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카를 폰 오시에츠키 - 급진적 평화주의와 반파시즘 투쟁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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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4회 작성일 16-02-0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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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에스터베겐 수용소의 오시에츠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








카를 폰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는 전간기(戰間期, 제1차 세계대전 종료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의 기간) 독일의 비판적 언론인이자 평화 저술가였다. 그는 순수 언론인으로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오시에츠키는 1920년대에 전쟁과 무장을 반대하는 급진적 평화주의 기사와 논설로 크게 주목을 받았고, 1930년대 초 나치즘의 위협을 알리고 폭압을 비판하는 저술 활동으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그는 1935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이 유력했으나 나치의 방해로 인해 1936년에야 전년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빈한한 삶에서 우파 민족주의자로


출신은 미약했고 출발은 모호했다.



오시에츠키는 1889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일제국의 북동부인 슐레지엔에서 살다가 더 나은 삶을 찾아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오시에츠키의 아버지는 변호사 사무실의 보조 자리를 얻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부업으로 식당 운영을 해야 했다. 오시에츠키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가 홀로 식당을 했고 궁핍한 살림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함부르크의 시의원이자 나중에 시장이 되는 막스 프레될(Max Predöhl)이 나서서 오시에츠키의 집안을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오시에츠키는 실업계 중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학업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프레될의 소개로 함부르크 시 검찰청의 하급 보조 서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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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26세의 오시에츠키



양부이자 사회민주주의자였던 구스타프 발터(Gustav Walther)의 영향으로 오시에츠키는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정치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오시에츠키는 스무 살을 전후해 삶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낮에는 직장 업무에 충실했지만 밤에는 다양한 문화 행사와 정치 모임에 드나들었다. 그는 여가 시간에 집중적으로 독서에 매달렸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와 희곡을 써보기도 했지만 곧 정치나 사회 현실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썼다.

1911년부터 그의 기고문은 헬무트 폰 게를라흐(Hellmut von Gerlach)가 창립한 ‘민주주의연맹’의 주간지 『자유로운 말』과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주재하던 ‘일원론동맹’의 기관지에 자주 실렸다. ‘민주주의연맹’은 자유주의적 좌파와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였지만, 일원론동맹은 다윈주의자이자 인종우생학자인 헤켈의 극우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 조직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당시 오시에츠키는 함부르크 지부의 회원이었다.




비판적 언론인으로서의 길


전환은 단호했고 입장은 선명했다.



오시에츠키는 게를라흐의 평화주의에 점차 더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의 빈한한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초기에 경도되었던 우파 민족주의 사상과 조직에서 이탈해 점차 자유주의 좌파 내지 급진적 민주주의자로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오시에츠키가 평화와 민주주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아내 모드 헤스터 리치필드-우즈(Maud Hester Lichfield-Woods, 1888-1974)의 영향도 있었다. 1913년 오시에츠키와 결혼한 모드 헤스터는 영국 장교인 아버지와 인도 공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영국의 여성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었다. 결혼 뒤 그녀는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언론 활동을 시작하도록 독려했다.

결국 오시에츠키는 직장에 사표를 낸 뒤 1914년부터 극우 민족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16년 군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겪은 전쟁 체험이 그의 생애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는 그동안 기웃거렸던 모든 종류의 인종주의적 일원론과 극우 사상에 단호히 결별을 선언했다. 오시에츠키는 1917년 <일원론과 평화주의>라는 소책자에서 당시 일원론동맹 대표였던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가 인도주의적 이성을 외면한 채 범 게르만주의의 망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본 뒤로 다윈주의적 진화론을 버리고 확고한 반전 평화주의의 신념을 다졌다. 아직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는 독일평화협회(Deutsche Friedensgesellschaft)의 함부르크 지부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함부르크 지부의 대표를 거쳐 1919년에는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중앙본부의 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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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 타게-북(일기)』 1924년 7월 5일자





편집장이자 발행인으로 나치에 저항하는 글을 실었던 비판지 『세계무대』 <출처: (cc) jaimelondonboy at Flickr.com>




하지만 그는 독일평화협회의 회장인 루트비히 크비데(Ludwig Quidde, 1858-1941, 1927년 노벨평화상 수상)와의 의견 차이로 곧 협회 활동에서 물러났다. 크비데로 대표되는 ‘애국적 평화주의’는 오시에츠키의 적극적 평화관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언론 활동에 복귀해서 『베를린 인민신문』, 『다스 타게-북(일기)』 그리고 특히 『세계무대』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1924년 오시에츠키는 반군사주의 잡지로 잘 알려진 『다스 타게-북(일기)』의 편집 책임을 맡았고, 1927년 마침내 당시 가장 널리 읽힌 비판지 『세계무대』의 편집장이자 발행인이 되었다.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평화주의


평화는 몽상에서 벗어나 정치와 결합해야 했다.



1920년대에 언론인 오시에츠키는 주로 반전 군사주의와 평화 문제에 집중해 글을 썼다. 그는 당시 새로운 지향으로 등장하고 있던 ‘급진적 평화주의’를 대표했다. 그것은 독일의 오랜 군사주의와 전쟁 찬양의 전통 속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독일어권에서 평화주의 운동과 조직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늦게 등장했다. 베를린에서 독일평화협회가 조직된 것은 1892년이었다. 당시 독일은 군사주의를 비판하거나 전쟁과 무장을 거부하기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어려웠다. 19세기 자유주의 혁명의 실패 이후 권력을 장악한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보수적 민족주의 지배자들은 전쟁과 군사적 가치를 옹호하며 국민국가로의 통일과 통합적 지배를 관철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배 체제를 비판하던 노동운동가나 사회주의자들도 반전평화지향을 ‘부르주아적 한담’이라며 조소하고 오히려 자본주의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심지어 폭력 투쟁을 수용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의 선구적인 평화운동가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1924, 1905년 노벨평화상 수상)의 평화운동과 국제적 평화정치의 등장으로 인해 평화주의는 독일에서도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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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베를린의 오시에츠키 거리에 세워진 동상



오시에츠키는 1920년대 독일 평화운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루트비히 크비데의 온건한 평화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크비데의 평화주의는 국제무역을 통한 상호이해와 국제법적 조정을 통한 외교에만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방어 차원의 전쟁을 용인하는 문제점을 가졌기에 오시에츠키는 그것에 맞서 ‘급진적 평화주의’를 내세웠다. ‘급진적 평화주의’의 조류는 독일평화협회의 좌파 진영에서 발현된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지배 폭력 사용에 대한 원천적 거부, 나아가서 병역 의무나 무장에 대해서도 거부의 입장을 보였다. 오시에츠키는 『세계무대』에서 이 급진적 평화주의를 대변했으며 크비데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우파 계열의 온건한 ‘애국적 평화주의’와 대립하게 된다.

게다가 오시에츠키는 자신의 평화노선을 베르타 폰 주트너의 ‘도덕적 평화주의’와도 구분 짓는 의미에서 ‘정치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다. 오시에츠키는 1924년 「평화주의자들」이라는 에세이에서 당시까지의 독일 평화주의가 “망상적이고 몽상적이며 사유에만 빠져 있는데다 정치라는 수단을 불신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주트너처럼 감정에 대한 호소나 인류애를 내세워서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오시에츠키는 주트너처럼 왕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의 양심에 호소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그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평화주의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며, 이성적인 관점에서 전쟁으로 치닫는 현실을 분석하고 지배 질서에 맞서 싸울 것을 강조했다. 그의 관점에서 평화주의는 정치적이 될 때에만 비로소 대중과 함께하는 길이 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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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에 있는 칼 폰 오시에츠키 거리 <출처: (cc) Sibylle Rüstig at Flickr.com>



그러나 당시엔 ‘급진적’이거나 ‘정치적’인 평화주의는커녕 온건하고 ‘도덕적’인 평화주의조차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평화주의는 ‘반역’이나 ‘비겁함’ 같은 부정적 함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들에게도 의심스럽거나 조심스러운 용어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시에츠키는 평화주의를 더욱 급진적으로 끌어올려 모든 종류의 국가 기구를 통한 무장과 전쟁을 거부했으며 군사주의적 가치와 문화에 대해 비판을 퍼부었던 것이다.

특히 오시에츠키는 『세계무대』를 같이 만들던 동료 쿠르트 투콜스키(Kurt Tucholsky, 1890-1935)가 자극적으로 내건 “군인들은 살인자들이다”라는 반전 슬로건을 적극 옹호하고 자기화했다.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반전 평화주의 기고문들로 인해 그는 곧 바이마르 공화국의 검찰, 사법부와 충돌했다. 독일 해군과 제국군에 대한 비방 죄로 오시에츠키는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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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 베를린의 테겔 교도소에서 방면된 오시에츠키(가운데).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






정치활동과 반파시즘 투쟁


고난은 이어졌고 투쟁도 지속되었다.



오시에츠키는 언론 활동 외에도 잠시 정치 일선에 나서서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반전평화주의를 실현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24년 오시에츠키는 공화당(RPD)이라는 자유주의 좌파 계열의 정당을 결성했다. 하지만 그 당은 1924년 5월 총선에서 단지 0.17%의 득표를 얻었을 뿐이었다. 오시에츠키의 손을 거쳐 완성된 공화당 강령은 1848년 혁명과 1918년 11월 혁명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오시에츠키는 강령을 통해 한편으로는 기업의 사회화 조치를 옹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독일인들의 ‘통일공화국’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적 강령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고, 독일사회민주당(SPD) 지지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었다. 현실정치에 좌절한 오시에츠키는 다시 언론활동에 집중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배적 질서를 격렬히 비판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히틀러와 나치즘의 등장에 대해 오시에츠키는 수차례 그 위험성을 경고하며 자신을 반파시스트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는 히틀러를 ‘이탈리아의 싸구려 모방꾼’으로 폄하했고 중공업 분야의 기업가들이 나치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시에츠키가 나치즘의 본질과 고유한 동력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시에츠키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내적 모순 때문에 자멸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 그만큼 단호하고 완강하게 모든 종류의 극우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반전과 반군사주의를 적극적으로 밝힌 이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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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에스터베겐 수용소에서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



1929년 3월 『세계무대』에서 오시에츠키는 독일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군비확장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1931년 말 바이마르 공화국의 검찰은 그를 체포해 법정에 세웠고 법원은 1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미 비판적 언론인으로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큰 명성을 누리던 오시에츠키의 석방을 위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토마스 만, 로맹 롤랑 등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나서서 석방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은 석방을 거부했다. 오시에츠키는 당시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DNVP),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세력이 단일한 전선으로 결집하는 것을 보고 다가올 대선에서 독일공산당(KPD) 지도자인 에른스트 탤만(Ernst Thälmann)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시에츠키의 그런 정치적 입장과 선전 활동을 힌덴부르크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금 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죽음의 길은 열렸고 수상의 길은 닫혔다.



1932년 12월 22일 오시에츠키는 정치범에 대한 성탄 특별사면으로 베를린의 테겔 교도소를 나왔다. 출감 후에도 그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오시에츠키는 그동안 거리를 두었던 사민당과 공산당의 노동자통일전선이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권력 장악 후 오시에츠키는 나치 당국의 표적이 되었다.

1933년 2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후 오시에츠키는 다시 체포되어 베를린의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의 나치 지지 대학생들이 “불멸하는 독일의 민족정신을 수호”한다며 분서 난동을 감행했을 때 오시에츠키의 저술도 함께 불태워졌다. 오시에츠키는 존넨부르크로 이송된 뒤 1934년에는 올덴부르크 시 근교의 에스터베겐 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국제적십자의 중재로 1935년 오시에츠키를 방문했던 스위스 외교관 칼 야콥 부르크하르트(Carl Jacob Burckhard)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눈이 부어올라 잘 볼 수 없었고 치아가 뽑혀 나가고 다리가 부러진 채로 끔찍한 고통의 삶을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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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오시에츠키 메달의 수여식 <출처: (cc) Michael F. Mehnert at Wikipedia>



망명에 성공한 오시에츠키의 동료들은 그의 곤경을 세계 언론에 널리 알렸다. 그들은 1934년부터 ‘독일인권동맹’의 이름으로 오시에츠키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촉구하는 서명 캠페인을 전개했다. 다시금 아인슈타인과 토마스 만이 나섰고 작가 하인리히 만과 올더스 헉슬리, 버트런드 러셀 등의 학자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당시 오시에츠키는 나치 독일과는 다른 “독일의 상징 인물”이 되어 있었다.

캠페인은 우여곡절 끝에 성공했다. 노르웨이의 노벨상위원회는 1935년에 나치 독일의 개입을 우려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캠페인은 계속되었고, 이미 만신창이가 된 오시에츠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에 게슈타포의 엄격한 감시 하에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노벨상위원회는 국제적 압력이 지속되자 1936년 11월에 오시에츠키를 1935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뒤늦게 발표했다. 게슈타포는 오시에츠키가 수상을 하지 못하도록 출국을 막았다. 심지어 히틀러는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한다고 발표하면서 1937년부터 노벨상을 대신할 문화학문 독일민족상을 제정했다. 1938년 5월 4일 오시에츠키는 49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기억과 유산


평가는 갈렸지만 기억은 모였다.



사망 직후부터 오시에츠키는 나치즘의 억압과 만행의 대표적 순교자로 간주되었다. 전후에는 반파시즘 투쟁의 상징적 인물로 동독과 서독 모두에서 존경받는 드문 인물이 되었다. 이를테면 통일 이전에 동독은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오시에츠키 메달 상’을 제정해 추모하며 자신들의 반파시즘 투쟁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서독도 오시에츠키를 다양하게 기리며 민주적 평화문화의 선구적 인물로 인정하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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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덴부르크 대학의 로고에는 오시에츠키의 이름이 들어간다.



1991년 독일 중부 지역 니더작센 주의 올덴부르크 대학도 그의 이름을 대학 명칭에 병기해 그를 기리고 있다. 또한 1984년부터 올덴부르크 시는 ‘현대사와 정치를 위한 칼 폰 오시에츠키 상’을 제정해 격년으로 수상자를 발표하며 오시에츠키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올덴부르크 출판사는 그의 저술 전체를 8권으로 편집해 발간했다. 또 올덴부르크 대학 도서관에는 그의 삶과 저술에 대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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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에츠키 부부의 추모비



물론 오시에츠키의 정치적 의미와 역사적 공헌을 둘러싸고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시에츠키를 비판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은 그가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정부를 과도하게 비판해 민주체제의 붕괴에 일조했다고 본다. 하지만 대다수 역사가들은 그가 반군사주의와 반파시즘 정신을 일깨우며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옹호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그의 ‘급진적 평화주의’ 사상과 실천은 1945년 이후 독일과 유럽의 평화정치와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평화운동이 항상 ‘급진적’이거나 ‘정치적’일 필요는 없다. 적대와 갈등의 당사자들이 감성 또는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공감대와 합의점을 모색하고 조정과 화해를 통해 평화를 찾아가는 길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에서는 전쟁과 폭력을 유발하거나 인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자주 등장한다. 그에 대해 완강한 비판과 거부가 필요할 때가 적지 않다.

그렇기에 전쟁과 적대를 조장하는 지배 질서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정치적 평화주의’, 또는 모든 종류의 국가 기구를 통한 무장,전쟁과 폭력 사용을 전면 거부하는 ‘급진적 평화주의’의 전통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대의를 구금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킨 오시에츠키의 이름은 20세기 전반기의 인류 평화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현재 독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나 거리가 적지 않다. 특히 베를린과 올덴부르크 시는 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워 그의 평화 정신을 기억하고 환기한다. 평화를 말하면서 정치 투쟁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시에츠키의 치열했던 삶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Elke Suhr, Carl von Ossietzky. Eine Biographie, Köln 1988.
  • Wilhelm von Sternburg, “Es ist eine unheimliche Stimmung in Deutschland”. Carl von Osssietky und seine Zeit, Berlin 1996.
  • Wolfgang Wippermann, “Der umstrittene Friedensnobelpreisträger Carl von Ossietzky”, Hans Kloft (Hrsg.), Fridenspolitik und Friedensforschung. Die Friedensnobelpreisträger aus Deutschland, Berlin, 2011, pp. 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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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기 |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현재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바이마르공화국 말기 나치즘 대두에 대한 공산당의 대응>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예나대학교 사학과에서 <Idee einer nationalen Konföderation im geteilten Deutschland 1949-1990>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Bonn)대학교 아시아학부 초빙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를 거쳤다. 『역사비평』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연구 관심과 주제는 냉전사와 평화사 및 과거청산과 역사문화다. 현재 <한겨레21>에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Option oder Illusion? Die Idee einer nationalen Konföderation im geteilten Deutschland 1949-1990(선택가능한 길인가 망상인가? 1949-1990년 분단 독일의 국가연합안)(Berlin: Ch. Links Verlag, 2010), 『20세기평화텍스트 15선』 (서울: 아카넷, 2013). 역서로는 『역사에서 도피한 거인들. 역사는 끝났는가』(서울: 박종철출판사, 2001)과 『근대세계체제3』(서울: 까치, 2013, 공역)이 있다.


후원

인문한국지원사업(HK : Humanities Korea),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이 원고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와 네이버가 공동기획했습니다.


출처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발행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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