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조선시대 천문학의 발전 - 시간과 공간을 재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8회 작성일 16-02-06 16:35

본문















14547441308955.png


조선은 과학기술을 등한시했던 “유교의 나라”라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조선의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문헌들을 살펴보면, 조선은 물론이고 전근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룩한 과학기술의 성취를 보여주는 수많은 책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달력과 역법으로 대표되는 천문학은 시간과 공간을 측정하는 첨단지식이 집약되어있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서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규장각박물관 특별전시에서는, 조선과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천문학 서적들을 볼 수 있다.




세종 시대 천문학의 성취: 조선의 자국력 『칠정산』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소개되어 관심있는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는 세종 시대의 성취로 ‘칠정산’이라는 역법이 있다.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친근한 개념인 달력으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달력과 역법은 차원이 다르다. 역법은 해와 달, 그리고 오행성들의 일 년 동안의 운행 도수를 정밀하게 계산해내는 요즘의 수리천문학과 같은 전문 지식이다. 관상감의 천문 관원들이 팀을 꾸려 1년 동안 천문 데이터를 계산해내고 그 결과를 보통 책력이라 부르는 ‘역서’로 간행해 반포했다.





이미지 목록




14547441321128





14547441336060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

조선시대 세종26년(1444년),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역법서적이다. 『칠성산내편』은 상・중・하 3권 7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대 수시력(授時曆)을 바탕으로 하고 명나라 초기에 편찬된 『대통력법통궤 大統曆法通軌』를 참고하여 엮었다. 5권 5장으로 이루어진 『칠성산외편』은 명나라 초기에 번역된 이슬람 역법인 회회력(回回曆)의 오류와 미비한 점을 수정・보완하여, 동서양 천문학의 융합을 이룬 저서이다.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을 통해 조선 정부는 일월식 및 일출・일몰 시각 등 각종 역법 계산을 관측지인 한성을 기준으로 삼아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역법 운용의 독립성을 실현하기도 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이로써 우리나라의 역법은 여한이 없을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라는 자신에 찬 어조를 엿볼 수 있다. 1443년 7월, 세종과 그 신하들은 향후 『칠정산내편』을 이용하여 역을 추산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일·월·오성의 운행도수를 계산하는 역법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문화국가의 지표였다. 물론 전근대 최고의 문화 선진국이자 황제국인 중국이 고대 이래로 최고 수준의 역법을 확립해 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유럽에서 근대과학이 탄생하기 시작하는 17세기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역법, 즉 수리천문학의 최고 선진국은 중국이었다. 특히 원나라 때부터는 당시까지 가장 우수했던 『수시력1)』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서양(즉 아랍)의 천문학까지도 마스터해 그것을 이용한 역법을 확립했으니(『회회력』이 그것이다), 중국은 당대 동서양의 최고 역법을 지닌 세계 최고의 천문학 선진국이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쥔 중국은 그들이 확립해낸 역법을 천하의 표준으로 제시했으며, 주변 제후국들은 그러한 역법을 따라야했다. 그러나 외교적 관례였을 뿐 주변국들은 자체적으로 역법을 확립하려 노력했다. 물론 노력한다고 역법을 마스터해서 자국의 위치를 기준으로 일·월·오성의 운행도수를 계산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천체들의 운행도수를 만족스러울 만큼 계산하지 못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이 판단하고 있다. 자국의 수도를 기준으로 천체들의 운행도수를 자체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조선 건국 후 세종시대에 들어와서 가능했다. 그것이 1442년에 편찬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이다. 천문학 선진국인 중국의 역법에 의존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립을 이룩한 쾌거였다. 15세기 당시 중국을 이어 두 번째로 이룩한 천문학의 성과로 신생국가 조선이 명실상부한 문화국가임을 자부할 수 있는 국가적 성취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규장각에는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은 물론이고 그것을 편찬하기까지 참조하고 정리해낸 많은 문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중에 『수시력입성』은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계산한 데이터를 수록한 것으로 규장각에만 남아있는 수시력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수시력첩법입성』은 고려의 천문학자 강보가 수시력을 학습하면서 계산한 데이터를 수록한 책이다. 14-15세기 당시 전 세계 최고의 역법이었던 『수시력』의 내용을 담은 천문학 문헌을 규장각은 가장 잘 품고 있다.





이미지 목록




14547441345594





14547441357045







『수시력입성 授時曆立成』

원나라 천문학자 왕순이 수시력의 산법으로 태양과 오행성의 위치를 편리하게 계산하기 위해 작성한 표이다. 표가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왕순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사업은 곽수경이 물려받아서 완성하였다. 하지만 1369년에 편찬된 『원사 元史』 「역지 曆志」에는 계산의 이론과 공식을 담은 『수시력경 授時曆經』만이 수록되고, 계산에 필요한 『수시력입성』은 빠져있어서, 수시력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1442년 칠정산을 확립한 이후 조선은 1444년부터 한양을 기준으로 계산해낸 데이터를 담은 우리의 역서를 매년 간행 반포했다. 중국의 황제가 외교적 관례상 준 중국의 역서는 단지 참고용으로 활용할 뿐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문화국가 조선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역서를 간행해 전국에 반포해 썼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대략 5천부의 역서를 간행했다고 하지만 간략한 달력의 형태로 더 많은 부수의 역서가 인쇄되어 유통되었을 것이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역서의 공급과 수요는 급격하게 증가해 18세기 말 정조대에는 무려 30만부가 넘었다. 대략 다섯 집에 한부씩의 역서가 보급되었던 셈이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발행부수인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이미지 목록




14547441367947





14547441379925







『대청건륭오십년시헌서 大淸乾隆五十\年時憲書』 중국본(왼쪽)과 조선본(오른쪽)

시헌력법으로 반포된 1784년의 역서이다. 시헌력(曆)이 아닌 시헌서(書)라고 한 이유는 건륭제의 이름 홍력(弘曆)을 피휘(避諱)한 것이다. (피휘란, 왕이나 황제 이름을 피해서 글자를 바꿔쓰거나 다른 글자로 쓰는 것이다)

단력장, 연신방위도, 각월장으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구조는 명나라 대통력과 거의 같지만, 시헌력에는 13성(省) 및 몽고(蒙古), 회부(回部) 등지의 일출・일몰・절기 시각까지 기입되었다. 이는 청 황제가 명실상부하게 ‘제국의 시간을 지배하는 자’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조선에서는 서명응・서호수 부자가 “우리나라의 달력에도 팔도 감영에서의 일출・일몰・절기의 시각을 수록하여 관상수시(觀象授時)의 왕도정치를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으나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다.

『시헌서』의 조선본은 조선 관상감에서 같은 해에 간행했다. 형식은 중국본 『시헌서』와 같으며 다만 연신방위도가 빠져있다. 이면지 혹은 일자가 적혀 있는 부분은 소장자가 잡기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조선본 역서는 30만부 가까이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중국에서의 역법 패러다임의 변화: 시헌력 체제의 확립



17세기 전반의 시기는 동아시아 천문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281년에 반포된 이래 360여년 동안 동아시아 역법의 표준이었던 『수시력』이 『시헌력』에 그 자리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명말 예수회 선교사-천문학자들과 중국 흠천감의 천문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매우 우수한 새로운 역법이, 청이 북경을 점령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면서 그대로 이어받아 반포한 것이 『시헌력』이었다.

『시헌력』이 이전의 『수시력』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우수한 역법일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최신 수학과 천문학에 토대를 두었던 것이 큰 배경이었다. 17세기 전반 명말 청초의 시기는 중국 과학사에서 가장 큰 변동의 시기였는데, 그 계기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래의 서양 예수회 선교사가 주도한 서양의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의 유입이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해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1602)와 천문학의 『건곤체의』(1605), 그리고 수학의 『기하원본』(1611) 등의 개설적인 서양과학서가 간행되어 중국에 소개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숭정역서』 편찬사업이라는 국가적인 차원의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서양식 수학 및 천문학 지식의 학습과 그것을 토대로 한 개력(改曆)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미지 목록




14547441391792





14547441404616







『숭정역서 崇禎曆書』

명나라 숭정 연간에 예부상서 서광계와 예수회 선교사들이 개력(改曆)을 위해 번역한 서양 천문학 총서이다. 그러나 1635년에 『숭정역서』의 편찬에도 불구하고, 개력은 성공하지 못한 채 명조는 멸망하였다.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은 『숭정역서』를 『서양신법역서』로 개찬(改撰)하고 이를 청조에 진상했다.




그것은 예수회 선교사 아담샬(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 로(Jacobus Rho, 1593~1638), 그리고 그들의 중국인 협력자 서광계와 이천경 등의 고위직 관료들의 주도로 1629년부터 시작되어 1635년 최종 보고서가 올려지며 일단락되었던 개력을 위한 거대한 과학 프로젝트였다. 이 『숭정역서』는 명 말의 다급한 정치 상황 속에서 반포되지 못했지만 그 내용이 고스란히 청이 들어선 이후 1644년 『시헌력』으로 반포되었고, 1645년 『서양신법역서』로 편찬·간행되었다. 『서양신법역서』는 『건곤체의』와 『기하원본』을 위시해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중요한 천문학 및 수학의 모든 전문적 지식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수록된 방대한 문헌이었다.

결국 1644년부터 매년 청 황제가 간행해 반포한 『시헌력』이라는 이름의 역서는 한 나라가 『태초력』(BC 104년)을 반포한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전통 역법과는 너무나 다른 계통의 서양 천문학 계산법을 활용한 전혀 새로운 역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법이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된 『서양신법역서』는 80여년 후에는 『역상고성』(1723년)으로 다시 업그레이드 되었다.





14547441418241





『어제역상고성 御製曆象考成』

청나라 강희 연간에 편찬된 『어제역상고성』과 건륭 연간에 편찬된 『역상고성후편 曆象考成後編』의 합본이다. 강희제의 명령 하에 1722년에 탈고한 『어제역상고성』은 상세한 해설과 체계적인 구성을 갖춤으로써 『서양신법역서 西洋新法曆書』의 난해함과 번잡함을 해결했다. 1742년에 완성된 『역상고성후편』은 케플러의 타원 궤도 이론과 카시니의 대기굴절 계산법 등 유럽 천문학의 최신 성과를 반영했다. 이 두 책은 각기 다른 시기,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편찬되었지만, 건륭제와 그의 관료들은 선대 황제들의 사업을 이어나간다는 의식 하에 두 책을 함께 묶어냈다.

청나라에서 계속 새로운 역법을 추구함에 따라,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달력은 청나라 역법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는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거의 매년 관상감 관원을 북경에 파견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새롭게 바뀐 역법을 소화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또한 20년 후에는 케플러의 타원궤도설에 토대를 둔 『역상고성후편』(1742년)으로 또 한 차례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로써 17세기 전반 『숭정역서』 사업으로 시작된 패러다임의 변화는 18세기 중반 무렵 마무리되었다. 청나라 최고의 전성기를 연 건륭제 치세(1735-1796)의 초기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성취는 『고금도서집성』과 『사고전서』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조선후기 시헌력 체제의 학습과 독자적 역서의 편찬



중국에서의 역법 패러다임의 변동은 주변국 조선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중원을 장악하고 새로운 세계질서의 중심에 선 청이 『시헌력』으로 개력했기 때문에 조선 또한 개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정치적으로 절실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병자호란 이후의 굴욕적 패배가 심어준 심정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정치적 저항 없이 『시헌력』 체제를 배워 개력하는 국가적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헌력으로의 개력 사업은 중국의 『숭정역서』 편찬 사업이 그랬듯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전혀 모르는 서양식 수학과 천문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화해야만 가능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 속에서 공식적인 중국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시헌력』 체제를 마스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고난한 과정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조건 정부는 천문관을 중국 사신행에 은밀히 파견해 방대한 관련 천문역산서를 몰래 구해 와서는 자력으로 연구해야했다.

1644년 개력 사업을 시작한지 10년만인 1654년 역서부터 비로소 시헌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24절기와 날짜 계산 정도에 불과한 미완성의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일식·월식과 오성의 운행 계산과 같은 정밀한 계산은 더 오랜 세월의 학습을 필요로 했다. 비교적 만족스러운 정도로 새로운 역법을 조선 관상감의 관원들이 마스터한 때는 1708년 무렵에 가서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청이 1723년 『역상고성』 체제로 전환했고, 곧 이어 1742년에는 타원궤도설에 입각한 『역상고성후편』 체제로 전환했다. 그에 따라 1729년에는 어렵게 『역상고성』 전질을 구해와 어렵게 연구를 거듭했고, 1745년에는 『역상고성후편』 전질을 구해와 고난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 결과 17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시헌력』 체제를 어느 정도 마스터하고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행 도수를 완벽하게 계산해낼 수 있었다. 1644년 시작한지 120여년이 지난 후였다.

이렇게 17-18세기 조선 천문학자들이 시헌력 체제를 배워서 익히고 조선 역서를 독자적으로 편찬,간행한 것은, 조선 초 세종 시대에 『칠정산』을 편찬해낸 것과 비견된다. 서양의 천문학 지식과 중국의 천문학 지식이 모여 이룬 동서 천문학의 조화라는 성취를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오로지 서적의 연구만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이룩한 것이다.




19세기 조선 천문학의 두 가지 모습: 남병길의 『성경』과 김정호의 『혼천전도』



18세기 후반 이룩한 조선의 놀랄만한 천문학의 성취는 19세기 들어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19세기 동안 조선 정부 주도의 주목할 만한 의미 있는 천문학 프로젝트는 없었다. 이미 완성된 체제에 따라 정상과학적인 천문학의 활동이 근근이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두 가지 문헌에서 엿볼 수 있다.





이미지 목록




14547441428497





14547441437786







『성경 星鏡』

1861년 관상감 제조 남병길이 편찬한 별자리지도이다. 청나라의 『흠정의상고성속편 欽定儀象考成續編』에 나온 별들 중에서 3원(垣) 28수(宿) 별자리와 남반구의 별 130개를 합하여 1,449개의 별을 수록했다. 관측 시점인 1861년을 기준으로 실측한 별의 좌표들은 오차가 매우 적어서 현대의 천문학으로 계산해보면 오늘날의 어떤 별을 기록한 것인지 95% 이상 동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별의 크기에 따라 구분한 별의 등급도 현대의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의 말미에는 별의 좌표를 관측하기 위한 적도의(赤道儀)의 그림과 사용법 등이 적혀 있다.

서문에서 남병길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사라졌던 고대 성인의 천문학 지식이 서양인들을 포함하는 이후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차츰 증보되면서 더욱 정밀해지는 역사를 소개했다. 그는 천문학 지식을 텍스트가 아닌 실측(實測)을 통해서 추구하였으며,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을 위해서 전문적인 내용을 서술할 수 있었던 명실상부한 사대부 천문학자였다.




하나는 남병길의 저서 『성경』이다. 남병길은 그의 형 남병철과 함께 세도정치기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경화 사족 일원으로 무려 20여편의 수학과 천문학 책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들은 관상감 관원들이 학습의 교재로 쓸 수 있는 매뉴얼 성격의 책들로 최신의 수학과 천문학 계산법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병길이 저술한 『성경』(1861년)은 19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천문학 성과인 『의상고성속편』(1845년)에 이르기까지의 항성에 대한 최신의 지식 정보를 집대성한 책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비록 정부 차원의 주목할 만한 사업은 없었지만 조선 천문학자들의 학습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14547441450080





『혼천전도 渾天全圖』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의 틀 안에 서양 천문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천문도이다. 1850-60년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목판으로 『여지전도 輿墬全圖』와 함께 한 쌍으로 제작하였다고 추정된다. 필사본과 목판으로 모두 전해질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별자리 그림의 가장자리에는 12궁, 12차, 24절기가 적혀있다. 그림 안에는 적도와 황도, 은하수, 전통 별자리인 3원 28수를 표현했다. 바깥에는 서양천문학 서적에서 두루 인용한 해와 달과 오행성, 즉 칠정(七政)의 형상・크기・거리・공전주기, 일월식의 원리,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 브라헤의 우주모델, 달의 위상변화의 원리 등을 담았다. 혼천전도는 전통과 서구의 융합(syncretism)・혼종(hybrid)을 의미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문헌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는 『혼천전도』라는 천문도이다. 이 천문도는 언뜻 보아 전체 외형이 전통 천문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서양 천문학의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예컨대 도면의 상단에는 일월오성의 그림과 크기 등의 데이터를 적은 ‘칠정주천도’는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의 기록 내용이며, 하단의 ‘칠정신도’와 ‘칠정고도’의 그림과 설명문은 티코 브라헤(Tycho Brache)와 톨레미(Ptolemy)의 우주도를 도해한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천문도 그림의 기준이 되는 황도와 적도가 모두 도면 정 중앙에서 좌우로 약간씩 벗어나 기하학적인 대칭을 이루며 그려진 것을 들 수 있다. 과학적인 천문도라면 적도가 정 중앙에 그려지거나 황도가 정 중앙에 그려짐으로써 좌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이 「혼천전도」는 겉보기에만 기하학적인 대칭적 균형을 이루었을 뿐 황도와 적도 그 어느 것도 기준이 되지 못하는, 천문학적으로 천문도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이 천문도는 전통 천문도와 서양식 천문학이 기묘하게 융합된 ‘키메라’2)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렇게 기묘한 천문도를 김정호라는 위대한 지도 전문가가 최한기의 도움을 받아 19세기 중반 무렵 만들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또한 요즘 웬만한 박물관마다 하나씩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목판으로 만들어져 매우 널리 보급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반 무렵 조선에서는 남병철, 남병길 같은 경화사족 사대부 천문학자들이 관상감의 천문 관원들과 함께 전문적으로 천문학을 학습·연구하면서 천문 기구를 개량·창제하는 활동이 있었다. 반면에 천문학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지도 전문가가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 천문학 지식을 기묘하게 결합해 키메라와도 같은 천문도를 제작하고, 그것이 조선 땅에 널리 유행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중앙 중심부에서 과거 오래전 17세기에 시작된 고전적 ‘시헌력 체제’의 패러다임이 유지되는 속에서, 지방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불구의 천문학이 만들어지고 널리 유행하는 것이 19세기 중후반 조선의 모습이었다.



<전시회 정보>




‘수시력’은 원나라의 천문학자 왕순, 곽수경 등이 확립해서 1281년부터 사용한 역법으로 중국의 전통 역법으로서 가장 진전된 우수한 역법이었다. ‘회회력’은 원나라 때 아랍의 천문학자들이 확립한 역법으로 『알마게스트』의 천문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원주를 360도를 쓰는 등 중국 전통 천문학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나라는 ‘수시력’을 공식 쓰면서 우수한 ‘회회력’을 보완해서 천체 운행의 계산에 활용했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하나의 생물체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유전형질을 지닌 세포가 함께 존재하는 괴물과 같은 생물체를말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괴물 ‘키마이라’에서 유래했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14547441456802

문중양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계산통계학과에서 통계학과 컴퓨터사이언스를 공부한 후, 대학원에서 서양과학사와 한국과학사를 공부했다. 《조선의 수리학(水利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줄곧 조선 후기 서양과학과 전통과학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주론을 중심으로 그 양상과 성취에 대해서 연구해왔다. 처음에는 18세기 영·정조대의 과학 활동 및 사대부 지식인들의 과학관을 중심으로 연구를 했으나, 조선 초기 세종대 과학의 성취에도 관심이 많으며, 요즘에는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과학활동에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저서로 <조선후기 水利學과 水利담론>과 <우리역사 과학기행> (2006년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 있다.

인물정보 더보기


출처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
세계는 바깥에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안에도 있다. 세계는 눈에 보이는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과거에도 있었다. 규장각 특별전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는 우리 안에 있는 오래 전의 세계에 관한 전시이다. 규장각이 전통 문화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세계 지식의 집성지라는 관점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중국본 도서에 집중했다. 전통 유학과 근대 과학, 지리서와 백과사전, 수학과 역법,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규장각 특별전을 통해 그간 잊혀져 있었던 ‘우리 안의 세계’를 다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발행2015.11.16.



주석


1
‘수시력’은 원나라의 천문학자 왕순, 곽수경 등이 확립해서 1281년부터 사용한 역법으로 중국의 전통 역법으로서 가장 진전된 우수한 역법이었다. ‘회회력’은 원나라 때 아랍의 천문학자들이 확립한 역법으로 『알마게스트』의 천문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원주를 360도를 쓰는 등 중국 전통 천문학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나라는 ‘수시력’을 공식 쓰면서 우수한 ‘회회력’을 보완해서 천체 운행의 계산에 활용했다.
2
하나의 생물체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유전형질을 지닌 세포가 함께 존재하는 괴물과 같은 생물체를말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괴물 ‘키마이라’에서 유래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