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조선에 들어온 신문물 - 세계에 접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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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16-02-0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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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의 세가 동아시아에 도달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말라카, 중국의 마카오, 필리핀의 마닐라, 일본의 나가사키가 무역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중국의 차와 비단, 일본의 도자기와 은, 조선의 인삼이 거래되었다.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인적 교류가 잇따랐고 이를 통해 문화가 교류하게 되었다. 국제 무역의 변두리였던 조선에도 주로 중국과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을 통해 신문물이 들어왔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 지리관, 세계관, 우주관도 조금씩 변화하였다.




동아시아를 뒤흔든 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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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제 화승총. <출처: e뮤지엄 –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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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용되었던 화승총.



화승총(match-lock)은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어 있던 화승이 약실의 화약에 불을 붙여 화약이 폭발하면서 그 압력으로 총탄이 발사되도록 만들어진 개인 화기이다. 새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성능이 좋다는 의미로 조총이라고도 불렀고, 일본인들은 뎃포(鐵砲)라고 불렀다. 1543년에 포르투갈 사람이 일본 규슈 남단에 있는 다네가시마의 영주에게 조총 두 정을 팔았고, 1544년에는 마침내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그 후 조총은 일본 전역에 퍼져서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구는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1558년 조총 1만 정을 제조하여 군대를 무장시켰으며, 새로운 무기 체계와 전투 기술을 운용하였다. 그 전략과 전술을 기록한 병서가 바로 『기효신서』이다. 그러나 조총은 제작이 어려워서 명군의 개인 화기 체계를 전면적으로 교체할 수는 없었다.

1589년(선조 22)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대마도주가 조총 수삼 정을 바쳤으므로 이것을 군기시에 간직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것이 조선에 최초로 화승총이 전해지는 순간의 기록이다. 또한, 1591년(선조 24) 5월 1일자 실록은, 일본이 조총 30만 정으로 무장하였으며 장차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중국인이 전한 첩보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이에 대해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1592년에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할 수 있었고 국왕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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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의 주요 성분인 질산칼륨(염초)는 조선은 수입에 의존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조선군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의 기술자를 활용하기도 하고1), 포로가 되거나 투항한 일본군을 활용하기도 하면서2), 조총 제작 기술을 국산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화승총을 모방하는 데도 기술적 난관이 많았고 표준화도 심각한 문제였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은 화승총을 대량으로 제작하였으나, 이 때 문제가 된 것은 화약이었다.

화약의 주요 성분은 염초유황이었다. 염초는 질산칼륨이란 화학물질인데 조선은 자체 생산력이 부족하여 명나라나 일본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후라서 일본에서는 사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명나라는 신흥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군수품 수출을 통제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631년에 정두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대신에 그는 신문물 몇 가지를 얻어 조선에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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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식 소총(수석총)은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개발되어 19세기 중엽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출처: BY Oleg Volk @Wikimedia Commons (CC BY)>



이때 정두원이 가져온 물건들 중에는 수석식 소총(flint-lock)이 있었다. 수석식 소총은 부싯돌을 사용하여 화약에 점화하는 방식으로 개량된 소총이다. 화승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습할 때도 발사가 가능하고 밤에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수석식 소총을 받아들여 전력을 증강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조선 조정이 당면한 화약의 부족이란 문제에 비하면 성능이 약간 개선된 소총을 수입하거나 개발해 내는 일은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얻을 것이 적은 사업으로 생각되었기 떄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대포와 같이 화약을 많이 사용하는 중화기의 비중이 높았던 조선군은 소총 위주의 무기체계를 사용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화약이 소용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약의 부족은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후 효종숙종을 거치면서 조선군은 북벌을 내세우고 화력을 보강하였다. 효종 때는 우수리강 유역에 출현한 러시아군에 대항하여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파병되었는데, 이것을 나선정벌(1651~1654)이라 한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수석식 소총으로 무장한 러시아군을 맞아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군의 소총수들은 사격 능력이 탁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유럽의 개인화기는 후장식 장전법, 카트리지, 나선형 강선을 판 총열 등이 개발되어 성능이 개량되었으나, 조선군의 개인화기는 여전히 화승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1866년에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병인양요 때도, 조선은 여전히 화승총 15만 정을 보유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신미양요 때에도 조선군은 여전히 재래식 화승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명·청 교체와 병자호란의 향배를 결정한 홍이포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가 투항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이 청군의 포로가 된 사건이었다. 조선 조정은 청의 해군이 약하다고 인식하였으므로 유사시에 왕실과 수뇌부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전략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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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홍이포. <출처: BY Jocelyndurrey @Wikimedia Commons (CC BY-SA)>



명나라는 후금을 방어하기 위해 산둥반도덩저우홍이포를 다루는 부대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629년에 후금군이 북경 지역까지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조선은 이를 위문한다는 구실로 정두원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정세를 살폈다. 당시 마카오의 포르투갈 인들은 명나라 조정에 두 차례에 걸쳐 홍이포를 제공하고 있었다 홍이포의 위력 시범을 참관한 정두원은 1631년에 귀국하면서 로드리게스로부터 포르투갈인들이 명나라 조정에 바쳤던 홍이포 관련 보고서의 필사본과 함께 홍이포의 위력에 관한 첩보를 조선 조정에 전했다.

그러나 같은 해인 1631년에 덩저우에 있던 화기 부대의 장교들이었던 공유덕경중명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함대와 홍이포 부대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해 버렸다. 그 후 청은 재빨리 홍이포 사용법은 물론이고 그 제작법까지 국산화하였다. 조선 조정은 공유덕, 경중명 등이 함대를 이끌고 청나라로 항복하려는 것을 차단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또한 청의 황제인 홍타이지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조선이 유사시에 강화도로 몽진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는데 자신들은 이미 해군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중에도 조선 조정은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이 이끄는 청 해군의 이동 상황에 대한 첩보도 파악하고 있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이포에 대해서는 그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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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삼전도비. <출처: BY Dalgial@Wikimedia Commons (CC BY-SA)>



1637년 인조 15년 1월 22일조 실록에 의하면, 청군은 3만의 병력을 함선에 실은 뒤 원거리 조준 사격이 가능한 홍이포를 잇달아 발사하여 조선군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그 틈을 타 강화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강화도에 무사히 상륙한 청군에 의해 봉림대군과 왕비와 대신들의 가족들이 모두 사로잡혔다. 남한산성에서도 사정거리가 긴 홍이포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출성을 결심하고 1637년 인조 15년 1월 30일에 남한산성을 나와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던 것이다.

도대체 홍이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전쟁의 향배를 갈랐을까? 홍이포는 컬버린이라는 이름의 대포이다. 이 대포는 포신이 길고 구멍이 정밀하게 가공되어 있기 때문에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압력이 새나가지 않아 탄환이 멀리 정확하게 나갔다. 그러므로 기존의 중국이나 한국에서 사용되던 재래식 화기와는 다르게 사정거리가 매우 길고 조준사격이 가능했다. 더군다나 포성이 대단히 커서 적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마카오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 인들은 명나라 조정에 1차, 2차에 걸쳐 홍이포를 납품하였는데, 첫 번째로 명나라에 공급된 홍이포는 명나라의 장수 원숭환(1584~1630)이 영원성에서 후금의 누르하치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북경과 국경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명 조정은 마카오로부터 두 번째 홍이포 공급을 받았다. 이때 정두원과 로드리게스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또한 이때 마카오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덩저우의 장교와 병사들에게 홍이포 사용법을 전수했으며, 그 부대가 바로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이끌던 부대였던 것이다. 이들이 나중에 강화도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남한산성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여러 학술 문헌에는 정두원이 조선에 홍이포를 가져왔다고 적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홍이포는 명나라의 일급 전쟁 무기였으므로 반출이 허락되지 않았고, 모든 홍이포는 명나라 황제에게 바친 물건이므로 그런 식을 허술하게 취급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7년(1731년) 9월 21일자 기록에 따르면, “홍이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제작한 것이며 사정거리는 10여 리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이 홍이포를 제작하기 위한 기술적 난제를 푸는데 무려 100년의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리관과 우주관을 바꿔준 세계지도와 천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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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프리카 등 5대주와 850개가 넘는 지명이 기록된 곤여만국전도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신문물 가운데 하나가 1603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1552~1627)과 권희(1547~1624)가 가져온 『구라파여지도』이다. 이것은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로 생각된다. 이 세계지도는 작성되자마자 조선에 전해졌던 것이다. 이수광(1563~1628)은 1614년에 찬술한 『지봉유설』에서 『곤여만국전도』를 인용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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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은 서포만필을 통해 그의 문학관뿐만 아니라 천문학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도 1631년에 귀국하면서 『만리전도』라는 세계지도와 『직방외기』라는 세계지리서를 얻어왔다. 세계지도는 그 제작자들의 의도했던 대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세계에는 많은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김만중(1637~1692)은 그의 『서포만필』에서 『곤여만국전도』에 실려 있는 서양의 지구설을 소개하면서 지구설을 믿지 않는 것을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했고, 이익(1681~1763)도 『곤여만국전도』를 보았으며, 그의 제자인 안정복(1712~1791)도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인용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온 신지식의 총아는 천문학이었다. 1631년에 정두원은 디아스라는 선교사가 쓴 천문서인 『천문략』, 천체망원경의 구조와 원리 그리고 그것으로 관측한 우주의 실제 모습을 기록한 아담 샬의 『원경설』, 『숭정역서』의 편찬 경위를 서술한 『치력연기』 등을 얻어 왔다. 그는 또한 천문도도 얻어왔 는데 아담 샬의 『적도남북양총성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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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권의 책으로 구성된 필사본 지도책인 《곤여도》에 실린 (적도남북양총성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가 그린 세계지도인 《곤여전도》. <실학박물관 제공>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곤여도』라는 제목으로 소장하고 있는 성도는 적도남북양총성도이다. 이것은 벨기에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청나라의 흠천감에서 활약하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1623~1688)가 제작한 것을 필사한 것이다. 그는 현재 베이징의 고관상대에 있는 대부분의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하였는데, 그 관측기구의 원리, 제작법, 사용법, 그리고 항성 목록을 실은 『영대의상지』를 1674년에 출간하였다. 이 책은 1709년에 조선 관상감의 허원(許遠)에 의해 조선에 수입되었다. 페르비스트의 『적도남북양총성도』와 『영대의상지』를 바탕으로 『협기변방서』의 권13 성도보천가의 성도가 그려졌다. 이 책은 1742년에 청에서 출간되었는데, 이듬해인 1743년에 조선에 수입되었으며, 1792년에는 김영이 편집하여 조선 관상감이 발행한 신도 『보천가』에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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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보물 제848호. 총 3,083개의 별과 기(氣)가 그려져 있다. 평사도법을 사용하였으며, 우측의 칠정도에는 해와 달과 오행성을 천체망원경으로 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한편, 청의 흠천감에서 일하던 예수회 신부인 이그나티우스 쾨글러(1680~1746)가 그린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가 1723년에 청에서 출간되었다. 북경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관상감 천문학자 안국린이 이것을 구하여 1742년 귀국하였다. 1742년 11월 22일에는 큰 병풍으로 제작하기로 하였으나 이 일을 맡아야 할 안국린이 귀국 직후 병사해, 그 사촌 형인 안국빈이 제작을 담당하여 이듬해인 1743년 상반기에 완성하였다. 이 천문도 병풍이 바로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황도남북양총성도)』이다. 이 가운데 새로 증가된 별들을 제외하고 중국 전통의 별만을 추려서 그린 것이 『신구법천문도』이며, 현재 한국의 국립민속박물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휘플과학사박물관, 일본 국회도서관, 일본 오사카 남만문화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조선 말기에 제작된 『신구법천문도』가 더 존재한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1744년 갑자년을 역원으로 한 『흠정의상고성』이 출간되었고, 1844년에는 『흠정의상고성속편』이 편찬되었다. 1862년에는 관상감에서 『흠정의상고성속편』의 권3 성도보천가를 그대로 번각하여 『신법보천가』를 출간하는데, 이준양(1817~1886?)이 편찬 실무를 맡고 남병길(1820~1869)이 감독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마와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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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중앙·남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던 감자와 고구마가 세계로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5세기 말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고,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작물들이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작물들이 조선에도 전해졌다. 옥수수는 옥촉서(玉蜀黍)라는 이름으로 1527년에 출간된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등장한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일본으로부터 담배가 전래되고, 명나라(혹은 일본)로부터 고추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구황작물로 중요성이 높은 아메리카 대륙의 감자와 고구마는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이후, 유럽인들의 무역로를 따라 동남아시아, 일본과 중국 등으로 전해졌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에 의해 고구마는 그들의 무역 거점이었던 필리핀에 퍼지게 되었다. 그 후 고구마는 16세기 말에 중국 남부에 수입되었다. 고구마는 가뭄에 잘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번식이 쉬운데다가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달다.

명나라 말기의 대신인 서광계는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틈에 톈진에 있던 자신의 농장에서 고구마가 북쪽 지방에서도 재배가능한지 시험하고 그 결과를 『농정전서』에 수록하였다(1639년 간행). 그러나 고구마는 중국에서도 널리 퍼지지 못했던 듯하다. 1785년에 청나라의 건륭제가 중국 북부인 하남성이나 섬서성에 고구마를 널리 재배하도록 명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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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은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구마 종자를 갖고 들어왔다.





동래부사였던 강필리는 고구마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란 책을 집필했다.




조선에 고구마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1719~1777)이 1764년 귀국하면서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몇 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저장을 제대로 못하여 겨울을 나지 못하고 재배에 실패하였으나, 이듬해 동래부사로 파견된 강필리(1713~1767)가 다시금 대마도에서 구하여 마침내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는 수확물 중에 고구마 세 개를 1765년에 조정에 진상하였는데, 조정은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대장에게 각각 하나씩 나눠주고 재배시켰으며, 이 때 제주목사로 파견된 윤시동(1729~1797)으로 하여금 부산에 들러 고구마를 가지고 제주도에서 재배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1794년에 서영보의 보고서에 따르면 관청과 아전의 가렴주구 때문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재배를 포기하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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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척박한 땅에 잘 자라는 작물 중 하나로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출처: BY Tahir mq@Wikimedia Commons (CC BY-SA)>



감자는 순조 24~25년(1824~1825년) 함경도 지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청나라 심마니가 우리 국경을 몰래 침입하여 골짜기에 감자를 심어 놓고 먹었는데, 그 사람들이 떠난 후에 남아 있던 것이 조선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또한 1830년경부터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해안과 섬에 출현한 이양선에서 감자를 나눠주어 이것이 전파되기도 하였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가뭄에도 강하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많은 훌륭한 작물이다. 그러므로 널리 재배되고 저장법과 조리법이 개선되었다면 국민 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인구 증가와 산업 발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작물이 들어와서 정착하려면 긴 세월이 필요하였고, 정치의 혼란과 수탈로 인해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선조실록』 26년 2월 10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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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26년 6월 16일조. ; 『선조실록』 27년 2월 1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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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13년(1635) 12월 30일조. ; 『인조실록』 15년 1637년 2월 5일조. ; 『인조실록』 15년 1637년 2월 2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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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현 | 천문학자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서울대학교 천문학박사. 전 고등과학원 연구원. 저서에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 별자리(2000년, 현암사)”, “과학사탐험대 4(2004, 웅진주니어)”, “우리 혜성 이야기(2013년, 사이언스북스)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1.25.



주석


1


『선조실록』 26년 2월 10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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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26년 6월 16일조. ; 『선조실록』 27년 2월 17일조.

3


『인조실록』 13년(1635) 12월 30일조. ; 『인조실록』 15년 1637년 2월 5일조. ; 『인조실록』 15년 1637년 2월 27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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