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중국여행을 기록하다 - 조선후기 연행록과 연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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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9회 작성일 16-02-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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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과 연행록



17세기 초 동아시아는 한·중·일 모두 역사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명·청 왕조의 교체가 있었고, 일본은 에도시대가 열렸다.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와 벌인 전쟁(병자호란, 1637년)에 패하면서 명이 아닌 청에 조공외교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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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래조도.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면서 조선은 매년 정기적으로 두 차례, 비정기적으로는 한 두 차례 외교사절단을 청에 파견하였다. 외교사절로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부경사행(赴京使行), 혹은 연행(燕行)이라고 하는데, 황제가 있는 연경(지금의 북경)을 가는 외교행위의 뜻을 담고 있다. 연경은 오늘날 중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과거 원, 명, 청의 수도였다. 오랜 기간 중국의 수도였던 탓에 연경을 가는 것이 곧 중국 사행을 뜻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사행을 천자를 알현한다는 의미를 써서 ‘조천(朝天)’이라 일컬었다. 반면에, 청나라에 가는 사행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감정에 따라 조천 대신 연행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조선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1637년(인조 15)부터 1894년까지이다. 250여 년 동안 줄잡아 500회 이상의 조선사행단이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사행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견문을 글로 남겼는데, 그 결과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현재 400여 종이 넘는 중국여행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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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이 연경을 다녀온 과정을 일록 형식으로 쓴 ‘연행일록’. <출처: e뮤지엄 – 공공누리>



외교사절들이 중국 사행에 참여하여 겪고 느낀 것을 기록한 글을 사행록이라 한다. 이 사행록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서 원나라 때는 ‘빈왕록’이라 하였고, 명나라 때는 ‘조천록’, 청나라 때는 대개 ‘연행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행록은 주로 청나라 사행을 한 조선후기 사행록을 뜻하지만, 현재 중국견문록들을 통상 연행록이라고도 지칭하여 다른 명칭보다 훨씬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행록은 공식적인 보고문서인 등록과 달리,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연행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 견문과 감회, 의론 등을 적은 일종의 여행기록물이다. 연행록은 공적인 보고 형식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일기 형태의 저술이 대부분으로 기록한 사람의 개성과 창작 역량이 훨씬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었다. 대부분 일기체의 ‘일록’ 형식이나, 기사체잡록 형식도 있다. 따라서 기행시나 기행산문 형태의 글이 많으며, 간혹 여성독자들을 위한 한글 기행가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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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이 눈을 덮을정도로 길어 스스로 미수라 불렀다는 허목의 초상화



연행록은 대부분 한자로 쓰였지만, 한글로 된 연행록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이다. 홍대용은 『담헌연기』라는 이름의 연행록을 썼는데, 한문 연행록 외에 한글 연행록도 쓴 것이다. 『을병연행록』은 홍대용이 연로하신 어머니를 위해 한글로 썼다고 한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연행록의 인기로 독자층이 확대되어 『을병연행록』 외에도 『무오연행록』, 『연행가』 등 여성이나 서민 독자층을 겨냥한 한글 연행록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연행가』는 1866년(고종 3) 왕비책봉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청나라로 파견된 홍순학이 130일간의 연행 여정을 기술한 가사체의 한글연행록이다. 당시의 국제관계를 날카롭게 관찰한 연행록으로 노정 내용이 자세하고 풍부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양반가사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19세기 중반 김직연(1811~1884)의 『연행녹』도 한글 연행록이다. 1858년(철종 9) 10월 26일 출발하여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부터 1859년 3월 20일 귀국할 때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허목의 『죽천행록』,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이계호의 『연행록』, 서유문의 『무오연행록』에 이은 다섯 번째 한글 연행록이면서 현존하는 최후의 사행 기록이다.




조선의 3대 연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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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업의 연행록



조선시대 유명한 연행록은 모두 산문형태의 글이다. 연행록은 한시 형태에서 점차 연행의 경험을 산문으로 기록하는 형태로 변화되어 갔는데, 산문이 시에 비해 경험한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쓰인 수많은 연행록 중에서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1712), 홍대용의 『담헌연기』(1766),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가 가장 유명했다. 이들 연행록은 연행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미리 읽고 떠날 정도로 연행록의 필독서였고 문학적으로도 훌륭했다. 특히 김창업은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번영상을 놀라우리만큼 편견 없는 태도로 기술하였다. 그가 쓴 『노가재연행록』은 『열하일기』뿐 아니라 홍대용이나 이덕무의 연행록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후대의 연행록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노가재연행록은 편년체에 가까운데 평순하고 착실하여 조리가 분명하며, 홍담헌은 기사체를 따랐는데 전아하고 치밀하며, 박연암은 전기체와 같은데 문장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내용이 풍부하고 해박하다”
- 김경선, 『연원직지

『노가재연행록』를 비롯하여 『담헌연기』, 『열하일기』가 후대인들에게 계속적으로 읽힌 것은 이들 연행록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뻔하고 재미없는 연행록이 아니라 재밌고 감동을 주는 연행록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견문록들은 여정을 날짜순으로 기록한 일기 형식이 많은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을 비롯한 대다수의 연행록들은 시간순으로 여정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여정순으로 연행일기를 쓰면 여행의 전 과정이 빠짐없이 기술되는 장점이 있지만, 주제의식이 산만해지고 금방 지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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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열하일기 <실학박물관 제공>



홍대용은 이전의 연행록과 달리 인물이나 사건 등을 중심으로 『담헌연기』를 기록하였다. 누구나 들렸던 장소나 관례적인 내용들을 과감하게 빼버린 것이다. 물론 중국을 다니면서 그때그때마다 여정을 깨알같이 메모했을 터이지만, 연행록을 정리할 때는 본인이 중국 견문에 가장 중요한 경험을 집중적으로 기술했다.

여행의 여정순과 주제순의 장점을 모두 취해 적절하게 섞어 놓은 것이 박지원의 『열하일기』이다. 『열하일기』는 여정순의 일기 형식에다가 특별한 내용을 ‘(記)’ 또는 ‘(說)’의 형식으로 확대하여 무미건조한 연행록을 문학작품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열하일기』는 시간 순으로 기술하는 종래의 평면적 서술을 지양하고, 극적인 장면을 중심에 두고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를 하여 가장 많이 읽혔다.




실학자들의 연행록



실학자들이 중국 연행에 참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홍대용이다. 홍대용은 연행록인 『담헌연기』와 『건정동필담』(일명 회우록)에 유리창에서 만난 중국문인들과의 교제를 소상히 적었는데, 이는 박지원과 북학파 실학자들이 잇달아 연행에 나서는 데 직접적인 자극을 주었다.

실학자들이 남긴 연행록은 주로 중국 사대부들과의 필담을 통해 당시 중국의 사상적 학문적 동향을 탐지하고 그들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눈 내용이 많았다. 18세기 한중 문화교류의 선두에 실학자들이 있었고, 그 결과물이 곧 연행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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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연행록인 입연기 <실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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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북학의 <실학박물관 제공>



홍대용과 박지원에 이어 이덕무도 1778년 38세로 서장관 심염조의 수행원으로 연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사신단의 대표였던 채제공의 추천을 받은 박제가도 함께 참여했다. 중국을 다녀 온 이덕무와 박제가 역시, 각각 『입연기』와 『북학의』를 써서 자신들의 중국 견문을 전하였다. 『입연기』에서 이덕무는 청나라의 신간 서적과 고증학풍을 소개하고 반정균, 이조원 등 중국 사대부들과 나눈 학문적 교류를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입연기』는 청나라로 떠나기 전날 박지원, 이서구와 함께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 이야기로 시작하여, 북경 입성부터 연행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는 연행록이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연행록 형태의 글은 아니나, 중국을 다녀온 뒤 쓴 것으로, “학중국” 즉 중국을 배우자는 논리와 방법론을 제시한 개혁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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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의 난양록 <실학박물관 제공>



1790년 서호수·박제가와 함께 중국을 다녀온 유득공은 『난양록』(『열하기행시주』라고도 함)을 썼는데, 『열하일기』와 마찬가지로 북경뿐 아니라 열하까지 다녀온 여행 기록이다. 이때의 연행은 건륭황제의 80세 만수절 행사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은부사가 서호수였다. 서호수는 1776년(영조 52) 처음 청나라에 연행사로 갔었는데, 이때는 실학자 유금과 함께 동행하였다.

1790년 열하 연행은 박지원이 갔던 1780년 연행과 달리 북경을 거치지 않고 황제가 있는 열하로 곧장 간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서호수의 사행길은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유일한 사행로였다. 서호수는 열하를 다녀온 뒤 『열하기유』를 남겼다.



압록강


박작성(압록강 연안의 성) 남쪽 푸른 물결이 불었는데 泊汋城南漲綠波

경쾌한 배, 빠른 말, 이별 노래 기다리네. 快船輕騎待離歌

갑작스런 편지가 빠른 파발에 보내오니 忽忽書付流星撥

연경으로 가지 말고 열하로 향하라 하네. 不向燕京向熱河

- 유득공의 『열하기행시주』 중에서

1790년 박제가와 함께 열하를 갔던 유득공은 1801년에도 박제가와 함께 재차 중국에 다녀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한 것이 『연대재유록』이다. 여기서 유득공은 사고전서 편찬자이기도 한 기윤 등과의 만남을 통해 당시의 중국 학계가 고증학 일변도로 되어가고 있음을 소개하였다.




연행도와 해로사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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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극돈이 정여에게 그리게 한 봉사도



청나라 연행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연행록 외에도 연행도가 있었다. 연행도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한 조선사행을 묘사한 기록화를 말한다. 연행도는 출발부터 사행의 최종 목적지인 북경까지 주요 사행 경로와 북경 일대의 태학과 공묘 등 명승유적지를 답사하며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연행도는 사행 노정의 주요 경관뿐만 아니라 이제묘, 강녀묘, 국자감 등의 유교적 이념과 결부된 명소, 아울러 명나라의 옛 사적 등이 그려져 있는 등 명에 대한 회고와 중국 명승을 유람한다는 의식이 곳곳에 배여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연행도는 사적인 그림이 아니라 한중 양국의 공식적 외교활동의 결과로 그려진 기록화이다. 대개 조천도, 연행도와 같이 양국 사신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노정의 견문과 외교의식 절차를 그린 기록화인데, 이 외에도 중국사신을 영접하였던 관반사들의 계회도와 조선사신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및 전별도1)와 같은 인물화도 있다. 반대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들의 영접과 관련한 기록화로는 영조도2), 관반계회도, 영접도감의궤반차도 등이 전하고 있다. 청나라 사신들의 영접 관련 기록화로는 조선에 4차례 파견된 청나라 사신 아극돈(1685~1756)이 청나라 화가 정여를 통해 그리게 한 <봉사도>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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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로 가는 바닷길 – 항해조천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해로사행과 관련해서는 17세기 초 명·청교체기에 그려진 <항해조천도>가 있다. 후금이 요동을 차지하자 조선은 할 수 없이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감행한 바닷길 사행을 그린 해로사행도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위험한 해로 노정을 과장되게 그려 명에 대한 의리명분을 강조하고자 했다.

보통 사행도는 그 길을 회상하고, 이후 사신들의 여정에 참고하기 위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러한 점에서 바닷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해로사행도는 매우 특별하다. 현재 전해지는 해로사행도는 1624년 반정을 일으킨 인조책봉을 위해 명나라로 떠난 사행단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이 사행의 정사이덕형이었고, 서장관은 홍익한이었다. 위험한 바닷길을 뚫고 무사히 귀국한 삼사는 생사고락을 같이 한 우의를 기념하기 위해 그림 3본을 제작하여 나눠가졌는데, 현재 2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해로사행도는 명나라 사행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18세기와 19세기에도 여전히 모사되었다.




동아시아의 연행록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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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연행록은 동아시아 조공 외교의 산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월남(베트남)의 연행록, 유구(오키나와)의 연행록도 있다. 2009년 중국에서 발간된 『월남한문연행문헌집성』에는 53인이 쓴 79종의 연행록이 영인되어 실려 있다. 월남국은 조선 다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많이 파견한 나라이다.

반면, 중국의 외교사절단으로 조선·안남·유구 등에 파견된 책봉사의 기록도 있다. 송대에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명대 동월이 남긴 『조선부』가 대표적이다. 중국이 유구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명대에는 17회, 청대에는 8회에 불과했지만, 유구국을 다녀온 중국 사신들은 대부분 기록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사유구록』인데, 이와 유사한 기록물들이 여러 종 확인되고 있다.

그 외 자료들은 『국가도서관유구자료』(북경도서관출판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북경 고궁박물관에 「유구책봉도」라는 그림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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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양에서 사행단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학술제를 여는 한·중 학자들 <연합뉴스 제공>



연행록은 중국과 주변국들과의 조공체제의 산물이자 동아시아 국제 교류의 소산으로 특별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우리 기록문화의 유산이지만,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공유하고 연구해야 할 자산이기도 하다. 17~19세기 동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지리 등 각종 정보가 담겨있는 연행록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전별도(餞別圖)


사행 송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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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도(迎詔圖)


사신을 영접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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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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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1.17.



주석


1전별도(餞別圖)


사행 송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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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영접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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