDEMO)은 스와질랜드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야당으로 스와질랜드 정부가 주시하고 있는 단체이다. ‘해가 저물지 않게 하라’(Ulibambe Lingashoni)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던 이 단체가 주장하는 바는 ‘민주적 스와질랜드 건설’, ‘국가의 모든 부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 ‘국가의 모든 토지는 그곳에서 일하는 국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모든 아동, 청소년에 대한 평등한 교육’,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와 같은 내용이다. 이 단체는 또한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며, 1991년에는 틴쿤들라 시스템을 검토하려던 음스와티 3세 국왕의 위원회 활동을 반대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국왕을 모욕하고 폭동을 선동했단 이유로 이 정당의 지도자인 마리오 마수쿠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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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영 |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글쓴이 윤서영은 아프리카 문학 및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비교문학과에서 나이지리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하우사문학의 혼종성 연구>, <비교문학 관점에서 본 영향과 수용의 문제>, <문학저널 kwani?에 나타난 소수문학적 특징>, <가나 대중음악의 혼종성>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1.13.



주석


1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아프리칸스(Afrikaans)어로 ‘분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1948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공을 통치했던 국민당의 정책이다. 이는 각각의 인종 특성에 따라 인종들이 분리 및 발전되어야 한다는 인종차별법이다. 이 법은 당시 남아공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던 백인이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흑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로 인해 백인의 타 인종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과 폭력, 고문 등이 실시되었다.

2


국민통합민주운동(People's United Democratic Movement, PUDEMO)은 스와질랜드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야당으로 스와질랜드 정부가 주시하고 있는 단체이다. ‘해가 저물지 않게 하라’(Ulibambe Lingashoni)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던 이 단체가 주장하는 바는 ‘민주적 스와질랜드 건설’, ‘국가의 모든 부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 ‘국가의 모든 토지는 그곳에서 일하는 국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모든 아동, 청소년에 대한 평등한 교육’,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와 같은 내용이다. 이 단체는 또한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며, 1991년에는 틴쿤들라 시스템을 검토하려던 음스와티 3세 국왕의 위원회 활동을 반대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국왕을 모욕하고 폭동을 선동했단 이유로 이 정당의 지도자인 마리오 마수쿠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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