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파의 문학 - 서민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현실 개혁의 의지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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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4회 작성일 16-02-0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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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이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 한국유학의 새로운 학풍을 가리킨다. 수기치인존심양성을 목표로 도덕적 인격 수양에 힘쓰는 기존의 학문 범주를 넘어서서 사회 현실의 실제적 문제를 파악하고 실질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학풍을 말한다. 이러한 학풍은 문학의 성격에도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작중 인물상의 변화이다. 서민이나 하층민 가운데서 새로운 인간형을 찾아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둘째, 문예 사상의 변화이다. 권선징악적 교화를 앞세우지 않고 진을 추구하는 사상이 형성되었다. 셋째, 주제의식의 변화이다. 문학을 도를 실어 나르는 수단 정도로 여기지 않고 문학으로 당대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문학의 독자적 비중과 영향력을 높였다. 넷째, 문체의 변화이다. 주자 같은 성리학자들이 경전을 해석하는 식의 단아하고 평이한 설명적 문체가 아니라 소설 투의 묘사적 문체를 구사했다. 이런 변화의 단초가 그 이전 시대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실학자들에 의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학파 문학의 이런 변화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서민층에서 찾아낸 새로운 인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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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김홍도의 우물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시정 공간이나 시정의 서민은 문학에서 주목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시는 물건을 교환하는 저자이고 정은 물을 긷는 우물이라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서민의 일상적 생활공간을 가리키지만1), 시정의 서민들을 경계하거나 훈계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기록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시정모리지배, 시정열사지배, 시정천류, 시정소아, 시정부랑지배, 시정무뢰지배, 시정소민 등의 말에서 느껴지듯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이익을 추종하고 어리석고 천하고 불안정하게 떠돌고 보잘 것 없고 잡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정공간이나 시정의 하층민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드문 편이며, 간혹 있다 해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해학적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뜻밖의 충·효·열을 실천한 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칭찬을 하는 경우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일부 문사들이 야담과 필기류의 산문이나 ‘인물전’, 장편 한시 등으로 이들을 다채롭게 그려내고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박지원의 「광문자전」, 「마장전」, 「예덕선생전」, 「김신선전」등의 산문 작품과 이학규의 「걸사행」, 정약용의「장천용전」, 「소경에게 시집 간 여자」같은 실학파 학자들의 문학이 자리해 있었다. 특히 박지원은 젊은 시절에 쓴 위의 전 작품들 외에 중년에 쓴 『열하일기』에서도 마부로 갔던 창대와 하인 장복이의 언행을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하인들의 우스갯소리와 익살스러운 행동, 엉뚱한 실수, 사소한 속임수, 허풍 같은 것을 아무런 도덕적 훈계 없이, 현장에 같이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은 500회가 넘는 조선조의 중국 사행 기록 전체 중 박지원의 기록이 유일한 듯하다.

중인 이하의 서민층에 대해 평등한 시선을 보내고 때로는 그들에게서 양반 계층보다 훌륭한 면을 발견하며 그들의 비루한 일면을 직시하면서도 생활의 당위성을 옹호해주는 관점은 문학사에 있어 큰 진전이라 하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사에서 하층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하층민의 생활공간이 주 무대로 등장하는 것은 중세 이후의 현상인데, 우리의 문학사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데에 실학파의 문학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진정을 중시하고 진을 추구하는 문예사상



일상생활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진정과 진실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논리는 조선조 중·후기부터 여러 문인 학자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허균은 남녀의 정욕은 자연의 이치요 예교는 성인의 가르침이니 천리를 따르겠다고 하여 정욕을 긍정했고2), 홍세태는 “사람은 천지의 중을 얻어 태어났으므로 그 정에서 느끼는 바를 말로 나타내 시를 이루는 데 있어서는 신분의 귀천이 없이 누구나 마찬가지다.”3)라고 하여 감성과 표현에서의 만인 평등을 주장했다. 김만중은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는 하지만, 만약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대부의 이른바 시이니 부(賦)이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4)라고 하여 서민 생활 정서가 그대로 드러난 노래가 지닌 진실성에 가치를 부여했다. 이런 논리는 이정섭의「청구영언후발」을 비롯하여 홍대용의「대동풍요서」, 이가환의「풍요속선서」, 홍양호의「풍요속선서」에서도 거의 차이 없이 전개되었다. 뛰어남과 졸렬함을 잊고 선과 악을 잊은 채 자연에 의거하고 천기에서 나오는 노래야말로 참된 노래라는 것이다. 도덕 윤리보다 진정과 진을 중시한 논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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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홍길동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러한 논리에 실학파 학자들은 더욱 분명한 강조점을 찍었다. 이덕무는 “문인 재사(文人才士)로서 통속을 모르면 훌륭한 재주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상것들의 통속이라고 물리친다면 인정(人情)이 아니다. 청나라 선비 장조가 ‘문사는 능히 통속 글을 해도 속인은 능히 문사의 글을 못하고 또 통속 글에 능하지 못하다.’라고 했으니 참으로 지자의 말이다.”5)라고 하여 ‘통속’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박지원은 “문장을 하는 자는 오직 그 참모습을 적을 뿐이다.[爲文者惟其眞而已矣.]”6)라고 하여 문학의 사명이 진을 담아내는 데 있다고 하였다. 유교 윤리에 합당한 소재나 주제의 범위를 넘어서 진을 추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도올이 나쁜 짐승이지만 『초사』에 편명을 삼았고, 추매는 흉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과 반고가 이를 서술했다.”는 것을 예로 들어 문예가 진을 추구해야 되는 까닭을 보편적 호소력을 갖추는 데서 찾았다. “기뻐서 웃고 슬퍼서 우는 것만은 통역을 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정이란 겉으로 꾸밀 수 없고 소리란 진심에서 우러나오기 때문”7)이라는 것이다. 보편적 호소력은 누구에게나 쉽게 통하므로 서로 다른 도덕적인 관습을 따져야만 통할 수 있는 경우와는 달리, 그 상호 이해와 소통의 범주가 무한히 넓기 마련인데 박지원은 이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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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쓴 연암집 건, 곤 <출처: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그렇다면 진은 어디에 존재하며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가? 박지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린애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무릎을 반쯤 구부리고 뒤꿈치를 살짝 들고 손가락을 Y자 모양으로 내밀고 다가서는 즈음 그래도 손끝이 나비를 의심나게 하면 그만 날아가 버리지요. 사방을 둘러봐도 인적이 고요한데, ‘아차’ 하고 웃으며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게 곧 사마천이 저서 할 때입니다.”8)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진을 포착하기 위해 객관 사물과 현상에 접근할 때 자신의 주의력과 인식이 흔들리면 그 접점의 순간을 놓쳐버리고 만다는 것으로, 객관과 주관의 합일 순간에 ‘진’은 존재하며 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인식이 객관 현상을 꿰뚫을 수 있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렇게 포착한 진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엄숙주의를 탈피하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야 하며, 옛날이 아니라 지금을 먼 곳이 아니라 여기를 그려내야 한다고 했다. 또 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도 모방하지 말고 나의 말로 새롭게 표현하고 우언의 수법을 잘 활용하라고 했다. 진은 가(假, 가짜) 혹은 위(僞, 거짓)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문학의 사명을 진에 두게 되면 문학의 현실성이 강조되고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문학의 발전에 하나의 획을 그은 사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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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 <출처: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문학으로 당대 현실의 이슈를 다루다



실학자들의 글은 어떤 종류의 글이든지 글의 행간에 당대의 현실 문제를 고민하는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형식과 소재 면에서 전통적 흐름이 뚜렷한 악부시 같은 경우에도 이익의「해동악부」에서는 민생이나 풍속과 관련된 현실적 문제의식을 담아냈고, 산수를 유람하고 나서 쓰는 산문인 유산기의 경우에도 국방과 안보의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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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일도회고시. 유득공이 고조선부터 고려까지 역대 서울을 시로 읊은 한시집. <실학박물관 제공>



회고시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는 자국의 역사에 대한 긍지와 비판적 문제의식을 담아냈으며, 정약용의 「애절양」, 「탐진촌요」, 「탐진농가」등의 한시는 사회적 병폐와 부조리를 그려냈다. 실학파 문인들은 과거 시험의 누적된 병폐, 신분 갈등, 과중한 부세문제 등을 다룬 것은 물론이고, 서민부자의 출현이라든가 서울의 도시적 번화함 등 당대 현실의 모습을 그들의 문학 작품에 형상화했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체험을 시나 산문으로 기록하는 전통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실학파 학자들은 그 기록에 개인적 감회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서 현실 개혁과 문명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박지원의『열하일기』는 사행 기록 문학에서 으뜸가는 성과로 손꼽히는데, 거기에는 생활 용구를 예리하게 만들어 민생을 윤택하게 하고자 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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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문물제도와 사회체제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실학박물관 제공>



그는 중국의 진정한 장관은 깨진 기와조작과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다고 크게 부르짖었다. 천하의 문물제도를 보는 기준이 변발에 호복을 입었느냐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느냐 따위가 아니라, 깨진 기와로 쌓은 담과 벽돌로 지은 집과 말이나 소의 똥거름을 쌓아두고 연료로 삼으며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느냐에 있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특히 <옥갑야화> 중 ‘허생전’에서 허생이 이완 대장에게 제시한 비판적 현실 개혁안은 박지원이 평소에 지녔던 비판의식과 그대로 통하는 것이다. 그는 의관 제도로 유교 문명의 적자임을 자처하는 것, 조정 관료들의 안일함과 무위도식,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 신분 차별 행위 등, 당대 사회의 주요 문제들을 웃음 띤 필치로 비판했다. 실학자들의 시와 산문에서는 그들이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공통적으로 드러나는데 문학이 당대 현실의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룬 것은 실학파 문학이 지닌 중요한 특징이다.




소설적 묘사와 우리말 구어 투의 문체



조선 중기에 허균을 비롯해 중국 사행을 다녀오는 사신들로부터 중국의 서적이 대규모로 수입되었다. 그중에는 소설 및 소품 종류의 서적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주로 이지, 장조, 원굉도 3형제, 김성탄, 전겸익, 풍몽룡 등과 같은 명말청초의 문인들의 서적이 차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조선의 문인 학자들도 이들의 문체를 닮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흔히 '패관소품체'라고 불렸던 이 문체는 기존에 모범으로 삼던 당송고문의 정중하고 평이한 문체와 달리, 글이 짤막하면서도 주제가 예리하게 드러나고 감각적 묘사가 두드러져서 생생한 현장감이 있었다. 유만주의 일기『흠영』에는 박지원이 자신의 문장에 대해 스스로 원굉도와 김성탄을 따른 것이 있다고 인정한 내용이 보인다. 그런 투의 글은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시원하여 사람들이 전파해 마지않는다면서 원굉도나 김성탄을 본뜬 글이 얼마나 유쾌한 재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또 남들이 자신의 글을 그렇게 일컫는 것에 대해서도 일종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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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행 그림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이런 문체의 유행은 국왕 정조의 금지 명령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이른바 소품 문체를 고문 문체로 되돌리고자 ‘문체반정’을 명한 것이다.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선비들의 문풍이 날로 비속해져 경박한 패관소품 문체가 성행한다고 개탄하면서 그 근본 원인이 박지원에게 있다고 지목하였다. “『열하일기』를 내가 이미 숙람하였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 있으랴? 『열하일기』가 세상에 돌아다닌 뒤로 문체가 이와 같아졌으니, 마땅히 매듭을 묶은 자가 풀어야 할 것이다.”9)라고 하여 반성하는 차원에서 박제가, 남공철, 박지원 등의 해당 신하들에게 자송문을 쓰고 순정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 올리게 함으로써 소품 문체의 유행은 진정 되었다.

당시에 문체 문제로 정조에게 박지원보다 훨씬 더 엄중한 문책을 당했던 사람은 실학자 유득공의 이종사촌이었던 이옥이라는 선비였는데, 그는 국왕 정조로부터 4차례나 엄중한 견책을 당했지만 과거 시험과 벼슬길을 포기했을지언정 문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의 글은 매우 유희적인 듯 보이지만 글의 행간에 예리한 현실 비판 의식을 감추고 있고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실학자들의 문학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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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 문체 문제를 걱정한 정조가 직접 쓴 칠언시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공공누리>



그런데 실학자들이라고 누구나 소품 문체를 즐겨 썼던 것은 아니다. 정약용의 경우는 소품체를 잡되다고 여겨 “잠시라도 패관소품 등 음탕하며 삿되고 편벽되어 바르지 못한 서적에 눈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근세의 재사(才士)와 빼어난 유자가 대부분 『수호전』, 『서상기』등의 책에서 발을 빼지 못하였으므로 그 문장이 다 가냘프고 구슬프며 뼈를 찌르고 살을 녹게 하니, 도의와 이치며 정취에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번화한 부귀가의 입에도 또한 올릴 수 없으니 복록에 매우 해로운 탓이다. 이는 모두 잡서를 즐겨 본 폐해이다.”10)라고 비판하였으며, 비판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소품 문체를 구사하지 않은 실학자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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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로 백화문으로 쓰인 수호전



그러나 실학파 학자들은 글쓰기의 문체나 방법은 달랐어도 모두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하여 진과 실을 형상화함으로써 실제 생활에 유익이 있는 문학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현들의 글을 답습하거나 표절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그러한 의식과 노력은 자국의 언어, 즉 방언을 한문으로 표기하고 민요의 정감을 한시에 반영하며, 우리말 구어체를 한문 산문에 응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박지원은 「영처고서」에서 이덕무의 글이 ‘조선풍’을 담아 개성적인 글이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정약용은 “나는 본래 조선 사람[我是朝鮮人], 즐겨 조선시를 지으리[甘作朝鮮詩].”11)라고 읊조려 조선 사람의 생활 정서와 말투를 노래할 것을 선언했다.

한시의 까다로운 형식을 무시하고 조선 사람다운 정감과 표현을 살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인식과 선언은 현실과 사물을 핍진하게 그려내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지만 작가 개인의 개성적 문체를 넘어 자국 언어와 생활 감정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 『아언각비』, 『이담속찬』 같은 저술을 낳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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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필의 두강승유도.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두강)를 배를 타고 유람하며 그린 풍경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두강을 건너다니고, 고기잡이 등을 즐겼다. <실학박물관 제공>



실학자들의 글은 첫 문장부터 일반 도학자들의 글과 구분되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실학파 학자들의 시와 산문이 지닌 그러한 특징을 그들의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상, 문예사상, 주제의식, 문체 등 4가지 항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익, 『성호사설』제29권 시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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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순암집』권17「천학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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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태, 『유하집』권9「해동유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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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서포만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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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청장관전서』권48「이목구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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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연암집』권3「공작관문고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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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연암집』권3「회성원집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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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연암집』권5「답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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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792년 10월 1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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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다산시문집』권22「도산사숙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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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다산시문집』권6「송파수작」제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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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양 | 성균관대 겸임교수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1.23.



주석


1


이익, 『성호사설』제29권 시문문.

2


안정복, 『순암집』권17「천학문답」

3


홍세태, 『유하집』권9「해동유주서」

4


김만중, 『서포만필』

5


이덕무, 『청장관전서』권48「이목구심서」

6


박지원, 『연암집』권3「공작관문고자서」

7


박지원, 『연암집』권3「회성원집발」

8


박지원, 『연암집』권5「답경지」

9


『정조실록』, 1792년 10월 19일 기사

10


정약용, 『다산시문집』권22「도산사숙록」

11


정약용, 『다산시문집』권6「송파수작」제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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